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가르침 : “성령안에 새 생활”

2011. 3. 10. 오전 9:2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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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1차 남가주 성령안의 생활 세미나 4

 


제 4 가르침 : “성령안에 새 생활”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요한15,26)


 ‘진리의 영’인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가 선한 마음을 지니고 또 선한 삶을 살아가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시는 분이 성령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로움은 굉장히 다양합니다. 차동엽 신부님은 성령이 주시는 은사가  5만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이 주시는 은사가 그 만큼 많다는 것입니다. ‘성령 칠은(聖靈七恩)’이란 성령께서 주시는 아홉 가지 열매를 말하지만 실제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은사는 그 보다 훨씬 다양하고 많다는 말씀입니다. 이렇듯 우리가 생각지도 못하고 상상도 못한 은혜로움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옵니다.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요한16,13)


 성령께서 오시면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말씀이 곧 진리입니다. 어떤 신부님이 미사 시간에 강론을 항상 길게 하셨습니다. 강론이 늘 길다보니 신자들이 그 틈을 이용하여 단잠을 잤습니다. 눈을 지그시 감고, 경청하는 것 같지만 꾸벅꾸벅 졸았습니다. 하루는 신부님께서 말씀의 진리를 강조시며 “하느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라며 아주 강한 어조로 소리 쳤습니다. 이 소리에 졸고 있던 한 청년이 깜짝 놀라 얼떨결에 소리 쳤습니다. “맞습니다. 신부님의 말씀은 질립니다. 질리고 말고요.”했답니다. ‘진리’와 ‘질리는 것’은 발음은 같지만 뜻은 전혀 다릅니다. 여러분은 진리의 말씀에 맛 들여야 합니다. 질리지 마시구요.


 사제인 제가 성경을 가까이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좀 더 열심히 말씀과 접하려고 했던 동기가 있습니다. 언젠가 대구로 피정강론을 하러 갔었는데 강론을 마치고 나오는데 그곳 수녀님께서 대구에서 청주까지 돌아가는 길에 차안에서 들으라며 테이프를 주셨습니다. 그것을 들으며 저는 새로운 깨우침을 얻었습니다. 카타리나라는 자매님이 계셨는데 그 자매님은 몸에 온통 병을 안고 사셨습니다. 암 덩어리를 안고 사셨습니다. 그런데 배움도 없고 병도 많은 분이었지만, 성경을 아주 열심히 읽었답니다. 그것도 무려 300번을 읽으셨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세월이 흘렀기 때문에 그보다도 훨씬 더 많이 읽으셨을 겁니다. 평신도인 그 자매님은 성경을 300번도 넘게 읽었는데 나는 도대체 몇 번 읽었는가를 생각해보니까 참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날부터 제가 성경을 더 열심히 읽어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밖에 나갔다 올 때에는 성당에 들러서 성경을 펼쳐 읽고 들어옵니다. 욕심 부리지 말고 한 장씩만이라도 꾸준히 읽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읽을수록  마음이 더 뜨거워져 한 장만 읽게 되는 것이 아니라 두 장, 세 장씩 점점 더 들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성경과 더 친숙해 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성당에서 성경을 읽고 있는데 어떤 할머니께서 오셨습니다. 할머니께서 성당 제일 앞자리에 안으시더니 성경을 멀찍이 세워놓고는 소리 내서 읽으셨습니다. 할머니가 성경을 읽으시는 것은 좋은데  다른 사람 기도 방해 되게 왜 큰소리를 내서 읽는지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제가 그런 불만을 가지고 있는걸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더 크게 읽으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같이 오셔서 성경을 읽으셨습니다. 이유가 궁금하여 여쭤 봤더니 석 할머니라고 연세도 많고 눈도 잘 안보이니 죽기 전에, 눈 더 안보이기 전에 더 많이 하느님 말씀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성경을 읽다가 시력이 예전보다 더 밝아지셨습니다. 시력이 나빠진 게 아니라 더 좋아진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기쁘셨겠습니까? 그래서 더 열심히 성당에 오셔서 성경을 읽으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은 언제, 어느 때, 어떻게 우리에게 다가올지 모릅니다. 바람은 저 불고 싶을 때 분다고 합니다. 성령의 바람이 언제 불어서 우리의 마음을 부추겨 일으키고 하느님 말씀에도 젖어 들게 해주실 지 아무도 모릅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은혜로움을 풍부히 가지고 계십니다. 그런데 인간이 협조할 때 그 열매를 맺게 합니다.


 지난 번 시간에 ‘구원’에 대해서 이야기했지만, 구원은 하느님의 구원의지와 인간의 협력의지가 합쳐져야 이루어지게 됩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실제로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완성은 세상 종말에 이루어지므로 삶의 여정 안에서 끊임없이 인간의 협력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협력과 이루어질 때 좋은 열매가 맺어지게 됩니다. 영생의 열매가 맺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마음을 열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는 힘과 지혜, 능력이 생길 수 있도록 늘 협력해야 합니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을 통해 아버지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기도를 마치자 그들이 모여 있는 곳이 흔들리면서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하느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였다.”(사도4,31)


성령으로 가득 차서 하느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전까지는 불안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것이 두려움이었습니다. 말씀을 전하게 될 때 나에게 어떤 위험 부담이 다가올 것인가를 생각했기 때문에 불안했지만, 성령께서 임하시고 나서는 목숨을 내놓고 담대하게 하느님 말씀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어떠한 처지와 여건, 환경 안에서도 성령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전하고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것을 기꺼이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로 이런 것들이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로움들 입니다. 선을 행할 수 있도록, 하느님의 말씀에 더 친숙해 질 수 있도록, 기도를 열심히 할 수 있도록, 말씀을 들으면 지루한 것이 아니라 자꾸자꾸 더 보고 싶도록 , 기도하면 기도할수록 더 기도하고 싶어지는 마음을 불러 일으켜 주는 역할을 하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은혜로움은 아주 다양합니다. 오늘 저는 성령의 은사 중에 일곱 가지 은사와 아홉 가지 열매에 대해서 설명을 드리고자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은총은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써야 합니다.



은총의 선물은 다양합니다. 주시는 분은 한 분이신 성령이지만 성령께서는 각각의 사람에게 서로 다른 은총을 주셨습니다. 다양한 은혜로움 들을 우리가 바라보고 또 나의 성향에 맞는 은혜로움을 어떻게 청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본당신자들에게 성경을 많이 읽으라고 하고 난 후, 어느 신자 분 댁에 가정방문을 가게 되었습니다. 우연치 않게 그 댁의 달력에 눈이 갔는데  방문한 날짜에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고 거기에 “신부님 방문, 성경 먼지 털 것!”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성경을 어디다 보관하십니까? 아주 귀하니까 찬장에 보관하십니까? 아니면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도록 열어 두셨습니까? 하느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을 늘 접할 수 있도록 가까운 곳에 두어야 합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읽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저한테 궁금해 하는 게 있는 것 같습니다. 제 양복 깃에  뱃지 하나 가 달려 있습니다. 이 뱃지는 수태된 지 10주된 아기 발의 실물 크기입니다. 여러분들 중에는 낙태의 경험을 갖고 계신 분들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원하지 않은 임신을 하고 난 후 3개월 이내면 낙태를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그때 아기가 이미 이만큼 커 있을 때입니다. 작은 아기이지만 인간의 생명은 소중합니다. 내 눈으로 보이지 않는 생명, 그 생명도 나의 생명과 똑같이 소중한 것입니다. 하느님이 당신의 숨을 불어 넣어 주셔서 생명을 허락하셨다면 그 생명은 존중되어야 하며 보호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자기생명, 겉으로 드러나는 생명은 소중하게 생각하지만 보이지 않는 생명은 아주 소홀히 할 때가 많습니다. 그것은 아주 잘못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그런 고리타분한 말씀을 하느냐고 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렇지만 진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잘못된 생각이나 판단을 다수의 의견이라고 내세워도 진리가 될 수는 없습니다. 진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진리는 아무리 흔들어도 진리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은 어디까지나 그 존엄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항상 보호되어야 합니다.

 

 

성모님에 관한 노래를 해 드리겠습니다. 들어 보셨습니까? 《인자하신 어머니, 당신과 함께》 우리 성모님은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성모님은 여신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성모님을 공경하고 사랑합니다.  왜냐면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이신 그분의 어머니이시기도 하지만 성모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신앙의 모범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공경합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카나의 혼인잔치’이야기가 나오는데,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결정적으로 술을 만든 기적을 일으키게 하신 분이 성모님이십니다. “술이 없구나! 술이 떨어졌구나!”라는 것을 예수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 말씀 드린 이유는 물을 술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예수님께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아들 예수님께서 이야기 하십니다.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한2,4)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 소리를 듣고 성모님이 이야기합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2,5) 예수님의 말씀에 곧바로 순명하신 어머니의 모습이 이 말씀에 나타납니다.

 

성령으로 인해 예수님을 잉태하셨을 때에도 가브리엘 천사의 방문에“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하고 순명하셨습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도 순명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그런데 예수님께서 일꾼들에게 돌 항아리에 물을 길어 넣으라고 했습니다. 일꾼들이 돌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자 예수님께서 일꾼들에게 그 안의 것을 퍼서 과방장에게 날라다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그 일꾼들이 그대로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능력을 가진 예수님께서 물을 부어라, 날라다 주어라 라고 말씀하셨지만, 일꾼들은 마리아에게 순명을 했던 것입니다. 마리아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때가 되지 않았지만 어머니의 청을 외면하지 않으신 예수님이십니다. 어머니 청을, 어머니 마음을 헤아려서 물을 술로 변화시킨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전구 해 주신 힘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짦은 이야기지만, 거기에 들어가 있는 의미는 굉장히 큰 것입니다.


 우리는 성모님께 이루어 달라고 청하지 않고 “빌어주소서.”라고 청합니다. 왜냐하면 성모님은 직접 은총을 내려주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은총을 우리에게 직접 베풀어 주시는 분은 하느님 아버지이십니다. 예수님이 하느님 아버지께 말씀 드려서 우리에게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께로 가는 길에 협력자로서의 역할을 해 주시는 분이 성모님이십니다. 어머니 마음을 헤아린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의 은총열매를 우리에게 직접 분배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께 기도할 때 “해 주소서.”라고 하고 어머니께는 “빌어주소서”라고 이야기합니다.


 제가 어릴 적에 용돈을 아버지가 주셨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께 직접 이야기하기 어려워서 어머니께 이야기해서 아버지께 받아썼습니다. 아버지 옆에서 어머니가 “얘가 돈이 필요하다.”라고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물론 아버지께 직접 말씀을 드려도 되었지만 어머니가 분위기를 맞춰 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성모님도 하느님 아버지께 우리들을 전구해 주십니다. 하느님 아버지께 가는 유일한 중재자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안계십니다. 성모님은 중계자 역할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이것을 잘 구별해야 합니다. 구별을 명확히 하지 못하기 때문에 “천주교는 마리아교다! 우상숭배다!”하고 오해를 합니다.


 탈출기에 “너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든,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든, 땅 아래로 물속에 있는 것이든 그 모습을 본뜬 어떤 신상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탈출20,4)라는 말씀 때문에 이런 오해를 하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 주셨기 때문에, 그분이 신성을 가지셨기 때문에 예수님이라는 형상으로 볼 수 있었지만, 하느님의 형상은 볼 수가 없었습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무한하신 하느님을 어떠한 형상으로 만들어 모신다면 그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우리는 우상의 개념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인성을 취하고 오신 생존하셨던 인물이셨습니다. 성모님도 마찬가지로 실제로 살아계셨던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이나 성모님을 잘 기억하고 그분의 삶, 그분의 인격, 그분의 마음을 잘 떠오르게 하기 위해서 어떠한 형상으로 만들었다면 그것은 우상이 아닙니다.


 여러분들도 가끔 사진을 찍습니다. 독사진도 찍고 주위 경관과 더불어 스냅으로 찍기도 합니다. 그러나 생동감이 나는 것은 어느 사진이겠습니까? 독사진보다는 주위경관과 함께 스냅으로 찍은 사진이 더 생동감이 나고 지난 추억을 떠올리기에도 좋습니다. 우리가 성모님상을 만든다던지, 예수님상을 만드는 것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신성한 것이 아니고 그분의 인격을 우리가 생각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런 것을 만드는 것이 우상이라면, 사진도 찍지 말아야합니다. 우리가 좀 더 우상의 개념을 잘 알고 계셨으면 좋겠습니다. 성모님을 모시는 것은 신앙의 모범이요, 철저히 겸손과 순명과 믿음의 사람으로서 예수님 삶의 여정에 함께 하셨던 어머니, 십자가 밑에 계셨던 어머니 그리고 부활승천 후에 제자들과 함께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하고 계셨던 어머니의 삶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분 자체가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성모님상을 예수님 자리에 갖다놓았다거나 하느님 자리에 성모님을 모셨다면 그것은 우상입니다.


여러분들은 주님을 모시고 사십니까, 데리고 사십니까? 말로는 모시고 산다고 하지만 실제의 삶을 보면 모시고 사는 집이 드뭅니다. 아까 큰 종을 쳤는데, 저는 첫날 여기 와서 종을 보며, “나는 종이다. 딸랑딸랑!”하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주님! 주님! 하고 부를 때는 주님은 주인이고 나는 종이라는 뜻입니다. 종이란 주인을 받들어 섬기는 것이 종입니다. 그분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빨리 알아차려서 행해야 합니다. 그것이 종의 역할입니다. 그런데 우리 삶에 있어서 주님을 모시고 살아야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우리 삶의 중심에서 주님을 모시고 사느냐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모시고 산다기보다는 데리고 산다는 표현이 더 맞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은 자식을 데리고 삽니까, 모시고 삽니까? 한국 같으면 철저히 모시고 삽니다. 모셔야 될 어른들은 데리고 살고, 아이들은 데리고 살아야 되는데 모시고 삽니다. 그러다 보니 젊은이들이 밖에 나와서 딴 사람이 모셔야 하는데 안 모셔 주니까 문제가 생깁니다. 상황이 바뀌니까 적응을 못하는 것입니다. 모시고 산다는 것은 그분의 뜻을 헤아리고 그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 삶의 중심이 되고 있는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선택 하느냐하면 그렇지 못할 때가 참으로 안쓰럽습니다.


 제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어떠한 위협에도 무릎 쓰고 선택할 수 있는 용기와 결단을 부추겨 주는 것이 성령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 체험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아, 정말 하느님께서 살아계시는 구나! 나와 함께 하시는 구나!”하고 느끼게 되고 그래서 의탁하게 됩니다. 맡기면 맡기는 만큼 또 다시 체험이 주어집니다. 더 큰 믿음 안에서 응답할 수 있는 힘이 생기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첫발을 내 디딜 때 두려워합니다. “그렇게 하면 정말 그대로 이루어질까?”하고 의문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의문과 두려움을 극복하고 온전히 내맡긴다면 그 이상의 것을 얻게 됩니다.


 이전 시간에 루카복음의 ‘잃었던 아들의 비유’이야기 했습니다. 작은 아들이 아버지한테서 받은 유산을 가지고 객지로 떠돌며 사창가에서 모두 탕진하고 돼지먹이로 끼니를 때우다 굶어 죽게 생겼을 때 고향에 계신 아버지 생각이 났습니다. 아버지의 참사랑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바로 그러한 마음이 일도록 부추겨 주는 것이 성령입니다. 우리가 신앙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용기를 결단력을 굳셈을, 은혜로움을 주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성령체험을 원하시면 성큼 내딛기를 바랍니다. 진리의 말씀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순종하면 거기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믿음은 순명을 낳고 순명은 기적을 낳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체험을 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모험이 또 다르게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그 모험은 결코 헛된 모험이 아닙니다. 말씀대로 행해 보십시오. 그럼 반드시 열매를 얻게 될 것입니다.


 여러 가지 열매들이 있고, 은사들이 있는데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한 가지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세 명의 젊은이하고 예수님이 달리기 시합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보다 빠른 사람이 한 명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보다 한발 앞서 들어왔습니다. 또 한 사람은 예수님하고 동시에 들어왔습니다. 나머지 한 사람은 예수님보다 한발 뒤에 들어왔습니다. 누가 칭찬을 받았겠습니까?  성경 말씀을 비유로 이야기 한다면, 한 발 앞서 들어온 사람은 세례자 요한 같은 사람, 즉 주님의 길을 닦는 사람이며 동시에 들어온 사람은 주님과 함께 항상 동행하는 사람이고, 한 발 뒤늦게 들어 온 사람은 주님을 뒤따르는 사람, 그렇기 때문에 모두다 칭찬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사람마다 그 역할이 다 다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사는 사람마다 각기 다릅니다. 어떤 사람이 받은 은총은 좋고 또 어떤 사람이 받은 은총은 조금 못하고, 이런 것이 없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주시는 은사는 다 고귀하고 또 공동이익을 위해서 써야 하고 하느님 영광을 위해서 써야 합니다. 그럴 때 그 은사가 빛나게 됩니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은 하느님의 은사를 풍부히 받고도 그것을 활용하지 못해서 그냥 묵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투덜거립니다. 자신이 조금 게으른 사이에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을 거두어 갔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을 거두어 가십니까? 다만 내가 잃어버릴 뿐입니다. 간수하지 않으면 잃어버리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사는 많이 써야 더 쓸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여러분들이 기도할 때, 특별히 성령 안수를 받으실 때, 체험하고 싶은 은사를 간절히 이야기 하시면 됩니다. 


여러 가지 은사들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성령이 주시는 ‘아홉 가지 봉사 은사’에 대해 말씀 드리기 전에 교제를 읽어 보겠습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성령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1코린12,4-7)


 성령이 주신 은사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 데 그것은 공동이익을 위한 것입니다. 공동 이익을 위한 은사에는 무엇이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밑에 보면 ‘아홉 가지 봉사 은사’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첫 번째는 ‘지혜의 말씀은사’입니다. 지혜하고 지식하고는 다릅니다. 지식이 이론적인 것이라면 지혜는 실천적인 것입니다. 영감 받은 말에 대한 실천적인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재판’이야기처럼 필요한 말을 할 수 있는 은혜가 바로 지혜의 은사입니다. 어떤 결정적인 상황이 왔는데 거기에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말을 할 수 있는 은사입니다. 지혜의 은사가 주는 첫째, 둘째, 셋째, 넷째가 있는데, 그것은 여러분들이 한번 읽어 보시면 되겠습니다.

 

그 다음은 ‘지식의 말씀은사’라고 했습니다. “영감을 받아 말하므로 명확하고 설득력 있게 말하는 은사이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조 지식의 은사를 받은 것 같습니다. 배운 지식을 잘 전달하는 은사이기 때문에 선생님이라 던지, 교리 강사, 성직자들이 받으면 굉장히 효과적인 은사가 지식의 은사입니다. 강의를 들으면서 쏙쏙 들어온다고 생각하시는 분계십니까? 그렇다면 그분은 지식의 은사를 받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계속 좁니다. “맞습니다. 옳습니다.” 하면서 고개를 끄덕끄덕 합니다. 그분도 지식의 은사가 앞으로 생길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볼수록 보고 싶어지는 마음이 일으켜지는 것도 지식의 은사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 다음에 ‘치유의 은사’가 나옵니다. 사람들은 치유라고 그러면 아주 굉장히 매력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치유은사, 치유피정 하면 여기저기 쫓아다니는데, 하느님의 은총은 꼭 거기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삶의 자리에서 어떤 믿음을 가지고 말씀대로 행하느냐에 중대한 치유가 일어납니다.  치유의 은사는 외적, 내적, 영적인 치유와 구마로 구별을 하는데, 외적 치유란 육체적으로 아픈 곳이 낫는 경우입니다. 사람들은 치유의 기적만을 생각하지만 그 치유를 통한 하느님의 능력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믿음을 동반한 가운데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기적행위를 통한 표징입니다. 예수님의 기적행위는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임을 알리는 것이며 하느님 아버지의 능력을 받은 메시아임을 드러내기 위하여 행하는 표징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은 안보고 당장 일어나는 치유의 기적에만 매달립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할 것은 그 안에 계신 하느님의 능력입니다. 하느님의 능력 없이는 아무것도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능력에 따르는 인간의 협력이 더해질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 설교하고 계실 때 지붕 위를 뚫고 앉은뱅이를 내려 보낸 이야기가 성경에 나옵니다. 그런데 정작 아픈 사람의 믿음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이웃 사람들의 믿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본인의 믿음도 중요하지만, 이처럼 주변사람의 믿음도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왕실 관리의 아들을 살리시는 이야기(요한4,43)도 나옵니다. 예수님이 갈릴래아 카나에 가셨을 때 그곳에 사는 왕실 관리가 예수님을 찾아와, 자기 아들이 죽게 되었으니 카파르나움으로 내려가시어 아들을 고쳐 주십사고 청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왕실 관리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아들을 낫게 해 주셨습니다. 그 아들의 믿음보다도 아버지의 믿음을 보고 치유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당사자의 믿음도 중요하지만 그 주변에 함께 더불어서 기도하는 사람의 믿음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난 현상에만 집착하지 말고 능력을 일으키시는 하느님을 바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필요한 때에 거기에 맞는 치유를 해 주십니다. 외적인 치유뿐만이 아니라 그밖에 주어지는 은총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준비하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제가 한국에서 본당 신부로 있을 때  어느 자매님께서 주일미사 끝나고 제게 오시더니 머리가 너무나 아파서 어떻게 할 줄을 모르겠다고 하셨습니다. 몇날 며칠을 계속해서 잠도 못 자고,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기는 것이 너무 고통스럽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기도 하십시오.”하고 말씀드렸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이 대신 채운다고 했듯이 그런 마음으로 기도하시라고 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통을 내가 체험하는 순간이 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하고, 또 동시에 나보다도 더 큰 고통을 받는 사람들의 고통을 내가 대신 짊어지는 순간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치유라는 것은 내가 병이 낫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마음이 일치하는 것임을 잊지 마시고 기도하시라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픈 곳을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뜻대로 해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면 거기엔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길지 않은 사제 생활동안 그러한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아무튼 그 자매님이 하느님의 뜻대로 해 달라는 기도를 드리고 집으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로 성당에서 뵐 수가 없었습니다. 미사에 빠지지 않으시는 분인데 미사에도 오지 않으셨습니다. 걱정을 하고 있는데 그 자매님이 5일 뒤에 성당에 오셨습니다. 그러면서 “신부님, 제가 신부님 기도 받고 나서 설사를 심하게 했습니다. 화장실을 들락날락 거리느라 성당을 못나왔습니다. 약국에 가서 지사제까지 사 먹어봤지만 낫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때 느꼈습니다. ‘하느님께서 역사하시는 구나!’ 그러고 나서 성당을 나온 겁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머리가 너무 맑고 깨끗해 졌습니다. 그 자매님이 오래도록 변비를 앓고 있었는데  그것 때문에 큰 고통을 받고 계셨습니다. 뒤가 꽉 막혔으니 아침에 일어나는 게 너무 두려운 겁니다. 화장실을 가야 하는데, 화장실을 가면 온갖 고통을 다 겪어야 되니까 너무 힘들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설사로 변비를 고쳐 주시니 머리 아픈 것이 깨끗하게 다 나아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머리가 아픈 것만을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근본적인 원인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법으로 원하는 것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내가 원하는 때에 내가 원하는 방법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기대하니까 만족하지 못하고 기도의 응답이 없다고 불만을 토로합니다. 기도할 때 들어주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육적인 치유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해주실 분을 우리가 주님으로 모시고 있다는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내적치유는 내적인 치유를 말합니다. 고해성사를 두려워한다던 지, 마음 안에 쌓아둔 상처들이 기도를 통해 치유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은총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옵니다. 일회적이 아닌, 계속해서 일어나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고 거기에 항상 순응해야 합니다.


 내적인 상처가 있을 때 그 상처만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고 마음이 답답해집니다. 저도 아까 말씀드렸듯이 골칫덩어리를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네가 신부면 다냐?”했던 그 골칫덩어리를 생각하면 속상했던 기억이 다시 납니다. 그것을 잊기란 쉽지 않지만 엊길 잊는 것보다는 있는 사실 그대로를 받아들일 때 마음이 편해집니다. 그것에 대한 두려움도 없고 미움도 없으면 편안해 집니다. 그것이 은총입니다. 내적치유란 성경보고, 신부님 강론 듣고 하는 일들이 다 싫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보고 싶어지고, 그 안에서 평화로움을 느낄 때 그것이 바로 내적치유입니다.


구마((驅魔 엑소시즘)란 인간이나 사물이 악령에 사로잡혀 있을 때 사람이나 사물에서 추방해 달라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할 때 항상 악은 그 옆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좋은 것 방해하는 것이 사탄의 세력이기 때문에 그 선 옆에 악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끊임없이 이겨내야 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악이 없었으며 하고 바라는 것이 아니라 악을 이길 수 있는 힘을 키워야 하며 그 능력을 성령으로부터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광야에서 유혹 받으셨습니다. 그 때 유혹을 극복하신 방법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사탄이 물러가면서 “다음 기회를 보면서 떠나갔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유혹 일회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성장하는 가운데에서 더 큰 유혹으로 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순간도 방심하지 말고 깨어서 준비해야 합니다. 항상 성령께서 나를 사로잡고 나를 성령께서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하며 성령께 나를 맡겨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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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음의 은사란 지난 시간에도 잠시 언급했지만 주님이 말씀하시면 말씀하시는 대로 그대로  따라서 행하는 것을 말하며 기적의 은사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특별히 어떤 사람을 통해 이루어지는 은사입니다. 저도 여러 번 이 같은 체험을 했습니다만, 깜짝 놀랐습니다. 성직자, 수도자 세미나에 몇 번 갔었는데, 그 안에서 은사를 확인받을 수 있었습니다. 다른 성직자나 수도자들이 성령이 오시면 나오는 이상한 언어가 저는 안 나왔습니다. 한번은 친분이 있는 신부님과 둘이 성령 세미나에 갔는데, 그 신부님은 하는데 저는 하지를 못하니깐 많이 고민되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같이 간 신부님 모르게 지도 신부님께 쫓아가서 머리 내밀고 안수해 달라고 했습니다. 세미나가 끝나고 집에 가는 시간에 또 가서 신부님께 머리 내밀고 안수를 또 받았습니다. 제가 예전에 그랬었는데 오늘 이렇게  할 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사람마다 주시는 은사가 다르고, 당장 원하는 은사를 주시지는 않지만 지나고 보면 각자에게 필요한 은사를 분명히 주십니다. 그 당시 제가 간절히 청했던 것이 내적치유 은사였는데 한참이 지난 후에 저는 그것을 끊임없이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고해성사를 보러오는 신자들에게 저는 절대 화내지 않습니다. 그분들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이야기를 충분히 듣습니다. 많은 분들이 고해를 통해 마음의 평화,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저는 외적치유 은사도 받았는데 미사하고 강론하고 안수를 해 드릴 때 많은 분들이 치유를 받았다고 하십니다. 이 모든 것에 감사할 뿐입니다. 제가 이상한 언어가 잘 안되어 지도신부님께 수없이 머리 내밀며 애를 써봤지만 하느님께서는 저를 또 다른 은사를 통해서 나를 쓰고자 하셨다는 것에 감사했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은사는 공동유익을 위해 사용할 때 더욱 더 성장합니다. 성령이 언제 어떻게 어떠한 형상으로 우리에게 역사 하실지 아무도 모릅니다. 저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언제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쓰실지 모릅니다. 그래서 필요하면 필요할 때 그냥 도구로 온전히 맡겨 드리는 것뿐이지, “이분은 내가 기도하면 낫는다.”라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저를 잠시 당신의 도구로 써서 표징을 보여주시는 것이지, 그것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아까 말씀 드렸지만 성경을 삼백 번 읽은 카타리나 자매를 통해서 제가 성경을 더 열심히 볼 수 있도록 은총을 주셨듯이 카타리나 자매는 이미 커다란 은사를 받은 것입니다. 영적인 치유은사를 받아서 저에게 얼굴도 안보고 테이프를 통해서 치유시켜 준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가 앞으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와 같은 은사가 여러분들에게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 나도 성경 읽어야 되겠구나.”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 은총입니다. 생각했으면 미루지 말고 실천해야합니다. 생각한 바를 실천하고 그 안에서 감사함을 느낀다면 그것이 은사의 시작입니다.


예언의 은사. 이거 하느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복음 선포를 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예언하는 거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또 예수그리스도를 그 분을 통해서 모든 사람을 통해서 선포한다는 거 그게 예언의 말씀.


‘예언의 은사’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려주는 것이 예언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뜻을 선포하는 것이 예언입니다. 하느님이 말씀해 주신 것을 해석해 주는 것입니다. 때로는 하느님께서 어떤 분을 통해 앞으로 있을 일들을 예언하게끔 하시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거의 대부분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 지를 알려주는 것이 예언의 은사입니다. 이밖에도 여러 은사가 있습니다.


다음에는 성령칠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성경에 구체적으로 기록된 것 이외에도 휠씬 더 다양한 은사가 있지만 기본적인 칠은에 대해 이야기해 드리겠습니다. 교제 중에 개인 견고의 은사인 성령 칠은 이라고 적혀있는 것 중에 슬기에 대해서 다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슬기의 은혜는 하느님과 하느님께 관한 것들을 올바로 판단하고 맞들이며, 실천하도록 돕는 은혜이다.”


“슬기로워야 한다.” “ 뱀과 같이 슬기롭고 비둘기와 같이 양순해야 한다.”는 말처럼 슬기롭다는 것은 올바르게 판단하는 것을 말합니다. 올바로 판단하는 것은 내 마음대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관점으로,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할 때 ‘슬기’의 은사를 받은 것입니다.



다음엔 ‘통달(깨달음)또는 이해’에 대해서 다 함께 읽겠습니다.


“통달(깨달음)의 은혜는 개시 진리를 깊이 통찰하여 잘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은혜이다.”


개시 진리는 성경 안에 있습니다. 진리의 말씀, 즉 하느님 말씀을 잘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은사입니다. 통달의 은혜는 성경을 읽으면서 ‘아 이게 이 말씀이구나.’이렇게 쏙쏙 들어오는 그러한 깨우침을 얻을 때 가 있거든요. 그런 거예요. 그런 거 체험할 때가 많이 있어요. 저도 그랬어요. 신학교 때 성경공부 재미 가 없었어요. 그런데 요즘에는 성경공부 재미있어요. 정말 재미있어요. 그냥 보고 있으면 또 보고 싶고 그래요. 그런 마음을 일으켜 줘요. 그게 은사예요. 그 다음에, 그 밑에 의견. 의견은 일깨움입니다. 읽겠습니다.


“의견의 은혜는 초자연적 공공목적, 하느님과 일치, 구원, 지복, 직관과 개인의 성화라는 관점에서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것과 피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올바르도록 판단하게 하는 은혜입니다.” ‘아 저 사람은 꼬마인데도 불구하고 의견이 있다.’라고 이야기 하는데 그 말은 할 것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별할 줄 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어른들은 구별은 하면서도 실천하지 않는 게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의견이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알고 판단했으면 그대로 행하는 것이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의견, 일깨움의 은혜는 우리 부모님들에게 꼭 필요합니다. 자녀들을 바라볼 때 제대로 바라보고, 그가 가지고 있는 은사 또는 장점을 잘 키워주고 또 보조해 줄 수 있는 그러한 역할을 할 때 매우 효과적이며, 사회 지도층에 있는 분들이 이러한 은사를 받으면 큰 도움이 됩니다.


그 다음에 네 번째는 지식의 은혜입니다.


“지식의 은혜는 우리의 지성이 성령의 도움으로 영원한 생명이나 완덕과 관련된 피조물에 대해 올바로 판단하는 초자연적 습성입니다.”


믿어야 할 것과 믿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확신을 주고, 영혼이 처한 상태를 신속하고 분명하게 알기 위해서 지식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아는 것이 판단도 할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 율법학자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 안다는 선입견, 고정관념, 틀, 이것 때문에 늘 꾸중 받았습니다. 우리는 명확하게 알고 또 명확하게 판단하기 위해서 지식의 은혜가, 앎의 은혜가 꼭 필요합니다.


  다섯 번째는 굳셈의 은혜. 굳셈은 용기로 표현합니다.


“굳셈의 은혜는 신앙생활 중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어떠한 위험이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는 확고부동한 신뢰심을 지니고 덕을 실천하도록 성령께서 영혼에게 주시는 힘입니다.”


확고부동한 신뢰심, 참고 견디는 사람에게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때때로 신앙이 미지근해서 작은 고통에도 금방 흔들리는 분이 계십니다. 그래서 냉담하고, 또 어떠한 어려움이 해결되기까지 성당 안 나간다고 하시는 분이 있는데 그런 사람에게 확고부동한 굳셈의 은혜로움이 필요합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주 하느님, 당신 안에 뿌리 내리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변해도 좋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변해도 하느님 안에 굳게 뿌리박으면 걱정할 것이 없는데, 굳게 뿌리박지 못하니까 조그만 바람만 불어도 흔들립니다. 촛불은 작은 바람에 꺼지지만, 산불은 바람이 거셀수록 활활 탑니다. 그래서 믿음은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그 사람의 믿음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굳세어져야 합니다.


여섯 번째는 공경의 은혜입니다. “공경의 은혜는 성령의 활동을 통하여, 아버지 이신 하느님께 대한 자녀적 사랑과 하느님의 자녀인 모든 사람에 대한 보편적 사랑의 정을 의지 안에 불러일으키는 은혜입니다.”


공경, 또는 ‘효경의 은혜’라고도 하는데 자녀를 품어주는 아버지의 사랑과 같은 은혜를 말합니다. 루카복음 15장에 ‘되찾은 아들의 비유’처럼 큰아들과 작은아들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아버지의 사랑, 그러한 사랑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일곱 번째는 두려워함의 은혜입니다. “두려워함의 은혜에서 뜻하는 두려움은 노예적 두려움이나 지옥 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의 마음을 상해 드리지 않겠다는 경외심에서 나온 자녀다움 두려움입니다.”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은혜입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상하게 해드려야 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제가 시골에서 자랐는데 시골에서는 해마다 산제사를 지냈습니다. 마을에 큰 산이 있었는데, 개미의 허리를 닮았다고 해서 개미산이라 했습니다. 산 중턱에는 사당과 제당이 있었는데 해마다 그곳에 가서 제사를 지냅니다. 제사를 지낼 때 동네에서 정한 룰이 있었는데, 제사 날짜가 정해지면 동네 입구에 표시를 해놓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동네에 들어오면 부정 탄다고 사람이 들어오지 못하게 동네입구 세 군데 모두 황토를 놓고 지푸라기도 열십자로 세워 놓았습니다.


제사를 지낼 제사장이 정해지면 제사장 집 앞에도 표시를 해 둡니다. 그러면 이 집에도 동네사람들이 알아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어머니한테 전화가 왔습니다. 그때 제가  청주에서 공부했는데 어머니께서 전화 하셔서 “얘야, 산제사날 잡혔다. 그러니까 오지마라.”하셨습니다. 저도 그 동네에 살았는데 부정 탄다고 들어오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말입니다. 어머니가 용한 사람이라고 그랬잖아요. 어머니께서 성당에 다니셨지만 동네 사람들이 싫어하는 일은 안하셨습니다. 밤에 산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제사장은 움벙을 파고 그 안에서 나온 물로 목욕을 한 후 제사를 지냈습니다. 밤 12시에 떡 준비를 하며 “시루 띠세요.”하고 소리를 지르면 집집마다 시루에 떡을 올렸습니다.  온 동네가 다함께 시루에 떡을 쪄서 그 떡을 쟁반에 담아 우물에도 갖다놓고, 토광에도 갖다놓고, 똥간에도 갖다놓고 귀신이 먹으라고 했습니다.  


옛날에는 동네마다 이런 미신 행위들이 있었는데 그 안에서도 규칙과 규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련의 행위들을 미신행위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 의미는 집집마다, 우환과 자손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지만, 중요한 것은 이것을 통해 예배의 참된 의미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마을에서 이런 일들을 하지만 마을사람들이 그것을 없애지를 못합니다. 없애고 난 후 화가 미칠까 봐 말을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계속 하는 것입니다. 제사를 지내는 것은 이 동네가 화목해지고 농사가 잘되라는 기원의 의미가 담겨 있지만, 한편으로는 저 산에 있는 그 신에게 경배하지 않으면 우리 동네 어떤 우환이 생기고 농사가 안되면 어떨까 하는 그 두려움에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이들은 그러한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한 해를 잘 보내게 해주셨으니 다음 한해도 잘 보내게 해 주십시오.”라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감사의 표현으로 제사를 지내는 것과 두려움에서 어떠한 화나 우환이 올까 봐 두려움에서 지내는 것과는 다릅니다.   성당에서 미사참여하고 기도하고 여러 가지 신심행위를 하는데 있어서 참여하는 마음, 예배의 본질은 감사와 찬미에 있습니다. 이것을 기준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을 거꾸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두려움’이라는 것은 하느님의 마음이 상하지 않게 나를 사랑하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경외심에서 나오는 두려움을 말합니다. 잠언에 보면 1장 7절에 “주님을 경외함은 지식의 근원이다.”무엇을 안다는 것, 깨우침을 얻는 것은 곧 하느님께 영광 드리는 것이지, 내가 잘 나기 위해서 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 가지 은사에 대해서 간략하게 말씀을 드렸지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사는 이처럼 다양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일곱 가지 은사들을 잘 살펴보고 받고자 하는 은사를 기도 중에 청하기를 바랍니다. 열심히 지향을 가지고 기도하시면 반드시 그 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 당신께서 주시는 은사는 너무도 많고 다양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은혜로움 들이 당신께서 주시는 것이고, 또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그 은사들을 주십니다. 우리 부족한 것 많지만 당신의 은사를 체험하고 그 것을 통해서 아버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고자 하오니, 당신 친히 우리 마음을 헤아려 주시고, 우리 각자에게 꼭 알맞은 은혜를 허락해 주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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