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언약의 하느님(2) (묵시11,19)

2021. 4. 22. 오전 9:2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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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번역성서


(49) 언약의 하느님(2) (묵시11,19)


(묵시11,19)

19 그러자 하늘에 있는 하느님의 성전이 열리고 성전 안에 있는 하느님의 계약의 궤가 나타났으며 번개가 치고 요란한 소리가 들리고 천둥과 지진이 일어나고 큰 우박이 쏟아졌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하느님의 언약에 관해 공부를 했습니다.

인류 역사의 종말은 하느님의 언약의 완성이다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1119절에서 하늘 성전에 있는 하느님의 언약궤를 보여 주는 것이라고 설명해 드렸지요. 그리고 마지막 최후의 심판인 대접 재앙을 기술하기 전에 12, 13, 14장에서 그 하느님의 언약의 내용에 관해 요약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왜 우리에게 하느님의 언약이 필요하게 되었다고 했지요? 우리가 죄를 짓고 타락했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그 죄로 인해 모두 죽어야만 하는 존재들이지만 하느님께서 창세전에 택하신 그 분의 백성들에게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들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라고 약속하신 것이 바로 언약이다라고 설명해 드렸습니다.

하느님은 신실하신 분이시고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은 그 분이 하신 약속은 반드시 지키십니다. 성경에는 모두 54천 개의 하느님의 약속이 등장합니다.

구하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줄 것이다, 볼 지어다 내가 세 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하리라,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내가 나 의 의로운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구하면 내가 다 이루리라.

성경에는 이렇게 수많은 하느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그 수많은 약속들은 전부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느님이 될 것 이다라는 하느님의 언약의 성취를 위한 약속들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54천 개의 약속들은 전부 그리로 수렴되는 약속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그렇게 신실하시고 전능하신 하느님의 약속이 전혀 나와는 상관없는 것들로 여겨질 때가 너무 많습니다. 내가 너무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러울 때 그 하느님의 약속을 근거로 하느님 앞에 열심히 매달리는데 하느님께서 침묵하시는 때 너무나 많습니다. 처음 예수를 믿었을 때는 기도를 하면 잃어버렸던 지갑도 돌아오고 없던 택시도 어디선가 나타나고 하는데 차츰 차츰 신앙의 연륜이 더해가면서 하느님께서 오히려 나를 멀리하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면 너무 답답하지요. 심지어 내가 정말 구원받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하느님이 원망스러울 때가 왕왕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잘 보면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전부 그러한 하느님의 침묵을 경험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시편13:1-4) 1 야훼여! 언제까지 나를 잊으시렵니까? 영영 잊으시렵니까? 언제까지 나를 외면하시렵니까? 2 밤낮없이 쓰라린 이 마음, 이 아픔을, 언제까지 견뎌야 합니까? 언제까지 원수들의 우쭐대는 꼴을 봐야 합니까? 3 야훼, 나의 하느님, 굽어 살피시고 대답해 주소서. 죽음의 잠 자지 않도록 이 눈에 빛을 주소서. 4 원수들이 '이겼노라' 뽐낼 것입니다. 적들은 기뻐하며 날뛸 것입니다.

 

이 시는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친 후 사울의 질투에 쫓겨 다니면서 온갖 고생을 다 할 때 쓴 시입니다. 그는 사울에게 쫓겨 다니면서 적국인 블레셋으로 도망을 해서 심지어 미친 짓까지 해야 했습니다. 침을 질질 흘리고 문을 머리로 막 받으면서 미친 사람인척 행동해서 겨우 블레셋 사람들의 칼을 모면했습니다.

다윗은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서 맨발로 도망을 쳤던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하느님은 왜 다윗이 그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에 대해 대답을 해 주시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거기서 꺼내 주시지도 않습니다. 소년 시절에는 물맷돌 다섯개로 2미터가 넘는 거인을 쓰러뜨릴 수 있는 힘을 주셨고 용기도 주셨습니다. 그런데 점점 그러한 하느님의 음성과 도움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느님이 보시기에 하느님 마음에 합당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도13:22) 22 그를 물리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이 다윗에 대해서는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찾아 냈으니 그는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요, 내 뜻을 다 이루어 줄 사람이다' 라고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느님은 그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운 당신의 자녀가 그렇게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침묵을 하셨을까요? ‘내가 너를 도와 줄 것이다. 내가 너를 절대 떠나지 않을 것이다라는 그 수많은 하느님의 약속들은 다 어떻게 된 것입니까?

욥도 마찬가지입니다. 욥은 하느님이 보시기에 정말 훌륭한 신앙인이었습니다.

 

(1:1,8) 1 우스라는 곳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욥이었다. 그는 완전하고 진실하며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악한 일을 거들떠 보지도 않는 사람이었다. 8 야훼께서 사탄에게 '그래, 너는 내 종 욥을 눈여겨 보았느냐? 그만큼 온전하고 진실하며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악한 일은 거들떠 보지도 않는 사람은 땅 위에 다시 없다' 하고 말씀하시자,

 

그런데 욥은 엄청난 고난 속으로 던져집니다. 그 가운데서 하느님은 38장 동안 욥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으십니다. 위로나 도움은커녕 그 고난의 이유도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욥기23:8-9) 8 그런데, 앞으로 가 보아도 계시지 않고 뒤를 돌아 보아도 보이지 않는구나. 9 왼쪽으로 가서 찾아도 눈에 뜨이지 아니하고 오른쪽으로 눈을 돌려도 보이지 않는구나.

 

모세에게는 어떻게 하셨나요? 모세가 애굽에서 도망 나와서 미디안 땅에서 40년간 처가살이를 합니다. 자존심, 성질 다 죽었습니다. 그의 나이가 여든이 되었습니다. 그 때 당시 수명이 길어야 70이고 건강(健剛)해야 80이었다고 하니까 이제 죽을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입니다. 그 때까지 하느님은 모세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를 위로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떻습니까? 하느님은 아브라함이 일흔 다섯 되던 해에 그에게 자손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25년 동안 하느님은 침묵하셨습니다. 25년이나 기다리게 하셨을까요?

왜 요셉이 그토록 힘이 들 때에 하느님은 그에게 침묵하셨을까요? 왜 형들이 그를 팔 때, 억울하게 감옥에서 수년을 썩을 때 하느님은 침묵하셨을까요? 그 요셉이 하느님께 여기서 나가게 해 달라고기도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왜 하느님은 침묵하셨습니까?

하느님은 엘리야에게도 침묵하신 적이 있습니다. 엘리야가 그 하느님의 침묵이 얼마나 견디기 힘들었으면 하느님, 내가 하느님께 열심이 특심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저에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차라리 저를 죽여주세요.‘ 라고 외칠 정도였습니다.

우리의 모습을 한번 보지요. 여러분 중에는 지금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고 계신 분들이 계십니다. 여러분 하느님께 그 병 고쳐달라고 많이 기도하셨죠? 하느님께서 왜 침묵하십니까? 자녀의 문제로 고통 받고 계신 분들 계십니다. 그 자녀를 위해 많이 기도하셨지요? 뭔가 변화가 있나요? 하느님께서 침묵하십니다.

우리 교회는 특히나 생활이 어려우신 분들이 많으세요. 여러분의 생활이 좀 나아지게 해 달라고 기도 많이 하셨을 겁니 다. 하느님이 눈에 보이게 확 풀어주시지 않으시죠? 하느님은 하느님의 자녀들에게 왜 그렇게 긴 터널을 통과하게 하실까요? 하느님은 왜 이렇게 하느님의 백성들의 아픔과 고통에 빨리 빨리 대답하시지 않으실까요? 왜 이렇게 답답하게 침묵하실까요? 하느님은 분명 성경에 54천 가지의 약속을 해 놓으셨으면서 왜 그 약속을 외면하시는 것처럼 우리를 답답하게 만드실까요?

우리가 좀 전에 언급한 것처럼 그 모든 하느님의 약속들이 전부 어디로 수렴되는 것인가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지 않으면 우리는 계속해서 답답할 수밖에 없고, ‘하느님은 약속을 밥 먹듯 어기시는 분이라고 계속해서 하느님을 원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모든 하느님의 약속들은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들의 하느님이 되게 만드시기 위해존재하는 것들이라는 것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최종 적인 언약을 염두에 두지 않고 지엽적인 약속들만을 우리 임의대로 해석을 하게 될 때 우리는 자칫 하느님은 약속도 안 지키시는 분으로 오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신실하신 분입니다. 하느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하느님은 그 분의 모든 약속을 지키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서 침묵을 하시는 것은 우리가 그렇게 인식하는 것뿐이지 하느님은 지금 하느님의 언약을 성실하게 이행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우리는 하느님의 백성으로 열심히 만들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느님의 침묵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하느님은 우리의 어떤 유익을 위해 침묵을 하시는가? 한 번 짚고 넘어가 보지요. 여러분, 믿음이 뭡니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 믿음을 소유한 사람을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합니다. 바로 그 믿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아 볼 수 있는 시금석이 바로 시간입니다.

하느님은 그 침묵 속에서 너 정말 나를 믿고 있니?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내가 나의 약속을 어김없이 지킬 것을 정말 믿고 있니?’ 이렇게 묻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침묵은 우리의 믿음의 성장을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시간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느님을 믿고 신뢰하고 그 분을 아버지로 여기고 있다고 하면서도 얼마나 그 분을 신뢰하지 못하는지 모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서 침묵하시게 되면 우리는 얼마간은 잘 견디는 듯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하느님에 대한 신뢰는 점점 줄어들고 맙니다.

우리는 그 하느님의 침묵 속에서 우리의 믿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시험이 닥치게 되면 우리가 얼마나 하느님을 신뢰하는지, 우리가 얼마나 그 분에 대해서 알고 있는지 금방 탄로가 납니다.

멀쩡할 때는 예수를 잘 믿는 것 같다가 병에 걸려 죽어가면서 하느님이 있긴 어디 있냐? 하느님이 있다면 나를 이렇게 놔 둘 수 있어?’ 이렇게 하느님을 부인하고 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사업이 잘 될 때는 예수를 잘 믿는 것 같다 가 오래도록 사업이 회복되지 않으면 이내 하느님을 떠나버리는 엉터리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우리는 그 모든 상황들이, 그 오랜 하느님의 침묵이 하느님의 언약을 따라 나를 하느님의 백성으로 양육하고 계시는 하느님의 열심이라는 것을 절대 놓쳐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진짜 하느님의 백성들은 하느님의 침묵을 경험하면서 자신들의 믿음이 진짜 인지 가짜인지 확인하면서 하느님께서 나에게 다른 어떤 것으로 이 땅에서 보상해 주시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는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며 하느님만으로 기쁩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인격을 존중해 주십니다. 하느님은 인격자이십니다. 그 인격자이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인격자로 대우해 주시는 증거가 바로 하느님의 침묵인 것입니다.

어린 아기가 울며 보챌 때 부모는 절대 침묵할 수 없습니다. 그 아기와는 대화가 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기는 이해력과 사고력이 아직 부족하기 때문에 부모는 아기가 울면 얼른 기저귀도 살펴보고 젖을 물리고 하는 것입니다. 아이가 자라면서 부모들은 아이들이 도움을 청할 때 종종 침묵을 합니다. 그 것은 그 아이가 스스로의 힘으로 그 상황들을 이겨 낼 수 있는 힘을 키워주기 위한 부모의 따뜻한 배려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느 순간부터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삶 속에서 침묵하시기 시작하셨다면 여러분 기뻐하십시오. 이제 하느님은 드디어 여러분을 신뢰하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그래, 이제 아버지는 너를 믿는다.’라는 우리 아버지의 신뢰를 받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다윗에게 침묵하신 13년 간 다윗은 하느님께 신실했습니다. 하느님을 여전히 경외했고 하느님께서 기름 부으신 왕 사울에게 깍듯한 예우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전히 부하들을 선대했습니다. 하느님은 그를 믿었기 때문에 그에게 침묵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그 침묵 속에서 더욱 더 신실한 하느님의 자녀로 성숙되어졌습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침묵을 통과한 다윗이 70이 넘어 그의 말년에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시편23:1-4) 1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누워 놀게 하시고 2 물가로 이끌어 쉬게 하시니 3 지쳤던 이 몸에 생기가 넘친다. 그 이름 목자이시니 인도하시는 길, 언제나 곧은 길이요, 4 나 비록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내 곁에 주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어라. 막대기와 지팡이로 인도하시니 걱정할 것 없어라.

 

다윗은 그 하느님의 침묵 속에서 , 하느님의 침묵이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하느님의 외면이 아니라 하느님의 적극적인 지키심이요, 하느님의 신실하신 약속이 이루어지고 있는 복된 시간이구나.’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4절에 보면 다윗이 죽음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녔다고 술회를 합니다. 많이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죽음의 음침한 골짜기가 나에게 해가 되는 시간이 아니라 하느님의 지키심의 순간들이었다는 것을 다윗은 안 것입니다. 그 죽음의 음침한 골짜기, 하느님의 침묵은 주의 지팡이요 주의 막대 기였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등장하는 주의 지팡이 미쉐나는 목자가 양을 지키는 막대기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막대기’‘쉐베트는 아이에게 바른 삶을 가르치기 위한 회초리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은 하느님의 백성을 하느님의 백성답게 만들어 내실 것이라는 너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라는 그 언약을 지켜내시기 위해 우리에게 침묵하신 다는 것을 다윗은 안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느님의 침묵의 시간을 잘 견뎌내고 통과 해 낼 수 있는 하느님의 신뢰를 받는 사람들에게 하느님께서 때때로 자신을 감추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베전2:19-21) 19 억울하게 고통을 당하더라도 하느님이 계신 것을 생각하며 괴로움을 참으면 그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20 죄를 짓고 매를 맞으면서 참으면 영예스러운 것이 무엇입니까? 그러나 선을 행하다가 고통을 당하면서 참으면 하느님의 축복을 받습니다. 21 여러분은 바로 그렇게 살아 가라고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여러분을 위해서 고난을 받으심으로써 당신의 발자취를 따르라고 본보기를 남겨 주셨습니다.

 

선을 행하면서도 고난을 당하는 것을 베드로 사도는 아름다운 일이라고 정의를 내립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그것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을 합니다. 우리가 왜 부르심을 받았다고요? 선한 일을 행하다가 고난을 당하고 그럼에도 그 것을 잘 참는 삶을 배우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 삶이 우리 타락한 인간들에게는 이해가 잘 안가는 삶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 삶은 바로 이런 거야라고 본을 남겨 놓으셨다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그 삶이 바로 하느님의 백성들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누에는 뽕 잎을 먹고 실을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그 실로 고치를 만들어 그 안에 들어가 번데기가 되지요. 그렇게 2주정도 번데기로 지내다가 껍데기를 벗고 나방이 됩니다. 그 나방이 고치를 찢고 나오는데 보통 하루가 걸립니다. 나방 은 그 고치 안에서 이리 저리 몸을 뒤척이며 그 고치를 찢는 것입니다.

그게 너무 안쓰러워서 인위적으로 그 고치를 조금 찢어주면 그 나방은 하루를 못 살고 죽는 답니다. 하루의 고통을 통과하고 스스로 고치를 찢고 나온 나방만이 찬란한 삼차원의 삶을 수명대로 살다가게 되는 것입니다. 2차원을 살던 누에가 삼차원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침묵의 시간, 고난의 시간을 통과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언젠가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을 입고 다른 차원, 다른 dimension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 새로 운 삶으로 가는 관문에 하느님의 침묵의 시간이 꼭 필요한 것입니다. 고난과 고통이라는 것은 하느님이 만들어 내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이 타락을 하고 우리가 스스로 우리를 지키려고 하는 시도에서 만들어진 것들이 고난이요, 고통입니다.

 

(창세3:17-18) 17 그리고 아담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아내의 말에 넘어가 따 먹지 말라고 내가 일찍이 일러 둔 나무 열매를 따 먹었으니, 땅 또한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죽도록 고생해야 먹고 살리라. 18 들에서 나는 곡식을 먹어야 할 터인데,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리라.

 

여기 18절의 가시와 엉겅퀴가 바로 우리가 당하는 고통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우리는 고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당하는 고난과 고통은 모두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땅에 생기게 된 가시덤불과 엉겅퀴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도 이 땅에 사는 한 그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피해 갈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그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하느님 손으로 벌초해 주시지 않으십니다. 그 것들을 그대로 놔두시고 그 가시덤불과 엉겅퀴 정글 속을 헤매는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말씀이라는 나침반과 지도를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가시덤불과 엉겅퀴 속에서 오직 하느님의 말씀을 의지해서 우리 스스로 그 곳을 벗어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나침반과 지도가 없는 사람들은 그 가시덤불과 엉겅퀴 속에서 헤매다가 결국은 그 속에서 죽게 되는 것이고요. 그러니까 우리는 그 가시덤불과 엉겅퀴 속에서, 하느님의 침묵 속에서 하느님께서 선물해 주신 그 구원이, 복음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더욱 더 확연하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침묵이라는 고통 속에서 그 구원의 진가를 깨달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오스딩하느님의 침묵은 우리의 구원을 바라보는 확대경이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것들에 둘러싸여 있을 때에는 하느님의 구원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를 깨달아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나의 지지대로 여기고 있던 것들이 하나 둘씩 떠나 갈 때 우리는 비로소 내가 진짜 의지하고 바라볼 곳이 어디 인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그 고통스러운 할례를 하느님의 언약이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그리고 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입성하기 바로 전인 길갈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할례를 명했는지 아십니까? 온 힘을 다 해 가나안과 전쟁을 해도 이길까 말까 한데 군사들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하나의 상징인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로 상징되는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꼭 해야 할 것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할례가 뭐죠? 남자의 고추 끝을 잘라내는 것입니다. 그 첫 번째 의미가 하느님의 백성들은 인간의 생식 능력에 의해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또 한 가지 중요한 의미가 뭡니까? 고대 시대의 남자의 생식기는 그 사람의 전 존재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나의 옛 사람의 죽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능력의 단념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나의 노력과 나의 열심히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리고 그 곳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나의 옛 사람과의 결별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길갈의 교훈입니다. 남자가 할례를 행하고 나면 그 할례 자국을 평생 동안 하루에 몇 번이나 보게 됩니까?

여러분 하루에 화장실 몇 번이나 가세요. 화장실 갈 때마다 하느님의 언약을 떠올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하느님의 백성으로 완성이 될 것이고 그 언약 의 완성을 위해서는 나의 옛 사람이 완전히 죽고 나의 능력이 내 안에서 완전히 단념이 되어야 한다.’라는 것을 하루에도 몇 번 씩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침묵은 바로 그 할례의 완성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나의 옛 사람을 죽이고 나의 능력을 단념하는 바로 그 할례의 완성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고통 없이 절대 영광을 보지 못합니다. 우리는 No Cross, No pain을 원하지만 그런 영광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반드시 십자가를 통해서만 나타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만 그런 고통 속에 내던져져 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나에게만 하느님께서 침묵하신다고 오해하지 마십시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똑같이 그 침묵의 시간을 통과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0장의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가 당하지 않는다.’는 말이 무슨 의미라고 했습니까? 정확한 원어대로의 번역은 누구나 흔히들 겪는 고난이라는 뜻이라고 했지요?

여러분, 모든 이들이 고통을 겪습니다. 그 속에서 숨 막히는 하느님의 침묵을 경험합니다. 그 때 여러분은 하느님 왜 나에게만 이런 고통을 주십니까?’라고 하느님을 원망하시면 안 됩니다. 오히려 누구다 다 겪는 이가 시덤불과 엉겅퀴의 정글 속에서 그래도 나는 나침반과 지도가 주어져 있지 않은가? 이제 곧 나는 여기서 나갈 수 있다.

그런데 아직도 그 나침반과 지도를 받지 못하고 가시덤불과 엉겅퀴 속에서 헤매고 있는 저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하고 오히려 세상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도하는 성숙한 여러분, 하느님이 신뢰할 만한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드리는 말씀은 저의 요구를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하느님의 요구를 여러분에게 전달하는 것뿐입니다. 아니 여러분에게 전달하기 전에 저에게 먼저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이 그렇게 설교하는 당신은 그렇게 살고 있습니까?’라고 궁금하실 때가 있으실 겁니다. 아니요, 이렇게 설교를 하는 저도 그렇게 못 삽니다. 그래서 참 괴롭습니다.

어떤 때는 마음속에서 끊이지 않고 솟구쳐 오르는 어두운 생각들 때문에 가지고 있던 볼펜으로 허벅지를 내리 찍은 적도 있습니다. 여러분 왜 제가 가끔 열흘씩 금식을 하는지 아십니까? 무슨 소원이 있어서 금식하는 거 아닙니다.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면 하느님이 들어주시겠지 해서 금식하는 것 아닙니다.

사목을 하다보니까 문득 문득 욕심이 머리끝까지 차 올라와서 도저히 이래서는 안 되겠다싶을 때 밥을 굶습니다. 저는 먹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배가 고프면 밥 생각밖에 안 납니다. 그래서 잠시나마 그 끓어오르는 욕심을 잊을 수 있어서 밥을 굶습니다. 저는 끊임없이 죄에게 당합니다. 그 때마다 발버둥을 치는 겁니다. 그게 저의 한계입니다.

그래도 이렇게 설교를 해 놓고 누군가가 그렇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되지 않는가? 하는 마음에 열심히 싸워봅니다. 번번이 녹다운 되지요. 저도 그렇습니다. 저는 예수 믿고 나서 눈물이 많아졌습니다. 왜 우는지 아십니까? 대부분 왜 예수를 믿고 나서도 나는 이렇게 변하지 않는가? 에 대한 눈물입니다.

하느님은 신실하신 분입니다. 하느님은 반드시 약속을 지켜내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약속의 내용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뭐가 두려우세요. 잘 이겨내십시오. 이제 121314장을 공부하게 되면 그런 고난을 우리가 정말 이겨낼 수 있을까?’ 생각되실 겁니다. 여러분은 이겨내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기고 계신 것입니다. 잘 하고 계신 거예요. 끝까지 포기하지 마십시오. 하느님의 침묵 속에서 하느님의 열심을 보시는 진짜 실력자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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