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1

2025. 9. 5. 오전 6:4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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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현실 논리라는 짐승(묵시 13,11-18)

두 번째 짐승은 땅에서 올라온다. 사탄의 세력을 가리켰던 바다가 아니라 인간이 발을 디디고 살아가는 땅 위에서 두 번째 짐승이 올라온다. 어린양처럼 뿔이 있으되 두 개밖에 없고, 용처럼 말하되 용은 아닌, ‘~처럼’으로서 묘사되는 두 번째 짐승은 저 스스로의 모습이 빈약한, ‘허상’(虛像)의 존재다. 두 번째 짐승의 역할은 다분히 종교적이다. 첫째 짐승을 온 땅과 땅의 주민들이 경배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그의 일이다.(묵시 13,12 참조) 이 경배는 실은 속이는 일이기도 했다.(묵시 13,14 참조) 경배는 진실된 것이 아니라 속이는 것이어서 두 번째 짐승을 두고 ‘가짜 예언자’로 해석하는 데 우리는 익숙하다. 초대 교회는 가짜 예언자로 몸살을 앓았다. 두 번째 짐승은 초대 교회의 가짜 예언자를 은유하는 표현들로 꾸며진다. 예컨대, 큰 표징과 불(묵시 13,13 참조). 큰 표징을 보여주는 일은 종말의 순간에 거짓 그리스도, 거짓 예언자들이 행하는 것으로 서술된다.(마르 13,22; 2테살 2,9-10 참조) 기원후 3세기에 콥트어로 쓰인 엘리야 묵시록 3장에서도 거짓 그리스도 혹은 적그리스도(요한의 첫째 서간에서도 다루고 있다)가 등장하는데, 물 위를 걷거나 병자들을 치유하면서 그리스도를 흉내 내는 여러 이적들을 보여주고 있다. 두 번째 짐승은 또한 엘리야처럼 하늘에서 불을 내리기도 한다.(묵시 13,13; 1열왕 18,38; 2열왕 1,10 참조) 예언자들의 대표 격인 엘리야를 흉내 내는 두 번째 짐승은 하느님을 알리고 선포하는 참된 예언자가 아니라 용‘처럼’ 말하는 ‘가짜 예언자’의 전형이다. 두 번째 짐승의 공간이 ‘땅’이란 이유로 역사 비평적 주석은 소아시아의 사회적, 종교적 상황에 주목한다. 요한 묵시록의 시대에 소아시아는 황제와 여러 신들을 향한 숭배와 제사 등이 일상의 주축이었다. 현대인이 이해하는 단순한 종교적 수준이 아니었다. 당시 사람들은 신의 세계가 이 세상에 구현되어 세상살이의 확실한 보증이 되길 바랐다. 거기에 황제 숭배와 여러 신들에 대한 경배는 사회 일반의 ‘당연함’으로 기능하였다. 사회 일반이 그러하다면 여러 신전의 건축과 그에 따른 예식과 제의 등의 참여와 실천은 현실의 상식 그 자체다. 여러 표징을 보여주고 짐승의 상을 세우라고 말하는 두 번째 짐승은 이러한 당시 사회 일반의 ‘당연함’을 더욱 당연하게 만드는 사회의식을 반영한다. ‘표징’과 ‘상’에 관련해서 주석 학자들은 당시 그리스도교 신앙과 대립하는 마술쟁이를 언급한다. 사도행전에도 바르예수라는 마술쟁이로 소개되기도 한다.(사도 13,6 참조) 마술쟁이는 하느님을 대적하는 거짓 예언자의 또 다른 표상이어서 주석학자들은 요한 묵시록의 두 번째 짐승을 인간 세상 안에 횡행하는 악의 세력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해 낸다. 그러나 두 번째 짐승을 하느님과 대적하는 악의 은유, 혹은 하느님을 향하는 정통 신앙에 벗어난 이교나 이단 정도로 해석해 버리는 것은 너무 편협하거나 게으른 일이 아닐까.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의 복잡한 논리를 초월적 신에 대한 신앙 정도로 너무나 쉽게 판단하고 규정하는 건 아무래도 민망한 일이다. 하여, 우리는 두 번째 짐승을 통해 이렇게 질문하고 해석해야 한다. 오늘 우리가 이른바 ‘현실 논리나 상식’을 근거로 신앙적 가치를 적당히 가미시켜 사유하고 행동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말이다. 현실의 모든 표징과 시대의 징표를 읽어내는 일은 현실의 논리를 더욱 단단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틈바구니 안에 하느님이 어떻게 소외되고 상처 입는지 밝혀내는 지난한 순교의 여정이기도 하겠다. 많은 경우 우리는 과학을 믿는다고 하지만 또 많은 경우 정신적이고 관념적인 이유로 속는 경우가 많다. 나는 이 점에 대해 우려한다. 가톨릭 신앙을 가지면서도 세속의 정신문화에 영향을 받는 경우가 많다는 것에 우려한다. 예를 들어, 성공과 행복이 거의 신앙화 되어 있는 오늘, 신앙 역시 성공과 행복을 위해서만 기능한다는 사실. 고통과 슬픔, 혹은 불안과 우울에 대해선 신앙적 고민이나 사유가 배제된 채 패배의식이나 죄의식으로만 분리되어 처리된다는 사실. 큰 표징 앞세운 거짓에 속아 짐승의 ‘표’ 받는 땅의 주민들 현실 논리나 상식에만 기대어 신앙 외면하는 우리와 닮아 요한 묵시록이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을 회피하지 않았고, 자기의 핏값을 치러 세상 모든 민족을 속량한 어린양이었다. 어린양의 핏속에 제 겉옷을 빨아 희게 만드는 것은 십사만 사천이라는 참된 성도이기도 했다. 번듯한 삶과 행복한 삶은 적어도 요한 묵시록의 독자들에겐 관심사가 아니었다. ‘로마의 평화(Pax Romana)’를 살아가는 시대, 로마의 권력과 상업적 성공 앞에 요한 묵시록의 독자들은 “나도 잘 살게 해주소서”라고 기도하지 않았고 로마의 현실 논리에 뒤섞이지 않았고, 그럼으로써 세상에 실패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분처럼 죽어가는 것을 힘겹지만 기꺼이 받아들이길 빌고 빌었다. 그렇게 요한 묵시록의 독자들은 현실 논리와는 멀어져도 한참 멀어진 곳에서 기어이 현실을 살아내고 있었다. 반면, ‘땅의 주민들’은 거의 모두 짐승의 표를 받는다.(묵시 13,16 참조) 낮은 사람이나 높은 사람이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이나 할 것 없이 모두 표를 받는다. 그 표를 받지 않으면 아무것도 사거나 팔지 못한다.(묵시 13,17 참조)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우리 모두는 어쩔 수 없이 현실 논리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두 번째 짐승은 그 현실 논리의 ‘어쩔 수 없음’을 너무나 강력하게 증거하고 책동한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인은 지혜로워야 한다.(묵시 13,18 참조) 요한 묵시록 17장 9절에 로마의 사치를 가리키는 대탕녀 바빌론이 등장할 때도 우리의 요한 묵시록은 지혜로운 마음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이를테면, 666의 의미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 짐승은 666이다. 6이란 숫자가 악마적 요소를 지니고 그것이 세 번 반복한다고 해서 악의 본령으로 해석하는 고전적 경향이 아직 뚜렷하다. 그러나 666은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악을 대변하지 않는다. 요한 묵시록은 분명히 ‘사람’이라고 밝히기 때문이다. 역사 비평적 관점은 그 사람을 로마의 황제들 혹은 로마 제국 자체로 해석하기도 한다.(묵시 17,11 참조) 그만큼 요한 묵시록의 시대를 살아간 신앙인에게 로마는 두려움의 대상이자 (역설적이게도 ‘부러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하느님의 뜻을 거역한 악의 세력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말하는 ‘현실 논리’ 속에 우리의 666은 무엇인지, 끊임없이 묻고 고민해야 할 것이다. ‘현실이 그런데 어떡해?!’라는 우리의 자조(自嘲) 속에 666은 여전히 살아 있다. 글 _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9-07 제3457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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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첫 번째 짐승의 입(묵시 13,5-10)

짐승의 입은 모독의 언어로 가득 차 있다. 큰소리를 지르며 하느님을 모독하는 짐승의 입은 구약의 다니엘서가 셀류코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를 가리킬 때 사용한 작은 뿔이 지닌 ‘큰 입’과 같다.(다니 7,8.20 참조) 다니엘서의 ‘큰 입’은 하느님께 드리는 이스라엘의 제사를 금지시켰고 나아가 하느님 자체를 거부하고 부정했다.(다니 7,25; 1마카 1,24; 다니 7,25; 11,36 참조) 요한 묵시록의 ‘큰 입’은 다니엘서의 ‘큰 입’과 같다.(묵시 13,5 참조) 요한 묵시록의 첫 번째 짐승의 입은 ‘주어져 있다’. 그리고 주어진 권한은 마흔두 달이라는 시간으로 한정되어 있다.(앞서 우리는 ‘마흔두 달’이란 시간이 기원전 2세기 중반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의 박해 시간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이해했다) ‘주어졌다’라는 수동태 형식의 표현을 학자들은 ‘신적 수동태’라고 일컫는다. 짐승은 하느님을 거스르되, 자신이 가진 고유한 권한이나 권능이 없다는 것. 모든 것은 오로지 하느님의 권능 아래 놓인 것이고, 그러므로 첫 번째 짐승의 권한은 자기 것이 아니라는 것. 신적 수동태의 형식을 빌려 요한 묵시록은 짐승이 내뱉는 모독의 언사에 힘을 빼고 있다. 말은 있으되, 힘이 없는 말. 말의 크기는 거창하되, 그 실속은 너무나 하찮은 것이 첫 번째 짐승의 ‘큰 입’이다. 짐승은 하느님만이 아니라 그분의 ‘거처’를 모독한다. ‘거처’로 번역한 그리스말은 ‘천막’으로도 번역되는 ‘스케네’(σκηνή)이다. 요한 묵시록 7장 15절은 어좌에 계신 분이 십사만 사천의 ‘천막’이 되어주신다고 서술한다. 요한 묵시록 21장 3절은 하느님의 거처가 사람들 가운데 있다고 말한다. 하느님의 거처는 천상이 아니라 이 땅, 이 삶의 자리다. 요한 묵시록은 이른바 ‘육화 사상’을 전제로 하느님을 생각한다. 육화하신 하느님,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세상은 하느님의 거처가 된다. 천상은 지상 안에 온전히 구현된다. 짐승이 하느님의 거처를 모독하는 건 하느님을, 동시에 그분의 백성과 이 세상을 모독하는 것이 된다. 짐승은 성도들과 싸워 이길 것이고 세상 모든 사람들을 다스릴 권한을 받는다.(묵시 13,7 참조) 다니엘서 7장 21절을 그대로 옮겨온 표현이고 요한 묵시록 12장 17절의 용을 그대로 모방한 표현이기도 하다. 신앙을 산다는 것은 세상에 처절히 패배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다는 것이 짐승의 승리가 가리키는 바다. 많이들 경험하지 않는가, 신앙인은 참고 희생하고 그러므로 손해 보는 일이 많다는 것을. 사실 예수님도 그러했다. 십자가를 짊어지면서 세상에선 실패했다. 세상의 힘에 짓눌렸고, 세상과의 싸움에서 속수무책으로 패배했다. 성도들의 운명 역시 그러하다. 그러므로 세상 논리 앞에 신앙은 실패와 패배의 어리석음이라 여겨도 무방하리라.(1코린 1,21 참조) 땅의 주민들이 짐승을 경배하는 것은 당연할 수밖에 없다.(묵시 13,8 참조) 세상은 그렇게 힘이 있어 보이는 권력자에게 경배한다. 우리는 그것을 탓할 수 없다. 땅의 주민들은 ‘모두’ 짐승에게 경배한다. 그들 ‘모두’는 어린양의 생명의 책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다.(묵시 13,8 참조) 생명의 책과 관련해서 결과론적 해석이 난무한다. ‘착한 일’, ‘올바른 일’을 해야 한다는 윤리 도덕적 지침의 실천 여부가 생명의 책에 기록될 가능성을 가늠한다. 절대적인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이 생명의 책에 기록되는 조건이 된다면, 시대가 다르고 문화나 관습이 달라 어느 시대는 옳지만 다른 시대에는 허용하지 않는 상대적 규범들에 대해선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생명의 책이 인간의 행동 방식이나 선택에 따라 그 허용 범위가 달라지는 책으로 인식하는 건 과연 타당한 것인가. 이런 질문들은 생명의 책을 인간 인식이나 행위의 수준에서 다루는 가벼운 생각들을 여지없이 무너뜨린다. 한계가 지워지고 익숙한 경험치에 의존하는 인간의 행동 방식과 어린양의 생명의 책을 연계해서 생각하는 건, 아무래도 영원하시고 초월적인 하느님과 그분의 아들 예수님을 너무 얕잡아 보는 것이 아닐까. 하느님 모독하는 짐승의 입 거창하지만 실속은 하찮은 것 세상의 권력과 흐름 따르기보다 존재 성찰하며 하느님 뜻 찾아야 하여, 우리가 주목할 표현은 이것이다. “세상 창조 이래”라는 표현. 어린양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은유일 때, 생명의 책은 세상 창조의 시간부터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성을 보증하는 상징이 된다. 요한 묵시록은 3장 14절에서 예수를 가리켜 하느님 창조의 근원이라 밝혔다. 생명의 책에 이름을 올리는 것은 인간의 행동 방식에 따른 결과론적 심판이 아니라, 시공간을 넘어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원이신 예수님과의 친밀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은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로 해석되어야 한다. 생명의 책은 존재의 근원에 대한 끊임없는 갈망이고 그 갈망은 근원적이고 운명적이다. 다만, 우리는 여기 존재하고 있고, 존재함으로 생명의 책과 끊어내려야 낼 수 없는 필연의 운명을 짊어지고 있기에. 그렇다면, 짐승을 따르고 경배하는 것은 무엇일까. 제 존재의 근본을 잊(잃)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제 존재가 나아갈 방향이 무엇인지 묻지 않고 이리저리 세상의 흐름에 자신을 떠넘겨버리는 일, 그것이 짐승을 경배하는 일이 된다. 사실 어린양을 통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창조주 하느님의 구원과 그분을 향한 경배로 불렸다.(묵시 5,6 참조) 이러한 구원의 섭리는 인간의 몇몇 행동으로 좌지우지되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적어도 우리는 하느님의 구원 의지보다 더 강한 권능을 지녀야만 한다는 것인데, 그건 불가능하지 않는가. 다만 구원을 받았음에도 인식하지 못하고 다른 것을 통해 구원을 지향하는 것, 그것은 무지한 일이지 악한 일은 아니다. 예수께서도 십자가 위에서 이런 말씀을 남기셨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십시오. 저들은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하느님을 알기 이전에, 제 인식의 수준과 넓이와 깊이가 부족함을 알고, 진정으로 저 자신이 무엇을 디디고 서 있는지를 아는, 자신에 관한 공부이기도 하겠다. 그 공부의 끝에 하느님은 비로소 발견된다. 글 _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8-31 제3456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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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첫 번째 짐승(묵시 13,1-4)

짐승은 땅에 떨어진 용의 모방체(模倣體)다. 하느님 백성을 괴롭히고 박해하는 용이 땅으로 떨어져 나타나는 게 짐승이다. 하여, 우리는 짐승에게서 하느님 백성을 괴롭히고 박해하는 용의 역할을 또한 발견할 것이다. 용은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에게 자기 권능과 왕좌와 큰 권한을 주었다.(묵시 13,2 참조) 용과 짐승은 그 호칭이 다를 뿐, 실은 하나의 형상이다. 하늘에서 떨어진 용은 땅에서는 짐승이다. 짐승은 열 개의 뿔과 일곱의 머리를 가지고 있다. 짐승은 표범 같고, 발은 곰의 발 같았으며, 입은 사자의 입과 같다. 다니엘서 7장이 소개하는 네 마리 짐승의 모습이 요한묵시록 13장의 짐승 위에 어른거린다. 다니엘서 7장은 바다에서 올라온 네 마리 짐승을 소개하는데, 네 마리 짐승은 사자, 곰, 표범을 닮았고, 네 마리 짐승의 머리를 다 합하면 일곱이며, 뿔은 열 개가 된다. 네 마리 짐승은 주로 하느님과 그분의 백성에 적대적인 네 왕국, 그러니까. 바빌론, 메대, 페르시아, 그리스 제국으로 해석한다. 다니엘서 7장이든 요한묵시록 13장이든 짐승이 등장하는 공간이 바다여서 태초의 바다, 창조의 섭리를 거스르는 혼돈의 바다와 연결해서 해석하기도 한다.(창세 1,2; 시편 74,13-14; 89,10-11 참조) 유다 전통은 바다의 괴물 레비아탄을 하느님과의 대립 구도 속에서 악의 형상으로 이해하기도 했다.(에녹 60,7-8; 4에즈 6,49-52; 2바룩 29,4 참조) 짐승은 아무래도 하느님을 대적하는 악의 세력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요한 묵시록의 작성 시기를 참작해서 짐승을 로마 황제들과 연결해서 해석하기도 한다. 짐승의 일곱 머리가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네로, 베스파시아누스 그리고 티투스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머리 중 하나는 상처를 입었으나 그 상처는 나았는데(묵시 13,3 참조) 이 머리를 네로 황제라고 여기기도 한다. 1세기 말엽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네로와 관련된 전설이 하나 있었다. 그리스도인들을 괴롭혔던 네로는 68년 자살했으나 죽음을 피해 다시 살아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할 것이라는 두려운 전설이 있었다. 짐승을 두고 역사적 관점으로 해석하는 것에 우리는 익숙하다. 그러나 또한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가령, 짐승을 로마 제국으로 이해하는 건, 마치 악의 가시적 형태가 로마였다는, 그리하여 로마는 묻고 따질 필요 없이 하느님을 모독하는 세력으로 치부하는 일은, 설사 그것이 요한 묵시록의 저자가 생각한 바였다 하더라도, 오늘 성경을 읽는 우리의 해석이 되어서는 안 된다. 로마로 여행 가고 싶어 하고, 로마의 찬란한 문화를 열광적으로 칭송하는 오늘의 우리에게 하느님을 대적하는 짐승으로 로마를 이해하는 해석은 굉장히 민망한 일이다. 요한 묵시록에 등장하는 악의 형상들을 역사 속 특정 부류, 특정 민족, 특정 계급, 특정 인물에 투사하는 해석은 불행히도 그치지 않고 반복된다. 1세기 말 요한 묵시록의 시간은 로마에 의한 억압이 그리스도인들에겐 위협이 되었던 시간이었고, 그 위협을 짐승을 통해 ‘해석’했다. 이 ‘해석’은 ‘주석’(註釋)과 다르다. 짐승의 의미를 캐묻는 ‘주석’이 하느님과 대립하는 악의 세력으로 짐승을 규정했다면, 그 짐승에 대한 ‘해석’은 해석 주체, 그러니까 읽는 독자들의 선택에 달려 있는 것이다. 자신에게 위협을 가하는 이들을 가리켜 악의 세력이라고, 짐승이라고 말하는 건 전적으로 그렇게 말하는 해석 주체의 주관적 판단이라는 것. 1세기 말엽의 그리스도인들은 요한 묵시록을 읽으면서 짐승을 악의 세력이라고 규정한 주석의 정보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고, 로마의 위협이 곧 악의 세력, 짐승의 위협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짐승은 하느님 대적하는 세력 역사적 관점으로 해석하기보다 현재 우리에게 무엇인지 살피며 짐스이 경배 대상 되지 않도록 인간적 욕망 항상 경계해야 그래서 우리는 다만 이렇게 물어야 한다. 짐승이 ‘하느님을 모독하는 이름’을 지니고 있는 악의 세력이라면(묵시 13,1 참조) 하느님을 향한 모독과 악의 성질이 오늘 우리에겐 도대체 무엇인지 묻는 해석학적 질문이 필요하다. ‘하느님을 모독하는 이름’은 저 옛날 로마 황제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오늘 우리 신앙에 위협적인 요소가 무엇인지, 그런 요소에 우리는 민감한지 먼저 물어야 한다. 요한 묵시록은 마침 짐승의 상처를 언급했다. 상처를 입어 ‘죽은 것 같다’(ὡς ἐσφαγμένην)는 묘사는 요한 묵시록 5장 어린양의 것과 닮아 있다. 어린양을 모방하는 이 묘사는 짐승과 어린양을 대립 구도로 놓으면서 짐승의 ‘적그리스도’ 성격을 더욱 부각시킨다. 5장에서 어린양은 세상 모든 이를 속량하여 하느님께로 이끄는 역할을 보여준다. 그런 어린양은 천상과 지상 모든 피조물의 경배 대상이 된다. 짐승 역시 그러하다고 요한묵시록 13장은 서술한다. 온 땅이 상처가 나은 짐승에 놀라워하고 그를 따르며 경배한다. 덧붙여 사람들은 짐승에게 이렇게까지 말한다. “누가 이 짐승과 같으랴? 누가 이 짐승과 싸울 수 있으랴?”(묵시 13,4) 비교 불가의 권능을 칭송하는 이 문장은 하느님을 향한 경배의 전형이었다.(탈출 15,11; 신명 3,24; 시편 86,8; 113,5; 이사 40,25; 44,7 참조) 요컨대 상처를 입어 다시 살아온 짐승은 하느님과 같은 경배의 대상이 된 것이다. 죽음마저 비껴간 짐승이 하느님 자리를 꿰차는 것은, 하느님이 아니면서 하느님일 수 있는 이유는, 전적으로 짐승을 대하는 사람들의 해석에 달려있었다. 성당을 다니고 신앙을 지닌다고 해서, 하느님을 제대로 경배한다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하느님을 절대 경배의 대상으로 말하지만, 그 하느님이란 단어 안에 얼마나 많은 인간적 욕망이 뒤섞여 있을까. 하느님이 짐승이 되어버리는 일은 꽤나 쉬운 일이고, 불행히도 신앙인들 안에서 자주 목격되는 일이기도 하다. 악의 세력은 외부의 고통과 두려움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우리가 원하는 것, 그것이 짐승이 되는 것은 그것을 하느님으로 해석하는 우리의 욕망 때문이다. 글 _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8-24 제3455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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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박해에 대하여(묵시 12,13-18)

하늘의 표징이었던 용이 땅으로 떨어졌다. 그 옛날의 뱀이었던 용은 땅에서 여인을 추격하고 여인은 그런 용을 피해 달아난다. ‘피하다’로 번역한 그리스말 동사 ‘디오코’(διώκω)는 ‘박해하다’라는 뜻을 지닌다. 용은 여인을 박해한다. 그리고 여인은 용의 박해에 속수무책이다. 박해는 여인을 비껴가지 않는다. 박해는 여인을 쫓는다. 그러나 여인은 이상하리만큼 아무렇지 않다. 큰 독수리 날개 덕분이다. 독수리 날개는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을 탈출시킨 하느님의 권능을 드러내는 은유적 형상이다.(탈출 19,4; 신명 1,31-33 참조) 노예에서 자유로,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이행에 독수리의 날개는 하느님의 보호를 기리는 이스라엘의 갈망, 그 자체였다. 시편은 하느님의 보호를 이렇게 노래한다. “당신 눈동자처럼 저를 보호하소서. 당신 날개 그늘에 저를 숨겨 주소서.”(시편 17,8)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떠나 온 그 옛날의 사건은 이스라엘 역사 안에 수없이 호출되어 아픔과 슬픔, 괴로움과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은 여전히 이스라엘을 도우시고 지켜주신다는 믿음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 갔다. 박해는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박해는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맞닥뜨려야 할 운명과 같은 것이었고, 그 운명에 하느님은 함께하신다는 믿음이 또렷했다. 박해의 시간은 제한적이다. 여인이 박해를 피해 피신한 곳에서 보살핌을 받는 시간은 일 년과 이 년, 그리고 반 년의 시간이다. 앞서 살폈듯이 이 시간은 은유적이다. 기원전 2세기 중반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세의 박해 시간과 동일한 이 시간은 유다인이든 그리스도인이든 박해에 맞서 꿋꿋이 이겨낸 시간을 상징한다. 하느님의 보살핌의 시간은 실은 박해를 견디는 시간인 셈이다. 박해를 피한 시간이 아니라 박해 한가운데 머물며 하느님을 갈망한 시간이 일 년, 이 년, 그리고 반 년이었다. 용은 더욱 가열하게 여인을 박해한다. 용에게 여인은 사라져야 할 존재다.(묵시 12,15 참조) 강물 같은 물로 여인을 휩쓸어 버리려 한다. 구약에 보면, 하느님 백성이 겪는 박해를 은유적으로 묘사한 대목에서 파도나 물 등이 나타난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죽음의 파도가 나를 둘러싸고 멸망의 급류가 나를 들이쳤으며….”(시편 88,7) 아니면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들을 직접 심판하실 때도 큰 강물 같은 물줄기가 등장한다. “그러니 보라, 주님께서는 세차고 큰 강물이, 아시리아의 임금과 그의 모든 영광이 그들 위로 치솟아 오르게 하시리라. 그것은 강바닥마다 차올라 둑마다 넘쳐흐르리라.”(이사 8,7-8) 강물이 범람하여 큰물이 되었을 때, 그 위협적 장면은 죽음에 가까운 두려움을 형성한다. 여인이 하느님 백성을 가리키는 은유일 때, 용의 입에서 나오는 강물이 여인을 휩쓴다는 서술은 하느님 백성의 파멸이 용의 존재 이유이자 목적이라는 사실을 들추어낸다. 우리의 이야기는 또한 용을 ‘뱀’으로 고쳐 부르는데, 태곳적 뱀의 시간과 하느님 백성이 겪는 박해의 시간은 우리의 이야기 안에 함께 겹쳐져 하나의 시간으로 고정된다. 뱀의 시간이 근원적이고 근본적 시간이라면, 역사의 어떤 순간도 박해로부터 자유로운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하느님 백성의 운명은 박해와 함께 형성되고 흘러간다는 것. 어쩌면 박해의 시간이 하느님 백성의 정체성을 더욱 확고히 드러낸다는 것. 박해와 고통 들이닥치더라도 하느님의 보호와 도움 믿으며 기꺼이 짊어지려는 자세 필요 그러나 용의 박해는 큰 독수리 날개에 의해 실패했듯, 땅에 의해 또다시 실패한다. 땅이 물을 삼켜버렸기 때문이다. 탈출기의 한 장면이 떠오르는 대목인데, 이스라엘 백성을 쫓던 이집트 군사들이 홍해 바다에 빠진 것을 두고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노래 불렀다. “당신께서 오른손을 뻗으시니 땅이 그들을 삼켜 버렸습니다.”(탈출 15,12)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의 탈출을 하느님의 도우심의 결과로 이해하고 믿었다. 땅이 물을 삼켜 여인을 구해준 것은 그 옛날 하느님이 이스라엘의 탈출을 도우신 것을 염두에 둔 서술이다. 박해와 고난은 현존하되, 하느님 백성을 치지는 못한다. 삶의 고통은 여전하되, 하느님 백성의 존재함은 무너뜨리지 못한다. 삶의 고통은 비록 힘든 것이나, 삶 자체를 파괴하지는 못한다. 이스라엘은 이집트를 떠나 광야의 척박함을 맞닥뜨렸고 힘든 가운데 하느님을 체험했다. 사는 것과 힘든 것 사이에 이스라엘은 꿋꿋이 견디어 내었고, 그 인고의 삶을 하느님의 보호하심으로 되뇌고 곱씹는 일을 지금껏 해내고 있다. 이런 서사에서 배울 건 이런 게 아닐까. ‘하느님, 우리를 보호하시어, 우리의 고통을 없애주소서’라는 기도는 가급적 조심해야 한다는 것 말이다. 오히려 ‘하느님, 이 고통 속에 당신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혹은 ‘이 고통의 의미는 우리에게 무엇입니까’ 묻는 일이 기도여야 한다는 것 말이다. 이것은 고통에 대한 공부에 관한 것이다. 마침, 여인의 이야기는 그 후손들에게 고스란히 이어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17절에서 읽게 된다. “그러자 용은 여인 때문에 분개하여, 여인의 나머지 후손들, 곧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님의 증언을 간직하고 있는 이들과 싸우려고 그곳을 떠나갔습니다.” 여인의 후손을 가리켜 땅의 교회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땅에 살아가는 믿는 이들은 땅의 삶 한가운데서 계명을 지키고 증언을 실천한다. 용은 그런 여인의 후손들과 싸우려는 기세를 꺾지 않았다. 여인의 후손들은 박해와 고통에 대해 여전히 공부해야 한다. 공부의 끝은 영광과 기쁨 혹은 행복과 성공을 바라지 않는다. 박해와 고통은 오롯이 땅의 교회가 살아가는 삶 자체이므로, 어쩌면 교회의 본래 모습이기도 하겠다. 교회는 간절한 행복이 아니라 처절한 고통과 슬픔에 동반자가 되어야 할 일을 제 몫으로 살아내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용, 그 옛날 뱀과의 싸움을 우리 믿는 이들은 기꺼이 짊어질 수밖에. 박해와 고통은 막으려 덤벼들 일이 아니라 계명을 지키고 증언을 실천할 우리 믿는 이들의 처소라고 다짐하며. 고통에 대한 공부는 끝이 없다. 글 _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8-17 제3454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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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메시아의 승리(묵시 12,5-12)

여인이 아이를 낳았다. 아이는 사내아이였고 쇠지팡이로 모든 민족을 다스리실 분이다. 그러나 아이의 탄생은 용의 저항과 함께 서술된다. 용은 사내아이를 삼키려 했다. ‘삼키다’로 번역된 ‘카테스티오’(κατεσθίω)는 완전히 먹어 치워 그 흔적을 남기지 않는 파멸에 가까운 뜻을 지닌다. 한쪽은 생명의 시작을, 다른 한쪽은 생명의 파괴를 말하고 있는 서사의 대립은 하늘이라는 공간에서 펼쳐진다. 사내아이는 하늘의 어좌로 들어 올려졌다. 사내아이의 승천을 두고 메시아의 승리로 해석하기도 한다. 사내아이의 운명에 대해 쇠 지팡이로 모든 민족을 다스린다는 시편 2장 9절의 내용을 인용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내아이를 예수님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프랑스 성서신학자인 A. 프이에(A. Feuillet) 신부는 사내아이의 탄생을 부활의 아침으로, 여인이 겪는 산고의 고통을 예수님의 수난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런 전통적 해석은 요한복음을 통해서도 강조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십자가와 부활을 여인의 산고와 아이의 출생에 빗대어 말씀하신다.(요한 16,19-22 참조) 그럼에도 전통적 해석들은 한 가지 의문을 남긴다. 메시아가 하느님 백성 혹은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관련된 존재라면 이 땅 위에서 펼쳐지는 메시아의 활동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 메시아라는 말마디 자체가 땅과 관련된 개념일진대, 메시아인 사내아이는 태어나자마자 곧장 하늘의 어좌로 들어 올려지고 만다. 메시아로서 이 지상을 쇠 지팡이로 다스리는 일은 예고되었으나 서술되지 않는다. 지상의 하느님 백성 안에 메시아의 역할은 더 이상 언급되지 않는다. 반면, 여인은 광야로 달아난다. 여인은 하느님 백성,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가리키는 형상이다. 하늘로 올라간 메시아와 달리 광야로 달아나는 하느님 백성을 우리는 어떻게 소화할 것인가? 메시아와 더불어 천상의 기쁨을 누려야 할 것 같은 상식적 바람은 광야라는 공간 앞에 허무하게 무너진다. 메시아 삼키려던 용 떨어지며 미카엘 천사와의 전쟁서 패배 속임수 안에서도 굴하지 않고 증언 통해 전지전능함 드러내 요한묵시록, 나아가 요한계 문헌의 전형적 특징은 대립적 공간,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광야를 두고도 마찬가지다. 하느님의 보살핌을 받는 곳이 광야라고 선언한다. 여인은 천이백육십일 동안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처소에서 보살핌을 받는다. 천이백육십일은 기원전 2세기 셀류코스 왕조의 왕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누스가 유다를 박해한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한 상징적 숫자다. 그 박해는 삼 년 반 동안 이어졌고, 삼 년 반의 시간은 마흔두 달로, 혹은 천이백육십일로 달리 표현된다. 박해의 시간과 광야의 공간은 서로 상응한다. 사실 광야는 하느님의 이끄심으로 노예와 죽음, 억압과 고통의 땅 이집트를 떠나 가나안 복지로 걸어가는 필연의 공간이었다. 광야의 공간은 구원의 설렘을 담아낸 공간이었고 하느님을 체험한, 그리하여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백성으로 거듭나는 자리였다. 척박한 광야는 하느님의 자비로 가득 차게 되었다. 하느님의 백성, 메시아를 삼키려 했던 용은 어떻게 되었나. 사탄은 떨어졌다. ‘떨어졌다’라는 동사가 9절에 세 번이나 반복된다. 미카엘 천사와의 전쟁에서 패했기 때문인데, 미카엘은 하느님의 보호로 이스라엘을 지키는 천사로 구약은 소개한다.(다니 10,13.21; 12,1 참조) 욥기에 따르면 사탄 역시 하늘에 오르고 하늘의 어좌에 다가설 수 있었다. 사탄이라도 본디 자리는 하늘이었다는 것. 그러나 ‘이사야의 승천’이라는 묵시문학 작품은 하느님의 어좌 곁에 있던 사탄은 끝내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져 하늘 아래 어느 지역에 떨어지고 말았다는 이야기를 전한다.(이사야의 승천 7,9 이하 참조) 사탄은 스스로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캐릭터로 해석되고 전해졌다. 요한묵시록 역시 하느님의 보호를 상징하는 미카엘 천사를 등장시켜 전쟁의 형식을 통해 사탄의 성격을 다시금 복기하고 있다. 사탄은 하느님의 자리와 그분의 보호를 막아서고 저항할 수 없다. 사실 용은 사내아이를 삼키려 했으나 삼키지 못했고 그러므로 용은 무력했다. 사내아이는 살아남아 메시아로서의 위용을 떨친다. 용의 저항은 실패했는데, 그 실패의 원인을 요한묵시록은 서술하지 않는다. 다만 사내아이를 삼키고자 하는 ‘원의’만을 언급할 뿐이다. 사탄은 옛날의 뱀이었다. 사탄을 그리스말로 바꾸면 ‘갈라지다’는 뜻을 지닌 ‘디아볼로스’(διάβολος)이고 우리말로 ‘악마’라 한다. ‘세상을 속이는 것’이 사탄의 일이고 악마의 일이다. 그 옛날 뱀이 그랬다. 하와를 속여 아담을 속이게 했고, 그로써 하느님과의 관계를 요원한 것으로 갈라치고 말았다. 옛날의 뱀인 사탄은 그의 부하들과 함께 떨어져 땅이라는 공간을 제 근거지로 차지하고야 만다. 땅은 그리하여 속고 속이는 공간으로, 믿는 이를 고발하는 공간으로 전락하고 만다. 하늘과 땅은 그렇게 갈라지고 땅은 불행의 공간이 되어버린다.(묵시 12,12 참조) 그러나, 바로 이러한 땅은 믿는 이의 ‘형제들’이 어린양의 피와 더불어 증언을 살아가야 할 공간이기도 하다. 메시아가 탄생하고, 승리의 기쁨을 노래하는 이유는 이 땅 위에 믿는 이들의 증언이 펄펄 살아있기 때문이다. 어떠한 속임수에도 굴하지 않고, 속임수 안에서도 진리와 신앙과 사랑을 증거할 형제들이 여전히 이 땅 위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묵시 12,11 참조) 메시아는 믿는 이들을 통해 당신의 승리를 자축하신다. 어쩌면 하느님은 참으로 무력하시다. 우리 믿는 이들의 증언 외에 다른 방법으로 당신을 드러내실 수 없을 만큼 하느님은 무력하다. 그러나 하느님은 참으로 전지전능하시다. 당신의 그 무한한 권능으로 마음껏 호령할 수 있는 세상을, 당신을 믿고 따르는 이들의 가냘프고 소박한 증언의 방식으로 끝없이 사랑하고, 또 사랑하실 만큼 전지전능하시다.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8-03 제3453호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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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하늘의 큰 표징(묵시 12,1-4)

묵시록 12장은 불쑥 튀어나온 느낌이다. 이를테면, 외길을 걷다 낯선 갈림길을 맞닥뜨린 것 같은 느낌말이다. 11장까지 일곱 나팔을 차례로 읽어 나가다가 갑자기 하늘에 큰 표징, 그러니까 여인과 용을 만나게 된다. 여인을 두고 이사야서 7장 14절의 말씀을 떠올리곤 한다. 이른바 임마누엘 신탁인데, 아시리아 제국의 침략으로 두려움에 떨던 유다 왕조의 앞길에 하느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예언자의 위로를 담고 있는 신탁이다. 유다 임금 아하즈는 아들을 갖게 될 것이며 그 아들 덕분에 유다 왕조는 멸망하지 않으니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라는 메시지도 신탁 안에 담겨 있다. 이 신탁은 후에 메시아에 대한 기대와 맞물려 하느님께서 이 세상 구원을 위해 직접 개입하실 것이라는 믿음의 근거로 자주 인용되었다. 예수님을 참된 메시아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임마누엘 신탁을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에 접목하여 소개하기도 했다.(마태 1,23 참조) 학자들은 묵시록 12장의 큰 표징인 여인의 형상을 통해 메시아를 기다리는 유다교회를 가리킨다고 해석한다. 여인은 열두 개의 별로 된 관을 쓰고 있다. 열두 지파를 가리키는 열두 개의 별 덕분에 하느님의 백성을 가리키는 전통적 형상으로 여인을 이해하는 데 무리는 없다. 여인이 아기를 배고 있는 장면은 하느님 백성 안에 메시아의 탄생이 임박했다는 전통적 예언의 한 형태다.(이사 66,7 참조) 해산의 진통과 괴로움은 메시아 시대가 오기 전 겪어야 할 시대의 아픔과 박해를 가리키는 것이다.(이사 13,8; 호세 13,13; 마태 24 참조) 그러니까 묵시록 12장의 여인은 유다 사회가 간직한 메시아에 대한 믿음의 표현들로 치장되어 있다. 그러나 여인만이 큰 표징으로 소개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묵시록 12장 3절에 붉은 용이 또 다른 표징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용의 형상은 고대 근동 안에서 혼돈과 어둠을 가리키는 악의 세력을 암시한다. 구약성경 역시 용을 그렇게 이해했다.(욥 7,12; 아모 9,3; 이사 27,1 참조) 용은 붉은 색을 띈다. 묵시록 6장 4절에 나타난 붉은 말의 색과 같다. 전쟁과 살인의 색이 붉은 색이어서 용을 형용하는 색은 용의 살인적 폭력성을, 그의 악함을 더욱 짙게 드러낸다. 용은 일곱 머리를 지니는데, 악함의 또 다른 상징들, 그러니까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묵시 13,1 참조)과 대탕녀 바빌론이 타고 있는 짐승(묵시 17,3 참조) 역시 머리가 일곱이다. 일곱이라는 숫자의 보편성과 전체성을 감안하면 악의 힘 역시 강하고 위대하다는, 그래서 묵시록 5장의 어린양과 대적할 만큼의 힘이 있다는 식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사실 악의 힘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 하느님의 백성을 가리키는 여인을 쫓아가기도 하고 그 여인을 휩쓸어 버리려고 했고, 여인의 후손들과 싸우려고 덤벼들고 있다. 악은 늘 우리 곁에 머물며, 우리와 싸우고자 한다. 악은 힘이 빠지지 않는다. 용은 열 개의 뿔도 가지고 있다. 묵시록 17장 12절은 열 개의 뿔을 열 임금으로 규정한다. 뿔의 형상은 그러므로 세상 임금의 다스림을 상징한다. 하늘의 큰 표징인 용이 땅의 다스림을 가리키는 열 개의 뿔을 지닌다는 건, 악에 대한 정신적이고, 추상적인 해석에 대한 하나의 경고와 같다. 악은 현실적이다. 우리의 정치, 경제, 문화 안에서, 우리 인간의 삶과 생각 그리고 행동들 안에서 악함은 상존한다. 특별히 용의 일곱 머리에 씌워진 작은 ‘관’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관은 임금의 것이고 그의 다스림을 상징한다. 세상을 다스리는 이들을 암시하는 요소들이 용을 형용하는 데 사용된다는 것은 세상의 위정자들, 특별히 로마제국의 정치와 경제, 문화에 대해 묵시록은 비판적이라는 것이다.(이와 관련해서는 묵시록 17, 18장 대탕녀 바빌론 이야기에서 충분히 설명할 것이다) 용은 천상의 사변적 형상이 아니라 이 땅 위 실제 권력을 비판하기 위한 소재다. 용은 그러므로 현실적이다. 지금도 용은 세상의 몇몇 위정자들과 정치 모리배들을 통해 구체화되고 있다. 용은 또한 꼬리를 가지고 있다.(묵시 12,4 참조)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휩쓸어 땅으로 던지는 데 용은 꼬리를 사용한다. 다니엘서 8장을 보면 셀레우코스 제국의 임금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를 가리키는 ‘작은 뿔’이 등장한다. 그 뿔은 하늘까지 다다라 거기서 별들을 떨어뜨린다.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는 유다를 박해했고 예루살렘 성전을 더럽혔다. 유다인들은 그의 박해를 세상 종말의 징표로 보았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분기하여 마카베오 항쟁을 이끌었다. 항쟁의 결과는 놀랍게도 유다 사회의 승리로 이어졌다. 물론 셀레우코스 제국은 이미 쇠퇴했고 로마 제국은 아직 유다 땅까지 세력을 펼치지 못했기에 힘의 진공 상태여서 가능한 승리였다. 유다 사회는 하스모네아 왕조를 이루었고 기원전 63년 로마 제국이 예루살렘을 점령할 때까지 100여 년 독립의 형태로 남아 있었다. 용의 꼬리는 유다 사회가 겪은 역사의 아픔과 박해를 암시한다. 용의 꼬리는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고, 또 다른 역사의 아픔을 다룰 때 어김없이 되살아나 악의 세력을 규정하는 은유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묵시록 12장은 이제 본격적으로 악의 세력을 분해하고 분석하여 그 실체를 파헤치려 한다. 악은 저 멀리서 찾아오는 불청객이 아니라 여인, 곧 메시아를 품고 있는 하느님 백성 한 가운데 버젓이 등장하고 활약한다. 악을 식별하여 선을 행하는 것은 선을 향하는 길목에서가 아니라 악에 대한 정확한 해석의 자리에서 가능하다. 불편하지만, 악함에 대한 고민을 본격적으로 다뤄봐야 한다. 우리 삶 어디에 묵시록 12장의 용이 똬리를 틀고 앉아 있는지…. 우리는 물어야 한다.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7-27 제3452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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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또다시 하늘(묵시 11,15-19)

일곱째 나팔이 울린다. 나팔이 울릴 때마다 펼쳐졌던 재앙과 환난의 끝은 일곱째 나팔로 사라진다. 일곱 봉인에서도 그랬다. 일곱째, 그 마지막 순간에 하늘은 어김없이 나타난다. 일곱째 나팔이 울릴 때, 하늘은 재앙을 걷어내고 희망과 영광을 드러낸다. 하늘의 큰 목소리가 이렇게 말한다. “세상 나라가 우리 주님과 그분께서 세우신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었다.”(묵시 11,15) ‘세상 나라(ἡ βασιλεία τοῦ κόσμου)’라는 말마디는 그리 유쾌하지 않다. 예수께서 유혹을 받으실 때, 사탄이 호령하는 나라가 세상 나라였다.(마태 4,8 참조) 묵시록에서도 세상을 호령하는 땅의 임금들은 예수님과 대척점에 서서 사탄에 부역하는 존재로 묘사된다.(묵시록 17~19장) 일곱째 나팔은 세상 나라와 예수님과의 대립 구도를 더 이상 허락하지 않는다. 세상 나라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었다고 선포한다. 그러니까, 이제 우리에겐 두 세상의 갈등이나 대립은 남아 있지 않다. 앞서 펼쳐진 온갖 재앙들의 의미는 일곱째 나팔의 시간에서야 비로소 참된 의미를 지닌다. 어긋난 이들에 대한 단죄나 심판, 혹은 하느님을 따르지 않은 이들에 대한 복수, 그로 인한 숱한 재앙의 장면들은 그리스도의 나라를 맞춰 가기 위한 여러 개의 조각이었고 일곱째 나팔은 그 조각들 모두가 하늘을 수놓는 데 필요한 것이라고 선언하는 셈이다. 우리 눈에 어긋나는 일과 부족한 삶에서조차도 그리스도의 나라는 여전히 세워지고 있다는 사실은 깨끗하고 고와서 선하고 아름다운 일과 삶 안에만 신앙의 본령이 존재한다는 환상을 미련 없이 포기하게 만든다. 스물네 원로의 경배는 이런 서사의 맥락을 더욱 견고히 한다.(묵시 11,14-18 참조) 그리스도의 나라는 하느님의 다스림이 이 땅 위에 실현된다는 것. 학자들은 이러한 경배의 말마디 안에서 구원의 ‘완성’을 읽어낸다. 그러니까, 이러저러한 인간 세상의 불의와 슬픔과 고통이 지나가고 다만 하느님의 다스림이 가득한 종말의 시간이 예수님의 등장으로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완성’이라는 표현은 일련의 시간이 지난 뒤에 펼쳐지는 결과론적 선물을 가리키지 않는다. 스물네 원로는 하느님을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던’ 하느님으로 인식한다. 하느님은 언제나 한결같이 ‘완성’의 시간을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태초부터 우리는 완성을 살고 있고, 마지막을 처음처럼 살아간다. 다만 우리는 지금을 완성으로 보지 않고 미래 어느 시간의 화려함을 완성으로 규정한 채 지금을 결핍의 시간으로 쉽게 규정하고 만다. 그로 인해, 지금은 늘 목마르고 배고프다. 스물네 원로가 말하는 하느님의 다스림은 부족한 우리의 일상이 하느님의 시공간에서 펼쳐지는 완성의 자리임을 고백하는, ‘나 자신과의 화해’가 아닐까. 그러나 누군가에게 ‘지금’은 하느님의 심판의 때이기도 하다. 18절에 민족들이 분개하는 것은 하느님의 시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배타적 완고함을 가리킨다. 반면 하느님의 종 예언자와 성도들은 ‘하느님의 이름’을 경외한다. 그들에겐 상이 주어질 것이다. 사도행전은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들’이란 표현을 유다인으로서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을 가리킬 때 사용했다.(사도 13,16.43.50 참조) 사도 바오로는 성도들이란 표현을 통해 우상 숭배에 결연히 저항하는 이들을 소개한다.(로마 15,26.31; 1코린 16,1.15 참조) 사도 바오로에게 우상 숭배는 제 신념과 신앙을 절대시하여 다른 이들에게 배타적인 이들의 삶의 태도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예언자와 성도들은 어떤 고귀한 신앙적 가치를 추구하고 실천하는 이들이 아니다. 다만 하느님께로 열려 있어 제 삶의 자리를 완고함과 배타심으로 분칠하지 않는, 그리하여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 묻기보다, 더불어 살아가기를 원하는 이들이다. 희망·영광 드러낸 일곱째 나팔 미래 다른 곳 아닌 지금 이 땅에 하느님의 다스림 실현되는 것 우리 일상이 바로 완성의 자리 완고함과 배타심으로 살아가는 이들은 파멸로 향하게 된다.(묵시 11,18 참조) 파멸은 하느님을 맞서는 이들을 향한 경고의 메시지 안에 자주 등장했다.(예레 51,25 참조) 다만, 우리의 본문에서 파멸은 ‘땅’을 파괴하는 자들을 향한다. 하느님을 적대시하는 게 아니라 땅을 파괴하는 자들을 파멸한다고 스물네 원로는 말하고 있다. 꽤나 흥미로운 지점이다. 하늘을 향하고 하느님을 배척해서 파멸의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이 땅을 파괴하는 자들이 하느님의 심판을 피해 갈 수 없다는 것은 땅을 하늘로 봐야만 가능한 생각이다. 우리가 지향하는 천상은 실은 이 지상을 회피하고픈 절망과 비겁함일 수도 있다. 하느님을 찾아 나서는 것이 현실의 삶을 죄악시하고, 그 삶을 비루하게 여기는 이들의 교만이 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인간으로 오셨지만 우리는 저 하늘에 천사처럼 살고자 갈망하는 건 아닐까. 그 갈망이 인간이 되신 하느님을 죽였다. 파멸에 대한 예고는 다만 하늘의 성전이 열리고 하느님의 현존을 가리키는 계약 궤가 등장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묵시 11,19 참조) 번개와 요란한 소리, 천둥과 지진들 역시 하느님의 현존을 알리는 전통적 은유다. 땅을 파괴하는 자들에 대한 심판은 또 다른 폭력이나 억압, 혹은 재앙이 아니라 하느님의 등장이라는 서사의 흐름으로 이어진다. 강렬하다. 그러니까 심판은 결국 하느님을 또다시 소개하는 일이 된다. 하느님은 이렇게 인간 앞에 무력하다. 사랑이 가득한 분은 늘 그렇게 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다시 땅 위의 완고한 이들에게 천상을 열어 보임으로써, 하느님은 다만 끝없는 사랑으로 남으실 뿐이다.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7-20 제3451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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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죽어서 사는 일, 증언(묵시 11,7-14)

증언의 끝은 불행히도 죽음이다. 예수님을 증언하고 신앙을 살아가는 일의 끝이 죽음이라는 사실은 지난한 신앙의 역사가 증언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아이러니한 것은 신앙을 살면서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게 우리이지만 실은 세상에서 실패한 삶이 순교였고 증언이었다는 사실을 또한 인지하고 추앙하는 우리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묵시록 11장의 두 증인의 죽음은 신앙의 결과가 참혹한 실패라는 ‘사실’에 대한 복기이자 해석이다. 두 증인의 죽음은 땅의 주민들을 기쁘게 하는 대상이 된다.(묵시 11,10 참조) 순교나 신앙의 증거는 세상 안에서의 실패나 참혹한 결과를 비껴가지 않는다. 두 증인은 정확히 죽임을 당했고 그들의 죽음은 세상의 조소거리가 되었다는 사실을 담담히 읽어내야 한다. 그러나 이 죽음은 악의 승리가 가져온 결과가 아니다. 묵시록 11장의 동사 시제를 살펴보면 그렇다. 지하에서 올라오는 짐승이 싸워 이기는 대목에 사용된 동사는 미래형이다. 악의 승리는 여전히 요원하다. 우리는 묵시록 12장(1~8절)에서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을 또한 만나게 된다. 성도들과 싸워 이기는 권한이 주어진 짐승이지만 현실적인 전쟁이나 다툼은 묘사되지 않는다. 악의 존재는 서술하되, 그 권한이나 능력의 실행은 철저히 제한하는 묵시록의 서술 방식이다. 두 증인의 죽음을 가리키는 동사는 ‘현재형’이다. 두 증인의 죽음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캐릭터는 ‘모든 백성과 종족과 언어와 민족에 속한 사람들’, 말하자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다. 다른 표현으론 ‘땅의 주민들’이기도 하다. 텍스트의 ‘지금’은 두 증인의 주검을 바라보는 세상 사람들의 해석(기뻐하고 즐거워하는)의 시간에 집중하고 있다. 악의 세력에 의한 두 증인의 실패가 아니라 두 증인의 주검에 대한 해석과 읽기가 우리 이야기의 현재다. 악의 세력은 두렵고 짐승의 힘은 대단한듯 하나 미래에 일어날, 그래서 지금은 공허하고 허무한 힘일 뿐이다. 지금의 시간은, 증언하는 일이 실은 죽는 일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인지 묻는 시간이다. 우리 이야기의 공간적 구성 역시 그러하다. 두 증인의 주검은 ‘큰 도성의 한 길’, ‘소돔과 고모라, 혹은 이집트’라고도 하는 도성에 버려져 있다.(묵시 11,8 참조) 이 도성을 해석하는 스펙트럼은 ‘영적인 눈’이다.(이 도성은 ‘영적으로(πνευματικῶς) 불린다’라고 본문은 말한다) 현실의 공간을 영적으로 바라보는 일은 이미 사라진 저 옛날의 소돔과 고모라, 이집트까지 죄다 불러와 현실의 공간에 새로운 의미를 투사하는 해석학적 작업이다. 소돔과 고모라, 이집트는 이스라엘에게 있어 심판과 단죄의 공간이었다. 우리의 이야기는 여기에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공간’이라는 서술을 덧붙인다. 악에 대한 심판의 공간 안에 구원의 완성이 이루어진다는 것. 악함의 한가운데 두 증인의 주검이 있고 그것이 바로 구원의 자리라는 역설이 묵시록이 꾸며놓는 시·공간의 묘미다. 증인들의 주검은 주님이 함께하는 구원의 공간을 가리키는 지시체다. 묵시록 서사의 전형적 특징이 매번 이렇다. 선악의 완전한 구분을 이야기하는 얄팍한 이원론이 끼어들 틈이 없다. 두 증인의 주검을 바라보고 기뻐하던 ‘모든 백성과 종족과 언어와 민족’은 묵시록 5장의 어린양이 속량한 사람들이기도 하다.(묵시 5,9 참조) 우리 모두는 선하기도 하고 동시에 악하기도 하다. 선악을 무 자르듯 딱 갈라놓고 생각할 수 있는 편리함은 이 세상에 애시당초 존재하는 게 아니다. 땅의 주민들이 두 증인의 주검을 두고 기뻐하고 서로 선물을 주고받는 것은 두 증인이 선포한 예언의 말들이 그들을 괴롭혔기 때문이고 두 증인의 죽음으로 그 괴롭힘이 사라졌을 것이라 그들이 믿었기 때문이리라.(묵시 11,10 참조) 그러나 이 기쁨은 단지 사흘 반의 시간에만 가능한 것이다.(묵시 11,11 참조) 마흔두 달, 천이백육십 일, 그리고 삼 년과 반 년의 시간들과 의미를 같이 하는 ‘사흘 반’의 시간은 완전 수 ‘7’이 반토막 난, 그리하여 미완의 시간으로 남는다. 땅의 주민들이 나누는 기쁨은 한시적일 뿐이다. 우리 이야기의 읽기는 한시적인 기쁨이 어떤 식으로 변하는지 세심히 살펴보는 데 있다. 악에 대한 심판의 공간에서 구원의 완성 이뤄지는 역설 ‘두 증인’ 죽었다가 살아나며 하느님 향한 끝없는 여정 증언 사흘 반이 지나고 두 증인은 제 발로 일어선다. 주검이 생명을 얻는 것은 오로지 하느님에게서 생명의 숨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주석학자들 대부분은 이스라엘의 재건을 비유적으로 이야기하는 에제키엘서 37장의 ‘마른 뼈’를 떠올린다. 마른 뼈가 힘줄과 살이 붙어 다시 살아난다는 이야기는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다시 부흥케 하리라는 희망을 노래한다. 묵시록 11장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이 땅에서의 부흥이 아니라 구름을 타고 하늘까지 올라가는 두 증인의 모습을 기록하기 때문이다.(묵시 11,12 참조) 전통적인 주석학자들은 하늘을 오르는 두 증인이 구약의 엘리야와 모세라고 해석하기도 한다.(2열왕 2,11 참조) 그리스도교의 관점에서 베드로와 바오로라고 이해하는 전통 역시 존재한다. 그러나, 두 증인을 역사의 어느 인물로 고정할 필요가 있을까. 세상 모든 민족을 향해 예언의 말씀을 선포한 이들이 하느님을 향하고 하느님 안에서 영광을 드리는 지표와 모범이 된 것이 역사 속 한두 명의 일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두 증인이 하늘로 오르는 그때, 큰 지진이 일어나 도성 십분의 일이 무너졌고 칠천 명의 사람이 죽었다.(묵시 11,13 참조) 마지막 때를 가리키는 천재지변과 땅의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서술은 ‘남은 사람들’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회개의 문학적 장치다. 두 증인의 죽음으로 시작한 세상 사람들의 한시적 기쁨은 하느님을 향한 회개에로 향하고 있다. 첫째, 둘째, 그리고 셋째, 나아가 무수히 많은 불행과 고통과 비참함이 우리 생에 닥치더라도 신앙인은 그 자리를 하느님을 향한 끊임없는 여정의 한 대목으로 이해한다는 다소 투박하지만 여전히 필요한 이야기가 묵시록 11장이 전하는 두 증인의 이야기다. 증언의 끝은 세상에서 죽음으로 결판난다. 그러나 그 죽음은 비로소 생명의 가치를, 그 본령이신 하느님을 알아가는 출발점이 된다. 우리는 그렇게 또 죽어간다, 살기 위해서!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7-13 제3450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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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예언의 힘(묵시 11,1-6)

요한묵시록 10장에서 예언자 소명을 받은 요한은 11장에 들어서면서 지팡이 같은 하나의 잣대를 받는다. 그 잣대로 성전과 제단, 그리고 그곳에 있는 이들의 수를 측량하라는 말씀을 요한은 듣는다. 에제키엘서(40~43장)에서도 성전을 측량하는 이야기가 있다. 바빌론에 유배간 유다 민족을 위해 이미 사라졌으나 여전히 갈망의 대상으로 남아 있는 성전을 이상적으로 소개하는 이야기다. 대개의 주석학자들은 에제키엘서와 요한묵시록 11장을 함께 열거하면서 위로와 격려의 예언자적 소명을 짚어내곤 한다. 에제키엘이든 요한이든 어려운 시기에 하느님의 보호로 굳건히 살아가자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게 예언자적 소명이라는 것이다. 성전이란 형상은 하느님의 현존을 가리키고 어렵고 힘든 시간, 하느님은 늘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위로와 희망이 성전을 측량하는 이야기 안에 스며들어 있다. 그러나 요한묵시록 11장은 에제키엘서의 성전 측량과 다르다. 측량의 수치는 나타나지 않고 다만 측량의 행위가 서로 다른 두 공간의 분리를 만들어낸다. 요한은 성전을 측량함으로써 성전 바깥뜰, 그러니까 이민족들의 공간을 분리해낸다.(묵시 11,2) 성전 바깥뜰의 이민족은 폭력적 캐릭터로 묘사된다. “그들이 거룩한 도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을 것이다.”(묵시 11,2) 폭력과 분리된 듯 서술되어야 할 거룩한 도성은 더 이상 평온하지 않다. 불행히도 거룩한 공간이 폭력의 공간이 된다. 성전과 성전 바깥뜰로 구분된 두 공간은 폭력으로 점철된 하나의 공간이 되었다. 요한묵시록의 공간적 배치는 늘 이렇다. 천상이 지상 속에 스며들고 지상이 천상의 공간으로 확대되며, 선과 악이 하나의 공간 안에 뒤엉켜 각각의 의미를 더욱 섬세히 살펴보게 독자를 이끈다. 세상의 일이란 게 이분법으로 명확히 구분되는 논리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건 우리의 경험칙에서 얻을 수 있는 평범한 지혜다. 요한묵시록은 거룩함을 지켜내는 게 아니라 오히려 폭력과 악의 세력 안으로 밀쳐 넣는다. 거룩함은 천상에서 홀로 빛나지 않는다. 성전은 홀로 거룩해서 세상을 등진 공간이 아니다. 세상 속, 그 어두움 속에서 성전은 반드시 세워지고 꾸며져야 한다. 이민족의 폭력은 마흔두 달이라는 시간으로 제한된다. 마흔두 달과 관련해서 요한묵시록은 1260일(묵시 12,6 참조)과 3년 그리고 반년(묵시 11,3; 12,14 참조)의 시간으로 다시 소개한다. 같은 시간을 다른 표현으로 곱씹는 이유와 관련해서 대개의 주석학자들은 다니엘서 7장 25절이 암시하는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 임금(기원전 175~163년)의 박해 시절을 떠올린다. 역사의 한 사건은 그것이 폭력적이고 참담할수록 깊고 묵직한 슬픔과 상처를 남긴다. 기원전 2세기의 그 박해는 요한묵시록이 쓰인 기원후 1세기 말엽에까지 이어져 어렵고 힘든 모든 시절의 메타포로 작동한다. 마흔두 달은 거룩한 도성, 거룩한 백성이 살아내는 모든 시간들의 상처가 된다. 그럼에도 상처의 시간은 절망과 소외의 시간이 아니라 예언의 시간이어야 한다.(묵시 11,3) 두 올리브 나무와 두 등잔대로 상징화된 두 증인이 나타난다. 유다 전통에서 두 올리브는 이스라엘의 두 영웅, 그러니까 대사제 여호수아와 세상의 지도자 즈루빠벨을 암시한다.(즈카 4,1-14 참조) 종교와 정치의 영역을 아우르는 두 영웅은 마지막 시대, 메시아의 등장을 기다리는 (기원전 2세기 무렵부터 시작된) 묵시주의의 시대에 이르러 종말론적 영웅으로 재해석되었다. 구원 상징하는 ‘두 증인’ 등장 박해 시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님 함께하신다는 위로 전달 강력한 하느님 권능 재확인 역사의 두 영웅은 구원과 희망의 상징으로 거듭났고 두 증인을 소개하는 요한묵시록은 폭력의 시대 앞에 선 그리스도인들을 염두에 두었을 터. 좌절하지 말고 슬퍼하지 말고 두 증인을 통해 희망을 견지하라는 메시지를 독자들에게 건네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두 증인을 소개하는 서사는 역사 속 하느님의 권능을 배경으로 더욱 힘찬 형식을 빌어 진행된다. 희망은 분명하게 강력한 것이어야 한다는 다짐을 한 것 마냥 두 증인에 대한 묘사는 단단하고 선명하다. 먼저 두 증인 입에서 나오는 불이다.(묵시 11,5 참조) 원수를 삼킬 정도로 강력한 불은 하느님의 분노를 가리키는 전형적 은유다.(2열왕 1,10 이하; 루카 9,54 참조) 하느님은 당신의 말씀을 전하고 실천하는 모든 이들을 악의 세력으로부터 보호하신다는 전통적 믿음이 불이라는 형상 속에 스며들어 있다. 여기에 덧붙여 두 증인은 하늘을 닫는 권한도 지닌다. 하늘을 닫는 권능은 엘리야의 이야기를 참조한 듯하다.(1열왕 17,1)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엘리야를 통한 하느님의 힘찬 권능에 대한 이야기를 소중히 여겨 예수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와 그분을 향한 믿음의 근거로 사용하기도 한다.(루카 4,25; 야고 5,17 참조) 물을 핏빛으로 만드는 모세의 이야기도 첨가된다.(탈출 7,17 참조) 모세는 그야말로 민족의 영웅이고 하느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을 당신 백성으로서 역사의 전면에 내세우셨다. 두 증인이 모세처럼 꾸며지는 건, 어떤 순간에도 하느님의 역사하심은 계속될 것이라는 믿음과 희망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것이리라. 두 증인에 대한 묘사는 11장 6절 후반부에 이르러 절정에 치닫는다. “원할 때마다 온갖 재앙으로 이 땅을 치는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만이 아닌, 특정 민족이나 공간에 치우치지 않는, 그리하여 온 세상 위로 권능을 떨치는 두 증인의 모습은 경이롭다. 그 누구도 대적 못 할 두 증인이기에 그들이 존재하는 한, 예언의 힘은 맹위를 떨칠 것이다. 그런데, 두 증인은 자루 옷을 입고 있었다.(묵시 11,3 참조) 마흔두 달, 천이백육십 일 동안 자루 옷은 두 증인을 감싸고 있었다. 자루 옷은 고통과 회개의 은유로 사용된다.(이사 22,12; 예레 4,8; 마태 11,21) 요한묵시록은 천상의 기쁨, 영광 혹은 권능을 드러낼 때 ‘흰 겉옷’을 사용한다. 자루 옷은 아니다. 두 증인의 옷차림에서 요한묵시록 서사의 긴장이 진하게 느껴진다. 예언자의 운명은 그리 영광스럽거나 화려하지 않다는 것. 그들은 고통과 회개의 길을 묵묵히 걸어갈 것이다. 그래서인가. 11장 7절에 다다를 때, 두 증인은 죽음을 맞닥뜨리고 만다. 그들의 죽음이 무엇인지…, 우리는 밝혀야 한다.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7-06 제3449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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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작은 두루마리(요한 묵시록 10장)

마지막 일곱 번째 나팔이 울려 퍼지기 전, 작은 두루마리를 펴 들고 있는 천사가 나타난다. 구름에 휩싸인 천사의 모습은 마지막 시대 메시아의 개입을 알리는 ‘사람의 아들’(다니 7,13 참조)과 닮았고 당신 백성 앞에 장엄히 나타나시는 하느님에 대한 서술과도 닮았다.(탈출 16,10; 1열왕 8,10 참조) 천사는 땅과 바다를 발판 삼아 서 있다. 천상과 지상의 공간적 구분은 천사의 형상 안에서 희미해지고, 희미해진 만큼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렸다. 인간 역사 안에, 백성들 삶 한가운데 천상의 섭리가 천사를 통해 구현된다. 천사의 머리 위 무지개는 그래서 특별하다. 하느님과 인간 세상을 연결하는 계약의 상징인 ‘무지개’(창세 9,13 참조). 천사는 하늘과 땅, 하느님과 인간이 비로소 하나가 되었다는 메타포로 등장한다. 천사를 둘러싼 시간적 구성도 매한가지다. 천사가 등장하는 시간은 ‘얼마 남지 않은 시간’(묵시 10,6 참조)이다. 우리말 성경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라 번역했지만, 그리스말 본문은 ‘더 이상 존재할 시간이 없는 시간’을 가리킨다. 머뭇거리거나 기다릴 시간이 더 이상 주어지지 않는 시간은 도대체 어떤 시간일까. 천사의 모습을 다시 한번 살펴봐야 한다. 더 이상 머뭇거리거나 기다릴 시간이 없는 그 시간에 천사는 창조의 하느님을 호출하고 그분을 두고 맹세한다. 이 맹세는 마지막 때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을 두고 맹세한 대목과 겹친다(다니 12,7 참조). 다른 시간을 허용하지 않아 더 이상의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그 시간은 사실 마지막, 완성의 시간이(어야 한)다. 태초에 하늘과 땅을 만드시는 하느님께 맹세하는 천사는 마지막 종말의 때를 이야기 한가운데로 끌고 들어온다. 처음과 끝이 하나가 된다. 우리의 이야기는 ‘일곱 번째 나팔 소리가 울리는 시간’ 또한 소개하고 있다.(묵시 10,7 참조) 혹자는 ‘아직 다다르지 않은 종말의 시간’이라고 해석하고 종말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과도기적 시간이 우리 이야기의 시간적 배경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런 관점으로 해석하다 보면 우리말 성경처럼 하느님의 섭리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아 그 완성의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는 식의 해석이 가능해진다. “일곱째 천사가 불려고 하는 나팔 소리가 울릴 때, 하느님께서 당신의 종 예언자들에게 선포하신 대로 그분의 신비가 완전히 이루어질 것이다.”(묵시 10,7) 그러나 그리스말 본문은 ‘과거형’ 동사를 사용한다. 일곱째 천사의 나팔 소리가 울리는 장면은 이야기의 서술상 아직 나타나지 않았지만(11장 15절에 가서야 등장한다), 그 시간을 물리적 시간의 미래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일곱이라는 숫자는 완전수이고 충만함을 가리키는 것으로 일곱째 천사의 나팔이 울리는 시간은 하느님의 섭리가 ‘이미, 완전히’ 이루어진 것을 가리키는 시간적 지표다. 요컨대, 천사가 외치는 이야기의 현재가 더 이상 기다릴 시간이 없는 ‘진공(眞空)의 시간’이라면 그 시간이 바로 일곱째 나팔이 울려 퍼지는 시간이라는 것이고, 하느님의 섭리가 완전히 드러난 시간이라는 것이다. 사실 믿는 이들의 시간은 늘 ‘완성의 시간’이고 ‘마지막 시간’이다. 지난 시간에 대한 회한이나 다가올 시간에 대한 설렘은 믿는 이들의 몫이 아니다. 믿는 이들은 온전히 지금을 전부로, 마지막으로 살아가는 이들이다. 그래서 더 이상의 기록은 필요치 않다. 더 이상 읽어야만 하고 그래서 깨달아야 하고, 깨달음을 기반으로 무언가 변화되어야 한다는 외침이나 환시의 시간은 무용하다. 우리의 이야기는 이제 마지막이고 완성된 시간을 살아갈 ‘주체’, 곧 ‘예언하는 주체’를 소개한다. 천사가 요한에게 제시하는 작은 두루마리는 읽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먹히기 위해 등장한다. 대개의 주석학자들은 두루마리를 먹는 행위를 두고 말씀을 받는 것, 그러니까 예언자적 소명을 받는 것으로 이해한다.(에제키엘서 2장 참조) 요한의 캐릭터는 본 것을 글로 옮기는 필자에서(묵시 1,19 참조) 말씀을 선포하는 예언자로 변모한다. 글이 말로써 생명력을 얻어 온 세상, 모든 민족에게 선포된다. 이어지는 요한묵시록 11장에 두 증인이 등장하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묵시 11,3.6.10 참조) 일곱째 천사 나팔 울리는 때를 물리적 ‘미래’로 해석해선 안 돼 믿는 이들에게 시간은 언제나 완성의 시간이며 마지막 시간 그러나 안타깝게도 예언자의 운명은 혹독하다. 작은 두루마리를 삼키는 것이 입에는 달지언정 배 속은 쓰리기 때문이다.(묵시 10,10; 예레 15,10.15-18 참조) 예언의 말씀은 고맙거나 기쁘거나 만족스러울 때도 있지만, 때론 반감과 대립의 대상이 되어 사람들 사이에서 비난의 근거로 이용되기도 한다.(예레 20,3 참조) 예언의 말씀이 불러오는 반응의 양면성을 이해하기 위해, 오늘 우리의 이야기가 꾸며놓은 시간의 성격을 다시 되짚어 보면 어떨까. 마지막이라서 더 이상의 기대와 바람이 필요 없는 시간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미래에 대한 설렘이나 지금에 대한 비판이 아닐 것이다. 빗대자면, 생의 마지막에 내놓아야 할 마지막 말이 앞으로의 계획이나 세상에 대한 비판, 혹은 제 삶에 대한 후회가 전부일 수 없듯이 마지막에 외쳐야 할 예언의 말씀은 그저 마지막 꼭 해야 할 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꼭 해야 할 그 말은 머뭇거림이 없어야 하고, 계산이 없어야 한다. 그 마지막 말이 예언의 말씀이라면, 그 마지막 말을 듣고 기뻐하거나 비난하는 것은 실은 마지막을 살지 못하는 이들의 섣부른 편견 때문이 아닐까. 하느님의 섭리가 완전히 드러난 이 마지막 시간에 예언자들의 등장은 울려 퍼져야 할 말들을 늘어놓는 도구가 필요해서가 아닐 것이다. 우리의 이야기는 두루마리를 삼킨 요한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알려주지 않으며 요한묵시록 어디에도 요한이 설파하는 예언의 말씀을 찾아볼 수 없다. 요한은 그저 말씀이 체화된 한 ‘주체’가 된 것이고 그 주체가 있음으로 되었다고, 그것이면 충분하고 그것으로 마지막 시간에 하느님의 섭리가 완전히 드러난 것이라고 요한묵시록 10장은 우리에게 말하는 듯하다. 말씀의 사람, 예언자는 온 생애 매 순간, 마지막을 살듯 살아가는 사람이고, 삶의 모든 순간에 일곱째 나팔이 울려 퍼지길 제 몸으로 증거하는 사람이다. 그리하여 입에서 터져 나오는 말은 제 속으로 삼켜져 말씀 자체로 거듭나는 이가 예언자일 것이다. 예언은 늘어놓는 말과 언변이 아니라 살아내는 인격을 통해 하느님 말씀으로 선포되는 것이다.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6-29 제3448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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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두려움(묵시 9,13-21)

인간의 삼분의 일이 죽는다. 불과 연기와 유황으로 인간은 죽어간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제 손으로 행한 일들을 포기하지 않고 저만이 숭배하는 우상을 끝내 움켜쥔다. 죽음의 재앙도 인간의 완고함을 꺾지 못한다. 대개 재앙의 서사를 인간의 부도덕성이나 일탈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재앙의 성격은 그러하다. 잘잘못을 가려 정의의 단호한 심판을 재앙으로 가시화하는 것이 묵시문학의 전형이기도 하다. 다만 우리가 재앙과 관련해서 또 다른 질문을 던질만한 소재가 요한묵시록 9장 13절 이하에 눈에 띈다. 재앙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는 유프라테스에서부터 그 질문은 시작한다. 여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기 시작하자, 하나의 목소리가 들린다. “큰 강 유프라테스에 묶여 있는 네 천사를 풀어 주어라.”(14절) 요한묵시록 7장에서 네 천사는 하느님 백성의 등장을 알렸지만, 9장에서는 땅을 향한 재앙을 알리는 존재로 소개된다. 네 천사는 유프라테스강에 묶여 있다. 동쪽 끝을 가리키는 유프라테스는 미지의 무서운 군대가 쳐들어올 것이라는 막연한 공포의 시작점이기도 하다.(창세 15,18; 신명 1,7; 1열왕 5,1; 에녹 56; 에제 38-39 참조) 네 천사는 인간의 삼분의 일을 죽이려는 준비를 이제껏 해왔고 마침내 그 시간은 무르익었다. 네 범주로 소개되는 ‘이 해, 이 달, 이 날, 이 시간’이라는 그 시간은 ‘필연적이고 확실한 시간’을 가리키는 묵시문학의 은유적 시간이다. 인간의 삼분의 일이 죽는 건 피할 수 없고, 반드시 혹은 필연적으로 삼분의 일의 죽음은 기어이 오고야 말 것이라는 두려움을 ‘이 해, 이 달, 이 날, 이 시간’은 품고 있다. 동쪽 유프라테스에서부터 오는 재앙은 인간들이 그렇다고 믿은, 그러나 실재하지 않는 두려움을 먹이 삼아 커나간다. 이 두려움은 유다 사회가 오래전부터 믿어온 하나의 ‘민간 신앙’이다. 묵시주의는 이러한 민간 신앙을 발판으로 한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사상을 지배했다. 동쪽에서 올 것이라는 막연한 심판의 재앙, 그것이 요한묵시록이 말하는 재앙이라면 이것은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다. 민중이 스스로의 삶을 심판하고 정제하고 다잡는 인생의 길잡이로 재앙을 쓰고 읽고, 그럼으로써 하느님을 향하는 길을 다듬어 간 것이다. 그렇다면 그 길잡이는 더욱 강하고 더욱 선명하면 좋을 터. 제 삶이 더욱 반듯해질 수도 있으니 말이다. 16절부터 기병대가 나타난다. 기병대는 ‘이억’의 숫자로 소개된다. 그리스말 본문은 ‘디스뮈리아데스 뮈리아돈’(δισμυριάδες μυριάδων)으로 되어 있는데, 굳이 직역하자면, ‘만(萬)들의 이만(二萬)’, 그러니까, 2×10,000×10,000= 200,000,000이 된다. ‘만’(萬)을 가리키는 ‘뮈리아스’(μυριάς) 는 ‘대단히 많은’ 혹은 ‘셀 수 없는’ 수적 가치를 지닌다. 이런 숫자는 셈을 하기보다 셈을 하지 않는 게 맞다. 다만 우리는 ‘이억’이라는 엄청난 숫자가 내포하는 두려움의 극단을 읽어내야 한다. 인간이 삼분의 일이나 죽어가는 일은 너무나 두렵고, 두려운 만큼 황망한 일이라는 것. 그 옛날 소돔의 멸망 역시 그러했으리라. 이억의 기병대가 뿜어내는 불과 연기와 유황은 소돔이 종말을 맞닥뜨릴 때 결정적으로 등장한 상징체들이다.(창세 19,24.28 참조) 그러나 인간이란 참 질기고 억세다. 우리가 만든 것들, 우리가 이루어 온 것들, 그리고 우리가 지탱해 온 것들을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 “나머지 사람들도 저희 손으로 만든 작품들을 단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마귀들을 숭배하고 또 보지도 듣지도 걸어 다니지도 못하는, 금이나 은이나 구리나 돌이나 나무로 만든 우상들을 숭배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묵시 9,20) 인간의 욕구는 숭배 대상에 정확히 투사된다. 불의한 자 심판받는다는 서사 민중 스스로 다듬어온 신앙 정작 욕망 포기 않는 이들은 회개할 의지 없이 우상숭배 숭배는 자기의 인정 욕구에 대한 숭배가 되어버린다. 보지도, 듣지도, 걸어 다니지도 못하는 우상들을 마치 살아 있는 듯 숭배하는 인간들은 무엇을 숭배하는지 모른 채 그 무엇을 늘 찾아다닌다. 타자화해 놓은 것은 실은 자신을 투사시킨 지독한 교만과 이기(利己)의 신기루가 된다. 우상숭배는 결국 자기 숭배다. 끝끝내 자기를 두고 숭배하는 인간은 스스로 회개하지 않는다.(21절) 회개하지 않아서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을까. 우리는 상선벌악(賞善罰惡)의 전통적 인식 아래 회개하지 않는 이들의 끝을 파멸이나 징벌로 정리되기를 바라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나머지 인간들’의 운명에 대해선 우리는 모른다. 다만 제 작품을 포기하지 않고 우상을 숭배하고 회개하지 않는 인간들은 두려움이 없기 마련이다. 동쪽 유프라테스에서의 재앙에 두려워할 줄 아는 인간은 실은 복된 이들이기도 하겠다. 제 잘못에 대한 일말의 공포심은 정의나 선에 대한 갈증이나 존중을 내포하고 있어, 죽어간 인간의 삼분의 일은 적어도 제 삶에 대해 부끄러움을 지닌 이들이 아닐까. 삼분의 일의 죽음은 그리하여 스스로 회개할 줄 아는 최소한의 양심을 위한 손짓이 아닐까.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 때, 행여 그 일이 자신에게 일어났으면 얼마나 힘들었을까라며 안타까워하거나 혹은 그 일이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일까라며 안도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참혹한 사건 앞에 아무런 감정의 요동을 표하지 못(안)하는 이들을 마주할 때, 우리는 당황스럽다. 얼마나 죽어야 그 완고함이 해제될까. 얼마나 참혹해야 저만이 옳다고 믿는 그 우상을 던져버릴까. 이억의 기병대가 오기 전에, 그리하여 또 다른 죽음이 닥치기 전에, 헛된 우상에 물든 이들에게 우리는 담대히 재촉해야 한다. 얼른 회개하라고….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6-22 제3447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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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두려움(묵시 9,13-21)

인간의 삼분의 일이 죽는다. 불과 연기와 유황으로 인간은 죽어간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제 손으로 행한 일들을 포기하지 않고 저만이 숭배하는 우상을 끝내 움켜쥔다. 죽음의 재앙도 인간의 완고함을 꺾지 못한다. 대개 재앙의 서사를 인간의 부도덕성이나 일탈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재앙의 성격은 그러하다. 잘잘못을 가려 정의의 단호한 심판을 재앙으로 가시화하는 것이 묵시문학의 전형이기도 하다. 다만 우리가 재앙과 관련해서 또 다른 질문을 던질만한 소재가 요한묵시록 9장 13절 이하에 눈에 띈다. 재앙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는 유프라테스에서부터 그 질문은 시작한다. 여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기 시작하자, 하나의 목소리가 들린다. “큰 강 유프라테스에 묶여 있는 네 천사를 풀어 주어라.”(14절) 요한묵시록 7장에서 네 천사는 하느님 백성의 등장을 알렸지만, 9장에서는 땅을 향한 재앙을 알리는 존재로 소개된다. 네 천사는 유프라테스강에 묶여 있다. 동쪽 끝을 가리키는 유프라테스는 미지의 무서운 군대가 쳐들어올 것이라는 막연한 공포의 시작점이기도 하다.(창세 15,18; 신명 1,7; 1열왕 5,1; 에녹 56; 에제 38-39 참조) 네 천사는 인간의 삼분의 일을 죽이려는 준비를 이제껏 해왔고 마침내 그 시간은 무르익었다. 네 범주로 소개되는 ‘이 해, 이 달, 이 날, 이 시간’이라는 그 시간은 ‘필연적이고 확실한 시간’을 가리키는 묵시문학의 은유적 시간이다. 인간의 삼분의 일이 죽는 건 피할 수 없고, 반드시 혹은 필연적으로 삼분의 일의 죽음은 기어이 오고야 말 것이라는 두려움을 ‘이 해, 이 달, 이 날, 이 시간’은 품고 있다. 동쪽 유프라테스에서부터 오는 재앙은 인간들이 그렇다고 믿은, 그러나 실재하지 않는 두려움을 먹이 삼아 커나간다. 이 두려움은 유다 사회가 오래전부터 믿어온 하나의 ‘민간 신앙’이다. 묵시주의는 이러한 민간 신앙을 발판으로 한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사상을 지배했다. 동쪽에서 올 것이라는 막연한 심판의 재앙, 그것이 요한묵시록이 말하는 재앙이라면 이것은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다. 민중이 스스로의 삶을 심판하고 정제하고 다잡는 인생의 길잡이로 재앙을 쓰고 읽고, 그럼으로써 하느님을 향하는 길을 다듬어 간 것이다. 그렇다면 그 길잡이는 더욱 강하고 더욱 선명하면 좋을 터. 제 삶이 더욱 반듯해질 수도 있으니 말이다. 16절부터 기병대가 나타난다. 기병대는 ‘이억’의 숫자로 소개된다. 그리스말 본문은 ‘디스뮈리아데스 뮈리아돈’(δισμυριάδες μυριάδων)으로 되어 있는데, 굳이 직역하자면, ‘만(萬)들의 이만(二萬)’, 그러니까, 2×10,000×10,000= 200,000,000이 된다. ‘만’(萬)을 가리키는 ‘뮈리아스’(μυριάς) 는 ‘대단히 많은’ 혹은 ‘셀 수 없는’ 수적 가치를 지닌다. 이런 숫자는 셈을 하기보다 셈을 하지 않는 게 맞다. 다만 우리는 ‘이억’이라는 엄청난 숫자가 내포하는 두려움의 극단을 읽어내야 한다. 인간이 삼분의 일이나 죽어가는 일은 너무나 두렵고, 두려운 만큼 황망한 일이라는 것. 그 옛날 소돔의 멸망 역시 그러했으리라. 이억의 기병대가 뿜어내는 불과 연기와 유황은 소돔이 종말을 맞닥뜨릴 때 결정적으로 등장한 상징체들이다.(창세 19,24.28 참조) 그러나 인간이란 참 질기고 억세다. 우리가 만든 것들, 우리가 이루어 온 것들, 그리고 우리가 지탱해 온 것들을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 “나머지 사람들도 저희 손으로 만든 작품들을 단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마귀들을 숭배하고 또 보지도 듣지도 걸어 다니지도 못하는, 금이나 은이나 구리나 돌이나 나무로 만든 우상들을 숭배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묵시 9,20) 인간의 욕구는 숭배 대상에 정확히 투사된다. 불의한 자 심판받는다는 서사 민중 스스로 다듬어온 신앙 정작 욕망 포기 않는 이들은 회개할 의지 없이 우상숭배 숭배는 자기의 인정 욕구에 대한 숭배가 되어버린다. 보지도, 듣지도, 걸어 다니지도 못하는 우상들을 마치 살아 있는 듯 숭배하는 인간들은 무엇을 숭배하는지 모른 채 그 무엇을 늘 찾아다닌다. 타자화해 놓은 것은 실은 자신을 투사시킨 지독한 교만과 이기(利己)의 신기루가 된다. 우상숭배는 결국 자기 숭배다. 끝끝내 자기를 두고 숭배하는 인간은 스스로 회개하지 않는다.(21절) 회개하지 않아서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을까. 우리는 상선벌악(賞善罰惡)의 전통적 인식 아래 회개하지 않는 이들의 끝을 파멸이나 징벌로 정리되기를 바라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나머지 인간들’의 운명에 대해선 우리는 모른다. 다만 제 작품을 포기하지 않고 우상을 숭배하고 회개하지 않는 인간들은 두려움이 없기 마련이다. 동쪽 유프라테스에서의 재앙에 두려워할 줄 아는 인간은 실은 복된 이들이기도 하겠다. 제 잘못에 대한 일말의 공포심은 정의나 선에 대한 갈증이나 존중을 내포하고 있어, 죽어간 인간의 삼분의 일은 적어도 제 삶에 대해 부끄러움을 지닌 이들이 아닐까. 삼분의 일의 죽음은 그리하여 스스로 회개할 줄 아는 최소한의 양심을 위한 손짓이 아닐까.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 때, 행여 그 일이 자신에게 일어났으면 얼마나 힘들었을까라며 안타까워하거나 혹은 그 일이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일까라며 안도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참혹한 사건 앞에 아무런 감정의 요동을 표하지 못(안)하는 이들을 마주할 때, 우리는 당황스럽다. 얼마나 죽어야 그 완고함이 해제될까. 얼마나 참혹해야 저만이 옳다고 믿는 그 우상을 던져버릴까. 이억의 기병대가 오기 전에, 그리하여 또 다른 죽음이 닥치기 전에, 헛된 우상에 물든 이들에게 우리는 담대히 재촉해야 한다. 얼른 회개하라고….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6-22 제3447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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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재앙의 정체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 때, ‘떨어진 별’이 등장한다. ‘떨어진 별’을 두고 타락한 천사, 혹은 사탄이나 악마로 해석한다. 그 별에게 구렁의 열쇠가 ‘주어졌다.’ 별이 열쇠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누군가가 별에게 열쇠를 주었다. 학자들은 이런 수동태 형식을 ‘신적 수동태’라 부른다. 요한묵시록은 악의 세력이 휘두르는 힘을 묘사하기 위해 대부분 신적 수동태의 형식을 빌려온다. 요한묵시록의 악은 힘이 있어도 얼마 안 가서 사라져 버리거나 무너져 버린다. 악은 그렇게 무능력하다. ‘신적 수동태’의 주체는 감추어져 있으나 대개 하느님으로 인식한다. 달리 말하자면, 참된 권능과 능력을 소유하신 분은 오직 하느님이셔서 악은 하느님과 동등하거나 하느님을 대적할 힘 따위는 지니지 못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모든 권능은 하느님으로부터 나온다는 신념이 ‘신적 수동태’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만약 이렇다면, 하느님은 기쁨, 행복, 성공 그리고 정의, 진리, 평화 등의 단어들 틈에서만 사유되어서는 안된다. 재앙, 고통, 불행, 나아가 사탄과 악마의 틈바구니 안에서도 그분의 섭리에 대해 우리는 묻고 답해야 한다. 요한묵시록의 재앙은 그러므로, 사탄이나 악마의 폭력이나 그것들에 대한 두려움을 논하는 자리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다시 되새기는 메타포가 된다. 별이 구렁을 연다. 거기서 큰 용광로의 연기 같은 것이 올라온다. 이 연기는 모든 것을 어둡게 만들고 모든 것을 집어삼켜 혼돈으로 만든다. 하느님이 세상을 만드시기 전, 그러니까 아직 질서가 잡히지 않은 혼돈의 상황과 정확히 일치하는 장면 서술이다.(창세 1,2 참조) 하느님의 손길이 빚어내는 모든 ‘있음’ 이전에 어둠이 있었다. ‘어둠’은 ‘없음’과 동의어다. 떨어진 별로 시작하는 재앙의 서사는 있는 것 같으나 실은 없는 것들의 이야기다. 없는 것들을 아무리 자세히, 기묘하게 묘사한들, 그것은 사탄과 악마를 그려내는 ‘수동태’의 힘처럼 하느님 앞에선 부질없는 것들일 뿐이다. 부질없는 것들은 메뚜기, 땅의 전갈과 같은 것들로 형상화된다. 이것들의 폭력은 땅의 풀과 푸성귀, 나무로 대변되는 ‘자연’도 아니고 하느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믿는 이들도 아닌, ‘하느님의 인장이 찍히지 않은 사람’들을 향한다. 단번에, 그리고 습관적으로 우리는 이렇게 해석해 버릴 것이다. 요한묵시록의 재앙은 하느님과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나쁜 이들을 향한 경고라고. 그러나 이런 선악 구도의 결과론적 징벌이 요한묵시록의 재앙이라면 굳이 하느님과 어린양까지 언급하며 심판을 논할 필요가 있을까. 나쁜 일에 공분을, 선한 일에 기쁨을 지니는 건 인간 일반의 현상이므로. 우리의 이야기는 5절부터 재앙에 대한 자신의 논리를 차근차근 펼쳐나간다. 다섯 달, 한계가 명확한 그 다섯 달 동안 하느님의 인장이 찍히지 않은 이들은 재앙의 희생자가 된다. 그 사람들은 죽는 게 아니다. 메뚜기로부터 괴롭힘을 당할 뿐이다. 그러나 그 고통이 얼마나 대단했으면 사람들은 죽기를 바란다. 한낱 메뚜기가 사는 시간이 다섯 달이고, 신약성경은 ‘다섯’을 ‘몇 안 되는 것들’을 가리킬 때 사용하기도 했다.(1코린 14,19; 루카 12,6; 마태 25,2 참조) 그렇게 허무한 다섯 달인데, 그 짧은 시간을 버틸 재간이 사람들에겐 없다. 도대체 무엇이 사람들을 이토록 힘들게 만드는 것일까. 메뚜기, 그것이 그렇게 두렵고 무서운 존재인가. 이제 메뚜기를 적확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람들을 해치는 메뚜기는 그야말로 전투에 임하는 장수와 같다. 종말의 위기를 다루는 요엘서의 서술과 흡사하여(요엘 2,4 이하 참조) 메뚜기를 종말론적 형상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메뚜기의 서술은 허망하다. 메뚜기에 관한 모든 서술은 실재하지 않는, ‘~같은 것’으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금관 같은 것’, ‘머리털 같은 것’, ‘사자 이빨 같은 것’, ‘마차들의 소리 같은 것’, ‘전갈 같은 것.’ 이런저런 ‘~같은 것들’은 실은 무엇 하나라도 제대로 인식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견디기 힘든 고통 안에서도 좌절과 죄책감 빠지지 않길 마치 9장이 시작될 때 구렁에서 나온 연기와 같다. 모든 것을 어둠 속에 집어삼켜 무엇 하나라도 제 본연의 모습을 뚜렷이 드러나지 못하게 만드는 연기 말이다. 금관이든, 사자 이빨이든, 떠들썩한 마차 소리든, 모든 것은 메뚜기를 향하지만 메뚜기를 비껴가서 메뚜기가 도대체 무엇인지 모호하게 만든다. 그러니 메뚜기는 히브리 말로 ‘아바똔’(אֲבַדּוֹן), 그리스말로 ‘아폴리온’(Ἀπολλύων)이라 부르는 ‘지하의 천사’(우리말 번역은 ‘지하의 사자’로 되어 있다)를 임금으로 모실 수밖에. ‘아바똔’은 ‘파멸의 공간’이란 뜻이고, ‘아폴리온’은 파괴자란 뜻이다. 두 단어 모두 생명에 반하는 ‘죽음’을 가리키기도 한다. 메뚜기를 소재로 서술된 재앙과 고통의 끝이 죽음이라니. 전투사의 모습으로 꾸며진 메뚜기가 전투 한번 해보지 않은 채, 죽음의 메타포 ‘지하의 천사’를 제 임금으로 섬겨버렸으니, 잔뜩 긴장한 채, 이를 깨물며 재앙과 고통의 끝을 탐험하고 그 정체를 묻는 우리의 읽기는 허무하다. 그럼에도 우리가 건질 것은 명확하다. 죽음은 대결과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 다섯 달로 한계 지워진 시간, 사람들이 그토록 죽고 싶어 하는 그 시간의 주인공 메뚜기는 사람들을 해치고 죽일 만큼 대단한 힘이 없다는 것. 모든 재앙의 끝은 죽음을 향하고 있어 재앙은 그렇게 허무하다는 것. 재앙과 고통의 끝에서야, 그 허무함의 민낯이 드러난 후에야 우리는 비로소 하나의 희망을 발견할지 모른다. 하느님의 인장이 찍히지 않은 그 사람들에게조차 죽음 같은 재앙은 징벌이 아니라는 희망 말이다. 견디기 힘든 순간을 맞닥뜨릴 때마다 사람들은 자신의 못남을 탓하며 죄책감에 빠질 때가 많다. ‘내가 부족해서 그런 일이 벌어졌어’, ‘나는 늘 왜 이럴까’ 하는 좌절과 패배의 소용돌이, 그 안에서 우리는 죽을 것 같은 고통을 겪겠지만 우린 다시 한번 그 고통의 정체에 대해 최대한 섬세하게 물어야 한다. 그 고통의 끝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은 허무한 두려움이 아닐까. 우리가 겪는 모든 고통은 우리의 부족함 때문이 아니라, 고통에 주눅 들어 미리 단정 짓고 후회하는 우리의 두려움 때문이 아닐까.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6-15 제3446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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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나팔은 울려야 한다(묵시 8,6-13)

나팔의 소리가 터져 나온다. 나팔은 하느님의 심판을 가리키는 전통적 형상이다. 나팔이 하나씩 불릴 때마다 참혹한 장면은 기어이 등장하고 만다. 그럼에도 우리는 요한묵시록의 심판이 징벌이나 멸망이 아니라 구원을 향한 하느님의 간절한 초대라는 사실을 앞선 글에서 살펴보았다.(6월 1일자 19면) 무서운 심판의 서사라는 다소 거칠고 투박한 방식으로 전개된 하느님의 호소는 일곱 나팔의 이야기 안에 선명히 새겨져 있다. 나팔이 불릴 때마다 ‘종말이다’, ‘심판이다’라는 건조하고 상투적인 해석으로 하느님의 간절한 호소를 이해하는 건 게으른 것이다. 심판의 서사가 어떻게 묘사되고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세심히 살피는 일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지상의 것들이 무너지고 파괴되며, 땅의 삼분의 일이 사라지고 제거되는 장면이 도대체 하느님의 초대와 무슨 연관이 있는지, 그리고 그 심판의 끝, 그러니까 일곱 나팔의 소리가 완전히 울려 퍼졌을 때, 하늘은 왜 여전히 하느님을 찬송하는 소리로 가득 차 있는 것인지(묵시 11,15) 섬세하게 물어야 한다. 요컨대, 심판의 참혹함이 하느님을 만나는 데 왜 필요한 것인지 묻는 일이 일곱 나팔의 이야기를 읽는 이유가 된다. 처음 네 개의 나팔은 땅의 것들과 관련되어 있다. 땅에 떨어진 우박과 불, 불타는 큰 산과 바다, 그리고 쓴 물 등이 그렇다. 땅의 것들이 제 모습과 가치를 잃어버리는 것을 두고 하나의 ‘상실’이나 ‘파괴’로 이해하는 우리는 하느님의 심판이 시작되었다고 여긴다. 다만, 그 심판은 옛날 이집트에 내린 하느님의 재앙과 매우 닮았다. 우박과 불이 땅을 엉망으로 만드는 것은 이집트 재앙의 일곱 번째에 해당한다.(탈출 9,24-25 참조) 요한묵시록 저자는 ‘피가 섞인 것’으로 우박의 성질을 더욱 섬뜩하게 서술한다. 이집트 재앙 첫 번째에 나타나는 나일강 물이 피로 변한 장면이나(탈출 7,17 참조) 요엘서 3장 3-4절에서 말하는 주님의 날의 징조를 우박에 접목해 이야기를 더욱 드라마틱하게 만들어 간다. 핏빛의 우박이나 불구덩이가 된 땅의 서술은 요한묵시록이 쓰인 시대로부터 2000여년 전 벌어진 사건의 이야기이지만, 유다 역사 안에서 그리고 요한묵시록이 쓰인 1세기 말 그리스도인들 안에서 하느님의 심판을 위한 메타포의 한 예로 작용하고 있다. 유다인이나 그리스도인들은 역사 속 어렵고 힘든 일을 제 삶의 현실을 위한 하나의 메타포로 끌어다 사용했고, 성찰과 회개의 소재로 다루곤 했다. 대표적인 것이 66년에 발발한 유다 1차 항쟁이었다. 로마에 저항함으로써 유다 민족의 독립과 순수성을 회복하려 했으나 그 결말은 하느님의 자리라 여겨진 예루살렘 성전의 불바다였다. 너무나 참혹한 사건이었고, 그로 인해 절망했으며, 그것으로 세상은 그 끝에 다다랐다고 모두 생각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공관복음서들은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을 서술하면서 유다 1차 항쟁의 역사를 끌어온다. 그 역사는 끝장난 역사가 아니라 예수님을 향한 믿음의 시발점으로 해석된다. 불타 무너진 성전을 예수님의 몸으로까지 해석하면서 역사의 고통을 믿음을 향한 다짐으로 어떻게든 바꾸어 내는 것, 그것이 핏빛의 우박과 불구덩이의 땅으로 대변되는 심판에 대한 서사의 기능이다. 핏빛의 우박과 불구덩이의 땅은 역사 속에 벌어지는 참혹한 사건들로 믿음과 삶이 완전히 무너질 때, 그 절망의 무게감에 사람들이 허덕일 때, 강렬한 심판의 형상으로 수없이 호출되지만, 혹독한 그 고통의 기억만큼이나 새로운 희망에 대한 간절함은 배가 된다. 둘째 나팔이 말하는 불타는 큰 산, 셋째 나팔이 불릴 때 나타나는 쓴 물, 넷째 나팔의 어둠 등이 차례로 서술되면서 심판이라 해석되는 여러 서술은 더욱 단단해진다. 참혹한 일로 믿음이 무너질 때 희망에 대한 간절함도 커져 이웃과 세상 고통 마주하며 그들의 아픔 함께 살아내야 그러나 다시 한번 되새기자면, 마지막 일곱 번째 나팔이 불리는 순간, 그곳은 하늘이다. 구원의 환호가 울리는 하늘, 하느님께 찬미 찬양이 드려지는 하늘. 어쩌면 하늘을 기다리기 위해선 우리가 살아내어야 할, 끝내 통과해야 하는 고통의 삶은 필연인지 모르겠다. 혹자는 심판의 대상이 ‘삼분의 일’로 규정된다는 점을 살피며 심판의 대상이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도드라지게 강조한다. 심판은 전체가 아닌, 부분의 일이라고 안도한다. 모두가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부류가 끝장나는 것이라서 믿는 이들은 안심해도 된다는 것. 이런 해석은 뭔가 원시적이고 천박하다. ‘삼분의 일’과 그렇지 않은 ‘삼분의 이’를 갈라놓고 적어도 나는, 우리는 그 ‘삼분의 일’과는 무관하다는 식의 해석은 가소롭다. 대개의 주석학자는 이런 해석을 두둔하며 ‘삼분의 일’의 회개를 주문한다. 심판의 징벌을 통해 속죄하여 살아계신 하느님을 따르라는 이런 주문은 삶의 고통이나 어려움을 죄다 윤리적, 율법적 일탈로 편협하거나 게으르게 해석한 결과다. 이런 해석에 예수님의 일갈은 긴요한 것이다. “너희는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러한 변을 당하였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루카 13,2) 역사 속에 벌어지는 참혹한 사건들을 심판의 형식으로 다시 복기하는 것은 죄악에 대한 경고나 일탈에 대한 징계에 방점이 찍혀 있는 게 아니다. 그 참혹한 사건들이 제삼자의 일이라서 무심한 것으로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일부분, 혹은 전부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시대 공감의 능력을 키워나가는 것이어야 한다. 가장 끔찍한 고통을 겪을 때, 우리는 절망하지 말자. 시대의 아픔에 무감각하게 살지 말자. 저만의 신앙을 지킨다고 이웃과 사회의 슬픔에 눈감지 말자. 핏빛의 우박과 불구덩이는 우리 사회 도처의 아픔을 끊임없이 들추어내고 있다. 나팔이 울리듯, 세상의 고통과 아픔은 더욱더 알려지고 드러나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땅의 ‘삼분의 일’과 ‘함께’ 그 고통과 아픔을 살아내어야 한다. ‘삼분의 이’의 무릉도원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나팔이 모두 울려야 구원은 온다. 나팔의 울림에 귀를 기울여야 구원은 비로소 ‘우리’ 것이 된다.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6-08 제3445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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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하느님을 향한 구원(묵시 8,1-5)

일곱 번째 봉인이 열린다. 요한묵시록 5장의 문제, 그러니까 봉인을 열 수 있는 주체를 찾는 일은 이제 그 끝에 다다랐다. 봉인은 모두 열렸고 봉인은 그러므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열리는 과정은 지난했으나 그 흐름은 놀랍게도 구원에로 방향 지워졌다. 마지막 일곱 번째가 열리는 공간은 하늘이다. 하늘에서 봉인되어 있던 두루마리는 하늘의 자리에서 완전히 열렸다. 처음부터 하늘이었고 마지막까지 하늘인 봉인의 흐름은 요한묵시록의 구원 의지를 분명히 한다. 앞서 요한묵시록 7장 마지막 부분의 말씀을 다시 되새긴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묵시 7,17) 이사야서의 한 대목을 옮긴 이 말씀은 하느님의 자비와 위로, 그로 인한 하느님 백성의 희망을 노래한다. 봉인이 해제된 두루마리는 하느님의 구원을 찬찬히 살펴보게 하는 묵상의 글이 된다. 그러나 구원이란 게 그리 호락호락한 선물이 아니다. 한번 노력해서 한번 받고 끝나버리는 영화나 소설 속 해피엔딩이 아니다. 대개의 주석학자는 일곱 번째 봉인이 열리는 것을 두고 종말이 왔음을, 그 종말의 시간에 봉인을 펼친 유일한 주체인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업적이 완성된 데 주석의 방점을 찍는다. 이런 해석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구원의 유일한 길과 목적은 예수님인 건 분명하나, 그 구원이, 종말이 어느 시간의 흐름 끝에 나타나는 하나의 현상으로 이해하는 것은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다. 요한묵시록은 구원 이전에서 구원 이후의 시간 흐름을 기록한 책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이미 이뤄진 구원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향해 쓰였다. 구원이 왔음에도 어렵고 힘든 세상살이가 여전한 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구원과 고통의 간극을 예수님을 통해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요한묵시록의 집필 동기다. 일곱 교회에 보내진 편지를 통해 우리는 이미 그 동기를 얼마간 살펴보기도 했다. 예컨대 에페소 교회에 보내진 편지에서 말하는 ’첫사랑‘의 상실이 그러하다. 첫사랑은 십사만 사천과 닮았다고 보면 어떨까. 저만이 옳고 구원에 합당하다 말하는 니콜라오스파의 배타적 자세가 첫사랑을 상실한 것이라면 모든 이에게 열린 구원에의 외침을 가리키는 십사만 사천은 첫사랑의 회복일 것이니. 첫사랑은 그러므로 구원을 누리는 이들이 한결같이 지켜나가야 할 보편적 사랑, 누구에게도 열린 구원의 선포와 같은 것이니. 구원이 왔다, 종말이 당도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업적은 완전히 성취되었다고 외치는 것은 오래된 중언부언이라 식상한 것이 아닐까. 구원을 이미 누리고 사는 이에겐 너무나 자명한 말이라 새롭지 않아 지루한 선포가 된다. 구원은 찾아 나설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과 성찰의 소재다. ‘반 시간’의 침묵은 그래서 소중하다. 전통적으로 ‘침묵’은 주님의 날이 임박했음을 가리키는 시간적 지표다.(스바 1,7; 즈카 2,17; 시편 76,9 참조) 주님이 오시고 그분이 행하시는 것을 찬찬히, 겸허히 살펴보는 시간이 반 시간이다. 반 시간은 그러므로 주님의 시간이다. 일곱 개의 봉인이 인간 세상의 희로애락 속에서 구원의 의미가 무엇인지 살폈다면 반 시간의 침묵 후에 펼쳐질 일곱 개의 나팔은 심판이라는 묵시문학적 장치들로 하느님의 역사하심이 어떤 것인지 소개할 것이다. 반 시간의 침묵 속에서, 그리고 구원이 완성된 시점에서 우리는 하나의 숙제를 얻은 셈이다. 하느님이 역사 속에서 직접 개입하셔서 그분이 행하시는 일들이 무엇을 향해 서술되는지, 그리하여 그 방향성 안에서 우리는 구원이라는 것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읽어내어야 한다. 구원, 시간의 끝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이해해서는 안 돼 구원은 찾아 나설 무엇이 아닌 어떻게 살지에 대한 성찰 소재 하느님의 일은 ‘일곱 천사’의 등장으로 시작한다. 유다이즘 안에서 일곱 천사는 대천사의 그룹으로 하느님께 가장 가까이, 그분의 현존에 함께하는 천사로 소개된다.(에녹 20, 토빗 12,15; 이사 63,9) 천사는 일곱 나팔을 가지고 있는데, 하느님의 경고(예레 4,5)나 하느님을 위한 축제와 예배(2사무 15,10; 민수 10,10), 아니면 하느님의 현현이나 마지막 날 하느님의 등장을 상징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탈출 19,16; 요엘 2,1; 스바 1,16) 일곱 천사와 일곱 나팔은 하느님을 향한 지시체다. 반 시간의 침묵에 이어 일곱 천사와 일곱 나팔은 하느님을 향해 더욱 세심히, 민감하게 집중할 것을 요구한다. 하느님의 일을 살피기 전, 우리에겐 하느님 그분을 향한 시선이 필요하다. ‘다른 천사’의 등장은 하느님을 향한 방향성을 더욱 탄탄하게 만든다. 우리말 성경은 제단 ‘앞에’라고 번역하지만, ‘앞에’라고 번역한 그리스말 ‘에피’(ἐπὶ)는 공간적 친밀성을 드러내는 전치사다. 그러므로 제단 앞은 하느님께 보다 ‘가까운’ 공간이다. 다른 천사에게는 금향로와 많은 향이 주어졌다. 다른 천사는 마치 사제와 같다.(레위 16,12; 민수 17,11 이하) 그러나 다른 천사가 보이는 뜻밖의 행동은 많은 의문이 남는다. 천사는 향로를 가져다가 제단의 숯불을 가득 담아 땅에 던진다. 향로와 향이 성도들의 기도일진대(묵시 8,3-4) 그 기도가 땅을 향해 던져지는 셈이다. 하느님을 향하는 기도가 땅을 향하는 공간적 연결성은 낯설다. 그러나 요한묵시록은 늘 이렇다. 4장의 천상이 땅의 공간과 하나 되어 서술되었고, 6장의 봉인이 열리면서 천상의 두루마리는 지상의 삶 자체를 겨냥했다. 요한묵시록 끝에 나타나는 새예루살렘 역시 하늘과 땅의 중간 어디쯤, 모든 것들이 통합되는 초월적 공간을 잉태한다. 주석학자들은 땅에 던져진 향로를 심판의 징조로 해석하곤 한다. 그러나 요한묵시록 8장 6절부터 서술되는 그 ‘심판들’이 과연 흑과 백을 나누듯 잘못된 이들을 향한 심판으로만 해석할 수 있을까. 아니면 천상의 기도가 이 땅 위에 떨어져 한계 지워지고 부족하고 그리하여 슬픈 현실 속, 하느님을 향한 쓸쓸하지만 겸손한 오솔길로 거듭나는 건 아닐까. 구원을 이미 누리는 이로서 우리는, 이 땅 위에 살아간다. 구원은 그러므로 천상의 행복만도, 지상의 불행만도 아닌, 여전히 살아내어야 할 삶 자체에 주어진 하느님과의 인연이 아닐까.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6-01 제3444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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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셀 수 없는 군중(묵시 7,9-17)

십사만 사천의 군중에 이어 셀 수 없는 군중이 등장한다. 십사만 사천을 유다계 그리스도인이라 해석하고, 셀 수 없는 군중을 이방인계 그리스도인들이라 해석한다. 하느님 백성에게 주어지는 구원은 셀 수 없는 군중에 대한 서술을 시작으로 모든 백성에게 열려 있는 것이라고 대부분의 주석학자들은 생각한다. 그도 그럴 것이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권’에서 나온 이들이 셀 수 없는 군중이라고 요한묵시록 스스로 규정하고 있다.(7,9) 구원은 이제 모든 이를 향한다. 구원의 역사가 시작될 무렵,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도 셀 수 없는 군중과 닮은 서사가 나온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 너의 후손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창세 15,5; 22,17) 구원은 애시당초 모든 이를 향해 있었다. 다만 모든 이를 위한 보편적 구원이 특별한 민족, 특별한 인간들에 의해 규정되면서 사달이 났다. 바빌론 유배(기원전 597~538년) 이후, 이른바 ‘유다이즘’을 형성한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에 배타적인 사상을 더욱 공고히 가져갔고 저들만이 하느님의 구원에 합당한 민족이라 여겼다. 요한묵시록의 셀 수 없는 군중은 이런 배타적 민족주의를 여지없이 허물어뜨린다. 수를 세어 구원에 합당한 이들을 찾아 나서는 일은 지금도 폐쇄적인 사이비 종교나 배타적이고 근본주의적인 교회들 안에서 심심찮게 등장한다. 셀 수 없는 군중이 머무는 곳은 어좌와 어린양 앞이다. 요한묵시록 4~5장에서도 살펴봤듯, 어좌라는 곳은 천상에 유폐된 공간이 아니라 모든 민족이 함께 모여 온 곳이다. 어린양은 세상 모든 민족들을 모아 ‘사제의 나라’로 만들었다.(묵시 5,10) 요한묵시록 7장의 셀 수 없는 군중은 마치 사제처럼 어좌 앞에 서서 구원의 완성을 노래한다. “구원은 어좌에 앉아 계신 우리 하느님과 어린양의 것입니다.”(묵시 7,10) 요한묵시록 21~22장의 새 예루살렘에서도 같은 장면이 나온다. 세상 모든 민족이 모여오는 새 예루살렘에서 어좌에 앉아계신 하느님과 어린양은 경배와 흠숭의 대상이 된다. 셀 수 없는 군중은 구원의 영광과 기쁨을 가리키는 희고 긴 겉옷을 입고 있다. 승리하는 이들이 드는 야자나무 가지 또한 들고 있다. 초대교회는 야자나무 가지를 순교의 승리를 가리키는 상징으로 이해했다. 세상의 폭력 앞에 신앙은 무력하지만 끝끝내 신앙을 저버리지 않고 순교의 길을 걸어가는 것 자체가 승리한 것이라 초대교회는 이해했다. 야자나무는 이집트 탈출을 기념하는 초막절 예식에 사용된 것이기도 하다.(레위 23,40 이하) 이집트를 떠나 가나안을 향하는 구원의 길에 야자나무로 엮은 초막은 수없이 세워지고 옮겨지고 또다시 세워졌다. 수난 동참하는 것이 환난이고 증거의 삶 살아가는 것이 구원 환난과 구원 분리하지 말아야 야자나무는 구원의 길의 고단함을 떠올리게 하지만, 동시에 이스라엘이 갈망하던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 복지를 향한 희망과 설렘의 상징이기도 했다. 요한묵시록 7장 15절은 초막절의 분위기를 더욱 뚜렷하게 묘사한다. 셀 수 없는 군중은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기고 어좌에 계신 분은 셀 수 없는 군중을 위한 천막이 되어주신다는 것. 그러므로 요한묵시록 7장의 셀 수 없는 군중이 야자나무 가지를 들고 구원을 노래하는 것은 이집트 탈출로 선명히 새겨진 구원이 모든 민족, 모든 시대를 향해 온전히 실현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구원은 보편적이며 현재형이다. 셀 수 없는 군중이 외치는 구원은 시편 118편 25절의 ‘호산나’(הוֹשִׁ֘יעָ֥ה נָּ֑א)를 닮았다. ‘구원을 주소서’라는 뜻의 ‘호산나’는 정확히 하느님과 어린양을 향한다. 구원의 주체이신 하느님을 향한 이 외침은 초막절에 야자나무 가지를 흔드는 순간 울려 퍼진 것이기도 하다. 호산나와 더불어 요한묵시록 5장 12절에 나타났던 찬미가가 셀 수 없는 군중을 통해 다시 등장한다.(묵시 7,12) 어좌, 스물넷 원로, 네 생물 모두가 셀 수 없는 군중과 더불어 하느님을 찬미한다. 온 우주가 하느님을 중심으로 구원을 노래한다. 모든 이를 향한 보편적 구원이 하느님을 중심으로 다시 한번 강조되고 있다. 13절부터는 셀 수 없는 군중의 신원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원로가 묻는다. “희고 긴 겉옷을 입은 저 사람들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느냐?” 요한은 답하지 못했고 원로가 부득불 답을 한다.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이다. 저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 마지막 날, 종말의 시간에 고통과 박해, 수난이 닥친다는 생각은 묵시문학의 전통적인 생각이다. 구원을 노래하는 군중이 환난을 반드시 겪어내어야 한다는 전통적 믿음은 다니엘서 12장 1절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우리의 요한묵시록은 환난과 구원을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말 번역은 셀 수 없는 군중을 환난을 ‘겪어 낸’ 이들로 이해하는데, 그리스말 본문은 환난을 ‘겪고 있는’(그러니까, ‘오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의 현재 분사형인 ‘에르코메노이’(ἐρχόμενοι)가 사용되었다) 이들로 소개한다. 환난은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 진행 중인 일이라서 끝난 게 아니다. 환난을 여전히 겪고 있는 이들이 구원을 노래한다. 그러나 환난을 부정적인 고통 자체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이어서 나타나는 구절에서 환난은 어린양의 피에 겉옷을 빨아 희게 만드는 일로 소개된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는 것이 환난이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증거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구원이라는 것이다. 환난은 그러므로 지속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수난은 끊임없이 이어져야 한다. 그래야 구원이 또렷이 드러난다. 모든 이를 향한 구원을 노래하는 일은 이제 우리 삶의 자리에 대한 성찰을 전제로 한다. 우리 삶이 예수의 삶과 닮았는가, 그분이 가신 십자가의 길이 우리 길이 되는가, 그리하여 하느님을 증거하는 삶이 힘겨워도 행복한 삶이라 우리는 고백할 수 있는가, 하는 반성들이 구원을 이해하는 첫 번째 작업이어야 한다. 모든 이가 구원을 받을 만하지만, 모든 이가 십자가를 지는 데 덤벼들지는 않는다. 모든 이가 누릴 구원은 예수님의 증거의 삶이 지금 여기서 여전히 진행되어야 이루어진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십자가를 내려놓게 해달라 기도하는 우리에게 과연 구원은 가능한 것인가. 우린 무엇을 증거하고 무엇에 승리하고 있는가.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5-25 제3443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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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십사만 사천(묵시 7,1-8)

요한묵시록 6장까지 여섯 개의 봉인이 연거푸 열리다가 7장에 이르러 잠시 숨을 고른다. 일곱 번째 봉인은 8장부터 다시 이어진다. 7장은 6장의 마지막, 그러니까 어린양의 진노를 견뎌 낼 수 있는 이를 찾아 나서는 질문에 이어 등장한다. 안타깝게도 이 세상 사람들은 어린양을 진노의 주체로 읽어내었고 이 세상은 그러므로 산과 바위 뒤에 숨어야만 하는 절망의 자리가 된 듯하여 허망하다. 그러나 이것이 끝인가? 요한묵시록 7장은 세상 사람들의 절망적 읽기에 또 다른 대답은 내놓는다. 7장은 천사의 등장으로 시작한다. 후기 유다이즘은 천사들이 종말론적 천재지변을 일으키는 주인공으로 이해한다.(에녹 60,11; 희년서 2,2) 요한묵시록 역시 천사가 불의 권한을 지녔거나(묵시 14,18) 물을 주관하는 것으로 소개한다.(묵시 16,5) 7장의 천사는 땅의 네 모퉁이에 서서 땅의 네 바람을 붙잡고 있다. 즈카르야서 6장 5절에서 영향을 받은 이 장면은 징벌의 시간 바로 전, 하나의 ‘멈춤’, 혹은 ‘쉼’을 상정한다. 하느님의 종 이마에 받은 인장, 주님 구원 뜻하는 명징한 은유 구원, 노력해서 얻을 수 없는 무한·보편으로 주어지는 선물 왜 멈추는가. 후기 유다이즘의 사상, 예컨대 노아의 홍수를 재해석하는 에녹서의 생각에서 얼마간의 답을 얻을 수 있다. 징벌을 준비하는 천사들이 있었다. 홍수를 쏟아부을 수 있는 천사들이었고, 노아는 방주를 만들어야만 했다. 이에 주님은 노아가 방주를 만들 수 있도록 천사들을 잠시 멈추게 한다. 세상이 죄악으로 가득 찰지라도 주님은 구원에 대한 얼마간의 시간과 방도를 마련하신다는 이야기다.(에녹 6) 다시 요한묵시록으로 돌아오자면 7장에 등장한 천사들은 분명 징벌을 준비하고 있는 천사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바람을 붙들고 멈춤과 쉼을 이끌어내는 천사들은 구원에 대한 희망을 얼마간 간직하게 한다. 징벌이 잠시 멈추는 곳에서 기어이 희망을 찾아내어야 한다. 이야기는 구원을 향해 급하게 전환된다. 2절에 다른 한 천사가 ‘해 돋는 쪽’에서 하느님의 인장을 가지고 올라온다. ‘해 돋는 쪽’은 구원을 상징한다. 에덴동산이 동쪽이었고(창세 2,8), 주님의 구원을 알리는 키루스 임금이 동쪽에서 왔고(이사 41,2) 하느님의 영광이 해 뜨는 동쪽에서부터 나타났다고 구약은 말한다.(에제 43,2) 하느님의 인장 역시 구원의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다. 인장은 징벌의 시간에 ‘하느님의 종들’의 이마에 찍혀야 한다. 징벌이 잠시 멈춘 시간, 우리는 하느님의 종들을 보살피시고 그들의 구원을 보장하시는 하느님의 구원 의지를 발견한다. 하느님의 종들은 하느님께 온전히 속해 있어 종말을 맞닥뜨린다. 십사만 사천이라는 숫자로 소개되는 ‘하느님의 종들’을 두고 유다계 그리스도인이라 해석하곤 한다. 열두 부족에서 시작한 십사만 사천이라 유다 전통과 문화를 바탕으로 하느님의 종들의 신원을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요한묵시록은 특정 민족이나 문화를 바탕으로 ‘하느님의 종’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 다만 예수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을 가리킬 때, 하느님의 종이라는 호칭은 요한묵시록에 자주 등장한다.(1,1; 2,20; 6,11; 19,2.5; 22,3) 말하자면 ‘땅의 자리’에서 속량되어 하느님에게로 온전히 의탁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표현이 ‘하느님의 종’이라는 것이다.(묵시 14,3) 하느님의 종들이 이마에 받은 인장은 또 무엇일까. 에제키엘서 9장 4절은 예루살렘에 징벌을 내리기 전에 구원받을 사람들의 이마에 ‘표’를 하도록 주님께서 배려하는 장면이 나온다. 에제키엘서 9장 4절에서 ’표’라고 번역된 히브리말 ‘타우’(תָּו)를 두고 십자가의 예형으로 인식하여 하느님의 구원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완성되었다는 그리스도교적 해석이 있었다. 이러한 해석은 요한묵시록 7장에서 인장을 받은 하느님의 종들을 두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 순교의 길을 걸어가는 이들이라고 읽어내는 해석과 맞닿아 있다. ‘인장’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은 그 말마디를 두고 그리스도교의 세례와 연결하기도 한다. ‘인장’이라는 그리스말은 ‘스프라기스’(σφραγίς)로 세례와 같은 의미로 초대교회는 이해했기 때문이다.(2코린 1,21 이하) 어떤 해석이든 인장을 받았다는 것은 징벌의 순간에도 하느님의 보호는 분명히 살아 있다는 명징한 은유가 된다. 하느님의 종들의 숫자는 십사만 사천이다. 각 지파마다 일만 이천씩 나와서 총합이 십사만 사천이다. ‘12’는 하느님 백성을 의미하고, ‘1000’은 풍성함, 충만함, 완벽함을 가리킨다. 하여 ‘1만2000’은 하느님 백성이 가득하고 완전하다는 뜻을 품는다. 여기에 다시 ‘12’를 곱해야 십사만 사천이 된다. 같은 수를 다시 곱하는 것은 묵시문학적으로 ‘마땅하고, 당연하여, 절대적으로 그러하다’는 의미다. 결국 십사만 사천은 하느님 백성이 진정으로 가득하고 완전하고 풍성하다는 수적 가치를 지닌다. 요한묵시록 7장 9절은 그리하여 십사만 사천의 무리를 ‘셀 수 없는 무리’라 규정하고야 만다. 하느님의 인장을 받은 하느님의 사람, 하느님의 보호를 받는 이들은 실은 무한대의 사람이다. 요한묵시록이 숫자에 민감하여 여러 숫자들을 소개하고 제시하는데 대략적으로 보면 하느님과 어린양 쪽의 서술에서는 무한적이고 보편적인 숫자를, 악과 그의 부속 형상들, 예컨대 용과 두 짐승과 대탕녀 쪽의 서술에서는 한계지워지고 제한적인 숫자를 배치시킨다. 말하자면 하느님의 구원은 보편적이고 무한하나 악의 자리와 그 힘은 제한적이어서 무력하고 무능한 것이다. 요한묵시록 7장은 잠시 쉬어가는 대목이다. 마지막 일곱 번째 봉인이 열리기 전, 우리는 ‘구원’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구원은 십사만 사천, 그러니까 무한하고 보편적인 자리다. 구원은 특정 목적에 부합하는, 혹은 부합하고자 애쓰는 이의 특별한 노력으로 쟁취하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그러니까 무한하신 하느님을 닮았다. 우리가 넓어질수록 구원은 뚜렷해진다. 우리가 좁고 좁아서 다른 이와 다른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힘들수록 구원은 그만큼 좁아지고 어려운 것이 된다. 구원은… 그러니까 주어진 선물이지 갖고 싶은 선물이 아니다.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5-18 제3442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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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여섯 번째 봉인이 열리다(묵시 6,12-17)

여섯 번째 봉인이 열리면서 묵시문학의 전형적 장면들이 등장한다. 큰 지진과 천체의 혼돈이 그러하다. 대개 이단들은 이러한 혼돈을 신의 심판이나 징벌로 이해하곤 한다. 더욱이 어느 나라의 지진이나 해일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는 현실의 사건들을 묵시록의 혼돈과 관련지어 해석하기도 한다. 세상 종말의 문학적 수사를 실제 사건과 엮어내어 해석하는 일은 끔찍하다. 누군가의 희생을 빌미 삼아 묵시문학적 표현에 대한 설익은 해석을 내놓는 일은 폭력 그 자체다. 땅의 지진과 같은 묵시문학적 표현들은 구약성경 안에서도 발견된다.(아모 8,8; 9,5; 요엘 2,10) 후기 유다이즘, 그러니까 기원후 1~2세기의 묵시문학 작품들 안에서도 지진에 대한 서술은 흔하다.(2바룩 70,8) 태양이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으로 변하는 것도 묵시문학의 전형적 은유다.(이사 50,3; 요엘 3,4) 당시 사람들은 끔찍한 사건이나 자연재해를 종말의 상징으로 해석했고, 그 재해가 두려울수록 하느님을 향한 간절한 외침은 뚜렷했다. 이를테면, 묵시문학의 재앙적 서술은 암울한 현실 안에 위엄하신 하느님이 직접 개입하신다는 신앙을 내포한다. 공포스러운 장면은 실은 하느님을 향한 한 줄기 희망의 또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하늘이 두루마리 말리듯 사라져 버리고 산과 섬 또한 제자리를 잃어버리는 장면 역시 묵시문학적 표현이다.(느헤 1,5; 예레 4,24) 묵시문학이 서술하는 천체의 혼돈이 마지막 시대 하느님의 직접적 개입을 암시하는 것이라면, 하늘이 사라지고 땅 위의 것들이 제자리를 잃는 것은 절망이 아니라 희망적 요소를 내포한 것이어야 한다. 물론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 국한된 관점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개입을 못마땅해하는 이들이나, 하느님의 개입이 인간 세상이 원하는 행복, 기쁨, 성공 등의 장면들로 묘사되길 원하는 이들에겐 천체의 혼돈은 불편하다. 만약 우리가 진정 하느님을 찾는 이들이라면, 하늘이 두루마리처럼 말리는 장면에선 설레야 한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만드실 때, 세상은 온통 물로 가득 차 있었다. 창세기 1장 6절에 하느님은 물을 갈라놓아 우주의 질서를 세우기 위해 창공을 만드시는데, 창공이라고 번역된 ‘라키아’(רָקִיעַ)는 ‘펼쳐진 공간’이라는 뜻을 가진다. 두루마리 펼치듯 생겨난 것이 창공, 곧 하늘이다. 프랑스 리옹의 성서신학자 프랑수아 마르탱은, 하늘이 두루마리 말리듯 사라져 버리는 것은 하느님께서 두루마리 펼치듯 창공을 만드시기 이전, 그러니까 창조 이전의 시간으로 우리를 안내한다는 해석을 내놓는다. 묵시문학의 재앙적 은유들은 이 세상을 접고 새로운 세상을 펼치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재창조를 암시한다는 해석이다. 이런 해석은 주류의 해석이 아니지만, 적어도 세상 종말을 끔찍한 사건들로 도배하는 묵시문학 작품들의 의도에는 부합하는 듯하다. 끔찍한 사건 앞에 주눅 들어 죄의식과 자책에 허덕이는 것이 아니라, 다시 한번 하느님의 시선으로 세상과 미래를 설계하고 기꺼이 하느님을 향한 신앙을 섬세하게 다듬기를 바라는 의도 말이다. 요한묵시록의 서사 흐름이 천체의 혼돈 이후 7장에서 십사만사천의 구원받은 이들을 소개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천체의 혼돈은 하느님 안에 구원을 누리는 이들의 등장을 위한 사전 작업인 셈이다. 그러나 세상은 재창조를 원하지 않는다. 요한묵시록 6장 15절에 일곱 개로 분화된 사회 계층이 등장한다. 당시의 인간 사회를 총망라하는 계층 분화의 관습적 예를 보여준다. 땅의 임금, 고관, 장수, 부자, 권력가, 종, 그리고 자유인…. 힘과 재능, 그리고 노력과 우연이 뒤섞여 우리 사회는 다양한 계층으로 형성된다. 이른바 기득권은 그 계층 구조 덕에 누리는 이익이 있어 세상의 변화를 싫어한다. 그러나 경쟁에 뒤처져 기득권으로부터 멀어진 부류는 세상의 계층을 차별과 소외로 인식하며 변화를 갈망한다. 15절과 16절은 신분과 권력, 그리고 노력 여하에 따라 형성되는 계층 분화의 세상을 한꺼번에 없앤다. 모든 계층은 산과 바위를 향해 숨겨달라고 아우성이다. 호세아서 10장 8절의 영향을 받은 이 아우성은 하느님께 불충한 이들이 겪는 징벌에 대한 두려움을 담고 있다. 징벌을 감당할 능력도, 의지도 없어서 다만 숨기를 바라는 나약함의 아우성이다. 창세기 3장 8절의 아담과 하와도 그랬다. 하느님이 찾는대도 아담과 하와는 숨었다. 하느님처럼 되고자 열매 하나를 나눠 먹은 결과는 하느님 앞에 나서지 못하는 인간의 처지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은, 그리하여 하느님을 제대로 반기지 못하는 인간의 현실은 무언가 답답하고 서글프다. 본디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모든 피조물을 관리하고 돌보는 ‘관계적’ 존재로 지어졌는데, 인간은 숨어있다. 인간은 그러므로 인간답지 않게 되었다. 이제 인간에게 하느님은 ‘진노’(嗔怒)의 주체일 뿐이다. 17절은 이렇게 말한다. “그분들의 진노가 드러나는 중대한 날이 닥쳐왔는데, 누가 견디어 낼 수 있겠느냐?” ‘주님의 진노의 날’은 마지막 때에 등장하시는 하느님의 위엄을 가리키는 전통적인 예언의 말마디다.(요엘 2,11; 말라 3,2) 요한묵시록은 진노의 자리에 하느님은 물론이거니와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언급한다. 앞서 요한묵시록 5장에서 어린양은 세상 모든 사람을 속량해서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가 되게 했다. 세상 모든 것의 창조주이신 하느님과 그분과의 인연을 다시 엮어 놓아 이른바 구원이란 걸 이루신 예수님을 ‘진노’의 주체로 해석하는 인간들의 아우성은 그리 달갑지 않다. ‘주님의 진노의 날’이 마지막 시대를 가리키는 시간적 은유라면, 그 마지막 시간에 우리는 주님을 어떤 모습으로 형용하고 은유할 것인가. 그 누구도 견디어 낼 수 없는 진노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 당당히 반길 기쁨의 주체로 주님을 만나길 다만 바랄 뿐이다. 인간들의 아우성 이후에 요한묵시록 7장은 구원을 노래하는 십사만사천을 등장시킨다. 참 다행이다.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5-11 제3441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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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어린양의 삶과 죽음(묵시 5,6ㄴ-14)

어좌 한가운데 자리 잡은 어린양은 살아 있는가, 죽어 있는가. ‘살해된 것처럼 서 있는’(ἑστηκὸς ὡς ἐσφαγμένον) 어린양이 과연 가능한가. 죽었는데 서 있는 게 가능한 일일까. 주석학자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역사적 사건과 연결하여 어린양의 모순적 양태성을 이해하려 한다. 그러나 어린양은 분명 죽었고, 또한 분명 살아 있다. 죽음과 삶은 물리적 시간의 전후에 머무르지 않는다. 죽음과 삶은 하나다. 흔히들 말한다. 예수님은 죽음을 물리치고 승리하여 우리 모두에게 생명을 주셨다고. 요한묵시록의 어린양은 이러한 이분법적 신앙 고백엔 그리 관심이 없는 듯하다. 요한묵시록은 삶을 죽음의 대척점에서 고민하지 않는다. 모두가 승리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죽음을 물리친 자리가 아니라 여전히 죽어가는 자리를 동시에 껴안는 자리로 묘사된다. 그 이유는 너무나 뚜렷하여 선명하다. 우리 주 예수께서 돌아가셨기 때문이고, 그분을 믿고 따르는 이들이 여전히 세상의 찬바람을 끝끝내 버티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영원한 생명으로 사라진 게 아니다. 영원한 생명을 살아내는 신앙인 곁에 예수님의 죽음은 현실의 죽음 위에 포개져 사유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린양’의 형상은 단순히 역사의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만을 놓고 고민한 결과가 아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위에 신앙인의 삶과 죽음이 포개져 ‘어린양’의 형상으로 소개된 것이다. 문법적으로 살펴봐도 그렇다. ‘살해된 것처럼 서 있는’으로 번역된 분사 형태의 동사들은 어린양을 꾸미는 형용사의 역할을 담당한다. 그리스말은 남성, 여성, 중성을 문법적으로 구별하는데, ‘살해되었다’는 동사는 남성형 분사다. ‘어린양’(ἀρνίον)은 중성 명사이기에 중성인 명사와 남성인 동사의 결합은 문법적으로 틀린 것이다. ‘살해되었다’는 동사가 남성형이라서 몇몇 주석학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어린양을 통해 바라보지만, 중성인 어린양에 대한 해석엔 관심을 두지 않는다. 더욱이 ‘살해되었다’는 동사는 ‘스파조’(σφάζω)로 쓰여있다. 목을 잘라 제물로 바치는 행위를 가리키는 동사다. 살해된 어린양을 굳이 예수님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요한묵시록은 11장의 두 증인 이야기에서 주님의 죽음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목이 잘려 죽은 이는 누구일까. 어린양이 중성 명사라면 굳이 남성으로서의 예수님만을 언급하기보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예수님의 죽음에 신앙의 증거로 함께 한 모든 순교자를 생각해 보면 어떨까. 예수님의 죽음은 실은 많은 신앙의 증거로 피가 끓어오르는 생명의 자리가 아닐까. 어린양은 예수님을 증언한 신앙인의 숱한 죽음 위에 새롭게 살아가는 모든 신앙인의 삶을 대변하는 것은 아닐까. 역사적 사실관계에 머물러 성경을 읽다 보면 무리수가 발생한다. 성경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신앙의 해석과 상상을 가미한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친다. 역사의 예수님이 아니라 우리 모든 신앙인 안에 살아계신 예수님은 그분의 삶은 물론이거니와 그분의 죽음마저 우리에겐 생명의 선물로 사유하고 상상하는 자유를 어린양을 통해 마련하신다. 예수님을 두고 상상을 펼쳐나가는 요한묵시록 5장은 6절 후반부터 우주론적인 차원으로 뻗어 나간다. 권능을 가리키는 뿔과 지혜를 암시하는 눈을 각각 일곱 개씩 가진 어린양은 하늘과 땅을 이어놓는 친교의 상징체로 소개된다. 어린양의 일곱 눈이 온 땅으로 파견되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공간은 천상임에도 불구하고 어린양의 눈은 땅으로 파견되어 하늘과 땅이 어린양의 형상 안에 통합되는 것이다. 네 생물과 스물네 원로는 이러한 친교와 통합을 이렇게 노래한다. “주님의 피로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속량하시어 하느님께 바치셨기 때문입니다.”(묵시 5,9) ‘주님의 피로’라고 번역된 그리스말은 ‘너의 피로’(ἐν τῷ αἵματί σου)라고 되어 있다. 천상의 ‘어린양’은 지상을 대표하는 네 생물과 스물네 원로에게 ‘너’라는 친근한 이웃이 된다. 어린양은 자신의 희생으로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을 하느님께 이끌었다. 묵시문학은 ‘모든’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 네 가지 범주로 표현하는 습성을 지닌다. 모든 민족이라고 해도 충분할 터인데, 굳이 종족, 언어, 백성, 민족으로 구별하여 표현한다. ‘모든 이’가 진정으로 ‘모두’, 어린 양을 통해 하느님과 하나 되는 것으로 어린양을 통한 신앙의 상상은 마무리된다. 천상의 주님이 지상의 ‘너’가 되는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었다. ‘너의 피’, 곧 예수님의 희생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속량하다’라고 번역된 그리스말 동사 ‘아고라조’(ἀγοράζω)는 다분히 상업적 의미를 지니는데,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 물건을 구입할 때 사용하는 동사다. 신약성경은 예수님의 희생을 부정적 사건으로 보지 않고 하느님과 하나 되기 위한 필연적 과정 혹은 치러야 할 대가를 말할 때 이 동사를 사용한다.(1베드 1,18 참조) 하느님이신 예수님은 거저 우리 사람을 구원하신 게 아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라서 힘 하나 들이지 않고 우리를 구원하신 게 아니란 말이다. 하느님은 참된 인간으로서 바보 같은 죽음을 맞닥뜨리셨고 바보같이 돌아가셨다. 하늘과 땅이 하나 되는 친교의 원동력은 끝없이 내려놓고 비워내고 스스로를 대가로 지불하는 하느님의 바보 같은 사랑 덕분이었다. 예수님은 오늘도 어린양의 형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우리에게 주어진 나날들은 실은 죽어가는 시간의 연속이다. 죽음이 생명일 수 있는 건,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 이 세상 모든 이와 더불어 영원한 생명이신 하느님을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 봉인을 열어 보이실 어린양은 그러므로 새롭고 신비한 천상의 놀라움을 말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끝내 살아내는 숱한 일상의 희로애락을 다시금 살펴보게 할 것이다. 그 일상이 죽음을 향할지라도 우리 믿는 이들에겐 천상이요, 생명이 된다.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4-20 제3438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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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한가운데 더불어 하나 되는(묵시 5,1-6ㄱ)

요한묵시록 5장의 주된 질문은 이러하다. “이 봉인을 뜯고 두루마리를 펴기에 합당한 자 누구인가?”(묵시 5,2) 어린양의 등장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이다. 하늘과 땅 위, 땅 아래 모든 곳을 살펴봐도 오직 어린양만이 봉인을 펼 수 있다고 서술한다. 요한묵시록 5장의 서술은 어린양에게 집중된다. 요한은 어린양을 찾을 때까지 울었다. 인간의 한계를 드러내는 ‘울음’은 어린양에 대한 집중도를 더욱 부각시킨다. 천상의 어좌에 앉아 계신 분을 향한 시선이 어린양을 향해 변화하는 지점에서 우리는 구약의 하느님이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어좌에 앉으신 분이 들고 있던 두루마리가 어린양에게 전해진 건, 요한묵시록이 말하고자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하느님 섭리의 연장이고 완성이라는 사실을 은유적으로 묘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두루마리는 안과 밖으로 쓰여 있는 글묶음이다. 전통적으로 안의 것을 신약성경으로, 밖의 것을 구약성경으로 이해하곤 했다. 이미 알려진 구약의 내용을 신약의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해 주실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라틴 교부들이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설명하는 유명한 문구와 일맥상통하는 해석이다. “Novum testamentum in vetere latet, Vetus in novo patet.”(신약은 구약 안에 숨겨져 있고, 구약은 신약 안에서 밝히 드러난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적 해석은 요한묵시록 5장의 서사 흐름과 얼마간 상이한 점이 있다. 어린양에게 주어진 두루마리는 ‘읽히기 위한 글묶음’이 아니다. 진즉에 주어진 질문은 ‘봉인을 뜯고 두루마리를 펴는 이’를 찾는 것이었다. 어린양은 물론이고 요한묵시록은 두루마리 안과 밖의 내용에 대해선 침묵한다. 두루마리는 읽히는 것이 아니라 열리는 것의 상징이다. 그리고 열기 위해 등장하는 어린양이 누구인지에 대한 읽기가 우선이어야 한다. 어린양은 사자와 연동되어 서술된다. 전통적으로 메시아와 그 집안을 가리켰던 힘센 사자가 요한의 눈에는 어린양으로 나타난다. 사자와 어린양은 힘의 구도 속에 공존할 수 없는 두 동물이다. 여기서도 우리는 구약의 전통과 신약의 새로운 해석이 서로 부딪히나 그럼에도 만나고 있음을 감지한다. 하느님은 인간의 역사 안에, 인간의 새로운 해석과 상상 안에 다양한 상징과 은유로 서술되고 전파된다. 미국의 성경학자 웨인 A. 믹스(Wayne A. Meeks)는 한 세미나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은유의 상징으로 소개했다. 그 자리에서 다른 성경학자는 은유라는 표현에 대해 비판적이었는데, 비판의 요지는 “십자가는 문자적 사실”이라는 것. 사도 바오로에 의해 십자가가 소개되고 서술되는 것은 십자가에 대한 사실적 요소를 바탕으로 적혀졌다는 이른바 역사비평적 견해를 드러낸 것이다. 그런 비판에 웨인 믹스는 이렇게 답했다. “십자가가 은유가 아니라면 그저 나무 두 토막을 겹쳐놓은 것 뿐”이라고. 개인적으로 웨인 믹스의 견해는 요한묵시록을 읽는 데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본다.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와 오늘, 그리고 수많은 시간들 안에서 새롭게 해석되고 새로운 은유와 상징으로 신앙인들 안에 소개되고 전파되어야 한다. 하나의 글과 표현에 얽매여, 그 글과 표현을 ‘사실’이라고 우겨대는 완고함은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하느님을 인간의 한계지워진 인식과 사유 안에 가두어 버리는 교만일 뿐이다. 오늘 우리 시대에 하느님은 또 어떤 식으로, 어떤 상징으로 해석될 것인지, 그리하여 오늘을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 좀 더 가까이, 그들의 폐부 깊숙이 닿아 있는 하느님을 어떻게 소개할 것인지 교회는 고민해야 한다. 사자를 어린양으로 새롭게 소개하는 요한묵시록의 해석을 좀 더 세심히 살펴보자. 어린양은 홀로 자랑스런 사자가 아니라 더불어 함께하는 존재로 묘사된다. 어린양의 공간적 형식을 가리키는 ‘한가운데’(ἐν μέσῳ)라는 말마디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말 성경 번역은 어린양의 공간을 어좌와 네 생물과 원로들 ‘사이에’로 해석하지만, ‘사이’가 아니라, ‘한가운데’이다. 어린양은 하느님을 가리키는 어좌에 앉으신 분과 지상의 하느님 백성인 스물네 원로, 어디든 계시는 하느님의 보편적 현존을 가리키는 네 생물과 ‘하나의 공간’ 안에 함께한다. 그러니까 어린양은 특정 공간이나 지위를 바탕으로 해석되지 않는다. 어린양은 시공간의 배타적 인물이 아니라 모든 시공간을 아우르는 친교의 장으로서 현존하시는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이런 분이시다, 저런 분이시다 고백하는 건 쉬운 일이나 이런 분도, 저런 분도 되신다는 사실을 겪는 건 때론 고통스럽다. ‘내가’ 찾아 나서는 메시아가 뚜렷할수록, ‘우리의’ 메시아는 흐릿해질 수 있다. 예수님은 특정 개인의 구세주가 아니라 선인이나 악인이나, 죄인이나 의인이나, 아픈 이나 성한 이나 모두에게 구세주라는 사실은 때론 따뜻한 이야기이나 때론 불편하여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이기도 하다. 특히 나와 불편한 이들을 위해서도 예수님은 사랑으로 다가오신다는 사실은 받아들여야 하는 신앙의 당위이지만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거북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린양을 살펴본다는 것은 긴 호흡과 용기를 필요로하는 일인지 모른다. 지금 글을 쓰는 순간에도, 오늘의 예수님은 또 어떻게, 어떤 이들을 향해 당신의 보편적 사랑을 전개하고 펼쳐나가실지 질문해 본다. 민감하여 함부로 이야기하기 힘든 정치, 경제, 사회의 이슈들로 우리나라가 오늘처럼 두 쪽으로 완전히 갈라진 험악한 순간에도 예수님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하실지 고민해 본다. 뜻이 안 맞는다며 내뱉는 단절과 배타의 언어에 우리는 참담했고, 그로써 우리는 조금씩 안정과 평화를 이 나라 이 땅에 만들어갈 것이다. 어린양은 늘 우리 ‘한가운데’ 저 혼자 돋보이지 않고 더불어 하나 되는 데 당신을 온전히 내어놓으실 것이다.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4-13 제3437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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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라오디케이아에 보내진 편지(묵시3,14-22)

라오디케이아는 기원전 3세기 안티오쿠스 2세에 의해 건립된 도시다. 에페소와 동쪽 지역을 잇는 도로 가운데 위치하여 상업적으로 번성한 곳이었다. 로마의 문인 키케로에 의하면 라오디케이아는 재정과 금융의 주요한 도시 중 하나였다. 섬유 산업, 특별히 양모 산업이 발달했고 귓병에 좋다는 고약과 눈병에 좋다는 약재도 라오디케이아에선 유명했다. 우리가 읽는 편지도 안약을 언급하고 있다. 라오디케이아는 경제적으로 강했고 그로 인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나는 부자로서 풍족하여 모자람이 없다”(묵시 3,17)라고 할 만큼. 그러한 라오디케이아는 60년경 지진으로 몰락하고 만다. 교회공동체에 전해진 우리의 편지도 부유함, 혹은 풍족함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만하면 되었다’라는 자만과 우월 의식에 대한 비판이 편지가 쓰인 동기 중 하나다. 편지를 보낸 ‘사람의 아들’은 ‘아멘’(ἀμήν)으로 소개된다. 신약성경에서 사람의 아들, 곧 예수님을 두고 ‘아멘’이라고 칭하는 경우는 처음이다. 이탈리아의 요한묵시록 전문가인 우고 바니(U. Vanni)는 ‘아멘’이라는 호칭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믿는 이들의 ‘하나 됨’을 언급한다. 예수님은 신앙 공동체와 하나 되어 육화하신 우리의 하느님이시라는 것. 편지가 교회공동체 내의 자만에 대해 비판적인 것은 상관없는 이를 향한 일갈이 아니라 자신과 하나 된 이를 생각하는 애틋한 사랑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또한 ‘창조의 근원’으로 소개된다. 유다 사회는 창조 때의 하느님을 지혜와 연결하여 사유하곤 했다. 예컨대 잠언 8장 22절부터 23절까지는 이렇게 말한다. “주님께서는 그 옛날 모든 일을 하시기 전에 당신의 첫 작품으로 나를 지으셨다. 나는 한처음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영원에서부터 모습이 갖추어졌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특별히 사도 바오로에 의해, 창조의 근원으로 예수님을 상정한다.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십니다.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콜로 1,15-16) ‘아멘’으로서, ‘창조의 근원’으로서 사람의 아들 예수님은 우리와 하나 되어 모든 시공간, 그리고 만물을 또한 하나로 엮어내는 분이시다. 요컨대 사람의 아들은 ‘모든 것의 정점이자 모든 것, 그 자체’로 소개되신다. 모든 것은 부분적인 것과 양립할 수 없다. 하나 됨은 갈라짐을 배제한다. 다른 어떤 것에 휩쓸리거나 다른 무엇이 예수님을 향한 열정과 신심을 흔드는 경우는 없어야 했다. 그러나 라오디케이아는 “미지근”(묵시 3,16)했다. 예수님을 향한 열정과 신심은 ‘적당한 수준’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학자들은 그노시스, 그러니까 영지주의적 사고에 젖은 신앙 공동체를 향한 비판이라 해석한다. ‘미지근’한 것은 예수님을 향한 신앙에 세상의 가치가 혼재되어있는 상태를 말한다. 교회는 옳고 세상은 그른 것이어서 그른 것이 옳은 것을 침탈하고 방해한다는 이원론적 혼돈을 말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세상의 올바름과 신앙의 올바름, 세상의 지고한 지혜와 신앙의 지혜를 분별없이 무턱대고 동일시하는 이른바 ‘혼합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이를테면 세상과의 호흡이 그리스도인이 갖추어야 할 덕목이라고 생각하고, 세상과의 불협화음보다는 친교와 사랑, 그리고 화해의 이름으로 세상과 우의를 돈독히 하는 것이 참된 신앙의 자세로 인식하는 것이다. 믿는 이들 중에 이렇게 말하는 이도 있었다. ‘세상에 맞서지 말고, 우상숭배든 황제숭배든, 그리스도를 믿더라도 적당히 세상의 분위기에 젖어 들 줄도 알아야 현명한 신자’라는 것. 이것은 함께 호흡하는 게 아니라 타협하는 것이었다. 어정쩡한 신앙의 고백은 신앙의 본질을 비껴가서 세상과 교회의 구별을 모호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세상의 것을 더 알고, 세상과 타협하고, 그럼으로써 보다 훌륭하고 모범적으로 산다는 것은 대체로 좋은 일이나, 그러한 것이 신앙적인 것과 동일시되는 것에는 물음을 던질 필요가 있다. 신약성경 외경 중 하나인 토마스복음에 따르면, 진정한 자아를 찾는 일은 물질적인 것에서 벗어나 스스로 나체가 되는 것이라고 언급하기도 한다.(토마스복음 21,37 참조) 우리가 얼마 전 읽은 스미르나에 보내진 편지에서도 비슷한 언급이 있다. “나는 너의 환난과 궁핍을 안다. 그러나 너는 사실 부유하다.”(묵시 2,9) 초대교회는 세상의 물질적, 혹은 정신적 성장과 부유함에 그리 높은 점수를 주지 않았다. 세상보다 더 깊고 넓은 지혜를 소유하고 있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세상 속 가장 낮은 곳에서, 때론 숨죽이고 때론 저항하며 버텨내는 삶을 살아서 그렇다. 세상이 모두 옳고 그름을 논박하며 가장 멋진 삶, 가장 훌륭한 삶을 외칠 때, 그리스도인은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것을 살아내느라 세상의 손가락질과 모욕을 참아내며 살아야 했다. 죄지은 자, 병든 자, 세상의 상식에 벗어난 자를 ‘형제’요, ‘자매’라고 칭하며 어떻게든 용서와 화해를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이었으므로 세상의 모욕은 신앙의 부유함이었고 풍족함이었다. 세상의 지혜와 부유함이라는 겉옷 위에 신앙을 액세서리로 꾸며내는 일보다는 우리의 속살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일이 하느님 앞에 진정 부유한 일이다. 사도 바오로는 말했다.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물이 숨겨져 있다”(콜로 2,3)고. 우리에게 진정 보물은 무엇인가. 우리의 편지 안에서도 분명히 말한다.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어주고 함께 먹고 마시는 일(묵시 3,20 참조), 예수님의 어좌에 함께 앉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일(묵시 3,21 참조)이 그것이다. 사순 시기를 지내는 요즘 자주 묻는다. 담배 끊고, 술 끊고, 심지어 피정의 이름으로 효소 단식으로 예수님을 만나는 일이 잦다. 제 한 몸 가꾸는 일이야 현대인의 필수 덕목에 가깝지만, 우리의 신앙이 제 마음의 평온이나 제 몸의 가벼움에 집중하는 일인가 자주 묻게 된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배고팠고 예수님도 그랬다. 수많은 신앙의 증거자는 생명에 배고파 생명을 내던졌고 세상에 실패하며 신앙 안에 승리했다. 세상을 평온히 사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잘했다고 한다면 우린 왜 성당에 다녀야만 하는가, 나는 자주 묻게 된다.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3-30 제3435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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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필라델피아에 보내진 편지(묵시 3,7-13)

필라델피아는 다른 곳과 달리 상대적으로 늦게 건설된 도시다.(기원전 2세기 중반) 페르가몬의 왕이었던 아탈로스 2세 필라델피아에 의해 세워져 그의 이름으로 불린 도시였다. 기원후 17년경 지진으로 무너진 후, 로마의 티베리우스 황제에 의해 재건되기도 했다. 화산이 많은 지역이라서 약한 지진이 빈번했지만 비옥한 토양이 있어 여러 도시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교회와 관련해서는 스미르나에서 폴리카르포가 순교할 때, 필라델피아의 그리스도인 열한 명이 함께 순교했다는 기록이 남겨져 있다. 신앙에 관한 한, 필라델피아는 순수했고 열심이었다. 그래서일까. 필라델피아에 보내진 편지에는 비판이나 꾸지람이 없다. 다윗의 열쇠를 가진 이라고 소개된 사람의 아들은 문의 형상에 빗대어 열고 닫는 데 절대적 권능을 가진 이로 묘사된다. 문을 열고 닫는 권능의 이야기는 엘야킴에게 왕국의 권력이 이양되는 장면에서 나온다.(이사 22,22) 엘야킴에게 문을 열고 닫는 데 필수적인 다윗의 열쇠가 주어지는데, 하느님의 구원이 다윗 가문을 통해 끊임없이 이어진다는 은유의 표현이다. 요한묵시록은 예수 그리스도를 다윗 가문 안에 배치한다.(묵시 3,3; 22,16) 하느님의 구원이 예수님 안에 수렴되고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필라델피아 교회에 주어진 문은 ‘열려진 문’(묵시 3,8)이다. 이제 문은 닫힐 리가 없다. 예수님을 통해 완성된 구원은 열려진 문이라는 형상을 통해 모든 이에게 열려 있다는 것. 바오로 사도 역시 ‘열려진 문’을 복음 선포의 보편성을 가리킬 때 사용했지 않던가.(1코린 16,9; 2코린 2,12; 콜로 4,3) 요한묵시록 21장에 가면 천상 예루살렘의 문도 사방으로 모두 열려 있다. 사실, 필라델피아는 ‘힘이 약하다.’(묵시 3,8) 모든 것을 감내하고 모든 이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 필라델피아는 그리 강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자신들의 믿음을 지켜내는 데는 실패하지 않았다. 약한 힘이 믿음을 지켜내는 데는 강할 수 있었던 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믿음이란 건, 개인의 능력과 노력의 결과물이 아닐 것이다.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수렴되는 지극히 단순하고 명징한 일이다. 믿음의 단순성은 주변 것들에 휘둘리는 일희일비의 가벼움을 걷어내는 것이기도 하겠다. 우리의 편지는 10절에서 이런 말을 남긴다. “네가 인내하라는 나의 말을 지켰으니….” 우리말 번역은 정확하지 않다. 다시 고쳐 번역하자면 이렇다. ‘왜냐하면 네가 나의 인내의 말을 지켰으니…’가 된다. ‘나의 인내’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가리킨다. 본디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세상의 미움과 박해를 당연한 운명으로 이해했다. 요한복음 17장 15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이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 세상살이 자체가 그리스도인들의 자리고 그 자리는 악을 제거하고 비워낸 천상이 아니라 악과의 투쟁 안에서 끊임없이 예수님을 갈망하고 찾아 나서야 하는 자리다. 필라델피아 교회도 ‘땅의 주민들’의 시험 안에 머물고 있다고 한다.(묵시 3,10) 세상의 우상숭배와 악함을 말할 때 사용된 ‘땅의 주민들’은 필라델피아 교회가 살아내고 있는 ‘삶의 자리’다.(묵시 6,10; 8,13; 11,10; 13,8.12.14; 17,2.8) 우리의 믿음이 예수님 한 분을 향한 단순한 일이라면 우리 생애의 복잡다단한 일들은 대부분 부수적인 것이 된다. 부수적인 것에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경우도 많다. 상대적인 것들에 절대성을 부여하고 제 인식을 진리의 기준으로 착각하며 행동하는 가벼움이 이 세상을 갈라놓고 찢어놓는다. 과연 우리는 주어지는 모든 것들을 ‘내 삶의 조각들’로 여기는가. 주어진 조각들 하나하나를 예수님을 향해 맞추는가. 아니면 이런저런 조각을 내던지며 있지도 않을 새로운 조각을 갈망하며 애태우는가. 필라델피아 교회는 수많은 삶의 조각들을 제 것으로 당겨 오늘을 마지막처럼 살아내었다. 오직 예수님을 갈망하며. 그래서 필라델피아 교회는 참된 유다인이다.(묵시 3,9) 세상이 유다인이라고 인식하는 혈육의 유다인을 ‘사탄의 무리(회당)’라고 거칠게 비난하면서 그리스도인이 참된 유다인이라 말한다. 학자들은 필라델피아 내에 벌어지는 유다인과 그리스도인의 갈등을 생각하곤 한다. 추정컨대, 그리스도인의 복음 선포가 유다인의 혐오와 박해 속에서도 끊임없이 전개되었을 것이다. 요한묵시록은 지금 필라델피아 교회를 위로하고 있다. 박해 속에 살아가도, 제 힘이 약해 세상에 억눌리더라도 그 속에서 참된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놓치지 않는 일, 매우 어려운 그 일로 필라델피아는 참된 하느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유다인들이 누릴 복된 시간을 요한묵시록은 필라델피아 교회에게 돌려놓는다. 그리스도인들의 발 앞에 유다인들이 엎드리게 하겠다는 말씀(묵시 3,9; 이사 45,14 참조), 그리스도인을 하느님 성전의 기둥으로 삼겠다는 말씀(묵시 3,12·유다 사회는 아브라함을 ‘세상의 기둥’으로 이해했다), 세상 구원의 보편성을 가리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예수님의 이름을 승리하는 이에게 새기겠다는 말씀들이 힘겨운 시간을 살아갔던 필라델피아 교회에겐 위로와 희망의 말씀이 된다. 필라델피아 교회는 승리를 가리키는 ‘화관’을 ‘이미’ 쓰고 있었다.(묵시 3,13) 힘이 약하고 박해 속에 겨우 살아내고 있지만 필라델피아 교회는 ‘승리’하는 중이었다. 이 세상살이 자체를 제 운명으로 꼭 껴안고 있는 필라델피아에겐 이겨야 할 대상도, 이겨서 얻는 저만의 기쁨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예수님처럼 오늘 하루를 묵묵히 걸어갈 뿐이다. 열린 문이 행여 닫힐세라 그렇게 구원을 지켜내며 필라델피아는 승리하고 있었다.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3-23 제3434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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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사르디스에 보내진 편지(묵시 3,1-6)

한때, 아시아의 동쪽과 서쪽을 잇는 교통의 요지였던 사르디스는 서기 17년 큰 지진으로 황폐한 곳이 되었다.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는 사르디스의 재건을 위해 막대한 자금을 지원하고 과세를 면제하기도 했다. 물론 황제를 위한 신전이 세워지기도 했다. 유다인들의 영향력도 제법 강한 곳이어서 사르디스의 공적인 일들에 유다인들의 참여 또한 활발했다. 사르디스에 소개된 사람의 아들은 “하느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묵시 3,1)다. 1장 4절에 일곱 영은 하느님의 성령을 가리키고 1장 20절에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대표격인 일곱 천사를 지칭한다. 하여 사르디스가 소개하는 사람의 아들은 하느님과 교회, 천상과 지상을 연결하는 절대적 주권을 지닌 분으로 이해될 수 있다. 사람의 아들은 사르디스 공동체가 ‘한 일’을 안다고 말씀하신다. 그 일이란 게 좋은 일, 모범적인 일이 아니다. 사르디스 공동체는 무언가 착각하고 있었다. 스스로 살아 있다고 여겼으나 사람의 아들은 ‘너가 죽어 있다’고 직격하기 때문이다.(묵시 3,1) 사르디스가 ‘한 일’은 죽음을 가리키는 상징이었던 셈이다. 무언가 해내고 있는데, 그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거나, 오히려 자멸하게 만드는 일은 도대체 무엇일까.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빌려오면 이렇다. “겉으로는 신심이 있는 체하여도 신심의 힘은 부정할 것입니다.”(2티모 3,5) 신심 있는 듯 행동하지만 자신과 돈, 그리고 제 욕망을 추구하는 일들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포장하여 신앙 생활하는 이들을 가리켜 사도 바오로는 ‘신심의 힘’을 부정한다고 비판한다. 사도 야고보도 마찬가지 말씀을 남긴다.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17) 야고보서가 말하는 실천은 ‘형제애’와 관련된 것이다. 저 혼자 배부른 삶이 아니라 더불어 행복할 수 있는 삶을 꿈꾸는 것이 믿음이 걸어 나가는 ‘생명’에로의 길이다. 그러므로 ‘깨어있어야’ 한다.(묵시 3,2) 깨어있음은 두 눈 부릅뜨고 제 인생을 갈고 닦는 윤리 도덕적 차원에서 제시된 명령이 아니다. 살아 있으되 죽은 것으로 규정된 사르디스 공동체가 깨어있음을 실천해서 얻어 내야 할 것은 ‘생명’이고 그 생명에로의 추구는 결국엔 서로에 대한 개방과 환대의 실천 유무에 달려있다. 3장 3절의 ’회개’라는 말마디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근대 이후 사람과 사회를 이해하는 데 있어 ‘개인’의 가치가 도드라지게 되면서, 회개라는 말마디를 개인적인 반성이나 성찰의 관점에서 해석해 버리는 일이 잦아졌다. 본디 회개는 ‘서로를 향해 돌아선다’는 의미다. 말하자면, ‘타자성’을 빼놓고선 회개를 이해할 수 없다. 어쩌면 회개는 사람됨의 근본 이유이자 목적일 수 있으리라. 사람은 ‘사회적 관계’ 안에 살아갈 존재이고 그 관계 속에서 비로소 사람다움을 이야기하고 실천하고 다듬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약 사르디스에 보내진 편지를 읽으면서 주목해야 할 동사가 있다면, ‘받아들이다’라고 번역된 ‘람바노’(λαμβάνω)가 될 것이다.(묵시 3,3) 요한복음은 육적인 완고함이나 배타성에서 해방되어 복음에로 열려 있음을 논할 때 이 동사를 빈번하게 사용한다. 듣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깨어있을 수 없다. 회개할 수도 없는 일이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또 한 번 빌려오자. “과연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로마 10,13-14) 듣고 받아들이는 것을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라 여기며 저 혼자 기도하고 묵상하는 일은 저만의 외로운 고행이 될 수 있다. 사도 바오로는 저 혼자만의 신앙에 대해 경고했다. 선포하는 이, 그리고 듣는 이의 형제적 친교와 일치 안에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는 사실은 복음서에서 여러 번 강조되기도 했다. 하느님 나라는 저 천상에 홀로 고립되어 있어 몇몇 의인이나 영웅들에게만 드러나는 밀교의 왕국이 아니다. 하느님 나라는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삶 한가운데 이미 드러나 있다.(루카 17,20-21) 깨어있음을 살아내야 할 사르디스 공동체가 여전히 죽어갈 때, 곧 스스로 유폐되어 서로를 향한 회개를 살아내지 못할 때, 사람의 아들은 ‘도둑’이 되어 ‘갑자기’ 나타나신다.(묵시 3,3) 사람의 아들이 ‘도둑’처럼 온다는 표현은 전형적인 종말의 심판을 가리키는데, 우리는 예수님을 ‘도둑’으로 만나서는 안 될 일이다. 신앙인이 살아내야 할 회개의 자리, 친교의 자리는 예수님이 ‘도둑’이 아니라 ‘벗’으로서 다가서는 자리이므로. 믿음을 시작한 이래, 우리는 부족할지언정 스스로를 더럽히진 말아야 하겠다. 말하자면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않는 사람’이어야 하겠다.(묵시 3,4) 14장 4절은 자신을 더럽히지 않는 14만4000에 대해 말한다.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끊임없이 찾아 나서는 이들은 흠도 결도 없이 오로지 예수님 안에 더불어 살아간다. 그들은 흰옷을 입고 생명의 책에 이름을 올리는 이들이다. 놀라운 일은 예수님을 향하는 것이 비로소 스스로의 이름을 지켜내는 일이라는 것.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그런 이들의 이름을 안다고 증언할 것이기 때문이다.(묵시 3,5) 사르디스는 지진 후 다시 살아난 도시였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역사적 자료가 희박하여 사르디스라는 도시가 지녔던 재건에의 역동성과 그 희망에 대해 추정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주석이 힘들면 해석의 상상력을 펼쳐보면 어떨까. 저마다 ‘한번 해 보자’며 미래의 달콤한 삶을 향해 덤벼드는 분위기, 거기에 그리스도인들을 혐오했던 유다인들 마저 도시의 공적인 일에 열심히 뛰어드는 분위기, 그 속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어떠해야 할까. 저마다 희망을, 노력을, 성공을 이야기할 때, 그리스도인은 희망 뒤편에 쓰러진 절망의 사람들을 살려야 하지 않을까. 저마다 무언가 해내야만 한다고 핏대를 올리며 외칠 때, 그리스도인은 아무 일도 못 한 채 하루를 버텨내는 이들에게 ‘회개’라는 일을 실천해야 하지 않을까. 도시의 재건은 그러므로 모든 사람을 살리는 일이어야 하지 않을까.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3-16 제3433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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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티아티라에 보내진 편지(묵시 2,18-29)

티아티라는 여러 산업이 발달한 곳이었다. 빵, 염색, 가죽 공예 등의 산업으로 꽃을 피운 곳이었다. 각각의 산업 분야마다 상인 조합들이 형성되었고, 장사를 할라치면 그 조합에 가입해야 했다. 예나 지금이나 물건을 사고파는 경제적 공동체는 그 공동체가 자리 잡은 곳의 문화적, 종교적 관습을 담아내기 마련이다. 티아티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양한 이방 문화와 종교에 가담할 수 밖에 없었던, 혼합종교의 삶을 살아간 곳이 티아티라였다. 티아티라에 편지를 보내는 이는 “하느님의 아들”(묵시 2,18)로 소개된다. 요한묵시록에서 유일하게 사용된 ‘하느님의 아들’이란 호칭은 28절 ‘아버지’라는 표현과 맥을 같이 한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그분이 간택한 이를 아들로 엮어내는 것은 다분히 구약의 메시아 사상을 함축하고 있다.(시편 2,8-9) “불꽃 같은 눈과 놋쇠 같은 발을 가진 이”(묵시 2,18)로서 하느님의 아들은 어느 누구도 대적 못 할 강한 힘을 지닌 듯 하다. 그 힘의 뒤편엔 그 어디에도 눈을 돌리지 말고 하느님을 바라보라는, 그리하여 하느님의 아들이 분명히, 강력히 말하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이라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도 존재한다. 티아티라는 사랑, 믿음, 봉사에 투철했다. 그럼에도 이제벨이라는 여자를 용인하는 것이 티아티라에 보내는 편지의 문제 제기다. 이제벨은 아합왕의 아내였고 바알신을 섬기도록 부추긴 여자였다.(1열왕 16,31) 하느님을 버리고 바알을 좇는 일은 예후에 의해 ‘불륜’으로 비난받기도 했다.(2열왕 9,22) 이제벨은 과거의 여자였으나 현재 티아티라의 상황을 비판하기 위한 하나의 은유 장치로 이해할 수 있다. 이제벨은 “예언자로 자처”(묵시 2,20)한다고 서술한다. ‘예언자’라는 말마디를 통해 학자들은 티아티라에서 몬타니즘이 성행했던 사실에 주목한다. 2세기부터 시작된 몬타니즘은 성령을 통한 환시와 황홀경을 중시하고 극단적 엄격주의를 통해 선민주의적인 행태를 보인 이단의 한 형태다. 몬타니즘은 특별히 여성 예언자, 예컨대 프리쉴라, 막시밀라, 암니아와 같은 여 예언자를 통해 활성화되었는데, ‘과거의 여성’ 이제벨을 소개하는 티아티라의 편지는 이러한 몬타니즘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학자들은 추정한다. 이제벨로 대변되는 신앙의 일탈은 무엇이었을까. 몬타니즘을 배경으로 추정해보면 이렇다. 이제벨과 그를 따르는 무리는 특별한 영적 체험에 대한 과도한 맹신에 집착했을 것이다. 저만이 특별한 계시에 초대받았다는 증거가 환시나 황홀경의 체험으로 특정되었고 그 체험이 더욱 견고해지면서 다른 이들에 대한 비교우위의 배타적 신심에 포로가 되었을 것이다. 초대교회의 관심사 중 단연 제일은 예수님의 재림이었을 테고, 그 재림이 무엇이고 누가 그 재림에 합당한 것인지는 도무지 알 수 없어서 두려운 질문으로 남아 있었을 테다. 이제벨과 그를 따르는 이들은 두려운 질문을 자신들의 체험 안에서 명확한 정답으로 읽어내고 싶었을 것이고, 자신들의 영적 체험과 신앙적 신념을 절대화하기에 이르렀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오시는 것보다 자신의 체험과 신념이 더 중요해진 신앙을 우리 성경은 ‘불륜’이라 부르고 있다. 그리고 불륜의 끝은 ‘죽음’이라고 티아티라에 보내진 편지는 분명히 한다.(묵시 2,23) 신앙의 일탈은 나쁜 짓, 악한 짓을 저지를 때만 드러나는 게 아니다. 자신의 생각과 신념과 행동방식을 객관화하지 못하는 데서 신앙의 일탈은 훨씬 심각한 것이 된다. 저만이 하느님의 신비를 제대로 꿰차고 있다는 착각 속에 다른 이들의 신앙 감각과 체험에 대해 무시하거나 외면하는 완고함과 거만함이 신앙을 왜곡한다. 이제 신앙은 저만의 이데올로기가 되어 그 누구의 말도, 조언도, 비판도 쓸모없는 것이 된다. 철저히 고립된 자신이 세상의 박해 속에 살아가는 진정한 신앙인인 양 고뇌하며 살아간다. 자기 스스로를 절대화하는 곳에 하느님은 허상으로 존재할 뿐이다. 불꽃 같은 눈과 놋쇠 같은 발을 지닌 하느님의 아들은 손가락 사이 무심히 흘러내리는 모래 한줌처럼 힘없이 사라질 뿐이다. 그 허상을 하느님이라 믿어 고백하는 일, 참 허망한 일이 된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아들은 티아티라에게 다른 짐은 지우지 않겠다고 하신다.(묵시 2,24) 다만 끝까지 지켜야 하는 일 하나를 제시하신다. 이제벨과 그 추종자들이 말하는 ‘사탄의 깊은 비밀’을 알려고 하지 않는 이들에게 제시하신다. ‘깊은 비밀’이란 표현에 영지주의적 색채가 짙게 배어있다. 영지주의는 더 많은 지식과 앎을 통해 누구보다 더 깊이 참된 진리를 얻어내려는 경쟁적 사상을 내포한다. 우리의 편지는 이러한 태도를 ‘사탄의’라는 수식어로 규정해 버린다. 하느님의 깊은 진리는 인격적 관계에 따른 타자에 대한 배려와 환대를 기본으로 한다. 저만의 노력이나 열정으로 타자를, 나아가 하느님을 알아내겠(었)다고 덤벼드는 일은 사탄의 일이다. 티아티라에게 남겨진 하나의 일은 어쩌면 하느님이 누구이신가 라는 질문 그 자체가 아닐까. 사탄의 깊은 비밀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느님의 깊은 신비는 어떤 것인가라는 질문 말이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한다. “오!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정녕 깊습니다. 그분의 판단은 얼마나 헤아리기 어렵고 그분의 길은 얼마나 알아내기 어렵습니까?”(로마 11,33) 하느님의 깊은 신비는 여전히 두려운 질문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에페 3,18) 하느님을 안다고 하는 순간, 그 모든 신앙은 실패한다. 민족들을 다스리는 권한과 샛별을 받는 일은 다름 아닌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일이다.(묵시 2,26-27; 22,16) 예수님과 하나 되는 일은 끊임없는 타자에 대한 질문으로 가능한 것이지, 자신이 정답이라 생각하는 순간, 질문은 강요가 되어 타자를 죽이고 하느님을 업신여기게 된다. 하느님 앞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조용히, 겸허히 다시 한번 묻게 된다. “당신은 누구이신지요?”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3-09 제3432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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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페르가몬에 보내진 편지(묵시 2,12-17)

페르가몬은 소아시아 북쪽에 위치하고 아주 가파른 언덕 위에 자리 잡은 도시다. 여러 신들을 위한 신전이 있었고, 로마의 지배를 받기 전 아탈로스 1세(아탈로스 왕조) 임금의 승리를 기념하는 여러 조각들이 산재해 있었다. 물론 소아시아 다른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로마의 지배를 받은 이후로 황제들을 위한 예배 역시 성행했던 곳이다. 그래서일까. 페르가몬에 보내진 편지는 페르가몬을 ‘사탄의 왕좌’(묵시 2,13)라고 단정해 버린다. 자비, 평화, 혹은 사랑의 이름으로 다소 잔잔하고 부드러운 뉘앙스를 지녀야 할 것 같은 성경의 문장들 틈에서 사탄의 왕좌라고 도시 전체를 규정하는 건, 아무래도 성급하거나 불편할 수 밖에 없다. 차갑고 거북한 성경의 문장들은 그래서 외면받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것이 구약의 아모스서인데, 단죄와 심판, 그리고 질책이 가득한 문장으로 엮어진 아모스서는 19세기에 이르러서야 교회 안에서 본격적으로 읽혀진다. 끔찍한 세계대전을 전후로 아모스서의 날카로운 경고성 문장들은 세상에 부득불 필요한 하느님의 말씀이었다. 인간들은 끝내 무너지고 넘어져야 제 과오를 인정할 수 밖에 없는지 아쉬울 따름이다. 페르가몬을 향하여 말씀하시는 분은 ‘쌍날칼’(묵시 2,12)을 지니신 사람의 아들이다. 날카로운 쌍날칼은 요한묵시록에서 그리스도의 복수를 가리키는 표징이다. 요한묵시록 19장에서 백마 탄 기사로 묘사되는 그리스도는 그야말로 장군이요, 승리자다. ‘하느님의 말씀’(묵시 19,13)이라는 이름을 지닌 그리스도는 날카로운 칼을 입으로 뿜어내며 ‘임금들의 임금, 주님들의 주님’(묵시 19,16)으로 등장한다. 그리스도의 복수는 대립할 경쟁자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리스도 외에 다른 권능을 지닌 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쌍날칼을 지닌 사람의 아들이 계신다면, 그곳이 사탄의 왕좌 또는 다른 무엇이 있든, 주눅 들거나 실망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를 주님이요 임금으로 고백하는 신앙인에게 세상의 모든 곳은 주님을 증거하는 자리일 뿐이다. 페르가몬에는 안티파스(묵시 2,13)라는 증거자가 있었다. 안티파스에 관한 기록은 5세기 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에 의해 처음 나타난다. 도미시아누스 황제 통치 시절(81~96년) 페르가몬의 주교로, 우상숭배를 거부하다가 불에 달구어진 청동황소상 안에서 죽어간 순교자가 안티파스라고 전해진다. 페르가몬에 보내진 편지는 안티파스의 순교를 보고서도 신앙공동체는 물러서지 않았고 제 믿음을 지켰다고 말한다. 쌍날칼을 지닌 사람의 아들을 믿는다는 건, 제 신념과 정체성이 세상의 어떤 논리에도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결심과 실천을 내포하는 것이기도 하다. 상황이 이렇다면, 페르가몬에 보내진 편지를 읽는다는 건, 교회와 세상, 혹은 믿음과 불신의 대립 구도에 의한 이원론적 해석과는 거리가 있다. 마침 편지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그러나 너에게 몇 가지 나무랄 것이 있다.”(묵시 2,14) 세상도 아니고 불신도 아닌, 신앙을 끝끝내 지키고 살아가고 있다고 이미 인정한 ‘너’(페르가몬교회)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는 사람의 아들의 말씀이 당혹스럽다. 이어지는 구절에서 그 이유가 드러난다. “너에게는 발라암의 가르침을 고수하는 자들이 있다.”(묵시 2,14) 다른 이방 종교나 문화, 혹은 세상의 권력이 아니라 믿는 이들 내부에 믿음의 가치와 무관하거나 해로운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발라암은 구약의 예언자다. 그는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는 모압 임금 발락의 청에 맞서 이스라엘을 축복해준 예언자였다.(민수기 22-24장 참조) 그러나 발라암이 축복한 이스라엘은 ‘프오로’에서 모압 여자들과 즐겼고 우상숭배를 자행했다.(민수 25,1-3) 하느님과의 계약을 모조리 거부한 이스라엘이었다.(신명 31,16) 발라암의 축복과 이스라엘의 일탈은 함께 갈 수 없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삶의 행태가 어떠하든 하느님의 백성이란 이유로 무작정 축복하는 일은 없어야 했다. 초대교회는 발라암의 이야기를 통해 곧은 정체성을 지니지 않는 신앙의 ‘적당한 타협’이나 ‘무한 긍정’, 혹은 ‘원칙 없는 관대함‘에 대해 걱정했을 것이라 추정한다. 우상과 황제숭배의 문화 속에서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을 적당한 개방과 환대의 수준에서 처리해버리는 일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을 따르는 것일 뿐이라고 또한 다짐하면서 말이다.(1베드 4,2-4) 세상의 위협이나 박해 앞에 신앙은 피아식별이 쉬워 무엇이 옳고 그른지 명확히 구별해 낸다. 그러나 교회 내부의 문제에 눈을 돌리면 그 식별이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세심한 관찰 없이는 교회 내부에서 벌어지는 신앙의 왜곡을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 무엇보다 신앙이 ‘인자함’이나 ‘중용’의 미덕으로만 꾸며질 때 그렇다. 신앙인은 착하고 부드럽고 온유해야 한다고 말하는 근거로 ‘사랑의 예수님’을 찾지만, 세속과 타협하고 정의에 맞지 않는 일이 교회 내부나 외부에서 일어날 때, ‘쌍날칼의 예수님’을 외면하는 것이 신앙이 되어선 안 된다. 말해야 할 것을 말하지 않는 건, 비겁한 타협이 될 수 있고, 말해야 할 바조차 무엇인지 분간하지 못하면서 사랑, 정의, 평화를 거론하는 건 허망한 일일 뿐이다. 그러나 세상살이라는 게 실은 비겁한 타협이 연속일 때가 많고, 그것으로 우리는 후회와 성찰을 연거푸 살아내는지 모를 일이다. 결국 페르가몬은, 아니 우리 믿는 이는 회개해야 한다.(묵시 2,16) 숨겨진 만나를 먹고 흰 돌도 찾아 ‘새 이름’을 얻어야 한다. 탈출기에 나타나는 ‘만나’를 두고 랍비 엘리아자르는 이렇게 해석한다. “이 세상에서 너희들은 만나를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다가올 세상에서 너희들은 만나를 발견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그 만나를 ‘숨겨진 만나’로 칭하면서 예수님의 몸을 받아 모시는 성찬례로 이해했다. ‘숨겨진’이란 그리스말 형용사를 ‘간직한’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예수님을 믿는 이들에게 특별히 유보된 만나는 다름 아닌 예수님 그분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회개는 예수님을 향해 끊임없이 걸어가는 것이다. ‘쌍날칼’의 예수님을 향하는 건 이러저러한 세상 논리에 휩쓸린 교회가 되지 않길, 그래서 할 말은 하는 교회이길, 행여 교회 조직의 견고함을 위하여 정치인과 경제인 앞에 적당히 타협하고 할 말을 잃(잊)어 가는 교회가 되지 않길 외치고 다짐하는 일이기도 하겠다. 그리하여 승리를 상징하는 흰 돌을 세상 마지막까지 간직하는 교회이면 좋겠다. 세상 속 홀로 신앙을 외치는 동시에 세상과 함께 호흡하는 교회, 어렵고 무거운 일이다. 우리는 그 힘든 일, 무거운 일을 해내고 있다.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3-02 제3431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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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스미르나에 보내는 편지(묵시 2,8-11)

기원전 600년경 스미르나는 완전히 무너진 도시였다. 그러나 기원후 1세기에 이르러 스미르나는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도시에 사람의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난 이”(묵시 2,8)로 자신을 소개한다. 한 도시의 흥망성쇠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사건으로 해석하는 문학적 상상력이 스미르나에 보내는 편지의 서두를 장식한다. 사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이에 대해 우리는 속속들이 알지 못한다. 다만 우리는 아직 살아있고 살아 있으되 죽을 것 같은 고통과 궁핍을 겪을 때가 많다. 어쩌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이는 죽을 만큼 힘든 일들 앞에 크나큰 희망으로, 그리하여 갈망의 대상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살 것인지, 또 죽을 만큼, 아니 죽을 수밖에 없을 때, 어떻게 하면 다시 살아날 수 있을 것인지 우리는 아파하며 간절히 묻게 된다. 그 질문의 답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이, 예수님 그분이 주실 수 있다는 희망으로. 스미르나에 보내는 편지는 시험, 환난, 충실 등등의 단어로 독자들을 단단히 준비시킨다. 그도 그럴 것이, 스미르나에는 유다인들의 공동체가 다른 어떤 곳보다 굳건히 자리 잡고 있어서다.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유다인들의 비난과 괴롭힘이 끊이지 않은 곳이 스미르나였다. 디아스포라의 유다인들은 이방 문화와 종교에 친화적이었다. 그런 이유로 소아시아 지역의 유다인들은 곳곳에 자리 잡아 자신들의 신앙과 문화를 지켜낼 수 있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리스도인들에게만은 적대적이었다. 다른 문화에 호응하면서 같은 하느님을 믿고 유다 문화에 뿌리를 둔 그리스도인들에겐 혹독했다. 사도행전은 그런 유다인들의 태도가 시기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다음 안식일에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도시 사람들이 거의 다 모여들었다. 그 군중을 보고 유다인들은 시기심으로 가득 차 모독하는 말을 하며 바오로의 말을 반박하였다.”(사도 13,44-45) 비난과 모독, 박해를 살아가는 스미르나 공동체는 궁핍했으나 부유했다.(묵시 2,9 참조) 궁핍을 가리키는 그리스말 ‘프토케이아’(πτωχεία)는 그야말로 물질적 가난을 의미한다. 초대교회는 현실적 가난을 영성적 풍요로움을 이해하는 인식의 자리로 규정하곤 했다.(2코린 6,10; 야고 2,5 참조) 현실의 어려움이 더없이 클지라도 예수님을 향한 믿음은 더욱 단단해진다는 것이 ‘가난함’이 품고 있는 의미라는 것. 고통의 자리가 기쁨의 자리가 되고, 슬퍼하는 일들이 행복의 기회가 된다는 ‘자기 계발서’ 형태의 정신적 위로나 격려 따위의 충고가 아니다. ‘가난’은 가난한 것이고, 그로 인한 힘겨움은 폐부를 꿰뚫는 아픔을 동반한다. 야고보서의 말씀을 되새겨 보자. “나의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들으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을 골라 믿음의 부자가 되게 하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여러분은 가난한 사람을 업신여겼습니다.”(야고 2,5-6) 믿음의 부자가 된 것은 가난을 탈피하고, 가난으로 인한 고통을 걷어낸 결과론적 선물이 아니다. 믿음이 풍요로워 부자가 되는 것은 가난한 형제를 업신여기지 않는 형제애적 실천의 다른 말이다. ‘가난’은 그리하여 공동체가 함께하는 친교의 ‘원형’을 가리키는 상징체가 된다. 없는 사람이 더 없는 사람을 생각해준다는 일상의 경험칙을 우리는 알고 있다. 가진 것이 많음에도 더 많은 것을 가지려는 사람은 경쟁이나 노력을 당연시 여기는 경향이 있으나, 나누고 함께하려는 사람은 무한 경쟁과 숨 막히는 노력이 벌어지는 삶의 자리 뒤켠에 지쳐 쓰러지는 이들을 염려하는 마음을 지닌다. 믿음의 부자는 이렇게 사람을 챙기는 일을 하느님을 향한 믿음으로 알고 실천하는 사람이다. 형제적 친교를 사는 일이 믿음이 걸어가는 풍요로운 길이다. 스미르나 공동체는 가난했으나 그 가난으로 부유한 친교를 살아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서로를 비난하고 시기하고 심지어 괴롭히는 이들은 참된 하느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 스스로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민족이라고 자부하면서 타민족이나 다른 사상을 단죄하고 멸시한 유다인들은 실은 ‘유다인’이 아니라는 것. 흔히들 요한묵시록, 나아가 요한계 문헌이 90년 유다의 얌니아 종교회의(그리스도인들을 유다 사회에서 배척하고 저주하는 결정적 자리) 이후에 적혀진 글이라 반유다인 정서를 배경으로 한다고 여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과 유다인의 대립 구도를 적고자 한 게 요한계 문헌은 아니다. 참된 하느님 백성, 유다인은 혈통이나 육욕의 관점에서 이해될 것이 아니라(요한 1,13 참조)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육화 사건의 수용 여부에 달려 있다고 초대교회는 생각했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결정적 계시의 자리임을 선언하는 것이 참된 유다인이라는 것이다. 사람의 자리가 하느님의 자리가 되어, 사람을 하느님처럼 배려하고 사랑하는 일이 참된 유다인의 일이어야 했다. 저들끼리 모여 회당에서 하느님을 칭송하지만 사상과 신념, 문화의 차이를 절대적 선악의 기준으로 삼아 이 땅 위에 함께 살아가는 이들에게 횡포를 저지르는 이들은 ‘유다인이라고 자처하는 자들’이고 ‘사탄의 시나고가’(우리말 번역에는 ‘무리’라고 되어있다)라고 스미르나에 보내진 편지는 단언한다.(묵시 2,9) 스미르나의 그리스도인들은 아직 ‘열흘’의 환난을 겪을 것이다.(묵시 2,10) ‘열흘’을 두고 구약의 다니엘이 겪는 고초를 떠올리기도 한다.(다니 1,12 참조)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가 제공하는 음식을 거부하고 열흘 동안 채소와 물만 먹어도 용모가 뛰어나는 기적 같은 이야기는 ‘열흘’의 시간을 하느님에 대한 충실성의 시간 개념으로 바꿔놓는다. 열흘 동안의 환난은, 그러므로 하느님을 향한 믿음을 시험할 기회다. 충실히 믿음을 지키면 승리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생명의 화관’을 얻게 될 것이다. 사는 게 힘들고 무너질 때, 행복과 성공을 갈망하다 제 삶의 참된 가치를 타협하게 되는 순간, 우리는 몸이 죽는 것보다 더 끔찍한 제 신념의 죽음(두 번째 죽음)에 괴로워할 때가 있다. ‘고작 이렇게 살려고 내가 그렇게 행동했나’라는 스스로에 대한 자책에 죽지 않는 것, 스스로에게 ‘왜 사는가’를 묻는 것, 믿음의 충실성을 되짚어보는 이런 질문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한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마태 10,28)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2-23 제3430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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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에페소에 보내는 편지(묵시 2,1-7)

처음에 사랑이 있었고 불행히도 그 사랑은 추락하고 말았다. 에페소에 보낸 편지는 ‘추락한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역사적 관점으로 이해하길 좋아하는 사람들은 추락한 사랑을 당시 로마 제국의 황제 숭배와 여러 신들을 모시는 신전들 탓으로 돌린다. 그도 그럴 것이 에페소에는 기원전 29년부터 아우구스토 황제의 명에 따라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위한 신전이 있었고, 수렵과 궁술, 그리고 자연의 모든 것을 관장하는 아르테미스 신전 역시 존재했었다. 그래서 이방 문화와 종교들 틈바구니에 흔들리는 신앙인의 모습을 두고 첫사랑을 잃어버렸다는 해석이 주를 이룬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에페소 교회에 말하는 이는 ‘오른손에 일곱 별을 쥐고 있는 이’다. ‘쥐다’(κρατέω)라는 말은 ‘가지다’라는 말보다 강력하다. 흔히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에 방점이 찍혀 해석된다. 예수님이 교회의 근본이자 목적이라는 것. 쥐어진 일곱 별은 일곱 교회를 대표하는 천사를 가리키는데, 예수님께서 일곱 교회를 꼭 붙들고 챙겨주고 보듬어 주는 신적 보호로 ‘쥐다’라는 동사를 읽어낼 수도 있겠다. 일곱 등잔대는 일곱 교회를 가리키는데 그 한 가운데를 거니는 분 역시 예수님이다. 우리말 번역은 일곱 교회 ‘사이’로 되어 있지만, 부정확한 번역이다. ‘사이’로 번역된 ‘엔 메쏘’(ἐν μέσῳ)는 공간적 일치를 가리킨다. 일곱 교회와 함께 하나 되어 머무시는 예수님을 ‘엔 메쏘’라는 말마디가 암시한다. 일곱 교회와의 일치는 이 말마디 하나로 더욱 강조된다. “나는 … 안다.”(묵시 2,2) 예수님은 에페소 교회가 행하는 일과 노고와 인내를 알고 계신다. 일, 노고, 인내라는 단어들은 모두 현실 속에 살아가는 신앙인의 ‘수고’(受苦)를 가리키는 것으로, 요한묵시록은 행복과 안식을 향한 신앙인의 자세라고 가르친다.(묵시 11,13) 예수님은 이미 우리의 삶이 슬프고 힘들고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다. 예수님께서 알아주신다는 이유만으로 그 힘든 삶은 살아지는 것이다. 에페소는 여러모로 훌륭하고 모범적이다. 그럼에도 부족한 것이 있으니 그건 노력이나 희생, 혹은 성실함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딱 하나가 부족한 것이었고, 그 하나가 편지를 쓰게 된 동기다. “그러나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너는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저버린 것이다.”(묵시 2,4) 에페소 교회의 ‘첫사랑’을 두고 요한계 문헌, 그러니까 요한복음, 요한의 편지들을 근거로 해석하곤 한다. 이를테면, 하느님의 인간을 향한 사랑으로 믿는 이들은 구원의 자리에 머문다는 것.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하느님이 인간으로 오셨고, 그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인간은 하느님과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 ‘첫사랑’은 그리하여 하느님과 인간의 친교를 이루는 신앙의 본질을 가리키는 단어가 된다. 많은 신앙인이 행하는 일과 노고와 인내는 어쩌면 부수적인 것일지 모른다. 우리가 신앙에 대해 본질적으로 질문해야 하는 것은 ‘내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나는 누구를 향해 있는가’라는, ‘타자성에 대한 근본적 질문’이어야 하지 않을까. 한 사람의 노력이 아무리 성실하고 완벽하다 할지라도 상대의 입장과 마음을 헤아리지 않는 것이라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리는 숱한 삶의 경험들 안에 ‘타자’가 잊혀진 채 이루어지는 ‘선한 폭행’을 경험하고 있지 않나. 사람의 아들인 예수님은 에페소 교회에 채근한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생각해 내어 회개하라’고.(묵시 2,5) 그 ‘어디’는 추락의 공간이다. ‘그러므로 더 사랑하라’가 아니라 어디서 추락했는지, 어디서 벗어났는지, 그리하여 어디서 사랑을 잃고 헤매는지 살펴보라는 말이다. 에페소 교회의 본디 자리는 ‘사랑’이었으나 그 ‘사랑’을 잃어버린 곳이 어딘 지에 대한 질문은 태초의 인간을 향해 던져진다. 아담과 하와가 있었고, 그 둘은 하느님과 결별하여 사랑을 잃어버렸다는 것. 인간은 본디 하느님과 조화로운 관계 안에 있었으나, 그 관계가 깨어지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지혜서 7장 3절은 이렇게 노래한다. “나도 태어나서는 같은 공기를 들이마시고 같은 땅에 떨어졌으며 첫 소리도 다른 모든 이와 마찬가지로 우는 것이었고….” 화려했던 솔로몬 역시 한계 지워진 인간의 처지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는 슬픔을 노래한 것이다. 인간 삶에 대한 부정적 해석은 하느님과의 조화로운 세상을 향한 갈망의 긍정적 해석이다. 그러므로, 첫사랑의 회복은 인간의 근본적 삶에 대해 또 다시 질문하는 일로 시작한다. 우리는 본디 ‘관계 안의 존재’였다. 하느님의 모상으로 서로에게 ‘알맞은 협력자’로 창조된 것이 인간이었다.(창세 2,18 참조) 인간이 진정으로 제 존재 양식을 구현하는 일은 무엇일까. 에페소에 보내는 편지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너에게 좋은 점도 있다. 네가 니콜라오스파의 소행을 싫어한다는 것이다. 나도 그것을 싫어한다.”(묵시 2,6) 니콜라오스를 두고 역사의 한 인물로 규정하는 노력은 많았다. 예컨대, 사도행전의 ‘니콜라오스’는 초대교회의 일곱 부제 중 한 분이셨다.(사도 6,6 참조)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니콜라오스였다. 혹자는 니콜라오스를 따르는 신앙인의 무리가 교회 내부에 있었고, 니콜라오스의 모범을 추종했던 그 무리가 엄격주의로 빠져들면서 신앙의 게으름을 탓하는 배타적 무리가 되었다는 점을 언급한다. 굳이 역사의 한 인물로 시작한 이런 해석을 절대화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신앙 공동체에서도 이런 정황은 발견되니까. 제 신앙의 가치를 절대화해서 다른 이의 신앙을 폄훼하거나 무시하는 일, 제 노력을 정당화해서 다른 이의 노력을 게으름이나 일탈로 규정하는 일, 모두가 니콜라오스파의 소행과 유사한 것들이다. 기억하자. 우리는 ‘승리하는 사람’이다. 단절과 소외, 비난과 무시에 승리하여 인간 본연의 자리를 다시 질문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낙원에서 생명 나무의 열매를 ‘함께’ 먹을 사람들이다.(묵시 2,7 참조) 인간은 왜 사는가라는 질문에 인색한 오늘, 경쟁과 노력에 흠뻑 젖어 인간다움을 한낱 행동 방식의 문제로 격하시킨 오늘, 우리는 첫사랑이 그립다. 사랑은 다른 이가 그 다른 이로 존재할 수 있도록 알맞게, 세심히 어루만져주는 것이 아닐까.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2-16 제3429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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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일곱 개의 편지

요한묵시록이 묵시문학적 작품이라는 것에 이론은 없다. 그러나 2장과 3장의 일곱 개 편지는 묵시문학과 그 형식에 있어 달라도 너무 다르다. 편지는 모호하지 않고 뚜렷하다. 온갖 상징들로 신비스럽게 꾸며가는 묵시문학과 달리 편지는 말하는 이와 말을 듣는 이가 대체로 명확하며 편지 속에 담아내는 메시지 또한 시의적(時宜的)이고 현실적이다. 그런 이유로, 요한묵시록 2장과 3장의 일곱 개 편지들을 읽는다는 건, 어쩌면 요한묵시록의 모호한 상징들을 이해하는 데 있어 하나의 구체적인 지렛대가 될 것이라는 믿음이 생기곤 한다. 편지를 쓰는 이유 중 하나는 ‘말하고픈 게’ 있어서다. 그래서 편지는 말하고픈 이와 그 말을 들어야 할 사람을 품고 있다. 요한묵시록에서 말하는 이는 ‘사람의 아들’(묵시 1,13)이다. 다니엘서에 등장하는 묵시문학의 대표적 인물이 ‘사람의 아들’(다니 7,13-14)인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가리키는 데 사용해 왔다. ‘사람의 아들’은 천상의 신비를 지상의 현실 속에 밝히고 드러낸 종말의 대표적 인물이다. 예수께서 육화하셔서 하늘을 땅의 역사 안에 온전히, 그리고 굳건히 드러내셨기에 ‘사람의 아들’은 예수님의 삶 자체와 비견될 만했다. 요한묵시록 역시 일곱 개의 편지를 소개하기 전, 일곱 별과 일곱 등장대 사이에 서 있는 ‘사람의 아들’을 먼저 소개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아들’이 편지를 쓰도록 요한을 재촉했다. 요컨대,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일곱 교회에 ‘말하고픈 게’ 있어서 일곱 편지는 쓰여졌다. ‘사람의 아들’이 누군지 종말론적 관점에서 살펴보는 노력은 많다. 마지막 시대, 하느님의 결정적 개입을 알리는 묵시문학적 인물로 정리되는 그러한 노력들은 사실, 모호하다. 구름에 싸인 듯 현실 세상과의 괴리감이 사람의 아들이라는 형상 위에 여전히 맴돌기 때문이다. 요한묵시록이 소개하는 사람의 아들은 다르다. 이유인즉, 요한묵시록의 일곱 개 편지의 시작은 사람의 아들을 교회의 구체적 현실과 접목하여 묘사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오른 손에 일곱 별을 쥐고 일곱 황금 등잔대 사이를 거니는 이”(묵시 2,1)라고 소개된 ‘사람의 아들’은 교회 공동체의 주권이 사람의 아들에게 있음을 가리킨다. “처음이며 마지막이고 죽었다가 살아난 이”(묵시 2,8)는 스미르나 교회의 몰락과 재생의 역사를 사람의 아들에 투사하여 교회의 운명이 사람의 아들의 그것과 같은 것이라고 암시한다. “불꽃 같은 눈과 놋쇠 같은 발을 가진 이”(묵시 2,18)는 신심 있는 티아티라 교회의 신자들을 더욱 격려하기 위해 다니엘서에서 말하는 신적 보호의 전통적 표상들을 사람의 아들을 묘사하는 데 사용하고 있다. 요한묵시록이 말하는 ‘사람의 아들’은 믿은 이들의 현실적 삶 안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는, 그야말로 하느님의 ‘육화’를 확연히 드러내는 형상이다. 더 이상 모호하고 감추어진 하느님의 개입은 없다. 사람의 아들, 예수님을 통해 역사 속, 사람들 안에 하느님은 구체적인 캐릭터로 다양하게 스며든다. 그럼, ‘말을 들어야 할 사람’, 편지를 전해 받는 사람은 누굴까. 요한묵시록의 일곱 편지를 받는 이는 ‘천사’다. 대개의 주석학자들은 요한묵시록의 ‘천사론’을 유다 전통과 다른 맥락에서 짚어내는데, 바로 이 구절 때문에 그렇다. “이러지 마라. 나도 너와 같은 종이다. 예수님의 증언을 간직하고 있는 너의 형제들과 같은 종일 따름이다.”(묵시 19,10) 요한묵시록의 천사는 천상의 구별된 존재가 아니라 지상의 형제적 관계 안에 배치된다. 천사를 인간의 처지에서 이해하는 요한묵시록의 천사론은 혁명에 가깝다. 천상을 뚫어지라 바라보며 거룩하고 신비스런 메시지를 갈망하는 이들에게 요한묵시록의 천사는 절망스런 존재일 뿐이다. 더 이상 신비스럽거나 초월적인 메시지는 없다. 현실의 공동체가 겪는 일들을 정확히 직시하게 만드는 게 요한묵시록의 일곱 개 편지이고, 그 편지를 수령하는 이는 천사를 위시한 신앙 공동체다. 이미 천상의 천사는 지상의 인간들과 ‘형제’가 되었다. 사람의 아들, 예수님 덕택에 그리되었다. 일곱 개의 편지는 소아시아에 위치한 일곱 개의 신앙 공동체를 향해 쓰여졌다. 그렇다고 각각의 교회를 각각의 사건으로 나누어 살펴볼 필요는 없는 듯 하다. 일곱 개 편지에서 공히 반복되는 구절이 발견된다는 이유에서 그렇다.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묵시 2,7.11.17.29; 3,6.13.22) ‘여러 교회’로 번역한 것은 적확하지 않다. 그리스말 본문은 ‘그 교회들에게’(ταῖς ἐκκλησίαις)라고 되어 있고, 그런 이유로 ‘여러 교회’는 ‘일곱 교회’로 다시 번역되어야 한다. ‘일곱’을 완전 수, 혹은 가장 풍성한 수로 이해하는 묵시문학적 전제 하에, ‘그 교회들’은 시·공간을 초월한 모든 신앙 공동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된다. 요한묵시록의 일곱 개 편지는 당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뿐만 아니라 사람의 아들을 우리의 주님이자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모든 신앙 공동체에 공히 전해진 편지가 된다. 더불어 일곱 개의 편지는 그 형식에 있어 대동소이하다. 대략 이렇다. 사람의 아들이 각각의 교회 공동체 현실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각각의 교회는 믿음에 관하여 얼마간의 부조리와 모순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각각의 교회는 회개해야 하고, 회개한다는 조건 하에 여러 선물들이 주어질 것이다, 라는 식으로 일곱 개의 편지는 적혀졌다. 크게 보면, ‘회개하라’는 메시지가 또렷하게 드러나는 형식이다. 그래서일까. 일곱 개 편지의 시작마다 ‘~를 ~이가 말한다’고 반복하는데, 과거 예언자들의 상투적인 어투이기도 하다. 하느님께 돌아오라는 회개를 두고 요한묵시록의 편지들과 예언자들의 글들은 많이 닮았다. 일곱 개의 편지들을 읽어가다 보면 묵시문학을 모호함과 신비감으로 읽으려는 이들의 무모함을 상당부분 상쇄시킬 수 있겠다, 싶다. 회개하라는 구체적인 메시지를 마주하며, 묵시문학적 상징 뒤에 숨은 채 현실을 회피할 수 없음을 실감하게 된다.차분히 우리 삶을 직시하려는 움직임이 회개의 시작이 아니겠는가. 화려한 상징들로 판타지와 같은 미래를 꿈꾸기보다 지금의 우리 삶을 섬세하게 읽어내는 일이 믿음의 일이 아니겠는가. 무엇을 회개하여 무엇을 믿어야 할 것인지, 요한묵시록의 일곱 개 편지는 여전히 우리에게 질문하고 있다.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2-09 제3428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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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일(묵시 1,3)

요한묵시록 1장 3절은 요한묵시록을 읽고 나누는 이들을 소개한다. 우리는 다만 궁금해한다. 요한이 본 것은 무엇이며 요한은 그것을 어떻게 증언하였을까하고 궁금해한다. 그러나 1장 3절에 이르면 우리의 궁금증은 당혹감으로 바뀔 수밖에 없다. 요한이 보고 증언한 것이 하나의 ‘기록’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예언의 말씀을 낭독하는 이와 그 말씀을 듣고 그 안에 기록된 것을 지키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요한의 환시가 ‘예언의 말씀’으로 읽혀야 할 글이 되었고 낭독의 목소리를 통해 다시 말씀으로 선포된다. 말씀을 선포하는 자가 있고 그 말씀을 듣는 자들이 있다. 전례적 공동체를 상상해 본다. 아니나 다를까. 요한묵시록은 2장부터 3장까지 일곱 개의 교회에 보내는 일곱 개의 편지를 찬찬히 소개한다. 적힌 글 주위에 저자와 독자들의 공동체가 형성된다. ‘예언의 말씀’을 한 걸음 더 들어가 생각해 본다. 하나의 기록이 필요한 이유는 그 기록이 소개하는 사람, 혹은 내용의 부재(不在)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예수께서는 더 이상 여기에 ‘보이는 분’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요한이 본 모든 것은 우리가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에겐 글이 필요하다는 식이다. 요한묵시록은 예수님과 요한의 부재를 ‘예언의 말씀’이라는 글로 탈바꿈하여 독자를 찾는다. 읽어야 할 ‘예언의 말씀’을 두고 요한이 본 것, 말씀의 실체를 다시 찾아 나서 하느님이든, 그분의 계시든 무엇이 되었든 찾아내려는 시도는 여럿 있었다. 예컨대, 요한묵시록이 말하는 천년의 통치(묵시 20,3)를 역사의 한 시기로 굳이 특정하려는 시도 같은 것들이 있었다. 부재의 빈틈을 과거의 역사적 사실 관계를 재구성해서 성급히 메꾸고자 하는 이런 작업들을 ‘주석’(註釋)이라고 생각하는 데 우리는 익숙하다. 이른바, 글의 ‘지시적 차원’을 우리 교회는 지난 100여 년 동안 줄곧 강조해 왔다. 이를테면, 이 글은 저것을 가리킨다는 식의 역사 비평적 읽기 말이다. 요한묵시록의 글을 읽고 나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가리키는 바를 명확히 알게 된다는 것인데, 불행히도 대부분의 이교(離敎)나 사이비 종교에서 실제 사건으로서의 요한묵시록을 다루는 방법과 유사하다. 그리하여 성경을 ‘제대로’ 읽는 것은 몇몇 주석가들의 역사에 대한 전문적 역량과 학업 성취도에 달려 있는 것이고, 그리하여 우리는 과거에 혹은 미래에 무슨 일이 있었고 무슨 일이 생겨날 것이라는 추측의 근거로 주석이라는 걸 이해하곤 한다. 그러나 요한묵시록은 ‘예언의 말씀’이 가리키는 어떤 무엇(그것이 역사적 사건이든 미래의 환시든)을 향하기보다 독자의 형편을 더 헤아리는 듯하다. 독자가 행복하기를 바란다는 사실 말이다. 읽고 듣는 이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요한묵시록은 말씀이 글이 되어 읽히는 것의 ‘효과’로 독자의 시선을 이끌고 있다는 것. 이를테면, 요한묵시록의 저자는 마치 예언자처럼 그의 글을 읽는 독자들이 행복하기를 글의 처음과 끝에서 당부한다는 것.(묵시 22,7) 본디 예언이라는 것이 그렇다. 지난 시절 고귀한 말씀이나 사건을 박제화해서 시대와 공간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은 메시지를 전하는 게 예언이 아니다. 예언은 현재에 대한 고민과 성찰, 그리고 미래에 대한 제안과 격려를 제공하는 것이 예언이다. 요컨대, 지금의 현실에 대한 의미 부여가 예언의 본질이다. 사실 요한묵시록 저자 역시 이렇게 자신을 소개한다. “여러분의 형제로서,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과 더불어 환난을 겪는”(묵시 1,9) 이가 요한묵시록의 저자다. 독자와 함께 나누는 시간과 공간으로 저자는 묵묵히 걸어 들어갔다. 그에게도 하느님과 그분의 계시는 부재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함께 살아가는 동시대의 신앙인을 만나고 그들에게 자신이 보고 듣고 만났던 모든 것을 나누고자 한다. 그들의 행복을 위해서 말이다. 여기서 ‘그들’은 저자의 동시대 인물로 제한될 수 없다. 요한묵시록이 ‘글’로 남아 있기에, 글을 읽는 가능태의 모든 독자들이 ‘그들’이라는 범주에 초대받았다. 하여, 요한묵시록을 읽는 일은 ‘주석’의 수준에 그쳐서는 안 된다. 지금 읽고 나누고, 다시 읽는 신앙 공동체의 ‘해석’(解釋)의 일이어야 한다. 요한묵시록 1장 3절에 ‘지킨다’라고 번역된 그리스말 동사는 ‘테레오’(τηρέω)인데, ‘무언가 지속적으로 지켜내기 위해 늘 챙겨 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예언의 말씀인 요한묵시록은 현재의 일이다. 말씀을 지켜내고, 묵상하고, 고민하고, 성찰하고, 그리하여 지금을 어떻게 살아갈까를 찾아 나서는 일이 요한묵시록을 읽는 일이다. 그러므로, 요한묵시록이 요한이 본 것을 기록으로 남긴 것은 현재의 의미를 붙들고 글과 독자가 격돌하기를 바라기 때문이 아닐까 상상해 본다. 기록된 것을 읽는 일은 글이라는 대상이 글을 읽는 주체에게 끊임없이 말을 건네는 것이고 읽기의 주체가 글을 수용하고 이해하는 저만의 논리를 세우는 일이라, 읽는 것은 고유하고 새롭다. 어좌에 앉으신 분이 나타나고 어린 양이 봉인을 뜯고, 하늘의 용이 추락하고 대탕녀가 무너지는 모든 일은 읽는 주체, 독자가 살아내는 삶 안에 또 다른 상징으로 환치되어 독자의 ‘행복’을 위한 길잡이가 된다. 마침 요한묵시록의 끝에서 예수님은 1인칭 화법으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보라, 내가 곧 간다. 나의 상도 가져가서 각 사람에게 자기 행실대로 갚아 주겠다.”(묵시 22,12) ‘행실’이라고 번역된 그리스말 ‘에르곤’(ἔργον)은 육체적 노동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요한묵시록을 읽는 것은 지금 내가 사는 것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겠다. 1장 3절의 ‘예언의 말씀’은 이렇게 독자 안에 육화한다.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1-26 제3427호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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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계시와 상징(묵시 1,1-2)

“왜 요한묵시록을 읽는가”라는 물음에 흔한 답들은 이런 것이다. 미래에 펼쳐질 종말을 알고 싶으니까, 그 종말의 시간에 도대체 무엇이 펼쳐지는지 궁금하니까, 아니면 종말의 심판, 재앙 등을 피할 수 있는 묘책이 무엇일까 살펴보기 위해서라는 답들. 종말을 염두에 둔 이런 답들은 진지한 신앙인들에게 낯설다. 우리 일상과는 멀어도 한참 먼 시간의 일들이라 낯설고, 그 먼 시간에 대한 얼마간의 호기심이 어른거리는 답을 얻고자 성경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 요한묵시록을 읽는다는 건, 그리 반가운 일이 아닐테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요한묵시록을 처음부터 찬찬히 읽어나가려 한다. 무엇보다 종말에 대한 괜한 호기심이나 막연한 두려움은 우리의 독법과 무관하다. 요한묵시록의 첫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Ἀποκάλυψις Ἰησοῦ Χριστοῦ)로 시작한다. 그리스말로 ‘아포칼립시스’라는 ‘계시’는 ‘장막을 걷어낸다’는 뜻을 지닌다. 숨겨지고 가려진 것을 밝히 드러내는 것이 계시다. 문법적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 살펴보면, ‘예수 그리스도’(Ἰησοῦ Χριστοῦ)는 그리스말 명사의 속격(屬格·Genitive case) 형태로 쓰였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말의 속격은 주체적 의미와 객체적 의미를 동시에 나타낸다. 두 의미를 염두에 두고 번역하면 이렇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가(주체) 예수 그리스도를(객체) 밝히 드러내는 이야기라는 것. 요컨대 요한묵시록은 예수님이 당신의 이야기를 여러 상징들을 통해 찬찬히 풀어놓은 글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이미 알고 그분을 이미 믿고 있다면,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새로울 게 없다. 복음서에 예수님의 삶과 행적은 간략하나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그분의 공생활이 모든 계시의 절정이란 사실을 우리는 알고 믿고 있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계시라는 말마디는 밀교나 신비주의자들의 감추어진 정보 따위가 아니다. 사도 바오로는 계시를 모든 민족에게 선포되어야 할 복음으로 이해했고(로마 16,25; 갈라 1,16 참조), 복음서에서 계시는 젖먹이 어린이들에게조차 건네어진 하느님의 구원에로의 초대로 읽혀진다.(마태 11,25 참조) 그럼에도 요한묵시록을 읽을 때마다 미래에 펼쳐질 종말을 염두에 둔 태도가 흔한 이유는 아마도 ‘머지않아 반드시 일어날 일들’이란 문장 때문일 것이다.(묵시1,1) 특별히 ‘머지않아’로 번역한 ‘엔 타케이’(ἐν τάχει)가 아직 남아 있을 또 다른 계시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엔 타케이는 전형적인 묵시문학의 시간 개념이다.(다니 2,28 참조) 이를테면, 종말의 시간이 ‘이미’ 다다랐다는, 그래서 ‘결정적으로’ 종말의 시간이 지금 여기서 펼쳐졌다는 의미가 엔 타케이에 담겨져 있다. 그래서 엔 타케이를 ‘갑자기, 곧, 느닷없이’로 번역하기도 한다. 어떠한 시간적 여유나 기다림조차 허락치 않는, 지금이야말로 계시의 시간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일어나야 할 일들’은 지금 일어났거나 일어나고 있는 현재형의 사건들이어야 한다. 대개의 학자들은 그 사건들을 예수님과 그분이 주시는 구원으로 해석한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시작한 요한묵시록은 그 읽기가 끝난 지점에 예수님을 갈망하는 목소리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하여, 요한묵시록의 모든 읽기는 예수님을 찾는 것으로 방향 지워진 것이다. ‘반드시 일어나야 할 일들’은 결국 예수님을 통해 드러나는 마지막 시대의 구원에 관련된 것이고 요한묵시록 스물두 개의 장을 읽는 것은 그 구원이 지금, 이 자리에서 ‘갑자기, 곧, 그리고 느닷없이’ 이루어졌다는 희망과 위로를 얻어 누리는 일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예수님과 그분의 구원을 열거하는 요한묵시록의 모든 이야기들은 실제 사건이나 사실을 반영하는 게 아니라는 데 있다. 1장 1절은 계시가 하느님에게서 예수님에게로, 그리고 요한에게 ‘알려졌다’고 말한다. ‘알려졌다’라고 번역된 동사는 ‘세마이노’(σημαίνω)로 ‘상징화하다’는 뜻을 지닌다. 요한묵시록은 미래에 펼쳐질 사건이 아니라 예수님을 두고 여러 상징으로 새롭게 소개한 글이다. 요한이 보고 듣고 그래서 기록한 요한묵시록은 요한이 가진 수많은 상징들로 꾸며진 새로운 예수님이다. 다만 그 상징들은 예부터 켜켜이 쌓여 온 오래된 것들이라 누구나 이미 알고 있어서 새로울 게 없는 것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요한묵시록이 소개하는 예수님은 익숙한 상징들의 새로운 조합이라는 것.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예수님을 제 삶의 언어(상징)로 수없이 상상하며 갈망하는 사랑의 노래가 된다. 요한묵시록을 읽으면서 무엇을 위해 읽는다고 생각하지 말자. 무엇을 더 알고, 더 챙겨서 내 신앙의 정도를 한껏 들어 높이려고 요한묵시록을 읽지는 말자. 지금 내가 읽는 요한묵시록은 언젠가 내 삶의 어느 곳에서 이미 만난 예수님을 다시 만나려는 희망과 설렘의 기록이기에. 지금 내가 살아가면서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들을 통해 예수님을 그토록 갈망한 그 사람, 요한을 우리는 부러워해야 한다. 그의 믿음을, 그의 사랑을….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1-19 제3426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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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요한묵시록의 구조

요한묵시록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은 요한묵시록이 어떻게 짜여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요구한다. 대부분 주석서들의 첫 장은 요한묵시록이 이러 저러한 이야기들을 이러 저러한 순서로 적어나간 글이라고 소개하는 이른바 서술의 ‘외형적 구조’에 관한 것을 다룬다. 요한묵시록을 읽기 위한 하나의 제안일 수 있고, 요한묵시록의 내용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요약’이기도 해서 주석학자들마다 저마다의 관점에 따라 요한묵시록의 구조를 다양하게 소개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혹은 보편적으로 요한묵시록의 구조를 바라보는 관점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먼저, 요한묵시록은 역사서나 복음서에 나타나는 연대기적 흐름을 염두에 두고 읽어서는 안 된다는 것. 구약의 역사서처럼 어떤 임금이 즉위해서 어떤 일들이 벌어졌고 어떻게 하느님 곁으로 갔는지, 아니면 복음서에서 볼 수 있듯, 예수께서 어디서 언제 태어나셨고 갈릴래아를 거쳐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 당신이 어떤 일과 말씀을 남기셨는지, 그 결과 언제 어떤 모습으로 돌아가시고 부활하셨는지, 물리적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읽을 수 있는 게 요한묵시록이 아니다. 요한묵시록은 두 개의 크게 다른 문학적 장르를 선보인다. 2장에서 3장까지의 일곱 개 편지와 4장에서 21장까지의 묵시문학적 환시들은 달라도 너무 다른 문학적 외형을 갖추고 있다. 학자들은 요한묵시록의 편집이 일곱 개의 편지에서 시작되었다고 본다.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전례와 모임 안에서 일곱 개의 편지들을 읽어나갔고, 이후 일곱 개의 편지들이 소개하는 내용들을 묵시문학적 상징들로 새롭게 해석하고 소개한 4장에서 21장까지가 덧붙여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2장에서 3장까지는 일곱 교회가 처한 현세적 상황을 이야기한다고 여겼고 4장에서 21장까지는 그 현세적 상황에 대한 영성적 해석이라고 이해했다. 요한묵시록의 본격적인 본문이라 할 수 있는 4장에서 21장 8절까지는 다시 두 부분으로 나뉜다. 어린양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일곱 개의 봉인과 일곱 개의 나팔 이야기(4,1-11,19)가 첫 번째 부분이고, 요한이 작은 두루마리를 받아 삼키고 나서 펼쳐지는 악의 세력들의 서술이 두 번째 부분이다. 두 번째 부분은 왕관을 쓴 여인, 용, 두 짐승, 그리고 대탕녀 바빌론과 용의 멸망을 다루는 여러 장면들로 구성된다. 처음 일곱 개 편지는 문학적 장르가 바오로 서간이나 가톨릭 서간과 닮아 있고 대개의 내용이 훈계나 교훈에 관련된 것이라 설화적 혹은 연대기적 흐름의 이야기와는 차이가 있다. 4장에서 21장까지 역시 그렇다. 어린양을 주인공으로 하는 첫 번째 부분이 대탕녀 바빌론을 향하는 두 번째 부분과 대립하는 구도로 펼쳐지는데, 이것 역시 이야기의 설화적 혹은 연대기적 흐름이 아니라 대립하는 두 주체, 곧 어린양과 대탕녀 바빌론에 대한 묵시문학적 설명 혹은 해석으로 읽혀진다. 요한묵시록의 구조를 읽어내는 데 있어 또 다른 전통적 관점은 숫자 ‘7’과 관련이 있다. 일곱 개의 편지(2,1-3,22), 일곱 개의 봉인(6,1-8,1), 일곱 개의 나팔(8,6-11,19), 그리고 일곱 개의 대접(16,1-21) 순으로 요한묵시록은 짜여져 있다는 것. 각각의 ‘7의 시리즈’는 그 시작과 마침이 모두 천상의 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천상은 이른바 ‘구원’의 완성을 가리키는 공간이어서 요한묵시록은 구원이 없는 상태에서 구원을 이루는 설화적 흐름이 아니라 애초에 하느님을 향한 구원의 성격에 대해 찬찬히 설명하고 풀어놓고 있는 글이라는 것이다. 다만, 구원을 이해하는 데 각각의 ‘7의 시리즈’는 처음과 끝 사이에 세상의 비참함이나 한계성, 그리고 악의 상황을 천상의 공간과 대비시켜 서술하고 있다. 하나의 ‘7의 시리즈’가 끝나면 또 하나의 ‘7의 시리즈’가 이어지는 구도로 짜여진 요한묵시록은 네 번에 걸쳐 구원에 대해 말하고 있다. 구원은 그만큼 간절한 것이고 요한묵시록이 끊임없이 붙들고 있는 서술의 본질이다. 요한묵시록의 구조를 살피다 보면, 요한묵시록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시작해서 ‘주 예수여, 오소서’라고 마치는 이유가 더욱 선명해진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현실을 살아가는 것이고, 그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은 게 사실이다. 주어진 삶이 힘들기도 하거니와, 신앙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살면서 마주치는 유혹과 일탈이 우리가 붙들어야 할 구원에의 지향성을 더욱 어지럽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이유로 대탕녀 바빌론의 악함에 맞서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향한 걸음은 어떠해야 하는지, 천상의 삶이 이 혹독한 지상의 삶을 통해 어떻게 구현되어야 하는지 요한묵시록은 찬찬히 풀어나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분명한 건, 예수님께서는 이미 오셨고, 이미 구원을 주셨다는 것이고 그러므로 예수님으로 시작해서 예수님을 여전히 갈망해야 한다는 것. 다만, 예수께서 오실 그날까지, 예수님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지, 현실의 무엇이 이미 함께 계시는 예수님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는지, 지속적으로 묻기 위해 요한묵시록은 여전히 읽혀져야 한다는 것. 요한묵시록의 구조는 그래서 우리 삶의 ‘오래된 미래’에 예수님이라는 변치 않는 분을 끊임없이 상상하게끔 우리에게 숙제를 남긴다. 계시는 여전히 우리의 상상 안에 갈망의 대상으로 남아 있다.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1-12 제3425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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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요한묵시록 저자, 요한

‘요한묵시록은 누가 썼을까’라는 물음에 우리는 주로 역사의 한 인물을 찾으려 애쓴다. 예컨대, 파트모스섬에 갇힌 사도 요한을 떠올리는 것이다. 2세기의 유스티노나 이레네오 교부의 증언을 시작으로 교회는 사도 요한을 요한묵시록의 저자로 여기고 있다. 그럼에도 요한이라는 이름은 ‘원로 요한’ 혹은 ‘마르코라는 요한’(사도 12,12.25; 13,13 참조)으로도 소개되기에 역사적 저자에 대한 질문은 또 다른 질문으로 혼재되어 흩어진다. 물론 여기에 ‘요한복음의 저자와 요한묵시록의 저자가 같은 요한인가’라는 질문이 덧붙여지기도 한다. 현대 주석학의 발전으로 요한묵시록이 한 시대, 한 사람의 작품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음을 알게 된 이후 요한묵시록은 이른바 ‘요한계 학파’라는 어떠한 사상을 공유하는 하나의 ‘공동체적 작품’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하여, 우리가 주목할 것은 역사의 한 인물에 대한 정보가 아니라 요한묵시록이라는 책이 소개하는 저자의 문학적 실루엣이다. 요한이라 명명된 저자는 ‘하느님의 종’(묵시 1,1 참조)이자 ‘환난을 함께 겪는 형제이고 동반자’(묵시 1,9 참조)이다. 또한 자신이 본 것을 직접 써 내려가는 작가의 면모 또한 요한으로 소개된다.(묵시 1,11.19 참조) 이것이 끝이 아니다. 요한은 모든 민족에게 ‘예언’해야 할 사명을 부여받기도 한다.(묵시 10,11 참조) 그러나 그는 파트모스섬에 갇혀 있다. 형제와 함께 환난을 겪고 형제들에게 자신이 본 것을 써 보내야 하고, 나아가 세상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선포해야 할 요한은 공간적으로 고립되어 떨어져 있다. 그의 공간적 단절은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님에 대한 증언’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증언은 역설적이게도 두 가지 대립 개념을 하나의 통합적 사유로 조망하도록 독자들을 이끈다. 증언 때문에 요한은 ‘환난’을 겪고 있고, 그럼에도 증언을 통해 독자들을 행복으로 이끌고자 한다는 것.(묵시 1,3;22,7 참조) 요한이라는 인물의 묘사는 물리적 거리감을 기반으로 한 어느 영웅의 희생적이고 특별한 삶을 기리는 데 소용되는 게 아니다. 오히려 ‘환난’을 ‘함께’ 겪는 형제적 일치가 하느님과 어린양이신 예수님과의 일치가 된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문학적 장치로 기능한다. 그리고 그 일치는 요한묵시록을 읽는 수많은 형제와의 일치로 확장되고, 그 일치를 요한은 ‘행복’이라는 단어로 환치해서 소개하고 있다. 요컨대, 요한은 특정 시공간의 범주를 뛰어넘어 신과 인간의 일치를 위해 보고 쓰고 선포하는 행복의 매개체다. 요한을 따라 요한묵시록을 읽어나가면서 맞닥뜨리는 모든 환시는 신과 인간의 일치가 행복이라는 사실을 일깨우는 장치가 된다. 요한이 처음 본 ‘사람의 아들’이 대표적 경우다. “나는 처음이며 마지막이고 살아 있는 자다. 나는 죽었었지만, 보라, 영원무궁토록 살아 있다.”(묵시 1,17-18) 요한이 본 것은 특별하고 생소한, 그리하여 흔한 유다의 묵시문학들이 제공하는 천상의 화려함에 있지 않다. 다만, 여느 ‘사람’, 그 ‘사람’을 통해 신적 신비를 보게 될 뿐이다. 종말의 시대에 천상과 지상을 이어주는 역할을 담당한다는 ‘사람의 아들’(다니 7장 참조)을 예수님께 적용한 요한묵시록은 신적 신비를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을 통해 설명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환시는 사람에 대한 사유, 예수님을 통해 사람의 운명이 어떻게 변모했는지, 신적 가치가 사람의 가치 안에서 어떻게 사유되는지 되돌아보게 한다. 다시 요한이 갇힌 파트모스섬이라는 공간과 요한의 선포가 끝없이 펼쳐질 무한한 공간의 연결성에 대해 사유해 보자. 한 사람이 겪는 환난의 공간이 행복의 공간으로 탈바꿈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사유 말이다.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님에 대한 증언으로 머물게 된 환난의 공간에서 요한은 이미 형제들과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요한은 파트모스라는 단절의 공간에서 이미 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그리하여 모든 대립과 단절을 뛰어넘는 ‘사람의 아들’을 보았고 전하게 된다. 단절이 초월이 되고 환난이 행복이 될 수 있는 건, 놀랍게도 철저하게 한 공간에 머물며 자신이 보고 듣고 쓰는 것에 집중한 요한 덕택이다. 하나의 공간에서 수많은 공간과 시간의 흐름을 읽어낼 수 있는 것은 초월적 지식이나 정보 때문만이 아니다. 인간의 삶이 제한적이고 한계적이라 해서 천상의 하느님을 읽어낼 수 없다는 것에 요한묵시록의 저자 요한은 저항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굳이 우리가 천상적 삶과 거기서 얻을 수 있는 행복을 염두에 두는 입장에 선다면, 모든 인간적 삶과 거기서 오는 행복은 얼마간 부족한 것이 되고 만다. 그러나 요한은 달랐다. 시공간의 한계를 있는 그대로 고백하고 제 삶의 환난을 기꺼이 짊어지며, 자신이 보고 듣는 것은 진솔하고 담담히 적어 내려갔을 뿐이다. 요한은 자신의 시공간과 다른 또 하나의 시공간을 꿈꾸지 않았다. 그렇다고 주어진 시공간을 저만의 왕국으로 만들지 않았다. 갇혀 있으되 열려 있는, 고요하되 수많은 말들이 이곳저곳에 울려 퍼지는, 그러한 자리를 요한은 파트모스에서 만들어 갔다. 제 삶에 두 발을 디디고 굳건히 서 있을 때, 하늘의 계시는 가장 찬란하고 완전하게 온 세상에 드러날 것이다. 제 삶에 가장 순수하고 진솔할 때, 하늘의 계시는 가장 선명한 행복으로 그 삶 안에 육화할 것이다.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대구대교구 사제로 2001년 6월 사제품을 받았다. 2009년 프랑스 리옹가톨릭대학교에서 ‘요한묵시록에 나타난 어린 양의 그리스도론적 고찰’ 주제 논문으로 성서신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발행일 2025-01-05 제3424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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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계시와 상상

신악성경의 마지막인 ‘요한묵시록’을 1장부터 차근차근 읽어가며 묵상하는 기획 연재를 시작한다. 프랑스 리옹가톨릭대학교에서 요한묵시록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와 함께 신앙인의 믿음과 삶의 문제를 질문하면서 지금 나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지 성찰해 본다. 요한묵시록을 읽을 때마다 나는 ‘상상’(想像)이란 단어에 집착한다. 실제로 요한묵시록은 ‘상상의 결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경을 근본주의적으로 이해하는 이들에게 이런 생각은 낯설고 불편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Ἀποκάλυψις Ιησοῦ Χριστοῦ)는 미래에 펼쳐질 사건들의 기록이 아니다. 예전부터 유다 사회 안에 켜켜이 쌓여 온 신앙의 흔적들을 주섬주섬 끌어모아 예수님의 관점에서, 예수님의 마음으로 다시 읽어낸 게 요한묵시록이다. 요한묵시록이 적혀진 시절(1세기 말),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들었고 알고, 그래서 믿고 있던 터였다. 그분에 관해 새로운 사실을 알고 싶어 요한묵시록을 쓰고 읽은 것이 아니라 그분을 두고 이 삶을, 이토록 애틋하나 힘겨운 삶을 어떻게 짊어지고 나갈까 ‘상상’하며 쓰고 읽고 간직한 게 요한묵시록이다. 대개 요한묵시록을 공부한, 혹은 공부하고자 하는 이들은 주석서들을 찾기 마련이다. 주석서에 기록된 내용들의 대부분은 문법적인 것이거나 아니면 역사적 상황에 대한 열거, 또 아니면 구약 이곳저곳에 요한묵시록과 관련된 내용을 소개하는 것으로 짜여 있다. 이를테면, 글의 ‘지시적 기능’에 충실한 것이 요한묵시록을 바라보는 주석서들의 흔한 경향성이다. 이 단어는 원래 이런 뜻이다, 실제 역사에서 이 상징은 이렇게 읽혔다 등등 역사적 맥락 안에서 요한묵시록을 설명하려 하는 것이고, 대개의 신앙인 역시 요한묵시록의 수많은 상징들이 지시하는(가리키는) 사건이나 사람, 혹은 실제 상황이 무엇인지 알려고 애쓰는 게 사실이다. 그런 주석서의 내용들은 필자가 이 지면을 통해 쓰고자 하는 것들과는 거리가 있다. 물론 글의 지시적 기능에 대해 간과할 수 없고 당연히 설명해야 하겠지만, 필자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이런 상징과 표현들을 적어 내려가야만 했던 요한묵시록의 공시적(共時的) ‘의도’에 있다. 이 ‘의도’는 한 시대, 한 시절의 이야기로 국한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수많은 역사서들을 읽어나갈 때, 그 시대 상황에 대한 이해를 넘어 지금 우리 삶에 어떤 교훈이나 생각거리를 던져주는지 우리는 묻게 된다. 요한묵시록도 마찬가지다. 1장 3절은 이렇게 말한다. “이 예언의 말씀을 (…) 지키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요한묵시록의 말씀을 듣는 이들은 2000년 전 그들만이 아닌, 지금의 우리, 미래의 암묵적 독자들에게까지 열려 있다. 2000년 전 글인 요한묵시록이 당시 어떤 의미로 읽혔다는 주석적 분석은 필요한 것이나 지금과 미래의 모든 독자들이 그렇게만 읽어야 한다는 것은 꽤나 진부하고 게으른 일이 될 수 있다. 성 그레고리오 교황께서 말씀하셨듯 ‘성경은 읽는 이와 자라는’ 역동적인 생물체고 이것은 비단 성경뿐만 아니라 독자를 만나 새로운 해석의 지평을 열어 놓는 모든 글의 본성이자 운명이다. 오늘날 글의 지시적 기능에 매몰된 주석서에 의존한 성경 읽기는 수많은 신앙인, 그리고 성경의 수많은 독자들의 다양한 읽기 앞에 필자 자신의 한계성과 편협함을 반성하는 게 옳다. 우리는 끝없이 요한묵시록을 읽을 것이고 그 읽기의 결과는 전혀 기대치 않은 신앙의 다양한 결과물들로 쏟아질 테니까 말이다. 따라서 글의 문자적 의미와 지시적 의미에 치중한 ‘주석’의 작업 너머 오늘날 우리에게 이 상징과 표현들은 어떻게 적용될 수 있고, 어떻게 살아내어야 할 것인지 캐묻는 ‘해석’의 작업이 필요하다. 달리 말해, ‘요한묵시록은 이 상징과 표현들을 통해 왜 이렇게 상상했을까’ 하는 지금 이 자리에서의 사회적 사유와 묵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요한묵시록을 통해 내가 생각하고 내가 고민하는 것은 지난 시대에 실제로 벌어진 역사의 흔적을 복기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의 예수님을 묻고 또 물어 얻어낸 것이 갈릴래아의 지형과 그분이 실제 하신 말씀, 혹은 그분의 연대기적 활동 흐름 정도라면, 요한묵시록을 해석해서 얻어낸 것은 천상과 지상, 태초와 종말의 시공간적 연대 안에 ‘어린양’으로서 늘 함께하시는 초월적 존재의 예수님이다. 역사의 예수님을 좇아가서 얻어낸 것이 아니라 요한묵시록의 시대를 살아간 신앙인들 안에 여전히 살아계신 예수님에 대해 생각하고 상상하고 해석해서 얻어 낸 결과가 요한묵시록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함께 읽어나갈 요한묵시록의 첫 번째 질문은 이렇다. “예수님은 지금 나에게 도대체 누구이신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시작하는 요한묵시록은 갈릴래아 나자렛 출신의 예수님이 아니라 지금도, 내일도 살아계신 예수님이 도대체 어떤 의미로 우리에게 읽혀져야 하는가에 초점이 맞춰진 작품이다. 그리고 두 번째 질문은 이렇다. “요한묵시록은 어떻게 우리에게 행복을 전해주는가?” 요한묵시록에 “행복하여라”라고 하는 말마디는 총 일곱 번 나온다. ‘일곱’이라는 숫자의 묵시문학적 가치는 ‘완전함, 풍성함’ 정도로 해석되는데, 요한묵시록은 자신의 독자들에게 완전하고 풍성한 ‘행복’을 전하기 위해 글을 쓴 것이다. 필자는 가톨릭신문에 글을 기고하는 동안 이 두 질문에 계속된 질문을 던질 것이다. 지금 나에게, 우리에게 예수님은 누구이신가를 요한묵시록의 수많은 상징들을 통해 물을 것이고 그 물음의 답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행복한 삶으로 전해질 것인가 또한 물을 것이다. 그리고 그 물음의 끝이 또 다른 우리 삶을 ‘상상’하는 신앙의 기폭제이자 신앙의 사회학적 전망이 되길 간절히 바랄 것이다. 요한묵시록의 예수님은 여전히 우리에게 수많은 상상을 통해 간절한 기다림과 설렘으로 당신을 바라보길 원하신다. “그렇다, 내가 곧 간다.”(묵시 22,20) 요한묵시록의 끝이 이렇게 끝나는 건, 바로 상상의 자유로움을 위한 예수님의 배려가 아닐까. 이미 오셨지만, 아직 오셔야만 한다는 예수님은 그분을 이미 만났으나 아직 기다리는 우리 삶을 그분에 대한 상상과 해석의 풍요로움으로 가꾸길 나가길 바라고 계시는 것이 아닐까.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대구대교구 사제로 2001년 6월 사제품을 받았다. 2009년 프랑스 리옹가톨릭대학교에서 ‘요한묵시록에 나타난 어린 양의 그리스도론적 고찰’ 주제 논문으로 성서신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발행일 2025-01-01 제3423호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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