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번역성서
(45) 약할 때 강함 되시네(I) (묵시11:7-13)
(묵시11:7-13)
7 그러나 그들이 증언을 끝내면 끝없이 깊은 구렁(아비소스)으로부터 그 짐승이 올라 와서 그들과 싸워 이기고 그들을 죽일 것입니다. 8 그리고 그들의 시체는 그 큰 도성의 한길에 버려질 것입니다. 그 도성은 그들의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던 곳이며 상징적으로는 소돔이라고도 하고 에집트라고도 합니다. 9 여러 백성과 종족과 언어와 민족에 속한 사람들이 사흘 반 동안 그들의 시체를 구경할 것이며 그 시체가 무덤에 안장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10 그리고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이 그들의 죽음을 보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서로 선물을 교환할 것입니다. 이 두 예언자는 땅 위에 사는 사람들에게 괴로운 존재였던 것입니다. 11 사흘 반이 지났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생기를 불어 넣어 주셔서 그들은 제 발로 일어섰습니다. 그것을 목격한 사람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12 그리고 그 두 예언자는 자기들을 향해서 '이리로 올라 오너라' 하고 외치는 소리가 하늘에서 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러자 그 예언자들은 원수들이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 갔습니다. 13 바로 그 때 큰 지진이 일어나서 그 도시의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그 지진 때문에 사람이 칠천 명이나 죽었습니다. 살아 남은 사람들은 두려움에 싸여 하늘에 계신 하느님을 찬양했습니다.
어떠한 책을 읽을 때 미리 구조를 알고 그 구조를 염두에 두고 책을 읽으면 훨씬 더 이해가 빠르고 쉽기 때문에 많을 시간을 내서 나름대로 열심히 분석을 해서 여러분께 알려 드렸습니다. 요한묵시록은 점진적이며 점층적이며 반복적인 기법으로 기록이 된 책입니다. 그래서 저도 그러한 관점에서 구조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한절 한절 풀어가다 보니까 조금씩 마음에 걸리는 부분들이 나오더라고요.
예를 들어서 우리가 일곱 재앙을 공부하고 있는데 저는 그 일곱 재앙, 인의 재앙, 나팔 재앙, 대접 재앙이 같은 재앙을 반복적이며 점층적으로 기록한 것이라고 보았고 많은 성경학자들도 그렇게 정리를 하고 있는 것을 여러 참고 서적들을 보며 확인을 했습니다.
그런데 한절 한절 풀어 가다 보니까 그 내용이 같지 않아요. 분명 인의 재앙은 자연재해에 관한 것이 주를 이루고 나팔 재앙은 영적이며 정신적인 재앙의 내용이 주를 이룹니다. 그리고 우리가 나중에 공부하겠지만 대접 재앙도 그 내용이 다릅니다.
그리고 17장에서 음녀의 심판이 나오고 18장에서는 바빌론의 심판이 나옵니다. 그리고 19장에서는 거짓 예언자의 심판이 나옵니다. 저는 이 심판도 같은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 기라성 같은 신약 신학의 대가들도 전부 그렇게 봅니다. 그런데 잘 보면 17장의 음녀는 다른 신을 섬기게 하는 세력, 즉 혼합주의에 대한 심판입니다. 그리고 18장의 바빌론은 경제적 정치적 힘을 추구하게 만드는 악한 세력에 관한 심판입니다. 그리고 19장의 거짓 예언자는 신비주의, 기적 등을 가지고 성도들을 미혹하는 세력입니다.
보다시피 다 다른 내용입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세대주의를 지향하는 사람들이 이 부분을 걸고 넘어왔을 때 어떻게 설명해 줄 수 있을까 참 고민을 많이 했어요.
‘디즈니랜드의 입체 영 화관을 생각하라’ 여러분 가보셨어요? 그 극장은 돔형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그 천정 전체가 모두 스크린입니다. 그래서 한 눈에 다 볼 수가 없어요. 동쪽 화면에서는 농부가 씨를 뿌립니다. 서쪽 화면에서는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놉니다. 남쪽 화면에서는 아낙네들이 빨래를 합니다. 북쪽 화면에서는 동네 어르신들이 담소를 나누고 있습니다. 이 전체는 일시에 일어나는 사건들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인간의 시야가 그리 넓지 못하기 때문에 따로 따로 봐야 다 볼 수 있습니다.
요한은 지금 교회시대라는 한정된 시간동안에 동시에 일어나는 일들을 따로 따로 환상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한묵시록에서 제일 많이 나오는 말이 ‘또 내가 보니’인 것입니다. 요한은 동쪽 화면에 그려진 환상을 보고 그 환상을 기록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일어나는 서쪽 화면의 환상을 그 다음에 봅니다. 그 환상을 다 본 다음에 또 동시에 일어나는 남쪽 화면의 환상을 보고, 그 다음에 북쪽 화면의 환상을 보고, 그것들을 ‘또 내가 보니’라는 단어로 연결해서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이 요한묵시록은 시간적인 순서가 아니라 교회시대라는 한정된 시간동안에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들을 각기 다른 관점에서 보고 반복하여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그러니 재앙의 내용도 분명 교회 시대 동안에 한꺼번에 세상에 내리는 것들을 각기 다른 화면으로 보고 각기 다른 관점에서 기록을 해 놓은 것입니다.
한번은 자연재해의 장면을 보고 기록하고 한번은 영적, 정신적 재앙의 화면을 보고 기록하고 이렇게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강도는 종말로 가면서 점점 더 강해진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4분의 1, 3분의 1 이런 숫자를 동원한 것입니다. 이 요한묵시록이 끝날 때까지 그 개념을 놓치면 안 됩니다. ‘입체영화관’ 아셨죠? 요한묵시록에는 ‘또 내가 보니’라는 단어가 스무 번이 넘게 나옵니다. 그 때마다 요한은 다른 화면을 보는 것입니다.
그 관점에서 11장을 보면 훨씬 이해가 쉽겠지요? 요한은 9장까지에서 교회 시대 동안에 내릴 재앙들을 설명하다가 다른 화면에 비친 장면, 즉 그 교회 시대동안 교회는 어떤 식으로 재앙에 노출이 되는 것인지를 보여주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시간에 두 증인에 관해 공부하면서 두 증인은 하느님의 백성들, 즉 교회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두 증인에게는 예언 사역, 복음 증거의 명령이 떨어졌고 그들은 이 땅을 살아가면서 교회 시대 내내 삶으로 입으로 복음을 전해야 하는 자들이라는 것도 확인했습니다.
그들에게는 권세가 주어졌는데 그 권세는 즈룹바벨과 여호수아와 같은 왕 같은 제사장의 권세입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의 전투에서처럼 그들은 반드시 승리하고야 말 것이라는 것도 함께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겉으로 보기에 그들은 이방인들에게 짓밟히는 모습으로 가게 된다는 것이 6절까지의 내용이었습니다. 이제 7절부터는 교회의 삶이 더 구체적으로 기술이 되어 있습니다.
(묵시11:7) 7 그러나 그들이 증언을 끝내면 끝없이 깊은 구렁으로부터 그 짐승이 올라 와서 그들과 싸워 이기고 그들을 죽일 것입니다.
그들이(두 증인) 그 증언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두 증인과 더불어 전쟁을 일으키고 그 두 증인을 죽입니다. 이 구절 역시 문자적으로만 보면 먼 훗날에 일어날 사건으로만 보입니다. 먼 훗날에 교회가 그 증거를 다 마치면 그 때 무저갱에 갇혀있던 짐승이 올라와서 두 증인을 죽이는 것으로 충분히 해석을 할 수 있지요?
여기서 ‘두 증인이 그 증언를 마칠 때에 무저갱에서 올라 온 짐승이 두 증인을 죽인다는 것’은 두 증인, 교회는 그 증인의 삶을 완전히 마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온다.’‘아나바이논’은 명사형 분사입니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시제를 나타내는 단어가 아니고 성격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이라는 구절은 언젠가 마지막 때에 올라오게 될 짐승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묵시록에 처음 등장하는 ‘짐승’이라는 놈이 ‘어떤 놈인가’ 그 신분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짐승이 마귀의 처소인 무저갱에서 올라온다는 것은 악마적인 기원과 성격을 나타내 주는 수식어인 것입니다. 이 구절을 두 증인이 증거를 다 마친 다음에 ‘그 다음에 무저갱으로부터 기어 올라온다’라는 시간적인 순서로만 이해하면 안 됩니다. 물론 이 11장 7절을 20장 7절 이후에 나오는 곡과 마곡의 전쟁과 연결해서 마지막 때에 더욱 잔인하게 기승을 부릴 악마의 세력으로 해석을 하는 것 이 틀리지 않습니다.
사탄은 지금 무저갱에 갇혀있고 그는 종말이 가까울수록 더욱 기승을 부리다가 최후의 종말의 때에는 더욱 더 잔인하게 교회를 핍박할 것입니다. 그것을 그 ‘마귀가 무저갱에서 풀려난다.’라고 표현을 하는 것이죠. 분명 그런 일이 있을 겁니다. 그러면 지금은 안심해도 되나요? 아니죠? 마귀는 지금 무저갱에 결박당해 있다고 하는데 지금 그 마귀가 아무런 활동을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귀는 지금도 우는 사자처럼 하느님의 백성들을 물기 위해 우리의 문 앞에서 늘 대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틈만 나면 뭅니다. 최후의 종말 때 성도들이 마귀에게 당해서 죽임을 당하게 되는 그 고난의 삶을 성도들은 지금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귀가 무저갱에 갇혀있다는 의미가 무슨 의미인가? 여러분이 이 개념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마태12:26-29) 26 그러므로 사탄이 사탄을 쫓아 낸다면 그 나라는 이미 갈라진 것이다. 그래서야 그 나라가 어떻게 유지되겠느냐? 27 또 내가 너희의 말대로 베엘제불의 힘을 빌어 마귀를 쫓아 낸다고 하면 너희네 사람들은 누구의 힘으로 마귀를 쫓아 낸다는 말이냐? 그러니 바로 그 사람들이 너희의 말이 그르다는 것을 지적할 것이다. 28 그러나 나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성령의 힘으로 마귀를 쫓아 내고 있다. 그러니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29 또 누가 힘센 사람의 집에 들어 가서 그 세간을 빼앗아 가려면 먼저 그 힘센 사람을 묶어 놓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래야 그 집을 털어 갈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자 바리새인들이 ‘저가 바알세불의 도움으로 귀신을 쫓아낸다.’고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어떻게 마귀가 마귀를 쫓아 내냐? 내가 귀신에게 사로잡힌 자를 건져내는 것은 그 사로잡고 있는 자를 내가 결박하고 건져내는 것이다’라고 설명을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사탄의 종노릇을 하고 있던 하느님의 택한 백성들이 하느님께 돌아오게 되는 구원의 사건을 예수님께서 ‘내가 사탄을 무저갱에 결박했다’라고 표현하시는 것입니다. 이제는 주님께서 하느님의 백성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마귀의 손에서 건져내실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死亡)을 이기시고 하느님의 백성들을 구해 내는 것을 마귀 는 전혀 방해를 할 수 없게 된 것, 그게 ‘마귀가 무저갱에 결박되어져 있다’라는 구절의 의미입니다. 그렇지만 그 마귀가 예수님께 자기의 세간을 늑탈 당하고 가만히 있을 존재가 아니죠? 자기가 빼앗긴 세간을 멸망의 순간까지 다시 빼앗아 오기 위해 발악을 할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과 마귀가 전쟁을 한다.’라고 표현을 하는 것이고 그 마귀가 성도들을 죽인다는 표현이 7절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들은 최후의 종말 때에 마귀가 최후의 발악을 하게 되는 그 처절한 죽음의 삶을 지금도 맛보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 두 증인이 무저갱에서 올라 온 짐승에게 죽습니다. 여기 짐승이라는 단어 ‘떼리온’ 앞에 ‘토’라는 관사가 붙어 있습니 다. ‘그 짐승’ 이라는 말입니다. 요한묵시록에 처음으로 짐승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데 ‘그 짐승’이라고 관사를 붙여 놓았습니다. 그 말은 당시 이 요한묵시록을 처음 받아 읽었던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 짐승’하면 어떤 짐승을 금방 떠올릴 수 있었다는 얘기죠? 어떤 짐승일까요? 다니엘 서 7장의 짐승입니다.
(다니7:2-7) 2 '다니엘이 말한다. 나는 밤에 이상한 광경을 보았다. 하늘 끝 사방에서 갑자기 바람이 일면서 큰 바다가 출렁거리는데, 3 바다에서 모양이 다른 큰 짐승 네 마리가 올라 왔다. 4 그 첫째 것은 몸이 사자같이 생겼고 독수리 날개를 달고 있었다. 내가 바라보고 있는 사이에 그 짐승의 날개가 뽑혔다. 그러더니 땅에서 몸을 일으켜 사람처럼 발을 딛고 서는 것이었다. 그 짐승은 사람의 마음까지 지니게 되었다. 5 둘째 짐승은 곰같이 생겼는데 몸을 한쪽으로 비스듬히 일으키고 있었다. 그 짐승은 이빨 사이에 갈비 세 개를 물고 있었는데 어디서 '일어나 고기를 실컷 먹어라' 하는 말이 들려 왔다. 6 내가 또 바라보니 이번에는 표범같이 생긴 짐승이 올라 오는데 옆구리에는 새 깃이 네 개 달려 있었고 머리도 넷이었다. 그 짐승은 권력을 받았다. 7 그 날 밤 꿈에 본 네째 짐승은 무시무시하고 끔찍하게 생겼으며 힘도 무척 세었다. 쇠로 된 이빨로 무엇이나 부서뜨려 먹으며 남은 것은 발로 짓밟았다. 먼저 나온 짐승들과는 달리 뿔이 열 개나 돋아 있었다.
네 짐승을 보았는데 그 짐승들이 사자 같고, 곰 같고, 표범 같고, 열 뿔이 있는 무서운 짐승입니다. 다니엘서 자체가 그 짐승이 무엇인지 해석을 해 줍니다.
(다니7:17-26) 17 '이 큰 짐승 네 마리는 세상 나라의 네 임금을 가리키는데 18 마침내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을 섬기는 거룩한 백성이 그 나라를 물려 받아 길이 그 나라를 차지하고 영원토록 이어 나가리라는 뜻이다.' 19 나는 그 중에서도 유별나게 무서운 모양을 하고 쇠 이빨과 놋쇠 발톱으로 바수어 먹으며 남은 것은 모조리 발로 짓밟는 네째 짐승의 정체를 알고 싶었다. 20 머리에는 뿔이 열 개나 돋아 있었고 새로 뿔 하나가 나오자 뿔 셋이 떨어져 나갔는데 그 뿔은 눈도 있고 입도 있어서 건방진 소리를 하고 있었다. 또 그 뿔이 다른 뿔보다 커졌는데, 그것들이 모두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21 내가 보니, 그 뿔은 거룩한 백성을 쳐서 정복하였다. 22 그러나 태고적부터 계시는 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서 오셔서 재판을 하시고 당신을 섬기는 거룩한 백성의 권리를 찾아 주셨다. 거룩한 백성이 나라를 되찾을 때가 되었던 것이다. 23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네째 짐승은 네 번째로 일어날 세상나라인데 그 어느 나라와도 달라, 온 천하를 집어 삼키고 짓밟으며 부술 것이다. 24 뿔 열 개는 그 나라에 일어날 열 임금을 말한다. 이들 임금 다음에 다른 임금 하나가 일어날 터인데 그 임금은 먼저 일어난 임금들과는 달라 그 중 세 임금을 눌러 버릴 것이다. 25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에게 욕을 퍼부으며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을 섬기는 거룩한 백성을 못살게 굴 것이다. 축제일과 법마저 바꿀 셈으로 한 해하고 두 해에다 반 년 동안이나 그들을 한 손에 넣고 휘두를 것이다. 26 그러나 마침내 재판을 받아, 주권을 빼앗기고 송두리째 멸망하여 버릴 것이며,
묵시록 11장과 아주 흡사하지요? 여기서 짐승이 무엇이라고 설명이 되어 있습니까? 바빌론, 메데, 페르시아, 로마 같은 이스라엘의 대적국가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넷째 짐승에 달린 뿔은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짐승이 성도들과 싸워 이긴다고 나오지요?
그 짐승은 이스라엘의 대적 국가들과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교회시대 전체를 통해 하느님의 백성들을 대적하는 세상 권세 잡은 마귀의 세력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 세력이 성도들과 싸워 이깁니다. 성도들은 죽습니다. 그 일은 분명 우리의 신앙의 여정동안에 일어 날 일들입니다. 계속해서 8절을 보면 좀 더 명확해 집니다.
(묵시11:8) 8 그리고 그들의 시체는 그 큰 도성의 한길에 버려질 것입니다. 그 도성은 그들의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던 곳이며 상징적으로는 소돔이라고도 하고 에집트라고도 합니다.
그 두 증인의 시체가 어디에 놓이게 됩니까? 큰 성 길에 놓입니다. 그런데 그 성은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며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 예루살렘이라고도 합니다. 먼저 큰 성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요한묵시록에 큰 성이 여러 번 나옵니다.
(묵시14:8) 8 또 둘째 천사가 뒤따라 와서 '무너졌다! *큰 바빌론 도성이 무너졌다! 자기 음행 때문에 분노의 포도주를 모든 민족에게 마시게 한 바빌론이 무너졌다!' 하고 외쳤습니다.
(묵시16:19) 19 그리고 *큰 도시(성)가 세 조각이 나고 모든 나라의 도시들도 무너졌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큰 도성 바빌론을 잊지 않으시고 그 도성에게 당신의 분노의 잔을 마시게 하셨습니다. 곧 심한 진노의 포도주를 미시게 하신 것입니다.
(묵시18:2) 2 그는 힘찬 소리로 이렇게 외쳤습니다. '무너졌다! *대바빌론이 무너졌다! 바빌론은 악마들의 거처가 되고 더러운 악령들의 소굴이 되었으며 더럽고 미움받는 온갖 새들의 집이 되었다.
아니겠지요? 그럼 그 큰 성 바빌론이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요?
(묵시18:21-24) 21 또 힘센 한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바윗돌을 들어서 바다에 던지며 말했습니다. '그 큰 도성 바빌론이 이렇게 던져질 것이니 다시는 그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을 것이다. 22 거문고 타는 사람들과 노래 부르는 사람들과 피리 부는 사람들과 나팔 부는 사람들의 음악이 다시는 네 안에서 들리지 않을 것이며 그 어떤 기술자들도 네 안에서 보이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맷돌 소리도 네 안에서 들리지 않을 것이다. 23 다시는 네 안에서 등불도 비치지 않을 것이며 신랑과 신부의 음성도 다시는 네 안에서 들리지 않을 것이다. 네 상인들이 땅의 권력자가 되었고 만국 백성이 네 마술에 속아 넘어갔으며 24 예언자들과 성도들의 피가, 그리고 땅에서 죽임을 당한 모든 사람의 피가 바로 그 도시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예언자들과 성도들과 이 땅에서 죽임을 당한 순교자들이 그 큰 성 바빌론 안에서 죽임을 당했다고 합니다. 예언자들과 성도들이 모두 바빌론에서만 죽었나요? 아니죠? 그러니까 그 큰 성 바빌론은 역사적이며 국지적인 어느 한 장소를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그 큰 성 바빌론은 어디를 말하는 것입니까? 바로 하느님을 대적하며 하느님의 백성들을 대적하는 마귀의 손아래 놓여 있는 세상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큰 성은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고 예수님이 못 박히신 곳이다’라고 하는 구절이 그 의미를 더 확실히 해 주죠. 소돔이 어디입니까? 그 패역함과 타락이 극에 달해서 하느님이 불로 멸망시켜 버린 곳이죠. 애굽은 어디입니까? 의로운 하느님의 백성들을 핍박한 곳을 대표적으로 상징하는 나라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못 박히신 곳은 어디죠? 그 곳은 단순히 예루살렘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모여서 하느님을 못 박아 죽이는 악마적 세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두 증인이 죽어서 큰 성 길에 내 버려졌다는 것은 우리 교회가 ‘이 세상’에서 그렇게 죽은 시체처럼 버려질 정도로 고난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계속해서 9절을 보면 세상이 어떻게 그 하느님의 백성들을 멸시하는가가 나옵니다.
(묵시11:9) 9 여러 백성과 종족과 언어와 민족에 속한 사람들이 사흘 반 동안 그들의 시체를 구경할 것이며 그 시체가 무덤에 안장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죽은 시체를 길바닥에 던져놓고 장사도 지내주지 않습니다. 사람이 죽었는데 장사를 지내주지 않는 것은 당시 고대 사회에서 가장 극악한 모독 행위였습니다. 우리 교회는 그렇게 모독을 당하고 멸시를 당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죠. 왜 그렇게 세상이 우리를 멸시하게 되는 겁니까? 그 이유가 10절에 나옵니다.
(묵시11:10) 10 그리고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이 그들의 죽음을 보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서로 선물을 교환할 것입니다. 이 두 예언자는 땅 위에 사는 사람들에게 괴로운 존재였던 것입니다.
교회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했기 때문에 세상이 교회의 고난을 보며 즐거워하고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죄의 특징이 뭡니까? 죄의 특징은 전염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죄는 늘 공범을 만들려고 합니다. 많은 공범을 만들어 놓아 야 자기의 범죄 행위에 대해 죄책감이 덜 들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한 무리가 나타났는데 전혀 그 죄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이 그 무리를 미워하게 되고 심지어 죽이게 되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들은 자신들의 추한 모습이 드러나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합니다. 그런데 어떤 녀석들이 빛이 되어서 자꾸 자기들의 추한 모습을 비춰내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빛을 밟아서 꺼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빛으로 오셨습니다. 세상이 왜 그 빛을 십자가에 못 박아서 꺼 버렸습니까? 그 빛이 자꾸 자기들보고 ‘너희는 어둠이다. 너희들 회개하지 않으면 큰일 난다’하면서 자기들의 죄를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여 버린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교를 너무나 감상적으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예수님을 사모한다고 하고 예수님을 만나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께서 자기들이 성도라고 자처하면서 예수님을 예배하고 있는 성당에 나타나신다면 그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또 십자가에 못 박히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어두움 속에서 빛을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정말 예수님이 보고 싶으세요? 그 분이 오셔서 여러분을 그 분의 빛으로 비추시면 여러분은 지금 그 예수님 앞에 당당히 서실 수 있으세요? 아니면 ‘누가 나의 이 부끄러운 부분을 들춰내는 거야?’ 하면서 돌로 치실 겁니까?
여러분, 우리가 구원받은 하느님의 백성들이 맞다면 정말 우리 이런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면서 회개해야 합니다. 세상이 우리를 보고 찔림을 받기는커녕 세상이 교회를 걱정해 주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런 코미디가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 정말 우리는 세상이 우리가 존재함으로 찔림을 받고 괴로움을 당하는 그런 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남 이야기처럼 들으면 안 됩니다. 바로 우리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오늘부터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성경에 ‘그리스도인들아 너희들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라고 명백하게 기록이 되어 있는데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아마 가짜일겁니다.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우십시오. 그래서 그 죄란 녀석이 여러분의 존재로 말미암아 치명상을 입도록 오늘을 싸우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