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만나다 33 - 예수가 고친 건 '오그라든 손'일까, 아니면 '오그라든 마음'일까
백성호 입력 2016.10.19 00:02 수정 2016.10.19 06:10
독사의 눈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예수를 해치울 수 있을까?’ 그렇게 노려보는 눈들이 회당 곳곳에 박혀 있었다. 예수는 그 속으로 걸어들어갔다. 마치 호랑이 굴로 들어서듯이 말이다. 회당 안에는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예수의 눈에도 그 사람이 들어왔을 터이다. 유대인들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물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어도 됩니까?“

맹자도 비슷하게 묻는다. 어린 아이가 우물을 향해 기어가고 있다면 어떡하겠는가? 그냥 놔두면 아이는 십중팔구 우물에 빠져 죽고 말 것이다. 그러니 착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기어가는 아이를 구하지 않겠는가. 인간의 천성은 선(善)하다. 인간의 성품은 하늘을 닮았으니 하늘의 성품이 본래 선(善)하다. 그게 맹자가 좇는 ‘하늘의 성품’이었다.

예수 앞에 양 한 마리가 나타났다. 그 양이 구덩이에 빠져 있다. 양의 목숨이 위태롭다. 안식일이지만 양은 쉴 수가 없다. 그걸 보는 예수의 마음은 어땠을까. 예수도 쉴 수가 없다. 그런 양이 살고 있는 세상은 어떨까. 세상 역시 쉴 수가 없다. 그럼 그 모두를 품고 있는 우주는 어떨까. 마찬가지다. 내가 쉬지 못할 때는 우주도 쉬지 못한다. 내가 쉬어질 때 비로소 우주도 쉰다.

가버나움의 회당에서 나는 눈을 감았다. ‘쉼’이란 뭘까. 휴가를 받아서 소파에 누워 음악을 들으며 책을 보는 일일까. 아니면 도심의 극장에서 만사를 잊고 영화를 한 편 감상하는 걸까. 그도 아니면 별이 쏟아지는 캠핑장에서 바비큐를 하며 자연을 즐기는 일일까. 이 모든 순간에 ‘쉼’이 있을 수도 있다. 또한 이 모든 순간에 ‘쉼’이 없을 수도 있다.

‘오그라든 손’ 대신 ‘오그라든 마음’을 성경에 대입하면 어떨까. 그럼 멀찌감치 서 있던 예수의 이적 일화가 성큼성큼 걸어와 나의 이야기가 된다. 각자의 이야기가 된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예수가 말했다. ”손을 뻗어라(stretch out your hand)“. 성경에는 ‘그가 손을 뻗자 다른 손처럼 성해져 건강하게 되었다’(마태복음 12장13절)고 기록돼 있다. 나는 회당의 구석으로 가서 바닥에 앉았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구체적인 장면을 떠올렸다. 회당의 입구, 그늘진 자리에 내가 앉아 있다. ‘오그라든 마음’을 가진 내가 앉아 있다. 그때 회당 안으로 예수가 들어온다. 나는 예수를 쳐다보고, 예수는 나를 쳐다본다. 눈이 마주친다. 예수가 내게 말한다.
네 마음을 뻗어라(stretch out your mind)“.
네 마음을 뻗어라(stretch out your mind)“.

그걸 위해 예수는 다림질을 한다. 그리스어 성경에서는 ‘에크테이노(ekteino)’라는 단어를 썼다. 구겨진 것을 ‘펴다’는 뜻이다. 그러니 예수가 설한 산상수훈의 메시지와 팔복, 주님의기도는 모두 다림질이다. 오그라든 우리의 마음을 꾹꾹 눌러 다시 펴게 하는 예수의 다림질이다. 성경에는 ‘(오그라든 손을 가진) 그가 손을 뻗자 다른 손처럼 성해져 건강하게 되었다’고 기록돼 있다. ‘성해지다’는 영어로 ‘restore’다. ‘회복하다’는 뜻이다. ‘곡(曲ㆍ굽을 곡)’을 ‘직(直ㆍ곧을 직)’으로 바꾸는 일이다.

가버나움의 회당 유적지를 나왔다. 바로 곁에 있는 갈릴리 호숫가로 갔다. 2000년 전에는 호수 주변에 가난하고 소외받은 이들이 많이 있었다. 병자도 많고 장애인도 많았을 터이다. 2000년 전 유대인들은 눈이 멀고 말을 못하는 사람을 마귀 때문이라고 보았다. 예수가 그런 사람을 고쳐주자 유대인들은 질겁했다. 마귀를 이겼으니 더 큰 마귀의 힘을 쓴 게 아니냐. 바리새인들은 그렇게 따졌다.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마귀들을 쫓아내지 못한다.“(마태복음 12장24절)

예수는 받아쳤다. ”사탄이 사탄을 몰아내면 사탄의 나라가 어떻게 버티겠느냐? 그럼 너희의 제자는 누구의 힘을 빌려 사탄을 몰아내느냐?“ 그런 예수의 반박에 바리새인들은 아무런 대꾸도 못했다. 왜 그랬을까. 예수의 반박이 이치를 관통하기 때문이다. 이윽고 예수는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한다. ”그러나 내가 하느님의 영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마태복음 12장28절)

예수는 그 이유까지 설명한다. 사람들이 짓는 죄와 신에 대한 불경은 모두 다 용서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용서받지 못하는 딱 한 가지가 있다고 했다. 그게 바로 ‘성령에 대한 모독’이다. 성령에 대해 모욕적인 말을 하는 게 ‘성령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해석은 너무 1차원적이다. 그게 아니다. ‘모독’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블라스페미아(blasphemia)’이다. 무언가를 ‘해치다’는 뜻이다. 그러니 예수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고 지적한 것은 ‘성령을 해치는 일’이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신의 속성’이 밭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짓는 죄와 신에 대한 불경은 모두 그 밭에서 자라는 오이나 가지, 토마토 정도에 불과하다. 가령 오이나 가지가 썩었다고 하자. 그럼 잘라서 버리면 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밭에서 다시 오이와 가지가 올라온다. 그런데 밭 자체가 망가지면 어떻게 될까. 아무리 씨앗을 심어도 싹이 트지 않는다. 어떠한 농작물도 올라올 수가 없다. 바탕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니 오이와 가지, 토마토를 망치는 일은 회복될 수 있다. 그러나 밭을 해치는 일은 결코 회복될 수가 없다. 그게 이치다. 그래서 예수는 ”성령을 해치는 일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고 말했다.

마르틴 루터(1483~1546)는 ”진리의 원천은 성경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독일의 종교개혁가이자 농민전쟁을 이끈 좌파 혁명가였던 토마스 뮌처(1489~1525)는 루터보다 더 깊은 곳으로 두레박을 던졌다. 그리고 통찰의 눈을 길어올렸다. 뮌처는 이렇게 말했다. ”진리의 원천은 성령에서 나온다.“ 뮌처는 한때 수도원에 머물며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성경이 성령에 의해 기록됐으니 우리가 닿을 곳은 ‘성령’이라고 했다. 뮌처는 진정한 권위는 성경이 아니라 하느님이 자신의 사람들에게 부여한 ‘내면의 빛’이라고 보았다. 그는 믿음에 의해서만 의롭게 된다는 루터의 의인론(義認論)을 반박했다. 이러한 신학적 견해의 차이로 인해 뮌처는 나중에 루터에게서 등을 돌렸다.

예수의 눈은 달랐다. ”무엇을 위한 율법인가?“를 따졌다. 뮌처가 ”무엇을 위한 성경인가?“를 따지듯이 말이다. 율법은 도구일 뿐이다. 무언가를 얻기 위한 방편이다. 그럼 성경을 통해 우리가 만나고자 하는 게 뭘까. 다름 아닌 성령이다. 영어로는 ‘holy spirit’이다. 하늘 위를 떠돌다가 번개처럼 내 머리에 꽂히는 초자연적 로또같은 존재로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그게 아니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을 잇는 속성이다. 둘을 하나로 잇는 속성이다. 그게 바로 ‘신의 속성’이다. 그 속성의 작용이 성령이다.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마태복음 11장28~29절)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마태복음 11장28~29절)

멍에는 무거운 도구다. 짊어지기만 해도 어깨를 옥죈다. 예수의 설명은 정반대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고 했다. 왜 그럴까. 예수의 멍에가 우리의 멍에를 부수기 때문이다. 그게 뭘까. 우리의 고집, 우리의 착각, 우리의 이념이다. 그게 부서진 자리가 바로 안식(安息)의 자리다. 예수는 유대인들에게 이런 말도 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복음 8장31~32절) 진리(眞理)가 뭔가. 참된 이치다. 그게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이치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