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1차 남가주 성령안의 생활 세미나 2
제 2 가르침 : “하느님의 사랑”
- 반영억 라파엘 신부-
저녁식사 맛있게 많이 하셨습니까? 여러분의 표정을 보니 맛있게 많이 드신 것 같은데 음식 종류가 깔끔해서 맛있게 드신 것 같습니다. 제가 샌디에고에 온 지 3년하고 조금 넘었습니다.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식사하기 위해 혼자 한국식당을 찾아갔습니다. 한인 타운의 순두부 집이었는데 주문한 순두부를 맛있게 먹고 있는데 주인이 와서 하시는 말씀이 “저는 음식을 하면서 예수님이 잡수신다고 생각하고 음식을 만듭니다. 또 한편으로 우리 집에 오시는 한 분 한 분은 모두 예수님이 보내 주신 분이시라고 생각하며 예수님처럼 맞이합니다.” 하시며 자신 있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개신교 신자셨는데 제가 신부인지 모르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식당에 손님이 오면 예수님께서 오시는 것으로, 또 예수님이 보내주신 사람으로 생각하고 예수님께서 잡수시는 음식으로 생각하고 만든다면 그 음식은 분명히 맛있을 것입니다. 사랑과 정성이 들어간 음식은 먹어보지 않아도 분명히 맛있습니다. 그러나 사랑과 정성이 들어가지 않은 음식은 사료와 같습니다. 여러분은 음식을 만들 때 사료로 만듭니까? 음식으로 만듭니까? 여러분이 음식을 만들어서 누군가에게 대접하는데 사료를 먹입니까? 음식을 먹입니까? 때때로 남편이 미울 때가 있습니다. 마지못해 만든 음식은 음식이 아니고 사료가 됩니다. 사료를 먹은 배우자가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사랑과 정성이 들어가야 음식이 됩니다. 여러분이 저녁을 맛있게 드셨다는 것은 사랑으로 음식을 준비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우리 샌디에고 본당의 구역모임에 열심히 다니고 있습니다. 구역모임의 활성화를 위해서가 우선이지만 또 다른 이유는 사제관에 주방근무자가 없어 한 끼의 식사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구역모임 끝나고 식사 시간이 되면 제가 아주 열심히 먹습니다. 모임이 없는 날에는 또 열심히 굶어야 합니다. 이 말씀은 농담이고요, 어쨌든 이렇게 구역모임을 갈 때면 꼭 식사를 하게 됩니다. 각 가정에서 한 가지씩 음식을 가지고 와서 여러 사람이 함께 먹게 됩니다. 그러나 제가 그곳에서의 식사는 맛있게 먹지를 못합니다. 음식을 만들어 오신 자매님들이 신부님께서 자신이 만들어 온 음식을 먹는지 살펴보시기 때문에 제가 마음 편히 식사를 못할 때가 태반입니다. 누구 것은 가져가고 누구 것은 안 가져가면 마음이 상하실까 봐 제가 거기에 있는 음식을 다 가져오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제가 먹고 싶은 음식을 제대로 먹을 수가 없습니다. 접시에 담아 온 음식으로 배를 다 채우고 나면 배가 불러 정작 제가 먹고 싶었던 음식을 먹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잔뜩 배부르게 먹긴 했지만 맛있게 먹지는 못한 것이지요. 그러니 신부가 배만 나오고 돼지가 되갑니다. 사랑으로 음식을 만들었지만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양은 한도가 있기에 먹고 싶은 것을 알맞게 먹어야 정말 맛있게 먹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음식의 종류도 많다 보니 무엇을 먹었는지 기억을 못 할 때가 많습니다. 맛있게 먹는다는 것은 많이 먹는 거 하고는 다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먹는 사람의 입장도 생각해 주어야합니다. 어쨌든 여러분은 사랑으로 만든 음식을 맛있게 드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번 시간에는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먼저 성경 말씀을 다 같이 읽고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32쪽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3,18)
다음은 34쪽입니다. 2번 읽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4,16)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 이 시간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서 묵상하고자 합니다. 저희 마음을 이끌어 주시고 당신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열어주소서. 당신의 사랑을 저희에게 가득히 채워주셔서 저희도 당신의 사랑으로 살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살아계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멸망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것,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 그것을 그대로 행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믿음이란 그분께서 이야기하는 대로 그대로 믿고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민수기에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의 백성들을 이끌고 이집트의 종살이로부터 탈출하는 과정 중에 불 뱀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뱀들에게 물려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됩니다. 그때 모세가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하여 죽음으로부터 백성을 구해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하느님의 말씀대로 모세가 구리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매달아 놓습니다. 그리고 그 뱀을 바라보는 사람은 살 것이라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이 산 반면 또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뱀을 바라보면 산다고 했지만 보지 않은 사람들은 다 죽었습니다. 죽은 탓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남의 탓입니까? 내 탓입니다. 믿음이란 하느님께서 하라는 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는다고 하였으니 보기만 해도 살아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소금기둥이 된 롯의 아내 이야기입니다. 하느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파멸시키실 때 롯의 가문만은 구해주기 위하여 그의 사위들과 아들딸들, 그리고 성읍에 있는 그의 가족을 모두 데리고 그곳을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롯이 부인과 딸과 사위들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하지만 사위들은 우스갯소리라며 들은 척도 안 했습니다. 할 수 없이 가족을 버리고 아내와 두 딸만을 데리고 도망쳐 나옵니다. 그 과정에 천사들이 “달아나 목숨을 구하시오. 뒤를 돌아다보아서는 안 되오. 이 들판 어디에서도 멈추어 서지 마시오. 휩쓸려 가지 않으려거든 산으로 달아나시오.”(창세19,17) 하였습니다. 그런데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다보다 그만 소금 기둥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궁금하고 미련이 남아 뒤를 돌아보았다가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말씀대로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돌아보지 말라고 명했으면 그렇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물을 네 오른편에 던져라.”하면 오른편에 던지는 것입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음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먹고 마셔라.”하면 그냥 먹고 마시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아서 오는 불행이라면 불행, 죽음이라면 죽음, 그건 다 자기 탓입니다.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모험이지만 거기에 따르는 축복이 반드시 주어지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그 삶의 길을 제시해 주십니다. 특별히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14,6) 하셨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그분께서 하신 말씀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걸어간 길을 내가 따라가는 것입니다.
말씀대로만 따르고 실행하면 나에게 주어지는 것은 구원이요, 영원한 생명입니다. 하느님께서 외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주신 것은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그분은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시면서까지 당신의 모든 것을 우리를 위하여 내어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십자가를 바라볼 때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바라보면 고통을 먼저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왜 예수님은 저 십자가에 고통스럽게 왜 매달려 계실까 하며 그분의 고통을 생각하기 전에 그분의 우리에 대한 사랑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 짓눌리는 느낌이 있지만 십자가가 왜 유명해졌는지, 왜 십자가가 가치가 있느냐 하면 바로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거기에 매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님 때문에 그 십자가가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볼 때 늘 예수님의 사랑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미사를 봉헌할 때 제대 양옆에 촛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 그 촛불을 바라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밝다’라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따뜻하다는 생각을 하십니까? ‘자기 몸을 태우고 있다’라고 생각하십니까? 십자가를 바라볼 때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을 생각해야 하고 동시에 양 옆에서 타오르는 촛불을 바라보며 이제 그분의 사랑에 보답해야 할 나의 의무, 내가 해야 할 일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촛불처럼 내가 스스로 타서 녹아야 합니다. 초가 빛을 비추려면 자기 몸이 녹아 들어가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그분의 사랑을 깊이 느끼고 또 그분의 사랑을 깊이 알고 전하기 위해서는 이제 내가 타야합니다. 그만한 수고와 땀 없이는 그분의 사랑을 알 수 없습니다. 그분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읽은 성경구절을 마음속에 새기며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4,16)
하느님의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 그 자체이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 그분을 사랑한다는 것,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 그것은 내가 사랑하지 않으면 그분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그분의 삶으로 바뀌지 않는다면 내가 그분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기도하고 미사 참여하고 또 나름대로 많은 피정을 다닌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서도 정작 삶의 태도가 바뀌지 않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분들은 하느님을 만나도 겉으로만 열심이기에 진정으로 그분을 만나지를 못합니다. 그분의 삶으로 바뀌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사랑이시고 내가 사랑의 삶을 살지 못하니까 바뀌지 않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믿는다는 것은 또 그분을 내가 안다는 것은 내가 변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모습으로 변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므로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도 그 사람 안에 계시다라는 것을 우리 모두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일방통행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쌍방통행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은 일방통행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많은 허물과 죄를 범하며 살아갑니다. 그럼에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여전히 사랑해 주십니다. 허물에도 불구하고 죄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인간관계 안에서의 사랑은 일방통행입니까? 쌍방통행입니까? 내가 이만큼 했으면 이만큼이 돌아올 것을 기대하고 사랑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기대가 채워지지 않으면 마음 안에 상처가 그 사랑한 만큼 커지게 됩니다. 그래서 준 만큼 기대하고 기대하는 만큼 상처로 키워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어떤 보상이나 대가를 바라지 않고 무조건 내어주는 사랑을 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은 일방통행입니다. 죄가 있든 없든 우리의 한 사람 한 사람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좀 짓궂었습니다. 시골에서 컸는데 겨울이면 토끼를 잡으러 잘 돌아다녔는데 이곳 미국에 와 보니까 토끼들이 호강합니다. 한국 같았으면 돌아다니는 토끼들은 죄다 잡혀 먹혔을 텐데 말입니다. 겨울에 눈이 오면 동네 사람들이 다 모입니다. 토끼를 잡기 위해 산 중간에 그물을 쳐놓고 한쪽으로 몹니다. 토끼는 앞다리보다 뒷다리가 길기 때문에 위쪽으로 잘 뜁니다. 그래서 토끼를 몰 때는 위에서 밑으로 몰아야합니다. 그래야 미끄러져서 도망가지 못하고 그물에 걸리게 됩니다. 요즘에는 그렇게 춥지 않지만 예전에는 참 추웠던 것 같습니다. 토끼 잡느라 정신없이 눈밭을 돌아다니다 보면 춥고 귀도 시려집니다. 그러면 어르신들이 따뜻하게 주머니에 넣고 다니라고 잡은 토끼의 귀를 하나 잘라 줍니다. 또 시골에 농사짓고 벼 수확을 하고 나면 지푸라기를 크게 묶어서 그 집에다가 붙여 놓습니다. 집을 보온하다는 의미입니다. 또 그 지푸라기를 하나씩 뜯어서 소 여물을 주기도 합니다.
저보다 한 살 많은 사촌형이 있었는데 매일 같이 돌아다녔습니다. 한겨울에 형과 장난하고 놀게 없으니까 성냥불을 가지고 붙이면 푸르르 타는 재미가 있어서 성냥불을 가지고 불장난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다가 작은집 행낭채에 있던 짚 두 매에 불을 붙였더니 불길이 확 타올랐습니다. 사촌형과 제가 너무 놀라고 겁이 나서 불도 못 끄고 그곳을 도망쳐 나왔습니다. 행낭채가 다 타버리고 반이 다 쓰러져 버렸습니다. 산속에 사촌 형하고 둘이 숨어 있다가 저녁 늦게 내려왔는데 어르신들이 저희가 너무 큰 잘못을 저질러놔서 놀랄까 봐 그러셨는지 야단도 치지 못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분들 속이 어떠셨겠습니까? 그러나 저희들을 생각하시어 큰 잘못을 했음에도 야단을 안치시고 괜찮다고 토닥거려주시고 그냥 넘어가 주셨습니다. 아직도 그 기억이 생생합니다. 또 시골에는 엿장수가 많았습니다. 엿장수 오면 고무신 뜯어진 것 갖다 주고 비료부대 갖다 주고 엿과 바꿔 먹었습니다. 저희 작은댁의 대문이 삽작 대문이었는데 삽작에 나무를 얼기설기 묶고 그것을 철삿줄로 고정을 시켜 놓습니다. 그 철사가 구리철사였는데 제가 그걸 살살 풀어서 엿과 바꿔 먹었습니다. 조카가 그걸 뜯어다 엿을 사 먹었지만 야단도 치지 못하셨습니다. 어쨌든 혼날 일이 있음에도, 큰일을 저질러도 야단을 치지 못하는 것, 성경에 보면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풍부했다.”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그런 사랑에 비유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그 잘못 안에 하느님의 사랑이 감싸고 있습니다. 우리는 죄를 크게 지으면 “제가 하느님 앞에 큰 죄를 지었습니다. 감히 당신 앞에 나갈 수가 없습니다.”라며 냉담을 하고 성당에 안 나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더 큰사랑으로 품어주는 사랑으로 기다리십니다. 제가 신학교 때 공부를 참 못했습니다. 만약 제가 공부를 잘했으면 이런 자리에 서 있지 못했겠지요? 신학교 일 학년은 방 하나에 6명이 함께 살았습니다. 침대가 양옆으로 세 개씩 있고, 맨 끝에 히터가 있었습니다. 한겨울에도 시간에 맞춰 밤에 잠깐 히터가 들어왔다가 새벽녘에 또 잠깐 들어오고 또 꺼지곤 했습니다. 그러니 모두 히터 옆에서 자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데 침대가 모두 미리 배정돼 있었는데 제가 운 좋게도 히터 옆 침대에 배정되어 저는 그중에서도 가장 따뜻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추위를 제일 많이 타던 한 신학생이 제게 잠자리를 바꿔 달라고 했습니다. “야, 우리 좀 번갈아 가면서 자자.”며 부탁도 아닌 명령조로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기분이 나빠지고 은근히 화가 나서 싫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한번 바꿔 줄 수도 있었는데 안 바꿔줬으니까 그 친구도 화가 났습니다. 결국 말다툼을 하고 히터를 아예 막아버렸습니다. 그래서 모두 다 감기 걸렸었습니다. 신학교엔 다 천사 같은 사람만 모일 것 같았는데 그렇지도 않더군요. 마귀 같은 놈은 어느 곳이나 꼭 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저 자신입니다. 한번은 제가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잘못을 저질렀으니 신학교 생활도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고해성사는 받아야지 하는 생각하고 신부님을 찾아갔습니다. 교수 신부님께 고해성사를 보는데, 그 신부님이 제게 손을 내밀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손을 내밀자 제 손을 꼭 잡으시며 하시는 말씀이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손을 내밀고 계시니 그 손 놓지 말고 하느님이 언제나 내밀고 있는 그 손을 놓지 말고 꼭 잡으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에 힘입어 제가 신학교를 끝까지 마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제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궁금하시지요? 신학교는 밤 10시가 되면 불을 끄고 모두 침묵을 해야 합니다. 이를 ‘대침묵’이라고 하는데 오로지 하느님과 만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도 있고 동시에 평생 고해성사를 들어야 하니 신자들의 고해성사를 듣고 바깥으로 이야기할 수 없으므로 그런 연습으로 ‘대침묵’을 꼭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젊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보니 금방 배고파지고 출출해집니다. 그러면 외출 나갔다 들어올 때 라면도 사오고 참치 캔도 사오고 소주도 몰래 숨겨 들어옵니다. 그러고 나서 밤에 출출 할 때 코펠에다가 라면을 끓이는데 거기에 참치를 넣어서 먹으면 소주와 함께 먹으면 그 맛이 기가 막힙니다. 남몰래 먹는 라면과 소주는 정말 맛이 있습니다. 그러다 걸리면 학교를 떠나야 하는데도 그런 일을 했습니다. 옛날엔 아파트에서 쓰레기를 버리려면 층마다 벽 끝에 1층 쓰레기통으로 연결되는 쓰레기 투입구가 있어서 그곳에 쓰레기를 버리면 1층 쓰레기통으로 바로 떨어졌습니다. 그러면 누가 버렸는지도 모르게 감쪽같이 쓰레기를 처리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은 쓰레기장 옆에 사무처장 신부님이 탁 서 계시는 겁니다. 신부님이 다 아시면서 눈감아 주시는 거지요. 그러면 다음부터는 외출 나가 소주 사올 때 신문지에 둘둘 말아 싸서 옵니다. 그리고 다 마신 병을 버릴 때도 신문지에 싸서 밖에 나가 버리고 들어왔습니다. 신학교도 사람 사는 곳이라 실수도 하고 잘못도 저지르고 또 그런 가운데 용서도 청하고 용서도 받고 그러면서 그 과정 안에서 다듬어져서 신부가 되는 것입니다. 똑같습니다. 우리들도 살아가면서 허물이나 잘못을 두려워할 것 아니라 자비로우신 하느님이 끊임없이 용서해주신다는 믿음으로 나 자신을 그분께 맡기고 또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걸려 넘어지는 게 문제가 아니라 걸려 넘어져서 일어서려고 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신자 중에 가장 무서운 신자는‘배신자’입니다. 여러분은‘배신자’하면 베드로나 유다만을 기억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배반했다는 사실은 너무나 잘 압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몇 번 배반하셨습니까? 바로 우리자신이 무서운 배반자들입니다. 이렇듯 배반자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매일 끊임없이 약속하고 또 시작하지만 또 걸려 넘어지지만 하느님은 여전히 손을 내밀고 계시고 우리를 품어 주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을‘믿음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했지만 그가 사는 땅에 기근이 들자 아브라함은 나그네살이라도 하려고 부인과 함께 이집트로 내려갑니다. 이집트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그는 자기 아내 사라에게 사람들이 자신과의 관계를 물으면 누이동생이라고 말하라고 이릅니다. 결국 이집트의 왕 파라오에게 자신의 아내를 누이동생이라고 속이고 그에게 자신의 아내, 사라를 시집보냅니다. 자신에게 닥칠 위험을 피하고자 계획된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아브라함을 우리는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릅니다. 아브라함이 늘그막에 귀하게 얻은 아들, 이사악을 번제물로 하느님께 바쳤습니다. 받치라고 했을 때 주저 없이 기꺼이 받쳤습니다. 자기 아들을 하느님께 기꺼이 바치는 믿음이 있었지만 그전에는 위기를 모면하고자 거짓말을 했던 거짓말쟁이였습니다.
모세라는 사람도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이끌어 내는 중요한 역할을 했던 하느님의 도구였지만, 그가 젊었을 때 그는 정의감에 불탄 나머지, 자기 동족이 핍박받는 것을 보고 이집트 사람을 죽인 후 땅바닥에 파묻어버리고 도망을 칩니다. 그래서 긴 여정을 멀리 피난 가서 살게 됩니다. 그때 그곳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게 됩니다. 처음에는 못하겠다고 핑계를 댔던 모세는 하느님의 거듭된 권유에 결국 응답을 합니다. 그러고 나서 끊임없이 하느님과 대화를 나눕니다. 정의감에 불탔던 모세가 삶의 여정 안에서 끊임없이 하느님과 대화하면서 하느님의 사람으로, 믿음의 사람으로 바뀌어 갑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고 그는 죽고 맙니다. 결국 그의 뒤를 이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됩니다. 어떤 신자는 모세가 심장 마비로 죽었다고 합니다. 바로 코앞에 두고 들어가지 못하니까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합니다. 또 한편으로는 가나안 땅에 가보니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라, 메마른 사막이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젖과 꿀이 흐르는 것은 전체적인 다른 것에 비교해 볼 때 나무와 물이 있으면 그야말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 겁니다. 모세는 정의감에 불탔던 그러한 마음으로 계속 남아있었다면 그는 참 속상했을 겁니다. 코앞에서 못 들어갔으니 얼마나 속상했겠습니까? 그렇지만 그는 속상해 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과 끊임없는 대화를 하는 그 과정에서 하느님의 사람으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도구 삼아 쓰시는데 그 몫은 여기까지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성숙함이 있었기 때문에 서운함이 없었던 것입니다.
유다도 배반했고, 베드로도 배반했지만 유다는 자살해서 죽었습니다. 자기가 잘못했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그것이 너무 죄스러워서 죽은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하고는 비교가 됩니다. 베드로는 잘못한 것을 알고 눈물을 흘리고 다시 주님의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바로 바뀌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유다처럼 자기 죄책감에 의해서 죽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비로움 하느님의 큰 사랑. 그것을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일을 저지른 것이지요. 하느님의 자비, 하느님의 사랑을 안다면 끊임없이 그분께 매달려 “나 자신이 정말 이 모양 요 꼴입니다. 그렇지만 다시금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당신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당신 일으켜 세워 주십시오. 그게 진짜 하느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입니다.
다윗이라는 사람이 있죠? ‘왕 중에 왕’이라는 다윗도 남의 아내를 탐하는 간음죄를 저지르고 그것도 부족하여 그녀의 남편 우리야를 적장의 손에 죽도록 지시한 살인 교사죄를 지었습니다. 잘못을 범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에 온전히 맡기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편협한 일부분이 아니라 우리의 죄와 허물에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런 큰 사랑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사랑은 아주 품이 큰 사랑입니다. 그런데 우리 속이 좁다 보니까 그분의 속도 좁은 줄 알고 그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여자 속은 밴댕이 속, 남자 속은 좁쌀. 그럼 뭐 그 속이나 이 속이나 똑같죠.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신의 숨을, 영을 불어넣어 주셔서 우리를 당신의 모상대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보시니 참 좋다고 그러셨습니다. 그런데 살다 보면 흠이 보이게 됩니다. 그래서 좋은 모습이 훼손되는 그러한 과정이 시시때때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것을 하느님께서 아시기 때문에 당신의 큰 사랑으로 받을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그 아드님을 통해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해 주십니다. 우리는 그 하느님의 큰 사랑에 우리 자신을 맡길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이 항상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또 한편으로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주신 그 큰 사랑은 성체성사를 통해서 그 사랑이 내려져 오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6,51) 라고 했습니다. 생명의 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우리는 매일 모셔야 합니다. 그런데 일주일에 한 번 모시는 것으로 만족하며 사는 신자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집에서 매일 차려진 밥상에 밥은 거르지 않으면서 하물며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밥상은 매일 찾아가지 않습니까? 그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선택된 사람들인 우리들은 차려진 밥상 앞에 우리는 끊임없이 찾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그분을 모시고 우리에 대한 깊은 사랑 때문에 밥으로 오신 그분을 느끼고 또 영적인 양식인 성체 먹은 힘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미사 참례를 자주 하지 않는 것이 참 안타깝습니다. 여러분이 이 성령 세미나를 통해 미사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그분께서 주시는 영적인 양식을 더 자주 받아 모실 수 있는 마음이 불러 일으켜지기를 기도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영성체를 받아 모시는 모습도 참으로 다양합니다. 오래전 일입니다마는 구역모임을 열심히 다녔습니다. 반모임에 열심히 다니는 부부가 있었는데, 어느 날부터 영성체를 안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혹시라도 죄가 있으면 고해성사를 하시고 영성체를 하십시오.” 라고 이야기했더니 그분이 “신부님, 실은 저희 부부가 요즘에 몸이 아파서 병원에 다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병원 의사선생님께서 밀가루 음식은 절대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영성체를 하는 것입니다.” 성체 안에 계신 하느님을 모시는 영성체를 단지 밀가루 음식으로 생각하는 그분들은 영원한 생명의 빵이라는 믿음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들 하고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 부부가 영성체를 밀가루를 먹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어떻게 하느님께서 역사 하십니까?
제가 꽃동네에 좀 오래 있었습니다. 거기에 있다 보니 노인분들께 많은 것을 배우게 됩니다. 중환자실에 항상 그분들이 계셨는데 거동을 못하시기 때문에 신부님들이 방문하여 영성체를 해드립니다. 제가 가면 어르신들께서 “고맙게 또 왔어?”하십니다.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고맙게 또 왔어.” 예수님께서 고맙게 또 오시어 우리의 죄와 허물과 잘못을 사랑으로 생명으로 빵으로 채워주십니다. 그 얼마나 고마운, 감사한 일입니까? 영성체할 때도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 모시기보다는 그냥 덥석덥석 받아 모시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미사 중에 성체가 모자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성체를 반으로 쪼개서 나누어주게 됩니다. 반으로 쪼갠 성체를 “그리스도의 몸.”하며 드렸더니 한 신자 분이 “이거 반쪽이잖아요.”하며 무척 서운해 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부서진 빵으로, 깨어 나누어진 생명의 양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성체를 받아 모시면서 우리 자신도 밥이 되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생명의 양식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생명의 양식이 되어주기보다는 “너는 내 밥이야.”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너의 밥이다.”라는 생각은 안 합니다. 성체를 모신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나에게 당신의 모든 것을 몽땅 내어주셨듯이 나도 그렇게 내어주겠다는 마음으로 받아 모실 때 거기에서 예수님이 살아 움직이시는 것입니다.
어떤 할머니는 하얀 것, 그만 가져오라고 하시면서 그것 열심히 먹어도 여전히 어깨 아프고 허리도 아프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얀 것, 그만 가져오라는 것입니다. 성체를 영하면 아픈 데가 싹싹 낫습니까? 예수님의 사랑, 그분의 음식 받아먹으면 아픈 것 낫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우리를 위한 커다란 희생, 봉헌의 삶을 살았다면 우리에게 다가오는 여러 가지 고통 시련 역경 그것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그 사랑을 통해서 예수님 보내주신 그 고통을 이제는 내가 대신하는 순간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주님께서 이미 받은 고통 내가 대신 해야한다고 하셨습니다. 바로 그 고통을 이제는 우리가 대신한다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받아 모시고 그 힘으로 극복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못합니다. 성체를 모실 때 보면 전화번호도 쓰여 있고 메모도 적혀 있는 깨끗하지 않은 손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내밉니다. 준비가 안 되어 있는 것이지요. 마음의 준비는 둘째 치고 외적인 준비도 안 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식사할 때 모두 손을 씻고 식사합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분이 오시는데 그만한 외적인 준비도 안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믿음의 현주소입니다.
성찬례 때에 신부님이 들고 하는 성체(거양성체)는 여러분이 잘 보이도록 일반 성체보다 조금 큰 것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받아 모시면 더 기분이 좋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거양성체하고 일반 신자 분들께 나누어 주는 성체하고 질적으로 다릅니까? 거기에 계신 예수님과 작은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이 서로 다를까요? 성체를 모실 때는 생명의 양식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매일 오셔서 영적인 양식으로 소화해서 예수님의 사랑 안에 산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여전히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에 대한 그 사랑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사랑에 응답할 수 있는 마음을 잘 가꾸었으면 좋겠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그분의 사랑을 생각하고, 촛불을 바라보며 나의 봉헌을 생각할 수 있는 그러한 마음이 새로워 졌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사랑으로 다가오십니다. 우리도 그 사랑을 잘 받아들이고 또 그 사랑을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해 주시기를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윌리엄 홀만 헌트 (William Holman Hunt)의‘세상의 빛 (The Light of the World)’이라는 상본을 나눠 드렸는데 그 성화를 보며 잠시 묵상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나에게 끊임없이 문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왜 문을 두드리고 계신지 여러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지만 끊임없이 내 마음의 문을 두들기고 있을 때 내가 문을 열어 드리는 것은 말씀에 대해 내가 응답하는 것을 말합니다. 바로 주님의 말씀에 응답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가까이에 있습니다. 우리 일상 안에 있습니다. 멀리서 사랑을 찾으려고 애쓰지 말고 삶의 자리, 지금 이 자리에 그 사랑이 현존하고 있다는 것, 바로 옆에 있는 이웃을 통해서 다가온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마라스머스’라는 병이 있습니다. 이 병은 바이러스, 영양결핍으로 오는 병이 아닙니다. 바로 사랑을 받지 못해서 생기는 병이 ‘마리스머스’병입니다. 이 병을 고치려면 사랑으로 치료해야 합니다. 바이러스나 영양결핍도 아닌데도 몸이 수척해지는 병이라고 하는데, 치유방법은 사랑입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도 그러한 병에 얼마든지 걸릴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는데 정말 나를 사랑하시나 의심할 때 그러한 마음이 바로 그 병에 걸린 상태입니다. 끊임없이 나에게 다가오시는 그분을 받아 드릴 수 있는 넉넉한 마음 키워 주시고 사랑의 결핍원인을 주님께서 친히 채워 주시기를 기도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느님 아버지 당신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친히 우리를 위해 기꺼이 십자가를 짊어짐으로써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또한 특별히 그 사랑을 매일 매 순간 일깨우도록 성체성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다. 그 생명의 양식을 매일 받아 모실 수 있도록 우리 마음을 일깨워 주시고 또 그 성체성사를 통해서 우리 마음이 풍요로움을 더해 주소서. 부족하고 허물이 많은 저희에게 당신의 아들 친히 사랑으로 다가오셨으니 거기에 ( )하고 또 새 삶을 통해서 그 사랑에 응답하게 하소서.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풍부했다 하셨으니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허물을 가슴 아파하지 말고 털어 버릴 수 있는 용기 허락해 주시고 당신 사랑에 온전히 위탁할 수 있는 귀한 마음을 주소서. 주님 당신의 사랑으로 살고 싶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넉넉하게 채워 주시고 보듬어 주시고 또 그 앞길에 항상 동행하여 주시고 비추어 주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