56) 승리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보상
(묵시14:1-5)
1 그리고 나는 어린양이 시온산 위에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어린 양과 함께 십 사만 사천 명이 서 있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져 있었습니다. 2 그리고 큰 물소리와도 같고 요란한 천둥소리와도 같은 소리가 하늘로부터 울려 오는 것을 들었습니다. 또 그 소리는 거문고 타는 사람들의 거문고 소리처럼 들렸습니다. 3 그 십 사만 사천 명은 옥좌와 네 생물과 원로들 앞에서 새로운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노래는 땅으로 부터 구출된 십 사만 사천 명 외에는 아무도 배울 수 없었습니다. 4 그들은 여자들과 더불어 몸을 더럽힌 일이 없는 사람들이며 숫총각들입니다. 그들은 어린 양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 다닙니다. 그들은 사람들 가운데서 구출되어 하느님과 어린 양에게 바쳐진 첫 열매입니다. 5 그들의 입에서는 거짓말을 찾아 볼 수 없었으며 그들은 아무런 흠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지난번에 666이 무엇인가에 대해 공부를 했습니다. 666은 네로도, 바코드도, 전자 신분증도 아닌 하느님을 대적하고 하느님을 흉내 내서 성도들을 미혹하는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악한 세력을 총칭하여 상징 하는 숫자라는 것을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성도들은 예수를 믿음으로 만사형통, 소원성취를 이루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땅에서 매매를 하지 못하게 되는 경제적, 정신적 불이익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 13장의 내용이었습니다. 그렇게 12장 13장에서는 우리는 이 땅에서 짐승에게 당하게 되고, 심지어 생명까지 잃게 되는 것으로 성도의 삶이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14장에서는 또 다시 우리 성도들이 승리하여 새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요한묵시록은 이렇게 반복해서, 지상의 불완전한 교회, 전투하는 교회, 핍박당하는 교회와 천상의 이미 승리한 교회, 완성된 교회를 보여줌으로써 이 땅에서 고난당하는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용기와 힘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이 땅에서는 지는 모습으로 가게 되지만, 너희는 이미 승리한 사람들이고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그러니까 기죽지 말아라’ 이게 요한 묵시록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시면 어린양과 하느님의 백성 14만 4천이 시온 산에 서 있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시온 산은 성경에서 시내 산과 대조되어서 나오는 산입니다.
시내 산은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모세와 이스라엘이 율법을 받은 산입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는 죄인들은 모두 하느님의 돌격으로 죽게 되는 무서운 산입니다. 반면에 시온 산은 은혜의 산입니다. 시온 산의 다른 이름이 뭡니까? 모리아 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던 이스라엘의 성전이 있던 산입니다. 그 산에서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아브라함이 죽어야 할 이사악을 하느님 앞에 번제로 드리려 할 때 하느님께서 어린양을 대신 죽게 하시고 죽어야 할 이사악이 살아난 은혜가 베풀어진 산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시온 산’하면 정의와 평화의 메시아 왕국을 상징하는 은혜의 산, 축복의 산을 상징합니다.
(미가4:7) 7 그 절름발이들, 비틀거리는 것들을 씨앗으로 남겨 강대국을 만들리라. 이제부터 영원토록 이 야훼가 시온산에서 다스리리라.
(시편2:6) 6 '나의 거룩한 시온산 위에 나의 왕을 내 손으로 세웠노라.'
(이사59:20) 20 시온을 구하시러 오신다. 죄를 뉘우치고 돌아오는 야곱의 후손을 구하시러 오신다. 야훼의 말씀이시다.
(히브12:18-24) 18 여러분이 와 있는 곳은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갔던 그 시나이산은 아닙니다. 그 산은 손으로 만져 볼 수 있고 불이 타오르고 검은 구름과 암흑에 싸인 채 폭풍이 일고 19 나팔소리가 울리고 굉장한 음성이 들려 오는 산이었습니다. 그때 그 음성을 들은 사람들은 하느님께 더 이상 말씀하지 마시라고 간청하지 않았습니까? 20 '비록 짐승이라도 이 산에 닿기만 하면 돌에 맞아 죽을 것이다 라고 하신 하느님의 명령이 견딜 수 없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21 사실 그 광경이 얼마나 무서웠던지 모세까지도 '나는 너무나 무서워서 떨린다' 고 말할 지경이었습니다. 22 그러나 여러분이 와 있는 곳은 시온산이고 살아 계신 하느님의 도성이며 하늘의 예루살렘입니다. 거기에는 수많은 천사들이 있고, 잔치가 벌어져 있고 23 또 하늘에 등록된 장자들의 교회가 있고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느님이 계시고 완전히 올바른 사람들의 영혼이 있습니다. 24 그리고 새로운 계약의 중재자이신 예수가 게시고 아벨의 피보다도 더 큰 힘을 발휘하는 속죄의 피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다 율법 아래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시온에 구원자를 세우시고 그 구원자에 의해 건져진 하느님의 백성들을 그 구원자와 함께 영원히 그 시온의 영광을 누리게 해 주셨습니다. 14만 4천, 하느님의 백성, 바로 여러분은 그렇게 이미 그 영광 속에 들어가 계신 분들입니다.
그러나 그 진리는 그렇게 쉽게 실감이 가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생활을 통해서 그 시온에 이미 서있는 우리의 영적 실존을 조금 씩 조금씩 이해하고 깨닫고 실감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 하느님의 백성 14만 4천의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하느님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어린양의 이름과 하느님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도 우리가 이미 이겼고 승리했다는 증거입니다.
(묵시3:12) 12 나는 승리하는 자를 내 하느님의 성전기둥으로 삼을 것이며, 그가 다시는 그 성전을 떠나지 않게 될 것이다. 나는 내 하느님의 이름과 내 하느님의 도성의 이름, 곧 하늘에서 내 하느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로운 이름을 그 이기는 자 위에 새기겠다.
누구에게? 이기는 자에게 그 이름이 새겨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이미 이기신 분들입니다. 영적으로 이미 그렇게 이기신 분들이시기 때문에 이 땅에서도 이기실 수밖에 없으신 분들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이렇게 나약해 보이고 매일 매일 실패하는 것처럼 보여도 분명히 이겨내실 것입니다.
그런데 왜 제가 매주 이렇게 혹독하게 여러분을 몰아 부치는가? 진짜 군사들에게는 악독한 훈련교관이 붙게 마련입니다. 제대하고 제일 생각나는 사람이 훈련소 조교들입니다. 고등학교 때 몽둥이 들고 다니면서 혹독하게 공부시켜 주셨던 선생님이 제일 생각납니다.
그 분들은 저를 강인한 국군용사로, 훌륭하고 성실한 학생으로 만들기 위해 그러셨던 것을 제가 알거든요. 제가 여러분을 달달 볶아서 저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다 여러분이 세상에 나가서 더 잘 싸우시라고 제가 이렇게 혹독하게 몰아치는 것입니다.
해병대나 공수부대 대원들이 왜 무서운지 아세요? 사회에 나와서 아무리 맞아도 부대에서 훈련받을 때 맞는 것보다 덜 하거든요. 평소에 혹독하게 훈련을 받은 사람들은 실전에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잘 이기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더 더욱 여러분을 달달 볶을 겁니다. 우리 주님 만나는 날까지 아주 신물이 나게 달달 볶을 겁니다. 그 승리한 하느님의 교회 14만 4천이 시온 산에서 새 노래를 부릅니다. 그 노래가 어떤 노래인지 간단하게만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묵시15:2-3) 2 나는 또 불이 섞인 수정바다 같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 수정바다 위에는 그 짐승과 그의 우상과 숫자를 가지고 이름을 나타냈던 그자를 이긴 사람들이 서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주신 거문고를 타며 3 하느님의 종 모세의 노래와 어린 양의 노래를 이렇게 부르고 있었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 주께서 하시는 일은 크고도 놀랍습니다. 만민의 왕이시여, 주님의 길은 바르고 참되십니다.
새 노래는 성도들을 구원하신 어린양과 그 어린양을 보내신 하느님을 찬양하는 노래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노래는 구원받은 성도 14만 4천 밖에는 배우지 못 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성도들만이 하느님의 구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직 성도들만이 그 구원을 감격 속에 자랑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천상의 완성된 교회가 그 새 노래를 부르며 그들의 구원을 감격해 하는 것처럼 이 땅에서도 그 구원과 그 구원을 이루신 우리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찬송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찬송이 우리 의 진심에서 우러나올 수 있도록 우리에게 주신 시간이 바로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그런데 4절과 5절을 보시면 우리 성도들에 대한 묘사가 이렇게 나옵니다.
(묵시14:4-5) 4 그들은 여자들과 더불어 몸을 더럽힌 일이 없는 사람들이며 숫총각들입니다. 그들은 어린 양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 다닙니다. 그들은 사람들 가운데서 구출되어 하느님과 어린 양에게 바쳐진 첫 열매입니다. 5 그들의 입에서는 거짓말을 찾아 볼 수 없었으며 그들은 아무런 흠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①첫 번째로 성도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한 자’라고 합니다. 여기서 ‘정절이 있는 자’ ‘팔데노스’는 ‘virgin, 동정을 소유한 자’를 말합니다. 이 구절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극단적인 세대주의자들은 결혼을 거부하고 평생 혼자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에는 그렇게 자기들처럼 혼인을 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닙니다. 하느님은 분명 결혼을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히브13:4) 4 누구든지 결혼을 존중하고 잠자리를 더럽히지 마십시오. 음란한 자와 간음하는 자는 하느님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분명 하느님은 혼인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러면 왜 오늘 본문에서 성도들을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한 자’라고 표현을 하는가? 여기서의 정절은 영적인 순결을 말하는 것입니다.
요한묵시록에는 각기 다른 두 여자가 등장합니다. 한 여자는 우리가 12장에서 공부한 교회를 상징하는 여자이고 또 다른 여자는 음녀 바벨론을 말합니다.
(묵시17:1-2,5) 1 대접을 하나씩 가진 그 일곱 천사 중의 하나가 나에게 와서 '이리 오너라. 많은 물 위에 앉은 엄청난 탕녀가 받을 심판을 보여 주겠다. 2 세상의 왕들이 그 여자와 더불어 놀아났고 땅에서 사는 사람들이 그 여자의 음란의 포도주를 마시고 취했다' 하고 말했습니다. 5 그리고 그 이마에는 '온 땅의 탕녀들과 흉측한 물건들의 어미인 대바빌론' 이라는 이름이 상징적으로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바로 이 여자, (세상, 음녀)로부터의 정절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말은 세속에 물들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아내야 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언젠가 유대인들의 혼인 풍습에 대해 설명을 해 드린 적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정혼한 후에 신랑이 그 신부의 지참금을 다 지불할 때까지 신부와 떨어져 있어야 합니다. 만일 신랑이 돈이 없어서 지참금을 지불하지 못할 경우에 신랑은 노동으로라도 그 만큼의 빚을 갚아야 합니다.
신랑이 그 빚을 다 갚은 후에 신랑은 보무도 당당 히 신부의 집으로 신부를 데리러 갑니다. 보통 밤에 그 신부의 집으로 찾아가서 신부를 데리고 신랑의 집으로 옵니다. 그 동안 신랑의 집에서는 잔치가 준비되고 신랑 신부가 도착하게 되면 화려한 혼인잔치가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정혼 기간 중에 만일 신부가 정절을 지키지 못하면 그 혼인은 즉시 파기할 수 있었습니다. 이 유대인의 혼인관습은 우리 하느님의 백성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어린양 혼인잔치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 성도들과 정혼을 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모든 빚을 다 갚으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오마’ 하시 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 동안 우리 신부들은 정절을 잘 지키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물들고 세상과 타협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우리에게 이렇게 경고합니다.
(고전6:9-11) 9 사악한 자는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모르십니까? 잘못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음란한 자나 우상을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여색을 탐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10 도둑질하는 자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주정꾼이나 비방하는 자나 약탈하는 자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합니다. 11 여러분 중에도 이런 사람이 더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하느님의 성령으로 깨끗이 씻겨지고 거룩하여졌으며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구원받은 우리가 완전하게 정절을 지켜낼 수는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리고 그 정절을 지켜내지 못한다고 해서 구원이 취소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에 대해서 점점 밝히 이해하게 되고 하느님 나라 백성들의 신분에 대해 점점 깨닫게 되면 우리는 점차적으로 정절을 지키는 순결한 하느님의 자녀의 신분에 맞는 삶을 추구하고 또 그렇게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혀 변화가 없는 그리스도인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②두 번째로 하느님의 성도들은 4절에 있는 대로 ‘어린양이 인도하는 대로 어디든지 따라가는 자’입니다. 우리가 착각하는 것이 어린양이 이끄는 곳은 전부 만사형통의 길인 줄 압니다. 그 반대입니다. 어린양이 이끄시는 길은 자기의 계획과 꿈과 야망을 다 접는 길입니다. 그걸 성경은 자기 부인이라고 합니다.
(마르8:34-35) 34 예수께서 군중과 제자들을 한 자리에 불러 놓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35 제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릴 것이다.
어떠세요. 그 어린양 예수를 따라가는 삶이 쉬울 것 같습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계획을 접고 예수님이 이끄는 대로만 따라가 는 것이 정말 쉽습니까? 그런데 성도들은 전부 그렇게 살다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35절에 이렇게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꿈을 쫓아 자기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 하느님마저도 동원하는 자는 반드시 죽을 것이요,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자신 의 계획을 포기하고 말씀대로 사는 자들만이 구원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신앙 생활을 통해서 그러한 사람으로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마태10:34-38) 34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35 나는 아들은 아버지와 맞서고 딸은 어머니와, 며느리는 시어머니와 서로 맞서게 하려고 왔다. 36 집안 식구가 바로 자기 원수다.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지 않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예수님은 때로 바른 신앙을 위해 가족들과도 원수가 되는 그러한 어려운 길로 우리를 이끄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백성들은 그 때 두말 않고 어린양이 이끄시는 대로 좇아갔다는 것입니다.
거기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이든지 푸른 초장이든지 그들에게는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함께 계신 곳이라면 지옥이라도 쫓아가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이런 설교를 해 보면 가짜와 진짜들이 금방 티가 납니다. 가짜들은 굉장히 언짢아합니다. ‘진짜 그런 길이라면 가기 싫다’ 이게 얼굴에 나타납니다.
저는 지금 성경에 기록된 것을 그대로 가감 없이 전달해 드리는 것입니다. 성도는 두말 않고 그 예수님이 이끄는 대로 따라 갑니다. 여러분도 그럴 각오가 되어 있으신 겁니까? 그렇게 열심히 살아내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은 이 땅에서 보상을 해 주십니다. 분명 여러분은 이 땅에서 그 보상을 받습니다.
(마르10:29-30) 29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30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의 축복도 백배나 받을 것이며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가 나와 복음을 위해서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토지를 버리면 이 땅에서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토지를 백배나 받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30절의 ‘현세에 있어’‘눈 엔 토 카이로’ 가 ‘지금 여기서’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던가요? 여러분께서 예수를 믿느라고 집이나 땅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을 버리면 정말 그 모든 것이 이 땅에서 백배로 오던가요? 집이나 땅은 그렇다 치고 형제, 자매, 어미, 자식들이 백명 씩 늘어납니까?
집과 땅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이 교회에 헌금 낸 것의 백배로 여러분에게 다시 돌려주실 것이라는 설교를 어디선가는 한 번 들어보신 적이 있으시죠? 그런데 정말 그렇게 됩니까? 저는 지금까지 한 번도 하느님께서 돌려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냥 낸 만큼 손해입니다.
그럼에도 내게 주어지는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고 우리는 이 땅에서 빵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는 고백으로 헌금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고자하는 것은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포기하게 되는 것들을 다시 뻥튀기해서 돌려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버린 그런 세상 것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보상, 그게 백배의 의미입니다.
그런 세상 것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보상을 너희에게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럼 그 보상이 뭡니까? 여러분이 이 땅에서 받으실 상, 그 보상은 바로 여러분이 하느님과 동행하면서 이미 여러분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성품을 하나하나 배워서 자기 것으로 만드는 그 기쁨을 말하는 것입니다. ‘에게, 그게 보상이야?’하실 분들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네, 그게 이생에 주어지는 보상입니다.
(고전9:16-18) 16 내가 복음을 전한다 해서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화가 미칠 것입니다. 17 만일 내가 내 자유로 이 일을 택해서 하고 있다면 응당 보수를 바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내 자유로 택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 일을 내 직무로 맡겨 주신 것입니다. 18 그러니 나에게 무슨 보수가 있겠습니까? 보수가 있다면 그것은 내가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서 응당 받을 수 있는 것을 요구하지 않고 복음을 거저 전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가 받은 상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가 받은 상이 어떤 상입니까? 이전 같았으면 자신의 모든 행동이 정당한 보상을 받아야 하고 자신의 모든 행동이 자기를 증명하고 자기를 자랑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 져 있었을 텐데 이제 주를 믿고 신앙생활을 하다보니까 이제 내가 어떤 보상을 바라지 않고 이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행동 을 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받을 보상은 집이나 전 토나 가족들과 누리는 행복 같은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하나님과 하나님의 성품’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상입니다. 그 게 정말 상인 줄 알고 자기 안에서 그러한 변 화가 발견이 될 때 기뻐하고 감격하고 자랑하는 것이 바로 ‘새 노래’인 것입니다
. ‘너무 좋다, 우리가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 던 이런 삶이 구원을 얻고 난 뒤에 이렇게 살아지는 게 너무 신기하고 좋다. 하나님 너무 감사합니다.‘ 이게 새 노래인 것입니다.
그래서 30절에 이 땅에서 우리에게 다시 백배로 돌려주신다는 목록에 ‘아버지’만 빠져 있는 것입니다. 왜 아버지만 백배로 안 돌려주십니까? 거기서 왜 아버지만 빠졌지요? 여러분의 진짜 아버지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마태23:9) 9 또 이 세상 누구를 보고도 아버지라 부르지 말아라. 너희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한 분뿐이시다.
그러니까 우리가 받는 상은 하느님 아버지와, 이 땅의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하느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기쁨, 그게 우리가 이 땅에서 받는 상인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느님께 ‘불평을 하고 원망을 하고’ 그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열심히 기도를 하고 아무리 열심히 헌금을 하고 아무리 열심히 종교 행위를 해도 우리가 기대했던 것 같은 물질적이며 현세 적인 복이 좀체로 잘 오지 않거든요. 집을 바쳤는데 집이 백배로 안 돌아옵니다. 땅을 바쳤는데 땅이 백배로 안 돌아옵니다. 십일조 꼬박꼬박했는데 여전히 비즈니스가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세계관이 바뀌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어찌 보면 당연한 불평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너희는 분명 그렇게 내가 주는 복을 오해하게 될 것이다’라는 것을 벌써 비유로 말씀해 놓으셨습니다.
마태복음 20장에 가면 포도원 품꾼의 비유가 나옵니다. 주인이 이른 아침에 장터에 나가서 놀고 있는 품꾼들을 데려다가 포도원에서 일을 시켰습니다. 주인은 3시에 6시에 9시에 그리고 11시에 계속해서 나가서 놀고 있는 품꾼들을 데려왔습니다. 유대인들 의 11시는 오후 다섯 시입니다.
그런데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보통 해질녘까지 일을 했습니다. 그 시간이 우리 시간으로 대충 저녁 6시쯤 됩니다. 그러니까 11시에 온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주인이 삯을 주는데 아침 일찍 온 사람과 저녁 다섯 시에 온 사람을 한 데나리온 씩 똑같이 주었습니다.
당연히 아침 일찍 와서 일을 많이 한 사람이 화를 내지요. ‘아니 왜 한 시간밖에 일을 하지 않은 사람과 우리를 똑같이 취급합니까? 이건 불공평합니다.’ 하고 따졌습니다. 그 때 주인이 내 것 가지고 내가 내 마음대로 주는데 네가 왜 화를 내느냐? 하고 말 한 뒤에 그 유명한 구절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이다’는 말을 덧붙입니다.
(마태20:13-16) 13 그러자 주인은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을 보고 '내가 당신에게 잘못한 것이 무엇이오? 당신은 나와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지 않았소? 14 당신의 품삯이나 가지고 가시오. 나는 이 마지막 사람에게도 당신에게 준 만큼의 삯을 주기로 한 것이오. 15 내 것을 내 마음대로 처리하는 것이 잘못이란 말이오? 내 후한 처사가 비위에 거슬린단 말이오?' 하고 말하였다. 16 이와 같이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여러분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진짜 상급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진짜 복은, 하느님의 성품을 좇아 그러한 하느님 나라의 삶의 원리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것 그 자체가 상급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힘겨운 우리의 신앙생활을 통해서 하느님의 백성으로 다듬어져 가고 성숙해져 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거기에서 희열과 기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먼저 와서 그 참된 신앙생활 속으로 들어가서 열심히 삶을 살아 내는 것 자체가 상인 것입니다.
우리에 게 엄청난 유익인 것입니다. 예수를 늦게 믿은 사람은 그만큼 세상에서 자기 시간을 방탕하게 허비하게 됩니다. 예수를 먼저 믿고 그 분의 뜻에 맞게 더 긴 시간을 살아낸 사람은 그만큼 시간을 덜 허비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옆에 달린 강도를 부러워합니다. 세상에서 할 거 다해 보고 즐길 거 다 즐기다가 그 강도처럼 막판 뒤집기로 구원을 얻고 싶어합니다. 아닙니다. 그렇게 세상에서 방탕하게 보낸 시간만큼 여러분에게는 손해입니다.
여러분은 주인의 부름을 받는 그 순간부터 신앙생활을 통해서 인내를 배우고, 사랑을 배우고, 겸손을 배우고, 아량을 배우고 ,더러운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조금씩 변해 가는 자신을 보면서 감격하는 것입니다. 그게 상입니다. 그게 하느님께서 이 땅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유일 한 보상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먼저 온 품꾼들이 ‘왜 이렇게 오래 예수를 믿고 이렇게 많이 헌신을 했는데, 나에게 물질적 보상을 해 주시지 않습니까?’라고 불평했을 때 ‘너희들이 도대체 구원이 뭔지, 복음이 뭔지 알고 있는 자들이냐? 먼저 된 자들아, 너희는 그 오랜 시 간 헛수고 했구나’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30년 40년 예수를 믿었다 할지라도 아직도 ‘하느님은 이 땅에서 나에게 현세적이며 물질적인 상을 주셔야만 한다고’ 마음속으로 우기고 계시다면 여러분은 꼴찌 된 자들입니다. 아직 어린애라는 것입니다. 아니면 애시 당초 가짜이거나 둘 중에 하나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성경에서 제일 미워하시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대부분이 예수님을 팔아먹은 가롯 유다를 꼽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여전히 가롯 유다처럼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롯 유다가 왜 예수님을 팔아먹은 겁니까? 적어도 돈이 탐이 나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은 삼십은 120 데나리온 정도 되는 가치입니다. 가롯 유다는 돈궤를 맡은 자였습니다. 그 정도 돈은 언제든지 만질 수 있던 사람입니다.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파는 사건 바로 앞에 붙어 있는 사건이 뭐죠? 예수님께 향유를 붓는 마리아 사건입니다. 그 향유가 얼마였습니까? 300데나리온 이었습니다. 유다가 그 여인보고 뭐라고 합니까? ‘그 걸로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면 더 좋을 텐데 왜 그 비 싼 것을 예수님 발에 붓느냐?’ 그럽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그 향유보다도 싼값에 팔아버린 것입니다. 유다가 왜 예수님을 팔아버렸을까요? 유다는 모든 것을 현세 적이며 물질 적인 것으로 해석을 했던 사람입니다. 자신은 예수님을 이용해서 이 땅의 권세와 부귀를 누리려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신이 죽으셔야 한다고 말씀하시니까 유다가 화가 난 것입니다.
‘난 당신이 우리를 로마에서 건져내고 찬란한 다윗의 왕국을 재현 해 줄 메시아로 믿고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따라왔는데 이제 와서 죽는다고 하면 어떡하는가? 그럼 내가 당신으로부터 얻을 유익 이 도대체 뭐냐?’ 유다는 예수님에 대한 배신감과 절망감에서 예수님을 팔아버린 것입니다. 반면에 마리아는 어쩌면 자기가 가진 전 재산이었을 그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어 그 분의 죽음을 준비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셨으면 좋겠습니까? 가롯 유다의 기대처럼 기적과 이적을 일으켜서 로마의 황제가 되어 여러분의 삶에 유익을 끼쳐 주시기를 바라시지요? 나의 기대를 저버리고 너무나 나약하게 그냥 죽어버리는 그런 예수는 별로 탐탁지 않으시지요?
당신은 곶감을 들고 있다가 내가 입을 ‘아’하고 벌릴 때마다 하나씩 넣어주어야 하는데 왜 나에게 그러한 현세적이며 물질적인 것들로 보상을 안 해주고 묵묵부답입니까? 이게 우리 아닙니까?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가롯 유다입니다.
우리는 오히려 그 반대로 마리아처럼 우리의 가진 것을 전부 털어서라도 우리 주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그 거룩을 사모하고 사모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마리아와 유다가 나란히 등장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누구냐? 마리아냐? 유다냐? 그런데 십자가와 거룩은 어디로 가고, 전부 곶감 타령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받은 구원은 물질적인 것으로 정의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성품의 문제요 인격의 문제인 것입니다. 보세요, 성경이 구원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
(로마6:6) 6 예전의 우리는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서 죄에 물든 육체는 죽어 버리고 이제는 죄의 종살이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에페 4:17-24) 17 그러므로 나는 주님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간곡히 권고합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이방인들처럼 살지 마십시오. 그들은 헛된 생각을 하고 18 마음이 어두워져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받지 못할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무지하고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입니다. 19 그들은 도덕적인 감각을 잃고 제멋대로 방탕에 빠져서 온갖 더러운 짓을 하고 있습니다. 20 그러나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그렇게 배우지는 않았습니다. 21 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진리가 있을 따름인데 여러분이 그의 가르침을 그대로 듣고 배웠다면 22 옛 생활을 청산하고 정욕에 말려 들어 썩어져가는 낡은 인간성을 벗어 버리고 23 마음과 생각이 새롭게 되어 24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새 사람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새 사람은 올바르고 거룩한 진리의 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이게 바로 구원입니다. 죄를 벗어버리고 거룩을 입는 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가난에서 해방되는 것이 구원이 아닙니다. 질병에서 벗어나는 것이 구원이 아닙니다. 죄를 벗고 거룩을 입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생활을 통해서 하루하루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어 가는 거룩의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 조금 씩 변해 가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며 감격하게 되는 것 ‘아, 난 진짜 하느님의 백성이 맞구나’하고 확인하게 되는 것이 바로 하느님이 주시는 상인 것입니다.
한 품팔이 지게꾼 노인을 만났습니다.
나는 무식하고 못 배워서 내가 남들한테 해 줄 수 있는 것은 이렇게 굶는 사람 쌀이나 사다주고 배고픈 사람 라면이나 사다주는 것밖에 못한다고 수줍게 웃는 그 사람이야말로 진짜 부자 아니겠습니까? 부자는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잘 쓰는 사람을 우리는 부자라고 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분이 예수를 믿으신 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이렇게 보상을 받는 것입니다. 고난과 환난 의 신앙생활을 통해서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인격과 성품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 바로 우리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상입니다.
여러분이 하시는 일이 그 분이 하시는 일보다 어려우세요? 여러분 한 달 월급이 그 분보다 적으신 분들 계십니까? 여러분 중 에 그 분 보다 못 배운 분 계세요? 여러분 중에 그 분 보다 작고 못 생기신 분 계십니까?
그런데 왜 여러분은 그 분이 느끼는 그 행복이라는 것을 못 느끼고 사십니까? 우리는 신앙인이 이 땅에서 받는 상급을 오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늘 만족하지 못하고 늘 불평만 하는 가롯 유다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승리하신 분들입니다. 승리한 여러분은 분명 이 땅에서 백배의 상을 받게 되어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 상을 받아 누리고 계십니까? 아니면 여전히 가롯 유다처럼 엉뚱한 상을 바라며 오늘도 그 예수를 팔아먹고 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