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번역성서
(30) 사자와 어린 양 (묵시5:1-8)
여러분은 혹시 ‘하느님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조롱하는 저 못된 세상 사람들에게 하루 속히 뽄때를 좀 보여 주세요. 하루 속히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풀어 주세요’ 이런 기도 해 보신 적 없으세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렇게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오매불망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일곱은 완전 수. 그럼 일곱 뿔이라는 것은 ‘신적인 힘, 전능, 완전한 승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묵시5:1-8)
1 나는 또 옥좌에 앉으신 그분이 오른손에 두루마리 하나를 들고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안팎에 글이 기록돼 있는 그 두루마리는 일곱 인을 찍어 봉하여 놓은 것이었습니다. 2 그리고 나는 힘센 천사 하나가 큰 소리로 '이 봉인을 떼고 두루마리를 펼 자격이 있는 자가 누구인가?' 하고 외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3 그러나 그 두루마리를 펴고 그것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자는 하늘에도 없고 땅에도 없고 또 땅 아래에도 없었습니다. 4 그 두루마리를 펴고 그것을 들여다 볼 자격이 있는 자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슬피 울었습니다. 5 그러나 원로들 가운데 하나가 나에게 '울지 마시오. 유다 지파에서 난 사자, 곧 다윗의 뿌리가 승리하였으니 그분이 이 일곱 봉인을 떼시고 두루마리를 펴실 수 있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6 나는 또 그 옥좌와 네 생물과 원로들 가운데 어린 양 하나가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어린 양은 이미 죽임을 당한 것 같았으며 일곱 뿔과 일곱 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눈은 하느님께서 온 땅에 보내신 7 그 어린 양이 나와 옥좌에 앉으신 분의 오른손에서 그 두루마리를 받아 들었습니다. 8 그 어린 양이 두루마리를 받아 들자 네 생물과 스물 네 원로는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 담긴 금대접을 가지고 어린 양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 향은 곧 성도들의 기도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일곱印으로 봉해진 책이 어떤 책인지에 대해 공부를 했습니다. 그 책은 단순히 일곱인으로 봉함 된 저주가 들어 있는 책이 아니라 재창조에 관한 하느님의 비밀과 섭리가 들어 있는 책이라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단순히 인이 하나씩 떨어 질 때마다 그 안에 있는 저주가 밖으로 쏟아져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5절을 보면 알 수 있지요?
(묵시5:5) 5 그러나 원로들 가운데 하나가 나에게 '울지 마시오. 유다 지파에서 난 사자, 곧 다윗의 뿌리가 승리하였으니 그분이 이 일곱 봉인을 떼시고 두루마리를 펴실 수 있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책이 일곱 인으로 봉해졌다는 것은 그 책의 내용이 완전하며 그 내용은 반드시 이행 될 것이고, 그 것은 하느님 이외의 그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는 비밀스러운 것임을 상징하는 것뿐입니다.
첫 번째 인을 떼면 기근이 오고 두 번째 인을 떼면 지진이, 오고 세 번째 인을 떼면 전쟁이 오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요한이 그 책을 펼 사람이 없고 그로 말미암아 그 책을 볼 수 있는 자도 없는 것을 보고 웁니다. 그 책이 펴져야 그 하느님의 재창조 사역이 계시되고 성취되고 완성이 될 텐데 그 책을 펼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아담이 죄를 짓고 난 뒤 모든 인간은 함께 타락을 해 버렸기 때문에 그 책을 펼 수 있는 자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이 크게 운 것입니다. 그 하느님의 계획이 그 책을 펴고 볼 자가 없어서 지연이 되거나 유보가 되는 것에 대한 안타까운 울음입니다. 그러니까 그 요한의 울음은 구원과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위한 염원인 것입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라는 기도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기도입니다.
(묵시6:9-10) 9 어린 양이 다섯째 봉인을 떼셨을 때에 나는 하느님의 말씀 때문에 그리고 그 말씀을 증언했기 때문에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영혼이 제단 아래 자리잡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10 그들은 큰 소리로 '거룩하시고 진실하신 대왕님, 우리가 얼마나 더 오래 기다려야 땅 위에 사는 자들을 심판하시고 또 우리가 흘린 피의 원수를 갚아 주시겠습니까?' 하고 부르짖었습니다.
이 성도들의 기도는 마찬가지로 “언제 그 하느님 나라가 완성이 되는 것입니까?“라는 안타까운 기다림이 담긴 염원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하느님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조롱하는 저 못된 세상 사람들에게 하루 속히 뽄때를 좀 보여 주세요. 하루 속히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풀어 주세요’ 이런 기도 해 보신 적 없으세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렇게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오매불망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하바꾹이나 예레미야나 이사야나 모두 그런 안타까움을 가지고 있었지요? 하바꾹의 기도만 한번 보고 가지요.
(하바1:2-4) 2 '야훼여, 살려 달라고 울부짖는 이 소리, 언제 들어 주시렵니까? 호소하는 이 억울한 일, 언제 풀어 주시렵니까? 3 어인 일로 이렇듯이 애매한 일을 당하게 하시고 이 고생살이를 못 본 체하십니까? 보이느니 약탈과 억압뿐이요, 터지느니 시비와 말다툼뿐입니다. 4 법은 땅에 떨어지고 정의는 끝내 무너졌습니다. 못된 자들이 착한 사람을 등쳐 먹는 세상, 정의가 짓밟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요한의 울음이나 제단 앞에서의 성도들의 기도나 예언자들의 기도를 단순히 ‘하느님 우리 원수를 언제 갚아 줄 것입니까?’ 로 이해를 하면 안 됩니다.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위한 기도는 단순히 우리의 원한을 이를 갈며 품고 있다가 하느님 앞에 일러바치는 기도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8절을 한 번 보세요.
(묵시5:8) 8 그 어린 양이 두루마리를 받아 들자 네 생물과 스물 네 원로는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 담긴 금대접을 가지고 어린 양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 향은 곧 성도들의 기도입니다.
(묵시8:3-5) 3 다른 천사 하나가 금향로를 들고 제단 앞에 와 섰습니다. 그 천사는 모든 성도들의 기도를 향에 섞어서 옥좌 앞에 있는 황금제단에 드리려고 많은 향을 받아 들었습니다. 4 그러자 그 천사의 손으로부터 향의 연기가 성도들의 기도와 함께 하느님 앞으로 올라갔습니다. 5 그 뒤에 그 천사는 향로를 가져다가 거기에 제단 불을 가득히 담아서 땅에 던졌습니다. 그러자 천둥과 요란한 소리와 번개와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성도들의 기도를 “향”이라고 묘사를 합니다. 이‘향’은 하느님께 드려지는 예배에서 예물을 항상 동반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향 제물은 보통 숯불을 담은 냄비 안에서 만들어 졌습니다. 그래서 그 숯불에서 나오는 연기가 향과 섞여진 형태가 기도를 상징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표현들을 많이 썼습니다.
(시편141:2) 2 나의 기도 분향으로 받아 주시고 치켜 든 손 저녁의 제물로 받아 주소서.
그런데 하느님 앞에 올려지는 향기로운 예물인 성도들의 기도의 내용‘하루 속히 제 원한을 풀어주세요. 저 원수를 빨리 죽여주세요.’ 라면 왠지 안 어울리지요? 이런 원한 섞인 기도의 내용을 보면 복음서의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가 생각나시죠?
(루가18:1-8) 1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고 이렇게 비유를 들어 가르치셨다. 2 '어떤 도시에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거들떠 보지 않는 재판관이 있었다. 3 그 도시에는 어떤 과부가 있었는데 그 여자는 늘 그를 찾아 가서 '저에게 억울한 일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하고 졸라댔다. 4 오랫동안 그 여자의 청을 들어 주지 않던 재판관도 결국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거들떠 보지 않는 사람이지만 5 이 과부가 너무도 성가시게 구니 그 소원대로 판결해 주어야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꾸만 찾아 와서 못 견디게 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6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말씀하셨다. '이 고약한 재판관의 말을 새겨 들어라. 7 하느님께서 택하신 백성이 밤낮 부르짖는데도 올바르게 판결해 주지 않으시고 오랫동안 그대로 내버려 두실 것 같으냐? 8 사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과연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 볼 수 있겠느냐?'
여기도 원한에 사무친 한 과부가 나옵니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재판관도 과부가 귀찮게 찾아오면 그 원한을 풀어 준다, 하물며 천지 만물의 주인이신 전능하시고 의로운 재판관이신 하느님께서 너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겠느냐? 그러니 기도하고 나서 금방 그 기도의 응답이 없다고 안달하지 말고 때를 기다려라’ 는 내용입니다.
‘强請하고 매달리면 하느님도 귀찮아서 들어 주신다’에 초점이 있는 게 아닙니다. 불의한 재판관과 의로운 재판관이신 하느님을 대조해서 뭔가를 설명하는 것 입니다. ‘하느님은 반드시 신자들의 염원을 이루어 주신다.’는 것을 강조해 주는 비유입니다.
그러니까 낙망하지 말고 기다리라는 것 이지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한의 울음이나 요한묵시록의 성도들의 기도나 구약의 예언자들의 기도와 이 비유에서 신자들이 하느님께 기도했는데 아직 들어지지 않는 기도(그래서 낙망하지 말아야 할 기도)는 같은 기도입니다.
그럼 그 의로운 재판관이신 하느님께서 풀어 주셔야 할 것이 원수를 갚아 주시는 것입니까? 물론 그것도 포함이 됩니다. 최후의 심판 때 우리의 대적들이 완전히 멸망하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거기서 머물면 우리도 왠지 철없는 악당이 되는 느낌입니다. 절치부심, 와신상담, 원수 갚는 일에만 몰두하는 철없는 악당. 그럼 그 기도의 내용은 어떻게 해석을 해야 옳을까요?
이스라엘의 ‘재판관’은 단순히 법을 안 지키는 자들에게 형을 선고하는 자가 아닙니다. 재판관 스스로 하느님의 법을 잘 지키고 준행 하며, 다른 이들이 하느님의 법에 순종하며 잘 살 수 있게 해 주는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재판관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법을 수호하다보면 거기에 반하는 악당들에게 벌이 내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수, 원한’ 이런 것보다 ‘하느님의 뜻을 바르게 성취’하도록 세워진 사람들이 바로 재판관입니다.
판관기를 영어로 ‘Judges’ 판관들은 전부 전쟁을 해서 적을 쳐부순 사람들인데 판관들을 ‘장군’이라고 부르지 않고 ‘재판관’이라 부릅니다. 판관들은 전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하던 사람들이었지요?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관영한 악을 몰아내고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것을 예표 한 것이 판관기입니다.
그런데 그 분은 왼손잡이의 모습으로, 소모는 막대기를 가진 자의 모습으로, 약한 아녀자의 모습으로 그렇게 오신다는 것이 판관기의 교훈이었지요? 판관들이 열심히 전쟁을 해서 적군을 물리친 사건들은 전부 하느님의 법을 모르는 자들, 즉 하느님을 대적하는 행악과 무지와 불법을 진멸하여 하느님 나라를 완성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상징적인 것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그러니 재판관이 궁극적으로 하는 일은 단순히 악당을 죽여 원한을 갚아 주는 일이 아니라 악을 진멸하여 義를 세우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묵시록과 루가복음의 비유에서 보았듯이 성도들이 드리는 기도 ‘하느님, 언제 우리를 조롱하며 멸시하는 저 악한 세력을 심판하시고 우리의 원한을 풀어주시겠습니까?’라는 기도는 하느님께서 반드시 이루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惡이 진멸되고 하느님의 義가 완성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를 한번 보자고요. 만일 오늘 하느님 나라가 완성이 된다면 여러분 거기 들어갈 자신 있으세요? 우리의 모습은 여전히 추하고 엉터리 같은 모습이 남아 있지요? 그래서 여러분 많이 고민하시잖아요? ‘왜 예수를 믿고도 나는 요 모양이냐?’‘왜 내 안에는 여전히 이렇게 악이 가득 차 있냐?’ 이런 고민들 하지요?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기도하는 성도들의 기도는 ‘하느님 우리 안에 있는 이 악한 것들 언제나 다 사라지고 하느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사는 자들이 되겠습니까? 하느님 하루 속히 그날이 오게 해 주십시오’라는 내용이 주된 내용인 것입니다. 우리 성도의 기도는 원수를 심판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우리 義 ‘거룩’인 거예요. 우리가 지금 우리의 꼴을 보면 절대 우리는 변할 것 같지 않지만 그날은 반드시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라. 불의한 재판관도 자기의 의무를 다 하기 위해 과부의 염원을 풀어 주는데 의로운 재판관인 내가 왜 너희들의 그 향기 나는 기도를 응답하지 않겠느냐? 그 날은 반드시 속히 곧 온다.’ 그게 성도들의 향기 나는 기도의 내용입니다.
단순히 ‘원수만 갚아 주세요.’라는 기도라면 거기서는 ‘악취’가 나겠지요. 거기서 무슨 향기가 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기도는 우리의 거룩과 그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하느님의 義를 염원하는 기도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의 기도를 ‘향기가 나는 향’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그 하느님의 계획의 완성이 유보되거나 지연 될 것을 염려하여 운 것입니다.
(베후3:13) 13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정의가 깃들어 있습니다.
거기에 하느님의 의가 완성이 되어 있습니까? 아직 부족합니까? 완성이 되어 있지요? 반드시 그 날은 우리에게 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은 아직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하느님과의 완전한 관계의 회복인 그 ‘義’를 추구하며 염원하며 그 완성의 날을 열망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완성된 하늘나라, 하느님의 義를 간절히 열망하는 자들을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장로가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본문 5절과 6절을 읽어보지요.
(묵시5:5-6) 5 그러나 원로들 가운데 하나가 나에게 '울지 마시오. 유다 지파에서 난 사자, 곧 다윗의 뿌리가 승리하였으니 그분이 이 일곱 봉인을 떼시고 두루마리를 펴실 수 있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6 나는 또 그 옥좌와 네 생물과 원로들 가운데 어린 양 하나가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어린 양은 이미 죽임을 당한 것 같았으며 일곱 뿔과 일곱 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눈은 하느님께서 온 땅에 보내신
요한이 원로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원로가 말하기를 ‘유다 지파에서 난 사자, 곧 다윗의 뿌리가 승리하였으니 그분이 이 일곱 봉인을 떼시고 두루마리를 펴실 수 있습니다' 그럽니다.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히브7:14) 14 우리 주님께서 유다 지파에서 나오신 것은 명백합니다. 그런데 모세가 이 지파를 사제직에 관련시켜 말한 일은 한번도 없습니다.
원로가 지금 하늘에 계신 이제 하느님이 영광을 회복하신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유다 지파의 使者’로 표현을 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성육신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백성들의 구원을 위해 우리 인간과 똑같은 인성을 지금도 갖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요한16:28) 28 나는 아버지께로부터 나와서 세상에 왔다가 이제 세상을 떠나 다시 아버지께 돌아 간다.'
주님께서 ‘하늘에서 세상으로 오셨다’라는 성육신에 관해 말씀하시는데 거기 쓰인 ‘왔다’라는 단어가 ‘엘렐루따’‘엘코마이’의 완료형 동사입니다. 헬라어의 완료형은 과거에 한번 일어난 일이 앞으로도 영원히 지속되는 것을 나타낼 때 쓰이는 시제입니다. 그러니까 그 예수님은 지금도, 아니 영원히 우리와 같은 육신을 지니고 사시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이신 그 분 이 우리와 함께 살기 위해서 육신을 입으시기로 선택을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을 ‘다윗의 뿌리’라고 표현을 하지요? 그 분은 다윗의 후손이신데 다윗의 뿌리라는 것은 다윗이 그 뿌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났다는 말입니다. 다윗보다 훨씬 먼저 있던 분, 그 분의 선재성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사야서에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사11:1) 1 이새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나오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돋아난다.
예수님은 이새의 줄기에서 나실 분이지만 동시에 그 뿌리가 되시는 先在하시는 하느님이시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직접 자신의 선재를 말씀하십니다.
(요한8:58) 58 예수께서는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 분은 완전한 하느님이시면서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셨던 것입니다. 바로 그 주님만이 그 책을 열고 인을 떼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라는 말은 창세기 49장의 야곱의 유언을 보면 좀 더 명확하게 그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49:8-12) 8 유다, 너는 네 형제들의 찬양을 받으리라. 네 손은 원수들의 멱살을 잡겠고 네 아비의 자식들이 네 앞에 엎드리리라. 9 유다는 사자새끼, 아들아, 너야말로 짐승을 덮쳐 뜯어 먹고는 배를 깔고 엎드린 수사자라 할까? 10 왕의 지팡이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지휘봉이 다리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참으로 그 자리를 차지할 분(실로-메시아)이 와서 만백성이 그에게 순종하게 되리라. 11 포도나무에 나귀를 예사로 매어 놓고 고급 포도나무에 새끼 나귀를 예사로 매어 두리라. 포도주로 옷을 빨고 포도의 붉은 즙으로 겉옷까지 빨리라. 12 눈은 포도주로 상기되고 이는 우유로 희어지리라.
유다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아에 관한 예언입니다. 당시 유대인에게 있어서 사자는 하느님의 능력과 하느님의 율법의 능력을 나타냈던 동물입니다. 그리고 헬라 사람들에게도 사자는 세상을 통치하고 악을 파괴하며 다음 세상에서 죽은 자를 안전으로 인도하는 헷신을 가리 켰습니다.
그러니까 유대 지파의 사자이신 예수님이란 표현은 원수를 정복하고 승리하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강함’을 나타냅니 다. 그것은 요한이 원로로부터 들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요한이 그 분을 봅니다. 그런데 들은 것과 직접 본 것이 완전히 다릅니다.
(묵시5:6) 6 나는 또 그 옥좌와 네 생물과 원로들 가운데 어린 양 하나가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어린 양은 이미 죽임을 당한 것 같았으며 일곱 뿔과 일곱 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눈은 하느님께서 온 땅에 보내신
들은 것은 분명 ‘사자’의 모습이었는데 직접 보니까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모습입니다. 거기서 ‘죽임을 당하다’라고 번역이 된 ‘습하조’라는 말은 ‘도살당한’이라는 말입니다. 승리를 한 사자가, 모양은 도살을 당한 어린양의 모습입니다. 하느님의 재창조, 하느님 나라의 완성은 바로 그러한 모습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승리’하면 나의 힘을 키워서 상대방을 완전히 묵사발을 만드는 그런 것을 연상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승리는 내가 당하고 내가 죽어서 이루는 승리입니다. 그게 십자가의 道, 십자가의 원리, 하느님의 지혜인 것입니다. 그것이 천국의 삶의 원리입니다.
(이사53:7) 7 그는 온갖 굴욕을 받으면서도 입 한번 열지 않고 참았다. 도살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처럼 가만히 서서 털을 깎이는 어미 양처럼 결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래서 세례 요한도 우리 주님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요한1:29) 29 다음 날 요한은 예수께서 자기한테 오시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하였다.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 저기 오신다.
(베전1:18-19) 18 여러분은 조상들에게서 물려 받은 헛된 생활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그것은 은이나 금 따위의 없어질 물건으로 값을 치르고 된 일이 아니라 19 흠도 티도 없는 어린 양의 피 같은 그리스도의 귀한 피로 얻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 힘을 키워서 그 힘으로 세상을 정복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가 가신 그 길을 따라,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인 십자가의 道로 살아가야 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 삶은 손해보고 당하고 하면서도 그 중심을 잃지 않고 주님 주신 평화를 잃지 않는 그러한 도살당한 어린양의 모습으로 세상을 굴복시키는 삶입니다.
이미 창세기에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렇게 양면성이 있다는 것을 미리 예언합니다. 우리가 조금 전 에 읽었던 유다에 관한 야곱의 유언 마지막 부분을 보면 그 사자가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 옷을 포도주에 빤다고 나옵니다.
(창세49:11-12) 11 포도나무에 나귀를 예사로 매어 놓고 고급 포도나무에 새끼 나귀를 예사로 매어 두리라. 포도주로 옷을 빨고 포도의 붉은 즙으로 겉옷까지 빨리라. 12 눈은 포도주로 상기되고 이는 우유로 희어지리라.
나귀에 대한 내용은 즈가랴서 9장에 나오지요?
(즈가9:9) 9 수도 시온아, 한껏 기뻐하여라. 수도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보아라, 네 임금이 너를 찾아 오신다. 정의를 세워 너를 찾아 오신다. 그는 겸비하여 나귀, 어린 새끼 나귀 를 타고 오시어
메시야는 겸손하여 왕이심에도 불구하고 나귀를 타고 오시는 모습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의 왕이 왕으로 등극을 할 때는 항상 나귀를 타고 등장을 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왕은 섬기는 왕이라는 하나의 예표였습니다. 솔로몬도 나귀를 타고 왕위에 등극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 모두가 겸손한, 섬기는 왕으로서는 모두 실패를 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진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귀를 탄 왕의 삶을 살다 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자가 그의 옷을 포도주에 빤다는 구절이 이어집니다. 그 구절은 이사야서 63장에서 메시아이신 사자 예수 그리스도가 진노의 포도즙 틀을 밟았는데 그 피가 전부 그 메시야의 옷에 튀어 버렸습니다. 그 말은 그 진노의 심판을 자기가 다 뒤집어 써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의 삶은 오히려 (자기를 죽여 남을 살리는 십자가의 삶, 십자가의 길)로 살아가는 삶, 사자이지만 어린양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삶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삶이 바로 승리의 삶인 것입니다. 그 어린양이 일곱 뿔을 가지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뿔은 항상 힘과 승리를 상징했습니다.
(신명33:17) 17 그의 위엄은 처음 난 수송아지요 그의 두 뿔을 들소 뿔이라. 만방을 들이 받아 단숨에 땅 끝까지 휩쓴다. 수없는 에브라임의 자손이 한 쪽에 솟았고 수많은 므나쎄의 후손이 또 한 쪽에 솟았구나.'
(시편18:2) 2 야훼는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를 구원하시는 이, 나의 하느님, 내가 숨을 바위, 나의 방패, 승리를 안겨 주는 뿔, 나의 산채, 나의 피난처, 포악한 자들의 손에서 이 몸 건져 주셨으니
그런데 뿔이 일곱입니다. 일곱은 완전 수. 그럼 일곱 뿔이라는 것은 ‘신적인 힘, 전능, 완전한 승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힘을 가지신 분이 이 세상에서 그 힘을 발휘하셨는데 그 모습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도살당한 어린양의 모습으로 보였습니다. 그게 힘입니다. 그리고 그게 완전한 승리입니다.
여러분, 부디 그 힘을 키우세요. 능히 나를 죽여 남을 살리는 십자가의 道로 세상을 살 수 있는 그 힘을 키우십시오. 세상 사람들은 여러분을 도살당한 어린양 취급을 하며 조롱할지도 몰라요. 그러나 그들의 조롱하는 입이 지옥의 숯덩이로 이글거리며 불 탈 날이 곧 옵니다.
(히브12:16) 16 또 음란한 자나 음식 한 그릇에 장자의 권리를 팔아 먹은 에사오 같은 불경스러운 자가 나오지 않도록 하시오.
(히브10:32-34) 32 여러분은 처음에 빛을 받고 나서 많은 고난의 도전을 받으면서도 견디어 내던 시절을 생각해 보십시오. 33 여러분 주에는 모욕과 환난을 당하여 구경거리가 된 사람들도 있고 그런 형편에 빠진 사람들의 친구가 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34 여러분은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동정했고 또 자기 재산을 다 빼앗기는 일이 있어도 그보다 더 좋고 더 영구한 재산을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 일을 기쁘게 당했습니다.
(히브11:35-38) 35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돌아 오는 식구들을 만난 여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더 나은 생명을 누리려고 석방도 거부하고 고문을 달게 받았습니다. 36 또 어떤 이들은 조롱을 받고 채찍으로 얻어 맞고 심지어는 결박을 당하여 감옥에 갇히기까지 하였습니다. 37 또 돌에 맞아 죽고 톱질을 당하고 칼에 맞아 죽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몸에 두르고 돌아 다녔으며 가난과 고난과 학대를 겪기도 했습니다. 38 이런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이 살 만한 곳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광야와 산과 동굴과 땅굴로 헤매며 다녔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리지만 그리스도교는 高地를 점령해서 보란 듯이 하느님 나라를 전파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십자가의 道로 전하는 자의 피를 타고 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傳道)라고 하는 것입니다. 전할 傳, 길 道 그 道가 바로 십자가의 길입니다.
여러분, 팥죽 한 그릇 같은 다른 것에 목숨 걸지 말고 하느님 나라의 완성과 나의 거룩을 위해 눈물을 뿌리며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낙심이 되고 좌절할 때마다 그 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그 책을 열고 완전한 승리를 이루어 놓으셨다는 것을 꼭 기억하세요.
우리의 그 향기 나고 거룩한 기도는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힘을 내십시오. 그리고 도살당한 여린 양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사자의 삶, 한번 잘 살아내 보자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