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만나다 30 - 예수는 보이는데, 예수 안의 신은 왜 안 보이나
백성호 입력 2016.09.28 00:05 수정 2016.09.28 06:18
예수 당시에도 그랬다. 사람들은 ‘안’보다 ‘밖’을 보기를 즐겼다. ‘나’보다 ‘남’을 논하기를 더 좋아했다. 그런 일들이 얼마나 비일비재했을까. 급기야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태복음 7장3절)
티는 아주 작은 티끌(mote)이다. 들보는 기다란 목재 기둥(beam)이다. 내 눈 속에 그런 기둥이 박혀있다고 생각해보자. 얼마나 아프고 불편할까. 뿐만 아니다. 들보로 인해 나의 시각이 왜곡된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왜곡된 시각’이 나의 눈이 된다. 가족을 대하고, 이웃을 대하고, 세상을 대하는 잣대가 된다. 그런 잣대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우리는 불같이 화를 낸다. 남의 눈에 낀 티끌 하나에도 분노한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태복음 7장3절)
티는 아주 작은 티끌(mote)이다. 들보는 기다란 목재 기둥(beam)이다. 내 눈 속에 그런 기둥이 박혀있다고 생각해보자. 얼마나 아프고 불편할까. 뿐만 아니다. 들보로 인해 나의 시각이 왜곡된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왜곡된 시각’이 나의 눈이 된다. 가족을 대하고, 이웃을 대하고, 세상을 대하는 잣대가 된다. 그런 잣대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우리는 불같이 화를 낸다. 남의 눈에 낀 티끌 하나에도 분노한다.

나는 성경을 펼칠 때마다 가슴이 멎는다. 예수는 정확하다. 참 놀랍다. 더하는 일도 없고 빼는 일도 없다. 그래서 가차(假借)없다. 예수 당시에도 ’메시아‘를 자청하는 이들이 더러 있었다. 그들은 모두 나름의 방식으로 남의 눈에서 티를 빼려고 했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 내가 네 눈 속의 티를 빼주겠노라.“ 이런 장면이 예수의 눈에는 얼마나 희극적이었을까. 큼직한 들보가 박힌 눈으로 남의 눈을 훑으며 티끌을 찾고 있으니 말이다. 비단 ’가짜 메시아‘들만이 아니다. 예수의 지적은 ’들보가 박힌 눈‘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된다.

석류 주스를 파는 가게가 곳곳에 보였다. 어른 주먹만한 석류를 수동식 기계로 누르면 ’주루룩‘하고 주스 한 잔이 나왔다. 나는 그늘진 테이블에 앉아서 주스를 마셨다. 시원하고 상큼했다. 그렇게 더위를 식히며 생각에 잠겼다. ”그럼 이 들보를 어떻게 해야 뽑을 수 있을까? 예수는 분명히 그 해법을 설했을 터이다. 그게 성경 속에 녹아 있을 것이다. 그게 과연 뭘까?“

예수는 분명하게 말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복음 10장38절)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누가복음 14장27절) 누차 강조했다.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라고 말이다. 그걸 외면하면 “나의 제자가 아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목회자들조차 “설교할 때 ’자기 십자가‘를 말하면 성도들이 부담스러워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예수는 왜 굳이 ’십자가‘라는 부담을 주려고 했을까. 거기에는 깊은 이유가 있다. 우리가 ’자기 십자가‘를 통과할 때 들보가 부서지기 때문이다. 예수가 십자가를 짊어지고 몸소 걸어갔다는 시장통의 계단. 그 위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 십자가‘를 꺼린다. ’십자가=고통‘이라고 생각한다. 안에서 물음이 올라왔다. “자기 십자가는 정말 고통일까?”

’어리석은 사람은 평생 동안/어진 사람을 가까이 모셔도/진리를 알지 못한다/숟가락이 국 맛을 모르듯이
지혜로운 사람은 잠깐 동안/어진 이를 가까이 모셔도/재빨리 진리를 이해한다/혀가 국 맛을 알듯이.‘
그럼 ’들보가 눈에 박힌 사람‘은 숟가락일까, 아니면 혀일까. 그렇다. 숟가락이다. 국 맛을 모르는 딱딱한 숟가락이다. 숟가락은 아무리 찍어 먹어도 맛을 모른다. ’예수의 맛‘을 모른다. 성경의 맛, 영성의 맛을 모른다. 눈에 박힌 들보로 인해 ’영성의 미각‘이 마비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는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했다. 딱딱한 숟가락이 자신을 무너뜨리게끔 말이다. 그래서 유연하고 피가 도는 혀가 되라고 말이다. 국 맛을 아는 혀, 예수의 맛을 아는 혀 말이다.

성경에는 ’숟가락과 혀‘에 대한 일화가 있다. 예수의 제자 필립보(빌립)가 졸랐다. ”주님, 저희가 아버지(하느님)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필립보는 왜 졸랐을까. 그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하느님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꾸 예수를 졸랐다. 단 한 번만 보게 해달라고 말이다. 그런 제자를 향해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요한복음 14장9~10절)

나는 예수의 지적을 다시 곱씹었다.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누가복음 6장42절) 나는 이 구절을 묵상했다. 그러다가 ’뚜렷이‘라는 단어에 주목했다. 그리스어 성경에는 ’diablepseis‘라고 표기돼 있다. ’뚫어서 보다(Thru+look)‘는 뜻이다. ’관통해서 보다‘는 의미다. 무엇을 관통해서 무엇을 보는 걸까. 그렇다. 예수를 관통해서 그의 안에 깃든 ’신의 속성‘을 보는 거다. 그게 ’뚜렷이‘의 깊은 뜻이다.


’나는 사람들 눈에 띄지도 않을 만큼 작은데 이 큰 사랑이 어떻게 내 몸 안에 있을까?
네 눈을 보아라, 얼마나 작으냐? 그래도 저 큰 하늘을 본다.‘
<이현주 목사 역 『루미 시초(詩抄)』 중에서>

’들보‘를 빼면 달리 보인다. 예수의 작은 몸 안에는 ’큰 사랑‘이 들어가 있다. 우주를 품는 무한(無限)의 사랑이다.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런 무한의 우주, 무한의 하늘을 우리의 작은 눈으로 볼 수 있다고 역설한다. 그래서 강조했다. 눈에 박힌 들보를 뽑으라고. 그걸 위해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라고 말이다.

“네 눈을 보아라, 얼마나 작으냐? 그래도 저 큰 하늘을 본다.”
이런 눈을 가질 때 비로소 보인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