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만나다 28 -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천 명이 배불리 먹다?
백성호 입력 2016.09.07 00:03
갈릴리 호수의 북쪽으로 갔다. 호숫가에 교회가 하나 있었다. ‘오병이어(五餠二魚) 교회(The church of multiplication)’. ‘다섯 개의 빵(五餠)과 두 마리의 물고기(二魚)’라는 뜻이다. 교회 안으로 들어갔다. 정면에 제단이 하나 있었다. 바닥에는 오래된 모자이크 조각이 박혀 있었다. 두 마리의 물고기와 하나의 광주리. 다섯 개의 보리빵이 광주리 안에 담겨 있었다. 척 봐도 무척 오래된 모자이크였다. 이 모자이크는 1930년대 초에 발견됐다. 4세기 때 이곳에 지었다는 비잔틴 시대의 교회 유적이다. 그 유적 위에 1936년 지금의 오병이어 교회가 세워졌다. 끊임없이 순례객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교회 안에서 눈을 감고 ‘오병이어’를 묵상했다. 예수의 이적 중에서도 대표적인 이적 일화. 우리는 그것을 무엇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호수를 건넌 예수는 산으로 올라갔다. 언덕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멀리서 엄청난 인파가 예수를 향해 오고 있었다. 그걸 본 예수는 제자인 필립보에게 물음을 던졌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요한복음 6장5절) 그냥 던진 평면적인 말이 아니었다. 요한복음에는 ‘이는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다’(요한복음 6장6절)고 돼 있다. 예수는 제자에게서 무엇인가 보려고 했다. 필립보는 저들을 다 먹이려면 200 데나리온어치 빵을 사더라도 충분히 않겠다고 답했다. 당시 노동자나 군인의 하루 품삯이 1데나리온이었다. 만약 1데나리온을 5만원으로 계산한다고 해도 1000만원이란 액수가 나온다. 그러니 군중에게 저녁 식사용 빵을 제공하려면 굉장한 액수의 돈이 필요했다.

사람은 밥을 먹어야 산다. 유대인에게는 그게 빵이다. 빵을 먹어야 육신의 생명이 산다. 그런데 예수는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고 했다. 육신의 생명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이다. 왜 그럴까. 우리에게는 육신도 있고, 마음(영혼)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마음의 생명도 못지 않게 중요하다. 그럼 마음은 무엇을 먹어야 살까. 예수는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라고 했다. 하느님의 입이 뭘까. 신의 속성이다. 성경의 말씀은 모두 ‘신의 속성’에서 나온다. 그래서 그 말씀 속에 ‘신의 속성’이 담겨 있다. 그래서 빵만으로 살 수가 없다. ‘신의 속성’을 먹어야 내 마음의 속성도 살아나기 때문이다.

이 대목이 ‘오병이어 일화’의 쟁점이다. ‘제자들은 빵을 나누어 주었다’와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는 곧장 이어지는 두 문장 사이에 아무런 설명이 없다. 가령 ‘제자들이 건넬 때 빵 하나가 순식간에 둘로 불어났다’거나 ‘빵을 아무리 건네고 건네도 양이 줄어들지 않아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거나 ‘믿기 힘든 일부 사람들은 손을 직접 빵 광주리 안에 넣어보기도 했다’는 식의 이적임을 확실히 드러내는 구체적인 상황이나 묘사가 없다. 그런 식으로 빵을 나누고 남은 양이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고만 돼 있다. 그래서 의견이 갈린다. 어떤 사람들은 “‘오병이어 일화’야말로 신의 아들임을 입증하는 예수님의 분명한 이적”이라고 말하고, 또 어떤 이들은 다른 해석을 내놓는다.

그랬다. 예수 앞에 모인 수천 명의 군중은 서로 ‘모르는 사이’였다. 같은 부락에서 온 아주 소수의 사람을 제외하면 말이다. 그들은 한번 헤어지면 언제 다시 볼지 모르는 이들이었다. 정 추기경은 답을 이어갔다. “성경에는 물고기 한 마리가 두 마리, 세 마리로 불어났다는 기록은 없다. 하늘에서 떨어졌다는 이야기도 없다. 그럼 예수님이 보이신 진정한 기적은 뭘까. 다름 아닌 꼭꼭 닫혔던 사람들의 마음을 여신 거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마음, 예수님의 사랑으로 이웃과 도시락을 나누게 하신 거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기적이다. 지금 우리에게도 그런 마음이 필요하다.”
정 추기경의 답은 파격이었다. 어찌 보면 민감하기 짝이 없는 물음이다. 그럼에도 추기경은 망설이지 않았다. 나는 오병이어 교회의 바닥에 새겨진 모자이크 조각 앞에서 눈을 감았다. 두 마리의 물고기. 그건 단지 물고기에 불과한 걸까. 다섯 개의 보리빵. 그게 단순히 보리로 반죽해서 구운 빵에 불과한 걸까. 그렇다면 오병이어 일화는 그야말로 ‘단순한 이적 일화’에 불과한 걸까. 더 이상의 파도는 내게 밀려오지 않는 걸까. 그 파도가 내 안에서 무언가를 깨어나게 하지는 않는 걸까.

거세게 반박하는 사람들도 있다. “‘오병이어’는 예수님의 대표적인 이적이다. 예수님의 절대 이적을 희석시키지 마라. 다섯 개의 빵과 두 마리의 물고기로 수천 명을 먹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걸 부정하지 마라. 예수님은 절대 권능을 가지신 분이다. 하느님의 아들이다. 그러니 그게 어려운 일이었겠나. 그냥 받아들여라. 거기에 진정한 믿음이 있다. 다시 말하지만 물고기 한 마리가 두 마리로, 다시 세 마리로, 나중에는 수천 마리로 늘어난 것이다. ‘오병이어’는 완전한 이적이다.” 이런 믿음을 가진 이들도 결코 적지 않다.

당시 풍경을 눈 앞에 그려보았다. 저기 저쯤에 예수가 앉았을까. 그럼 군중은 저 아래에 앉았겠지. 5000명이 넘었으니 산 중턱에 가득했을 터이다. 여기도 동그랗게, 저기도 동그랗게 둘러앉았겠지. 예수는 그들을 향해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빵과 물고기를 들고 하늘을 향해 기도를 올렸다. 모든 사람들이 그 광경을 쳐다봤을 터이다. 그리고 고개를 갸우뚱하지 않았을까. ‘아니, 저분이 뭘 하려고 하는 거지? 아,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몇 개로 저녁식사를 하려고 하시나? 그래서 감사 기도를 올리는 건가?’ 다들 그렇게 생각했을 터이다.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저녁을 먹으려고 식전 기도를 한다고 여겼을 터이다. 이어지는 예수의 행동은 상상을 초월했다. 예수가 떼어낸 빵과 물고기는 제자들의 입을 향하지 않았다. 군중을 향했다. 예수는 고작 몇 개의 빵과 물고기를 오천 명을 향해 건네기 시작했다. 나는 이 광경이 바로 ‘오병이어 일화’의 핵심이라고 본다.

나는 종종 ‘오병이어’ 광경을 떠올린다. 내가 떠올리는 풍경 속에는 그때마다 비가 내린다. 눈에 보이지 않는 소나기다. 수천 명을 향해 다섯 개의 빵을 나누기 시작하는 예수의 모습. 거기서 예수는 빵만 떼어냈을까. 자신의 내면에 깃든 ‘신의 속성’까지 함께 떼어내지 않았을까. 그걸 예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지 않았을까. 그래서 비가 내린다. 누구는 그걸 ‘사랑’이라 부르고, 누구는 또 ‘연민’이라 부른다. 그래서 사랑의 비가 내리고, 연민의 비가 내린다. 그런 빗줄기가 갈릴리 언덕을 적셨다. 그리고 사람들을 적셨다. 바짝 말라 갈라진 논바닥 같던 사람들의 마음이 ‘예수의 소나기’로 인해 흠뻑 젖었을 터이다. 그래서 깨어난 걸까. 그들 속에 잠자고 있던 ‘신의 속성’이 예수의 빗줄기로 인해 눈을 뜬 걸까.

그럼 ‘오병이어 일화’의 정곡이 보인다. 그건 물고기 한 마리가 두 마리, 세 마리로 늘어난 게 아니다. 빵 한 조각이 한 광주리, 두 광주리로 늘어난 게 아니다. 그게 과학적으로 사실인가, 아닌가가 아니다. 눈에 보이는 빵, 손에 잡히는 물고기. 그것만 따진다면 우리는 ‘육신의 생명’만 따지는 셈이다. 예수는 달리 말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복음 4장5절) 그러니 예수가 오천 명을 먹인 것은 단순히 빵과 물고기가 아니었다. 예수가 먹인 것은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이었다. 다시 말해 그 말씀에 깃든 ‘하느님의 속성’이다. 그래서 끝이 없다. 쪼개고 또 쪼개도, 나누고 또 나누어도 ‘신의 속성’은 줄어들지 않는다. 말 그대로 ‘무궁무진(無窮無盡)’이다. 그런 ‘신의 속성’을 예수가 품고 있었다. 그게 예수 안에 깃들어 있었다.

“내가 찾는 빵은 어떤 빵인가. 갈릴리의 언덕에서 예수가 행했던 이적의 빵. 한 개가 둘, 셋, 넷으로 마구 불어나 결국 수천 명을 먹이는 빵. 그런 빵인가. 아니면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의 빵인가. 그 빵에 깃든 신의 속성인가.” 우리는 그것부터 물어야 하지 않을까. 예수의 이적이 과학적 사실인가, 아닌가를 따지기 전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