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묵시10:9-11)

2021. 4. 20. 오후 12:30:56

글자


공동번역성서


(43)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묵시10:9-11)


(‘우리에게 복 주시되여기서 복 주셨다’ ‘율로게사스는 과거시제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이미 모든 복을 다 받은 사람 들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복 내려 주옵소서.’를 외치는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복의 내용을 잘 못 알고 계신 분들이지요. 그러니까 구원받은 사람들을 가리켜 전부 복 받은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자신들의 삶으로 입으로 복음 을 전하게 하십니다. 그 삶이 쉽지 않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압니다. 그런데 그것까지 해야 진짜 복음을 누리는 자들이며 진짜 복음을 바로 받아먹은 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

(묵시10:9-11)

9 그래서 나는 그 천사에게 가서 그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고 했습니다. 그 때 그 천사는 나에게 '이것을 받아 삼켜 버려라. 이것이 네 입에는 꿀같이 달겠지만, 네 배에 들어 가면 배를 아프게 할 것이다' 하고 말했습니다. 10 그래서 나는 그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받아 삼켰습니다. 과연 그것이 내 입에는 꿀같이 달았지만 먹고 나니 배가 아팠습니다. 11 그 때 '너는 여러 백성들과 민족들과 언어들과 왕들에 관해서 다시 예언을 해야 한다' 하는 음성이 나에게 들려 왔습니다.

 

우리가 지난시간에 10장을 공부하면서 바른 복음을 받아먹은 자들의 삶은 입에서는 달지만 배에서는 쓴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을 공부했습니다. 역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에는 고난이 필연적이라는 것을 함께 확인했지요? 성도의 삶이 이 땅에서 고난을 필연적으로 통과해야 한다는 사실은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이기에 성경을 올바로 전하는 사람은 성도의 고난을 피해서 설교를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11장을 공부하면서 그 신자의 바른 삶에 대해 더욱 더 자세하게 공부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올바른 복음 위에 사는 자들의 삶을 어떻게 기록을 해 놓으셨는지 우리는 알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그 그리스도인의 삶의 내용을 살피기 전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명령에 대해 9,10,11절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1절을 보면 작은 책을 받아먹은 요한에게 하느님께서 명령을 내리십니다.


(묵시10:11) 11 그 때 '너는 여러 백성들과 민족들과 언어들과 왕들에 관해서 다시 예언을 해야 한다' 하는 음성이 나에게 들려 왔습니다.


다시 예언해야 한다이 구절 때문에 고전적 세대주의자들은 이때부터 후 삼년 반이 시작되는 것으로 이해해서 이 때 새로운 예언을 받아서 새롭게 예언하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을 합니다만 여기서 쓰인 다시, 팔린이라는 헬라어는 더 깊이, 강화하여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11절의 말씀을 좀 더 원어의 뜻에 가깝게 번역을 하면 여러 많은 백성과 나라와 언어들과 임금에게 네가 하느님 말씀이 무엇인지 지금 전하던 것을 더 강화해서 전해야 한다는사명을 내리시는 장면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되는 그 시작은 복음을 듣는 것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복음이라는 것은 복이 담긴 소식, 복된 소식이지요? 그래서 복음을 듣고 그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이미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에페소서로 가보지요.

 

(에페1:3)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늘의 온갖 영적 축복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복 주시되여기서 복 주셨다’ ‘율로게사스는 과거시제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이미 모든 복을 다 받은 사람들 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복 내려 주옵소서.’를 외치는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복의 내용을 잘 못 알고 있는 분들이지요.

그러면 하느님께서 주시겠다고 하신 그 복음 안에 담긴 복의 내용이 뭔지 복습을 해 보죠.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이라는 단어가 언제 처음 나옵니까?

 

(창세1:27-28) 27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 내셨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 내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어 내시고 28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을 내려 주시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를 돌아 다니는 모든 짐승을 부려라!'

 

여기서 하느님께서 인간들에게 주신 , 바라크는 하느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하느님으로부터 끊임없이 인간의 존재 속으로 공급되는 모든 생명력을 ’‘바라크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을 하고 그 을 상실했습니다. 이제 인간은 뿌리가 뽑힌 나무가 된 것입니다.

살아있긴 하지만 생명의 근원인 땅에서 그 뿌리가 뽑혀버렸기 때문에 결국 사망으로 그 삶을 결론 맺을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지요. 그런데 하느님께서 다시금 어떤 무리들에게 그 을 회복시켜 주시겠다는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이 회복되기 위해서는 하느님과의 단절된 관계가 회복 이 되어야 하지요? 끊어진 송수관을 이어야 다시 물이 끊이지 않고 공급이 되지요. 그 끊어진 송수관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해결을 하십니다. 그래서 그 예수 안에 들어있던 모든 자들이 다시 하느님의 생명력을 영원히 공급받게 되는 것을 우리가 영생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구원받은 사람들을 가리켜 전부 복 받은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느님께서 그 의 회복을 아브라함에서부터 시작하십니다.

 

(창세12:1-3) 1 야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네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장차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2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리라. 너에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떨치게 하리라. 네 이름은 남에게 복을 끼쳐 주는 이름이 될 것이다. 3 너에게 복을 비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 것이며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저주를 내리리라. 세상 사람들이 네 덕을 입을 것이다.'

 

그런데 잘 보면 그 복의 내용이 그 복을 받은 사람에게서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흘러야 한다는 것을 하느님은 처음부터 강조하십니다. 네게 복을 줄 텐데 너는 그 복의 근원이 되어서 다른 이들에게 그 복을 흘려보내야한다 여기까지가 복음입니다.

 

(갈라3:6-9) 6 성서에도 기록되어 있듯이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믿었고 하느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7 그러므로 여러분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만이 아브라함의 참 자손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8 하느님께서는 이방인들도 믿기만 하면 당신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해 주시리라는 것을 성서는 미리 내다보았습니다. 그래서 성서는 아브라함에게 '너로 말미암아 만백성이 복을 받으리라' 는 복음을 미리 전해 주었던 것입니다. 9 그러므로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보세요, 사도 바울로도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셨는데 그 복음의 내용이 너 혼자 구원받고 천국 가라가 아니라 모든 백성이 너를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까지가 복음인 것입니다. 왜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그들이 복을 얻게 되는 것이 우리에게 이 되는 것인지를 지금부터 차근차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왜 하느님께서 복음이 적힌 작은 책을 받아먹은 요한에게 너는 지금부터 더 깊이, 더 열심히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을 하셨는지 우리는 알게 될 것입니다.

 

(로마10:13-17) 13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얻으리라' 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14 그러나 믿지 않는 분의 이름을 어떻게 부를 수 있겠습니까? 또 들어 보지도 못한 분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말씀을 전해주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15 전도자로서 파견 받지 않고서 어떻게 전도를 할 수 있겠습니까?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라는 말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16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그 복음을 받아 들인 것은 아닙니다. '주님, 우리가 일러 준 말을 누가 믿었습니까?' 하고 이사야도 한탄한 일이 있습니다. 17 그러므로 들어야 믿을 수 있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이 있어야 들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은 반드시 전하는 자의 입을 통해서만 전파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모든 일이 그렇듯 이 복음 전하는 일도 하느님 혼자서 하시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라는 것을 잘 압니다. 그리고 어차피 그 복음도 하느님께서 성령을 보내셔서 그 성령에 의해 눈이 뜨여지고 귀가 열린 사람만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것도 잘 압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먼저 복음을 받아먹은 자들을 복음 전파의 자리로 모두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자신들의 삶으로 입으로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그 삶이 쉽지 않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압니다. 그런데 그것까지 해야 진짜 복음을 누리는 자들이며 진짜 복음을 바로 받아먹은 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고전1:20-21) 20 그러니 이제 지혜로운 자가 어디 있고 학자가 어디 있습니까? 또 이 세상의 이론가가 어디 있습니까? 하느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가 어리석다는 것을 보여 주시지 않았습니까? 21 세상이 자기 지혜로는 하느님을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지혜로운 경륜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전하는 소위 어리석다는 복음을 통해서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이것보세요. 우리의 전도가, 우리의 설교가 미련한 것이라는 것을 하느님께서 아십니다. 그런 것으로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아세요. 하느님께서 개입 안 하시면 아무리 감동적인 설교를 퍼부어도 인간은 절대 하느님 앞으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굳이 우리를 그 일에 부르실까요? 왜 우리를 전도의 현장으로 부르실까요? 왜 우리를 하느님 나라 완성의 도구로 수단으로 방법으로 택하셨을까요? 그것은 하느님 나라의 완성, 즉 이제 영원히 타락하지 않고 무너지지 않을 그 완벽한 재창조의 사역에 우리를 동참시켜 주시려는 하느님의 배려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빵 나무를 주시지 않고 밀을 심어서 농사를 짓고 추수를 해서 방앗간에 가서 탈곡을 하고 그것을 잘 게 갈아 밀가루 반죽을 하고 간을 해서 오븐에 잘 구워서 빵을 만들어 먹는 창조의 자리에 우리를 부르시는 것처럼 하느님 나라의 완성에 그와 똑같은 원리로 우리를 그 영광스러운 자리로 불러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으로 입으로 하느님의 복음을 전파하면서 그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와 자비와 인내와 온유하심에 동참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타락하여 하느님께 등을 돌린 자들을 향해 어떠한 사랑을 부어주신 것인지를 조금이나마 맛보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그 하느님의 성품과 인격 안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한량없는 배려인 것입니다.

 

(루가19:41-44) 41 예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 이르러 그 도시를 내려다 보시고 눈물을 흘리시며 42 한탄하셨다. '오늘 네가 평화의 길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너는 그 길을 보지 못하는구나. 43 이제 네 원수들이 돌아 가며 진을 쳐서 너를 에워 싸고 사방에서 쳐들어 와 44 너를 쳐부수고 너의 성안에 사는 백성을 모조리 짓밟아 버릴 것이다. 그리고 네 성안에 있는 돌은 어느 하나도 제자리에 얹혀있지 못할 것이다. 너는 하느님께서 구원하러 오신 때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듣지 못하고 그냥 죽음으로 떨어지게 될 예루살렘을 보시며 우셨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하시면서 우셨습니다. 우리에게 복음 전파의 사명을 주신 것은 바로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와 자비와 인내와 온유의 성품을 우리에게 가르치시려 는 하느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면서 많은 핍박을 당하게 됩니다. 배신을 당하기도 합니다. 조롱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이 복음이 아니면 당신이 살 길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참아주며 인내하며 기도하며 눈물 흘리며 포기하지 않는 하느님의 성품에 조금 씩 조금씩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가 복음의 내용 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거듭난 자로서 복음을 전하는 것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야 하는 사람들이고 아울러 입으로도 그 복된 소식을 전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고전9:16-18) 16 내가 복음을 전한다 해서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화가 미칠 것입니다. 17 만일 내가 내 자유로 이 일을 택해서 하고 있다면 응당 보수를 바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내 자유로 택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 일을 내 직무로 맡겨 주신 것입니다. 18 그러니 나에게 무슨 보수가 있겠습니까? 보수가 있다면 그것은 내가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서 응당 받을 수 있는 것을 요구하지 않고 복음을 거저 전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자기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부득불 해야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말로 부득불은 마지못해의 뜻이 더 강하지만 여기서 쓰인 헬라어 아낭케는 헬라의 숙명론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당시 헬라의 델포이와 아테네의 신전에서는 간혹 신탁이 선포되었습니다.

그들이 섬기는 신으로부터 사제에게 신탁이 선포되면 사제는 그 신탁의 당사자에게 그 신탁을 전했고 그 사람은 반드시 그 신탁을 운명적으로 살아내야 했습니다. 만일 신전에서 전달된 그 신탁을 외면하거나 거부하면 그 사람은 벌은 벌대로 받고 그 신탁은 신탁대로 살아내야 했습니다. 그 때 쓰인 단어가 아낭케입니다. 그 뜻은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복음을 전하는 것은 거스릴 수 없는 운명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울로에게 벌써 이 땅에서 상이 주어졌습니다. 18절을 보면 내가 상을 받았다. 그 상이 무엇이냐 하면 내가 복음을 전할 때 응당 받아야 할 것을 받지 않고 값없이 기쁘게 전하는 온유함과 사랑과 인내, 이런 것을 벌써 상으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받아먹은 자들에게 복음전파의 명령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로마1:14) 14 나는 문명인에게나 미개인에게나 또 유식한 사람에게나 무식한 사람에게나 똑 같이 전도할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복음을 먼저 받은 자들은 모두 빚진 자입니다. 여기서 빚진 자오페일레테스는 그 빚을 갚지 않으면 감옥에 갈 수밖에 없는 악성 채무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복음 전파는 우리에게 부과된 의무요 책임입니다.

 

(고전9:23) 23 나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과 다 같이 복음의 축복을 나누려는 것입니다.

 

여기서 내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내가 복음에 참예 하고자 함이라는 표현을 쓰지요?

거기서 쓰인 단어 순코이노노스‘joint partaker’ 입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가 받은 복음을 누릴 수 없다 는 것입니다. 그 말은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이 그 복음의 혜택을 온전히 누리기 위해서는 복음을 전하는 일을 반드시 해야 한다는 것 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제가 선교와 전도에 별로 관심이 없는 줄 압니다. 제가 선교와 전도에 관한 설교를 하면서, ‘여러분, 세계를 품에 안겠다고 나서기 전에 먼저 올바른 복음을 정리하십시오. 그리고 자신의 거룩을 먼저 챙기십시오.’ 그렇게 설교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우리 교사님은 선교에는 관심이 없나보다이런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아닙니다. 제가 그렇게 설교한 것은 위선이나 종교 행위, 형식, 자기의로움그런 것들에 빠져서 엉터리 신앙생활을 하는 것에 대한 경고를 한 것이지, 선교의 중요성을 무시한 것이 아닙니다.

복음에 대한 정의도 못 내린 사람들이 선교지에 가서 학교 수백 개 짓고 빵공장, 국수공장 수백 개 짓는 것보다 하느님은 진짜 선교사 한 사람의 삶을 통해 하느님의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전도자들에게 그런 전도자의 삶을 통해서 하느님의 성품과 인격을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들의 유익과 권리를 내려놓고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지옥을 살고 있는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 자신들을 불사르는 이러한 모습이야말로 진정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아직까지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들을 보지 못했어요.

 

(이사52:7) 7 반가와라, 기쁜 소식을 안고 산등성이를 달려 오는 저 발길이여(How beautiful!). 평화가 왔다고 외치며, 희소식을 전하는구나. 구원이 이르렀다고 외치며 '너희 하느님께서 왕권을 잡으셨다' 고 시온을 향해 이르는 구나.

 

How beautiful! 삶으로 입으로 하느님의 복음을 살아내는 자들, 그들이야말로 진정 아름다운 사람들입니다.

기원전 490년에 아테네의 마라톤 광장에서 커다란 전쟁이 있었습니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왕이 수십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아테네로 쳐들어 온 것입니다. 그 때 아테네의 군사는 불과 수천 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마라톤 광장의 전투에서 아테네군이 승리를 했습니다. 그 병사 중에 한 명이 그 승리가 너무 기뻐서 단숨에 42.195km를 달려서 그 기쁜 소식을 전하고 죽었습니다.

그래서 마라톤 광장의 이름을 따서 마라톤이라는 경기가 생겨난 것이지요. 구원의 복된 소식이 고작 그런 전쟁의 승리보다 못한 소식입니까? 그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기쁘고도 기쁜 소식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발길은 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너무 좋아서...나누고 싶어서...

마포구 합정동에 가면 양화진(서울 마포구 양화진길 46(합정동145-3)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우리 조선 땅에 오셨던 선교사님들의 무덤이 있는 곳입니다. 한국에 있을 때 제가 자주 들르던 곳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 수많은 선교사들의 무덤을 하나하나 만져가며 그 묘비명들을 다 읽어 본 적이 있습니다. 다들 조선을 너무 사랑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왜 그들 이 미개한 땅 조선 땅에 와서 전염병으로 과로로 때로는 핍박의 칼에 목숨을 던지며 예수를 전했을까요? 그들은 하느님의 애통함에 참 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죄인들을 향한 하느님의 안타까움을 알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왜요? 그들 안에는 하느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진정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안 사람들이었습니다. 미친 사람들입니까? 아니요. 어떤 것이 진정한 가치요, 진정한 기쁨인지를 정확히 알았던 분들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사역을 하실 때 몸이 필요하셨던 것처럼 지금 이 시대에도 예수님의 몸이 필요합니다. 그게 바로 우리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작은 그리스도들, 하느님은 지금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여러 백성들과 민족들과 언어들과 왕들에 관해서 다시 예언을 해야 한다' ‘더 깊이, 더 강하게, 더 열정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아직까지 예수를 알지 못하는 분들 계시죠? 언제까지 여러분의 직무를 유기 하실 것입니까? 복음을 전하세요. 여러분, 전도는 별거 아닙니다. 한 영혼을 향한 하느님의 마음을, 그 눈물을 아는 것이 바로 전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전도하지 않는다니요? 우리가 선교하지 않는다니요? 그건 언어도단입니다. 전하세요. 증거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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