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번역성서
(24) 살아있는 믿음과 죽은 믿음 (묵시3,1-3)
살아있는 신앙을 하기 위해서는 바른 복음을 듣고 늘 그것을 기억하고(므네모뉴오) 지키고(테레오)회개하여(메타노에오) 항상 깨 어 있어야 한다는(그레고 류오) 것을 배웠습니다. 사람들이 평소에는 예수 잘 믿는 것 같다가 죽음이 닥쳤을 때 ‘하 루 만 더 살려주세요, 더 좋은 약 없어요?’ 이렇게 애걸복걸 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게 정말 부활을 믿고 영생을 믿고 영원한 천국을 믿는 사람들의 모습입니까?
(묵시3,1-3)
1 사르디스 교회의 천사에게 이 글을 써서 보내어라. 하느님의 일곱 영신과 일곱 별을 가지신 분이 말씀하신다. '나는 네가 한 일을 잘 알고 있다. 네가 살아 있다는 말이 있지만 실상 너는 죽었다. 2 그러므로 깨어나거라. 너에게 아직 남아 있는 것이 완전히 숨지기 전에 힘을 북돋아 주어라. 나는 네가 하는 일이 내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완전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3 그러므로 네가 그 가르침을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를 되새겨 그것을 굳게 지켜라. 그리고 네 잘못을 뉘우쳐라. 만일 네가 깨어 있지 않으면 내가 도둑처럼 너에게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너는 내가 어느 때에 너에게 나타날지를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지난번에 예수님께서 사르디스 교회에게 너희는 살았다하는 이름만 가졌지 실상은 죽은 자라고 책망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신앙을 하기 위해서는 바른 복음을 듣고 늘 그것을 기억하고(므네모뉴오) 지키고(테레오)회개하여(메타노에오)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는(그레고 류오) 것을 배웠습니다.
묵시록의 일곱 편지는 교회시대를 살아가는 교회들에게 사탄이 교회를 어떻게 미혹하고 시험할 것인지에 대한 친절한 안내문이며 견책의 편지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사르디스교회에게 ‘살아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죽은 자’라고 경고를 하신 것은 오늘날에도 그러한 교회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오늘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사르디스교회에게 예수님께서 경고하신 죽어있는 믿음이라는 것을 어떻게 define하고 있어야 하는 지에 대해서 조금 더 보충 설명을 하겠습니다.
우리가 ‘나는 산 자’라고 철썩 같이 믿고 갔는데 나중에 주님 앞에 갔는데 ‘넌 죽은 자야’ 이런 소리 들으면 안 되니까요? 난 산 자인가? 죽은 자인가? 꼭 확인해 보세요.
니체가 1902년에 19세기 이전까지 철학의 주류를 이루던 이성적 철학과 형이상학, 종교를 다 뒤집어 버리는 새로운 니체의 실존주의 철학을 모색하면서 저술한 유명한 책이 바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입니다. 짜라투스트라라는 사람을 통해 니체의 사상과 그의 철학을 표출해 놓은 책입니다.
그 책에 보면 짜라투스트라라는 한 노인이 동굴에서 뱀, 독수리 등과 생활하면서 삶을 깨우칩니다. 그는 그의 깨달음을 세상에 전파해야겠다고 결심을 하고 동부의 시골을 돌아다니면서 주로 (얼룩 소)라는 도시에서 ‘신은 죽었다’라고 계속 외치고 다닙니다. 그 때 사람들이 ‘당신 말대로 신이 죽었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가?’라고 묻습니다.
그러니까 짜라투스트라가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신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초극(超克)이다. 그러니까 너 희들은 외부로부터의 다른 아무런 간섭도 받지 말고 너의 내면의 의지로 하여금 말하게 하라, 그것이 가치이고 그 것이 진리이다’라 고 말합니다.
우리 인간들이 찾고 있는 ‘의미, 가치’ 그런 것은 실상은 우리 내면의 자유로운 의지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신의 존재를 부인하고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살 때 참 자유를 얻는 다는 것입니다. 즉, ‘신은 인간의 삶에 필요 없다’는 것이지요.
그 책은 나오자마자 하느님을 의도적으로 배격하고, 싫어하는 인간들의 죄성과 딱 맞아 떨어져서 선풍적인 반향을 가져왔고 세상을 움직인 위대한 책의 반열에 턱하니 올려졌습니다. 얼마나 그 책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같은 제목으로 조곡을 작곡했을 정도입니다. 그 책은 오늘날도 여전히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탈리아의 프로그레시브 록 그룹인 ‘뮤제오 로젠바’가 같은 이름의 록 음악을 히트시키기도 했지요?
왜 그렇게 인간들이 신의 죽음에 박수를 보냅니까? 타락한 인간은 신의 존재가 부담스럽습니다. 신이 시키는 대로 살기가 싫습니다. 그런데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 신을 인식할 수 있는 ‘신 인식’이 있어서 자꾸 두려움이 일어나는데 누군가 일어나서 ‘신은 죽은 것’라고 크게 외쳐 주니까 너무 신이 나는 것입니다.
19세기 20세기에 니체를 비롯한 수많은 철학자와 지식인들, 다수의 신학자들까지도 ‘death of God’ 이라는 하나의 학파를 이루며 신의 죽음을 외쳤습니다. 인간은 아주 우수한 존재이며, 점점 더 발전하고 있고, 신은 그러한 인간에게 아무런 필요가 없는 존재라는 진화론 적인 사상이 인류의 정신을 지배했던 것이지요.
그러다가 세계 1,2차 대전이 발발하고 인간의 지식과 문명이 인간을 이롭게 하기도 하지만 인간을 파괴하기도 한다는 것을 깨닫고 많은 사람들이 다시 하느님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산업사회를 거쳐 지식 정보사회로 치달으면서 다시 사람들은 윤택하고 풍요한 삶을 얻게 되었고 또 전처럼 신의 존재를 귀찮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이렇게 풍요 속에서는 늘 神을 버려왔습니다. 이것은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계속해서 인간을 사로잡았던 마귀의 속임수입니다.
인간은 조금만 살기 편해지고 조금만 자신들을 부추겨 주면 금방 자신이 신이 되어버리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이내 신의 보좌에 앉아 자기를 중심으로 우주를 운행하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인 것입니다. 그것이 죄인들의 공통적인 속성인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렇다 치고 하느님의 자녀라는 사람들 안에도 그러한 death of God사상이 많이 침투해 있는 것을 아십니 까? 예수를 믿는 다고 하는 사람들이 신의 존재를 그냥 교리 속에 갇혀있는 화석 같은 존재로 여기고 있거나, 신은 멀리 있다가 자기가 필요하면 가끔씩 나타나서 자기의 필요나 채워주고 가는 하인 정도로 여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살아있는 하느님을 거의 인식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것이 바로 현대인들이 누리고 있는 풍요의 결과인 것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이 누리고 있는 풍요는 하느님 없이도 얼마든지 인간을 행복하고 안전하게 느끼게 해 줍니다. 하느님도 이스라엘에게 그 점을 미리 경고하셨습니다.
(신명8:11-140) 11 아무쪼록 너희 하느님 야훼를 잊어 버리지 않도록 하여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의 계명과 법령과 규정을 어기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12 배불리 먹으며 좋은 집을 짓고 살게 되고, 13 소떼 양떼가 불어나고 은과 금이 많아져서 너희 재산이 늘어나더라도, 14 행여나 교만한 생각으로 너희 하느님 야훼를 잊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께서 너를 에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내 주시지 않았느냐?
이렇게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힘, 가치’ 그런 것들은 ‘오늘 예수께서 다시 오실 지도 모른다.’는 각오로 살아가는 종말적 신앙이라든지 우리는 저 하늘에서 다시 영광스러운 부활체로 부활하여 영원을 살 것이라는 부활신앙 즉, 살아있는 신앙을 오히려 방해한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배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신자들의 삶을 완벽하게 행복하게 놔두시지 않으십니다. 돈이 많은 사람은 건강이나 자식의 문제로 , 너무 건강한 사람은 경제적인 문제로 너무 머리가 똑똑한 사람은 훈련교관을 보내셔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느님을 잊지 않도록 도우십니다. 안 그러면 인간은 금방 하느님을 잊어버리거든요.
교회사를 보아도 교회시대 전체를 통하여 그러한 죽은 신앙의 흔적들을 우리는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그 때마다 하느님 백성들의 정신이 번쩍 들만한 일들을 허락하셨고 하느님의 종들을 통해 영적 대 각성 운동을 일으키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두가이파, 엣센니파로 대표되는 유대인들입니다. 하느님은 성경을 통해서 교회가 목숨 걸고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어떻게 잘 못 갈 수 있는가를 그들을 통해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중에 사두가이파 사람들의 신앙을 짚어보면서 우리는 어떻게 그들처럼 죽은 믿음을 갖지 않을 수 있는가를 확실하게 공부하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마르12:18-27) 18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물었다. 19 '선생님, 모세가 우리에게 정해 준 법에는 '형이 자녀가 없이' 아내를 두고 '죽으면 그 동생이 자기 형수와 결혼하여 자식을 낳아 형의 대를 이어야 한다' 고 하였습니다. 20 그런데 전에 칠 형제가 있었습니다. 첫째가 아내를 얻었다가 자식 없이 죽어서 21 둘째가 형수를 자기 아내로 맞았지만 그도 또한 자식 없이 죽고 마침내 그 여자도 주었습니다. 22 이렇게 하여 그 일곱 형제가 다 자식 없이 죽고 마침내 그 여자도 죽었습니다. 23 칠 형제가 다 그 여자를 아내로 삼았으니 부활 때에 그들이 다시 살아나면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24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성서도 모르고 하느님의 권능도 모르니 그런 잘못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25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다음에는 장가드는 일도 없고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처럼 된다. 26 너희는 모세의 책에 있는 가시덤불 대목에서 죽은 이들의 부활에 관한 글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거기서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요, 이사악의 하느님이요, 야곱의 하느님이다' 라고 하셨다. 27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이들의 하느님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너희의 생각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유대인들의 특권층 이었습니다. 그들은 제사장계급이었고 당시 삼권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대 제사장을 언제든지 갈아치울 수 있는 사람들이었고 항상 그 들 중에서 대 제사장이 선출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스모니안 왕조의 후예들이었기 때문에 상당한 부와 명예를 누리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던 제사장 계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모세 오경만 인정하고 믿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모세 오경만이 유일하게 권위가 있는 성경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 오경에 나오지 않는 천사나, 내세(천국과 지옥), 부활 같은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영원한 생명과 부활을 믿지 않는 현실주의자들이요, 실존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헬레니즘 문화를 적극 수용하는데 앞장섰던 사람들이었고 로마의 정책을 지지하고 그들에게 정치자금을 갖다 바치고 온갖 특혜를 다 누렸던 자들입니다. 그 말은 그들은 하느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세상과 적당히 타협을 하고 그 세상이 주는 풍요를 누리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굳이 부활과 내세를 믿지 않았던 것은, 그들은 세상에서 누리고 살 것이 너무 많았고 그 것들이 자신들을 행복하게 해 주었으며 그들은 거기에 만족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사두가이 人들은 메시야고, 다윗 왕국이고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지금이 좋은데 왜 그런 걸 바라겠습니까? 어떻게 해서든 현재 누리는 것들을 오래 오래 잘 지키는 것이 그들의 삶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리새인들과 항상 논쟁을 벌였습니다.
바리사이인들은 어서 빨리 메시야가 와서 로마를 몰아내고 그 위대하고 화려한 다윗 왕국을 재건해 주기를 오매불망 기다리던 메시야 대망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었는데 사두가이 인들은 그 로마에 빌붙어 자기들만 잘 먹고 잘 살고 있으니 얼마나 꼴 보기 싫었겠습니까? 게다가 사두가이 인들이 부활의 문제를 가지고 매번 조롱하듯이 물어보는게 바로 조금 전에 읽었던 일곱 형제와 아내 이야기였습니다.
‘일 곱 형제가 있는데 첫째 형이 후사가 없이 죽었다. 그래서 둘째가 그 형수를 취했는데 그 둘째도 후사가 없이 죽었다. 그렇게 모두 죽고 일곱째까지 죽었다. 그러면 그 여자는 부활해서 누구의 아내가 되는 것인가?’ 바로 그 이야기를 가지고 사두가이 인들이 이번에는 예수님을 조롱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부활이 무엇인지 정말 궁금하고, 설명을 해서 납득이 가면 믿어보겠다는 그런 의도에서가 아니라 철저하게 예수님을 조롱하고 비웃기 위해 작당을 한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그렇게 철저하게 신봉했던 신명기의 율법을 들어 질문을 한 것입니다.
(신명25:5-6) 5 여러 형제가 함께 살다가 그 중의 하나가 아들 없이 죽었을 경우에 그 남은 과부는 일가 아닌 남과 결혼하지 못한다. 시동생이 그를 아내로 맞아 같이 살아서 시동생으로서의 의무를 감당해야 한다. 6 그래서 난 첫아들은 죽은 형의 이름을 이어 받아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 가운데서 사라지지 않게 해야 한다.
바로 이 구절을 근거로 예수님께 당돌한 질문을 한 것입니다. 형이 후사가 없이 죽으면 동생이 그 형수를 취해서 아이를 낳아주는 제도입니다. ‘형사취수제도’지요(levirate marriage)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兄死取嫂제도를 허락하신 것은 이스라엘의 각 지파의 후사가 끊어지지 않게 하시기 위해 이 형사취수 제도를 주신 것입니다. 왜요? 그 후사로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창세38:6-10) 6 유다는 맏아들 에르에게 아내를 얻어 주었는데 그의 이름은 다말이었다. 7 유다의 맏아들 에르는 야훼의 눈 밖에 나서 죽었다. 8 유다는 오난에게 이르기를 형수에게 장가들어 시동생으로서 할 일을 하여 형의 후손을 남기라고 하였다. 9 그러나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고 오난은 형수와 한 자리에 들었을 때 정액을 바닥에 흘려 형에게 후손을 남겨 주지 않으려 하였다. 10 그가 한 이런 짓은 야훼의 눈에 거슬리는 일이었으므로 야훼께서는 그도 죽이셨다.
유다의 후손으로 주님이 오셔야 합니다. 그런데 유다의 장남 ‘에르’가 죽습니다. 그래서 유다가 둘째 오난에게 후사를 이으라고 합니 다. 그런데 둘째 오난이 어차피 자기 아들이 못 될 것을 알고 땅에다 설정을 하자 죽여 버리십니다. 게다가 유다가 자기 며느리에게 셋째를 주지 않으니까 하느님은 며느리 다말을 시아버지 유다에게 보내셔서 어떻게 해서든 후사를 이어가십니다. 유다의 후손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기 위한 하느님의 집념은 이렇게 대단하십니다. 그 집념이 바로 이런 그림을 만들어 내신 것입니다.
(룻기4:9-10) 9 그러자 보아즈는 장로들과 온 겨레에게 말했다. '나는 엘레멜렉과 길룐과 마흘론에게 딸렸던 모든 것을 나오미의 손에서 샀습니다. 당신들은 오늘 이 일의 증인입니다. 10 또 나는 마흘론의 아내 모압 여자 룻까지도 유산과 함께 아내로 얻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고인의 이름을 이어 그 유산을 차지할 사람을 낳아 주어서 고인의 이름이 그의 형제들과 함께 남아 이 고장 성문 안에서 끊어지지 않도록 할 것입니다. 당신들은 오늘 이 일의 증인입니다.'
룻의 남편인 마흘론이 죽고 그 형제 길룐까지 죽었습니다. 이렇게 형제가 모두 죽으면 가까운 친족이 그 유업을 무를 수 있었습니다. 그 때 보아즈가 유업을 무릅니다. 그 보아즈는 예리고의 妓生 다말과 살몬의 아들이었고 그 보아즈와 룻의 아들이 다윗의 할아버지인 오벳이고 그 아들이 이새입니다.
이 신명기 25장의 형사취수 제도는 이스라엘의 후사를 끊어지지 않게 해서 다윗과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준비하는 하느님의 세심한 배려였던 것입니다. 성경의 모든 내용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로 수렴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두가이 인들은 그것을 통해 단지 이 땅의 유업을 이어 받는 데에만 관심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이 성경도 알지 못하는 자들아’하고 책망하십니다.
(마르12:24) 24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성서도 모르고 하느님의 권능도 모르니 그런 잘못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이 왜 성경을 모릅니까? 그들은 제사장들이요, 성경 선생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에 대해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질문도 성경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더러 너희는 성경도 하느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자들이다. 즉, ‘죽은 믿음을 가진 자들이다’라고 질책을 하십니다. 성경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기록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두가이 인들은 그 성경이 가리키고 있는 예수님을 눈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사두가이 인들은 이 땅에서 자기들이 이어가야 할 기업, 자기들의 소유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목표지점, 종점은 바로 이 땅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자들은 성경을 바로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을 가리켜 이 ‘성경도 하느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자들아’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경도 하느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죽은 믿음을 가진 자들의 특징이 겉모양이 요란스럽다는 것입니다. 내용이 부실한 사람들은 늘 외양이 요란하기 마련입니다. 여러분, 사두가이 인들이 얼마나 종교행위에 극성이었느냐 하면 그 찬란한 헤로데 성전 ,마르코복음에서 제자들이 주님께 ‘주님 저 성전을 좀 보세요, 얼마나 크고 웅장합니까?’했던 그 성전을 사두가이 인들이 일궈낸 작품입니다.
그들은 현세의 복을 위해서 열심히 종교행위를 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것을 성경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참 신앙, 살아있는 신앙은 ‘얼마나 종교 행위를 열심히 하느냐? 얼마나 오래 믿었느냐?’ 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현실에만 눈을 두고 있는 죽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르12:26) 26 너희는 모세의 책에 있는 가시덤불 대목에서 죽은 이들의 부활에 관한 글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거기서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요, 이사악의 하느님이요, 야곱의 하느님이다' 라고 하셨다. 27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이들의 하느님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너희의 생각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이 구절을 어디에서 인용하신 것이지요? ‘모세의 책에 떨기나무 이야기가 나오는 대목’이라고 하셨는데 거기가 어디지요?
(출애3:4-6) 4 그것을 보러 오는 것을 야훼께서 보시고 떨기 가운데서 '모세야, 모세야' 하고 하느님께서 부르셨다. 그가 대답하였다. '예, 말씀하십시오.' 5 하느님께서는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아라. 네가 서 있는 것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하시고는 6 다시 말씀하셨다. '나는 네 선조들의 하느님이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모세는 하느님 뵙기가 무서워 얼굴을 가렸다.
하느님께서 80이 된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시제를 보면 현재형입니다.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은 이미 모세가 나기 4-500년 전에 죽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나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이었다.’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나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이다.‘라고 자신을 소개하시는 것입니다.
그 말씀은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이 살아있을 때부터 지켜주시던 그 하느님께서 지금도 살아있는 그들의 하느님으로 그들을 지키고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이 구절을 인용하셔서 부활을 믿지 않고 영원한 생명과 천국을 믿지 않았던 사두가이인들에게 ’너희들은 하느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삶을 준비하는 자들이 아니라 이 땅의 것들을 누리기 위해 하느님을 이용하는 자들이기에 성경을 그렇게 오해하는 것이다, 천국은 존재하며 이미 이 땅에서 죽은 많은 하느님의 백성들이 이미 천국에서 하느님과 함께 살고 있다, 너희들 그래도 이 땅을 목적지로 삼고 살겠느냐?’ 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두가이 인들에게는 경천동지할 말씀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이 지금 살아있고 하느님은 바로 그 살아있는 자들의 하느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찔렸겠습니까?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정말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자신들이 이 땅을 살아갈 때 친밀하게 그들을 이끄시던 산 자의 하느님과 함께 지금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을 살고 있음을 믿으십니까? 정말 우리는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으로 하느님과 함께 우리가 감히 상상 할 수도 없는 찬란한 영광 속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을 믿으십니까?
그 하느님이 지금 살아 계셔서 여러분의 삶에 역사하고 계시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그 것을 믿으시는 분들이 ‘death of God’‘죽은 하느님’이 아닌 살아 계신 하느님을 믿는, 살아있는 믿음 을 가진 자들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사두가이 인들처럼 이 땅에서의 부귀영화와 명예와 벼슬에 안달 내지 않습니다. 살아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이 땅은 하느님께서 다음 세상을 준비하라고 허락하신 곳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이 땅을 나그네처럼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히브11:13) 13 그들은 모두 믿음을로 살다가 죽었습니다. 약속받은 것을 얻지는 못했으나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고 기뻐했으며 이 지상에서는 자기들이 타향사람이며 나그네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 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믿음으로 살다가 죽었습니다. 약속받은 것을 얻지는 못했으나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고 기뻐했으며 이 지상에서는 자기들이 타향사람이며 나그네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지금 천국에서 산자의 하느님과 함께 살아있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우리 믿음의 선조들을 열거한 후에 그들은 모두 이 땅을 나그네요 외국인으로, 타향사람으로 살다가 갔다고 진술합니다.
여러분이 정말 현세만을 바라보는, 죽어있는 믿음을 가진 분이 아니라면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을 항상 인식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가끔씩 여러분에게 천국의 흉내를 내며 다가오는 세상의 가치들에게 현혹되어 살아 계신 하느님과 영원한 나라를 잊으면 안 됩니다.
여러분, 살아 계신 성령께서 지금 이 순간 시퍼렇게 두 눈을 뜨시고 여러분을 지켜보고 계시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우리는 ‘죽어있는, 이미 오래 전에 박재가 되어버린’ 하느님을 믿고 있는 것 아닙니다. 우리는 벌써 ‘산 자의 하느님이신, 살아 계신 하느님’ 과 함께 동행 하고 있는 자들인 것입니다. 정신을 차리세요.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하고 조금씩이라도 매일 매일 자라 가야 합니다.
우리는 빵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사는 자들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서 운동력이 있어서 날선 칼처럼 우리를 해부하십니다. 그 말씀 앞에 서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적나라하게 바라보게 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매일 매일 회개가 나오지 않겠습니까?
(히브4:12-13) 12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 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영혼과 정신을 갈라놓고 관절과 골수를 쪼개어 그 마음 속에 품은 생각과 속셈을 드러냅니다. 13 피조물치고 하느님 앞에 드러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하느님의 눈앞에는 모든 것이 다 벌거숭이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언젠가는 우리도 그분 앞에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살아있는 자는 자신을 돌아보아 회개하게 되고 회개하는 자들은 자라게 되어있습니다. 죽은 자는 자라지 않습니다. 죄인들은 자라지 않으려는 속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라면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미성년자가 범죄를 저지르면 훈방을 합니다. 책임을 질 수 없는 나이이기 때문입니다. 죄인들은 자신의 인생에 책임을 지고 싶지 않아서 자라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변해서 책임을 감수하기보다는 다른 이들과 상황이 변해 주기를 원합니다. 아닙니다. 살아있는 자들은 자기가 자라야 합니다. 다른 이들과 상황이 변하지 않아도 그 것들을 이겨 낼 수 있는 성숙과 성장이 있어야 합니다. 그들이 살아있는 자들입니다. 자라지 않는 것 은 죽은 믿음입니다. 그리고 살아있는 믿음은 반드시 행함이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야고2:21-26) 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 이사악을 제단에 바친 행동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된 것이 아닙니까? 22 당신도 알다시피 그의 믿음은 행동과 일치했고 그 행동으로 말미암아 그의 믿음은 완전하게 된 것 입니다. 23 이렇게 해서 '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믿었고 하느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해 주셨다 ' 라는 성서 말씀이 이루어졌으며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친구라고 불리었던 것입니다.' 24 그러므로 여러분은 사람이 믿음만으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을 알아 두십시오. 25 이와 같이 창녀 라합도 유다인이 보낸 사람들을 친절히 맞아 들였다가 다른 길로 떠나 보낸 행동으로 말미암아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은 것이 아닙니까? 26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과 마찬가지로 *행동이 없는 믿음도 죽은 믿음입니다.
죽은 믿음은 어떤 믿음이라고요? 행함이 없는 믿음입니다. 하느님께서 살아 계셔서 나를 지켜보고 계시고 나의 영광스러운 부활을 위해 노심초사 수고하고 계시다는 것을 아는 자들이 어찌 행함에 게으르겠습니까? 행하다가 실패하고 실수하셔도 괜찮습니다. 내 안에 하느님의 뜻을 기쁘게 자원하여 행하려 하는 마음이 있는가 확인하세요. 그리고 살아있는 믿음을 소유한 자들은 영생과 부활을 믿고 사모해야 합니다.
(고전15:16-19) 16 만일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다시 살아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17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시지 않았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되고 여러분은 아직도 죄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18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다가 세상을 떠난 사람들도 멸망했을 것입니다. 19 만일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이 세상에만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누구보다도 가장 가련한 사람일 것입니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우리처럼 불쌍한 사람들이 어디 있습니까? 이 무슨 시간 낭비며 돈 낭비며 체력의 낭비입니까? 만일 나중에 가 봤더니 부활이 없다면 그 자리에서 저를 돌로 찍으세요. 그렇게 해서라도 여러분의 화를 풀어 드릴게요. ‘네 말 듣고 왔더니 이게 뭐냐?’하고 분풀이를 하십시오. 하지만 그런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부활이 있기에 이렇게 참고 인내하며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살아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은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두려움은 결국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수렴되는 것입니다.
(히브2:15) 15 한평생 죽음의 공포에 싸여 살던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모든 인간들은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죽음 권세에서 벗어난 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죽음은 종말도 끝도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영생으로 가기 위해 거쳐야 할 중요한 관문일 뿐입니다. 우리에게 죽음은 더 이상 저주가 아닙니다.
(필립1:21) 21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그리고 죽는 것도 나에게는 이득이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셨음을 입으로 삶으로 선포해야 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사람들이 평소에는 예수 잘 믿는 것 같다가 죽음이 닥쳤을 때 ‘하루 만 더 살려주세요, 더 좋은 약 없어요?’ 이렇게 애걸복걸 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게 정말 부활을 믿고 영생을 믿고 영원한 천국을 믿는 사람들의 모습입니까? 아닙니다. 살아있는 믿음을 가진 살아있는 자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죽음을 이기신 우리 주님을 가장 확실하게 전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죽을 때 희망을 품고 있는 자답게 죽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의 삶에 코페르티쿠스적 변혁이 일어나야 합니다. 코페르니쿠스가 오기 전까지는 지구가 중심이고 태양과 별들이 지구 주위를 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가 ‘태양이 중심이고 지구가 그 주위를 돈다.’라고 발표를 했습니다. 세계는 혼란에 휩싸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었듯이 이제 우리가 이 역사의 주인공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인이시고 우리는 그 분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자들임을 확실하게 자각하셔야 합니다. 그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처소를 만드셨고 우리는 그 곳에서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을 입고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살아 계십니다. 하느님은 산 자의 하느님이십니다. 수많은 우리 신앙의 선배들의 시퍼렇게 살아서 우리의 신앙의 경주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깨어 나십시오. 정신을 차리세요. 그리고 힘을 내십시오. 조금만 더 가면 됩니다. 조금만 더 가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