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자 이신 하느님-
- 이사야서 49장 15절-16절의 말씀입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보라, 나는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은 늘 내 앞에 서 있다.”
잘 쉬셨습니까? 제가 시작할 때 이사야서 말씀을 읽어 드렸습니다.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하느님은 우리를 그만큼 사랑하시고 우리를 늘 옆에서 지켜보아 주시고 또 앞길을 열어주십니다. 그러기에 그분에 대한 믿음을 더욱더 확고히 해야 되겠습니다. 성경을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지혜서 16장 12-13절의 말씀입니다. “그들을 낫게 해 준 것은 약초나 연고가 아닙니다. 주님, 그것은 모든 사람을 고쳐 주는 당신의 말씀입니다. 당신은 생명과 죽음을 주관하시는 권한을 가지신 분, 저승 문으로 내려 보내기도 하시고 끌어올리기도 하십니다.”
오늘은 치유의 하느님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선 몇 말씀 드리고 난 후 실제적인 치유의 이야기를 여러분들께 들려줌으로써 은총의 하느님, 능력을 주시는 하느님 그분에 대해서 우리의 마음이 향할 수 있도록 기도하겠습니다.
앞 시간에 사랑이야기를 했습니다. 치매의 마지막 증세가 뭐라고 합니까? 부부 사이가 갑자기 좋아지는 거랍니다. 자기 남편이 남의 남편인 줄 알고, 또 자기 아내가 남의 아내인 줄 알기 때문입니다. 한평생 사랑의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자기를 죽이지 않으면, 예수님 안에 굳건히 서지 않으면 그 사랑을 지키기 쉽지 않습니다. 사랑이 있으면 천국이고, 사랑이 없으면 지옥입니다. 그 사랑이 없는 상태, 지옥의 상태를 뻔히 아는데도 그것을 즐기는 분들이 있습니다. 서로 함께 생활하면서 그 안에서 말을 하지 않고 그냥 멀뚱멀뚱 있으면 그것처럼 불편한 게 어디 있습니까? 지옥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지옥입니다. 그 지옥을 빨리 벗어나야 하는데 그러지 못합니다.
사랑하면 행복해진다는 것을 아는데, 사랑을 주면 부유해지고 참으로 행복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 상태를 유지하려는 노력은 많이 부족합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바뀌게 되면 그것이 바로 치유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치유에 대해서 관심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진정한 치유란 나 자신이 예수님의 사람으로 되는 것입니다. 나 자신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주님의 사랑을 닮아서 그 사랑으로 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치유’라고 하면 육체적인 치유에만 매여 있습니다. 육체적인 치유가 되려면 우선 내 안에 사랑의 치유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믿음을 갖지 않고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지 않고는 거기에 다른 치유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어떤 약초나 연고가 아닙니다. 바로 하느님의 말씀이 치유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을 통해서 우리 마음을 치유시켜 줄 수 있는 하느님께 향하는 은총이 오늘 여러분에게 분명히 주어지리라 믿습니다. 믿는 만큼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얼굴도 예쁘고 말도 잘하면 천상천하, 둘 중의 하나가 빠지면 천만다행, 둘 다 아니면, 설상가상입니다. 제가 대학교에서 5년 동안 사목을 했었습니다. 엘리베이터 문에 학생들이 종이를 붙여 놨는데 「마음의 도금을 입히지 마십시오」라는 말이었습니다. 얼굴 잘생기고, 말 잘하고 이런 것이 문제가 되는 게 아닙니다. 내 마음이 하느님 마음으로 얼마나 유지하고, 내가 하느님 마음에 드는 상태를 얼마나 잘 유지하고 있는지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얼굴만 예쁘다고 여자입니까? 마음이 고와야죠. 마음이 고운 게 누구 기준으로 고와야 하나요? 바로 주님의 기준으로 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사랑이신 주님, 당신 자신을 아낌없이 다 내어 놓으시는 주님을 기준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 기준을 항상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 )라 합니다. 말씀을 접하면 그 말씀대로 행해야 됩니다. 무엇보다 마음의 치유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변화되는, 사랑할 수 있는 그 마음의 치유가 분명히 오늘 여러분께 주어졌습니다. 이미 지금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은총이 풍부해도 받아들이고, 담을 그릇이 준비되지 못하면 역사 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오늘은 꼭 그분하고 화해해야 되겠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대로 이어집니다.
제가 가평 꽃동네에 있을 때 많은 분들이 대략 600명 정도,어떤 때는 3천 명이 미사를 보기 위해 오십니다. 어느 날인가 십자가의 의미에 대해서 강론을 하며“자기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지 마십시오. 나보다 더 아프고 고통, 시련에 처한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나의 고통도 힘들고 어렵지만, 내가 그들의 고통까지도 대신하겠다는 그런 마음을 간직하고 기도하십시오.”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지향대로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나름대로의 지향을 가지고 오신 분들도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그 지향하고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나는 내 가족을 위해서, 내 남편을 위해서, 내 아내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려고 왔는데, 저 신부는 끊임없이 그것을 버리라고, 가족을 위해서 기도하지 말고 그들보다 더 큰 고통을 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그러니까 마음속에서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신부가 마귀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내가 원하는 거 내가 기도하는바대로 기도하지 말라고 하니 얼마나 속이 답답하겠습니까?
그런데 신부가 계속해서 이야기하니까 자신의 기도 방향을 바꿔버렸습니다. 열심히 신부가 하라는 대로 기도를 했습니다. 자기 남편은 강남 성모병원에서 위암으로 고통받고 있고, 배에 복수가 가득 차서 하루에 패트 병 반 정도의 물을 빼내고 있는 상황이고, 간이 90% 망가졌으니 이젠 준비하라는 소리를 듣고 그의 아내가 남편을 위해 기도하러 왔는데, 남편 좀 살려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러 왔는데, 그날 자기 가족을 위해서 기도하지 말라는 말을 듣고, 그렇게 말하는 신부가 마귀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이런저런 마음속의 갈등을 느끼다가 결국 자신의 기도를 포기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집으로 돌아가는데 마음이 기쁘지가 않았습니다. 남편한테 오늘 꽃동네 가서 당신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온다고 하고 왔는데 기도의 첫 번째를 남편이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했으니 마음이 찝찝했습니다. 신부님이 하라 하니까 했지만 위독한 남편을 생각하니 마음이 무겁고 답답했습니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남편이 입원해 있는 병원에 갔는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아픈 사람은 ( ). 그 부인이 놀라운 체험을 했습니다. 그날부터 복수가 빠지기 시작했답니다. 빠지고 나서 한 주일 만에 밥을 먹게 되었습니다.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하다고 가족 모두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하느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제 지향의 기도를 받고서 말씀대로 기도했더니 이러한 은총을 얻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그분들께 말씀드렸습니다. “하느님께서 정말 귀한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셨고, 또 한편으로 은총을 주셨습니다. 지금 이 은총을 주신 것은 화해와 용서, 그러한 기회를 당신에게 분명히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용서 못하고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모두 용서해주고, 또 용서를 청하고 하십시오.” 저도 모르게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 가족 전체가 고해성사를 보고 갔습니다.
그리고 한참 지난 어느 날 꽃동네에서 미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한 여자가 막 뛰어와서 저를 껴안는 겁니다. “신부님 저 아세요?”하면서요. 갑자기 뛰어와서 껴안는데 알긴 뭘 알겠어요? 아무튼 깜짝 놀랐습니다. “저 아무개 입니다.” 하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예전의 그분이셨습니다. 그래서 남편의 건강부터 물었더니 위암을 앓던 남편이 세상을 떠나셨답니다. 그런데 그분이 기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말 있지요? 남편 죽으면 화장실 가서 웃는다면서요? 어쨌든 그분이 왜 기뻤느냐면, 남편이 치유 받았다고 생각한 후 기적같이 2년을 더 살았는데, 그동안 서먹했던 사람들과 화해하고 용서하고, 가족들과 화목하게 지내다가 세상을 떠나셨답니다. 그래서 그 부인은 너무 기쁘다는 것이었습니다. 남편이 하느님을 완전히 알고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 그 부인한테는 큰 기쁨이었습니다. 하느님은 바로 그런 은총을 주시는 분입니다. 육신의 병이 나아서 2년을 살고 3년을 살고 이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 안에서 얼마나 마음의 준비를 거룩하게 하고 그분이 원하시는 마음으로 그분을 향해 가고 있는지,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꿈꾸며 신비의 명약, 불로초를 찾아 제주도까지 사신을 보냈다는 중국의 황제 진시황도 이미 죽고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렇게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모두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얼마만큼 하느님과 온전히 일치된 모습으로 떠나느냐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남편이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 안에서 떠날 수 있는 그러한 은총을 주신 것에 너무나도 감사해 하셨습니다.
제가 아는 한 분은 이 표제 베드로 할아버지이신데, 그분은 이른 두 살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이분 역시 위암으로 돌아가셨는데 이분이 살아계실 때 댁에서 틈만 나면 저에게 전화하셨습니다. “신부님 안 그러려고 했는데 제가 하느님의 마음을 상하게 했습니다. 저 고해 성사 해 주세요.” 하면 제가 “집에서 특별하게 죄지을게 뭐가 있겠습니까? 하느님 용서해 주세요. 라고 기도하세요.”라고 말씀드리면 “예, 알겠습니다.”하고 전화를 끊습니다. 그런데 좀 있다가 또 전화를 하십니다. “신부님 안 그러려고 했는데..” 그럼 제가 마지못해 그 댁에 갑니다. 가서 성사 주고 그러면 “아, 고맙습니다. 이렇게 바쁘신데 오시라고 해서 번번이 죄송합니다.” 그러십니다. 하루 이틀 지나고 나면 또 전화를 하십니다. “신부님 안 그러려고 그랬는데…” 그분의 솔직한 마음입니다. 안 그러려고 했는데 고통이 너무 심하니까 그 고통 때문에 하느님을 순간적으로 원망하는 겁니다. 원망하고 난 다음에 또 금방 전화를 하시는 겁니다. 그래도 그런 일들이 반복되니 바쁜 저로서는 “어휴, 할아버지 그만 좀 하시지.” 그런 마음이 솔직히 들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또 전화가 와서 할아버지 댁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사시는 곳이 시골이라 그 댁에서 밭에 여러 종류의 과실나무를 심었는데 특히 사과나무에 사과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습니다.
방에 들어갔더니 사과 궤짝이 하나가 있고, 그 위에 흰 봉투가 하나 있었습니다. 성사가 다 끝나갈 무렵 할아버지께서 이것이 마지막 성사가 될 것 같다며 그래서 신부님께 마지막 선물을 드린다며 그 사과궤짝을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부탁을 하시는 겁니다. 자신이 세상을 떠나면 자신이 평생 다녔던 공소에서 장례 미사를 꼭 해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당연히 장례 미사를 해 드리겠지만, 자식들한테 이 유언을 남겼으면 좋겠다고 자식들을 다 부르시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식들이 다 모인 가운데 당신이 돌아가시면 공소에서 장례미사 하기를 원하신다는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그분의 아들들이 성당을 안 나왔습니다. 그래서 수첩에다가 할아버지 유언을 일일이 다 받아 적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틀 만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할아버지의 유언대로 장례미사를 하기 위해 그분의 아들들, 며느리들이 다 와서 성사를 보셨습니다.
베드로 전서에서 이야기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까 하고 찾아 돌아다닙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굳건히 하여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1베드5,8-9) 순간 깨어 있지 않은 하필이면 바로 그때, 악이 들어옵니다. 방심하면 악에게 넘어갑니다. 안 그러려고 그랬는데, 돌아가시는 그 순간까지 악의 유혹이 끊임없이 다가오더라…하신 말씀을 기억합니다. 그러므로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로 가시기 전에 기운이 있을 때 여러분이 힘이 남아있을 때 자식들한테 유혹해야 합니다. 나중에 힘없을 때 병원에 누워 있으면 유언도 못합니다. 자식을 위한 길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느님 안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그 길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자식들은 부모가 돌아가실 때 부모의 마지막 말씀을 귀담아듣게 됩니다. 유언의 말씀을 남기실 때 반드시 성당 가서 고해성사 보라고 하십시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라고 하시면 더 좋고, 혹시라도 결심하지 못한 상태의 자녀들이 있다면 그 기회에 하느님을 찾으라는 유언을 남기시기를 바랍니다.
치유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하느님을 알려주는 것이 가장 확실한 치유입니다. 그리고 이 치유에는 믿음이 따라야 합니다.“믿음이 없이는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없습니다.”(히브11,6) 우리는 흔히 성모 마리아를 행복한 분이며 은총을 가득히 받으신 분이라고 생각하고 늘 기도합니다. 그런데 은총을 가득히 받으신 성모님은 늘 고통이 함께하셨습니다. 그분의 삶의 여정은 어떻게 보면 정말 팔자가 사나운 여자의 일생이셨습니다. 아기를 낳는 그 잉태 순간부터 돌아가신 순간까지 너무나도 힘든 고통의 길, 시련의 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이 함께 하시고,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서 살아가는 길이었기 때문에 그 고통을 고통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기꺼이 다 감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리아가 엘리자벳을 찾아갔을 때 엘리자벳이 마리아에게 말합니다. “믿으셨으니 복되신 분!”이라고 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리라 믿으셨기 때문에 복되신 분이라는 겁니다. 성모 마리아가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복되고 행복한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믿음으로써 그분께서 주시는 은총을 누려야 하겠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께서 역사해도 역사하시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제가 본당 신부 할 때에 한 분이 주일 미사 끝나고 와서 “신부님, 제가 머리가 너무너무 아파서 기도 좀 받아야 하겠습니다. 기도 좀 해주십시오. 머리가 하루 이틀이 아니고 몇 년 동안 계속 아픕니다.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힘듭니다.”하시며 고통을 호소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날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역사 하시든지, 치유하시든지 그 머리 아픈 것이 낫는 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에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셨는데, “그 십자가의 고난을 그 고통을 체험하는 그 순간으로 해주십시오. 라고 기도할 수 있는 그 마음이 주어졌다면 그게 바로 치유입니다.”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알게 모르게 마음 아파하고 고통스러운 게 있습니다. 그 고통도 언젠가는 지나갑니다. 행복함도 지나가고, 불행한 것도 다 지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겐 영원한 생명이, 약속이 있습니다. 어쨌든 고통스러울 때, 이미 주어진 고통이라면 하느님께서 정말 당신의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주셨는데 그 아들이 겪으신 고난의 한 과정을 바오로 사도처럼 그 고난을 내가 대신하는 순간이라 생각하고 기도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씀드리고 나면 꼭 되물어 보십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10명 중에 7명은 이렇게 되묻습니다. “그러고 나면 아픈 것을 낫게 해 주시나요?” 그런 마음으로 기도하는데 하느님의 은총이 역사합니까? 그때 자기 자신을 내 드릴 준비를 하고 “기꺼이 주님의 뜻대로 해 주십시오.”라고 이야기가 나왔다면 그 사람은 100% 치유 받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어쨌든 머리가 아프다는 그 세실리아 자매님이 기도를 받고 나서 성당을 안 나오는 겁니다. 무슨 일 일까 하고 궁금하던 차에 그분이 일주일 만에 성당을 나왔습니다. 그분 말씀이 “제가 신부님 기도 받고 나서 설사를 얼마나 했는지 몰라요. 기도의 힘이 세긴 센가 봐요. 설사를 계속하기 시작해서 병원에도 가고 약도 사 먹었지만 안 낫는 거예요. 그래서 속으로“아! 하느님께서 역사하시는 거구나.”하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그분이 오래도록 변비를 앓았습니다. 변비를 앓아서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너무나 겁이 났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화장실을 가야 하는데 그 견디기 어려운 고통, 그러니까 남편도 싫어하고, 본인도 어떻게 할 줄 모르겠는 겁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머리 아픈 것의 원인이 되었던 그 속을 뻥 뚫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원인을 치유해 주십니다. 사람은 겉모양을 봅니다. 그러나 우리의 하느님은 속을 보십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온전히 맡겨 드릴 때,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가 실행하고자 하는 마음의 준비가 되었을 때, 그 치유는 어디에서든지 일어납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시간이 지난 다음에 그때 치유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저는 성경을 많이 읽었다기보다는, 자주 접하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한 평신도 자매님께서 성경을 300번 읽었다는 소리를 듣고 기가 팍 죽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날부터 성경을 모조리 읽어 보겠다고 생각하고 제가 밖에 나갔다오면 성당 가서 한 페이지, 하루에 1장씩은 꼭 읽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할머니 한 분이 매일 같이 성당에 오셔서 성경을 소리 내서 읽으시는 겁니다. 그러니 제가 성경 읽는데 방해가 되지 않겠습니까? 노인 분께 제가 성경 읽는데 방해가 되니 소리 내서 읽지 마시라고 말을 할 수도 없고 해서 그냥 가서 읽었습니다. 300번을 읽었으니 성경구절만 봐도 신구약, 어느 장의 어느 구절의 말씀이라는 것을 금방 알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저도 그때부터 성경을 매일 읽기 시작했습니다. 결정적인 것은 그 할머니께서 눈이 안 보여서 소리를 내며 성경을 읽으시는 것인데 그분이 성경을 그토록 부지런히 읽으시는 이유가 자신의 눈이 더 나빠지면 하느님의 말씀을 읽기 어려우니 더 나빠지기 전에 부지런히 읽어야 한다고 그렇게 매일같이 오셔서 읽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기적같이 얼마 있다가 눈이 더 밝아지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눈을 밝게 해 주신 것입니다. 잘 안 보이던 성경이 더 잘 보이니까 신이 나서 날마다 더 열심히 성경을 보시고 계십니다. 그러니 눈이 나빠서 성경을 읽지 못한다는 핑계는 이제는 하지 마십시오. 눈이 더 나빠지기 전에 성경을 부지런히 읽으십시오. 성경은 읽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말씀하시고 나는 듣는 것입니다. 그 안에 하느님이 역사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믿으십시오. 분명히 놀라운 체험을 주십니다.
하 젬마라는 자매님이 계시는데 이분도 늘 원인 모를 허리 통증과 다리 통증으로 고통을 겪고 계신 분이셨습니다. 한번은 주일날 아침 허리와 다리가 너무 아파 거동을 못할 지경에 이르자 사람들이 병원에 가라고 그랬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용하다는 사람을 소개 시켜 준다고 난리법석을 떨 때 그 자매님이 그러셨답니다. 그런데 그 자매님이 오늘은 주일이니 주일날 꼭 미사 참석을 해야 한다고, 병원을 가도, 용한 사람을 찾아가도, 우선 성당 가서 신부님한테 안수 받고 미사 영성체도 하고 그러고 나서 내가 병원을 가도 가겠다고 하셨답니다. 그래서 그날 남편하고 딸하고 젬마 자매님을 부축해서 간신히 성당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성당 사제 방에서 기도해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때 기도할 때 똑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정말, 이 아픔을 무의미하게 보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 무슨 뜻이 있어서 당신에게 아픔을 주셨으니 그것에 대해서 정말 감사하십시오. 고통도 은총입니다.”라고 기도 드렸습니다. 왜 고통도 은총이라 했을까요? 다른 사람이 고통 받은 것을 체험할 수 있는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깜짝 놀랐습니다. 그분이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시는 겁니다. 가족들에게 부축을 받고 오셨는데 그냥 혼자 걸어 나가셨습니다. 이러한 놀라운 일들이 하느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언제 어떤 방식으로 역사 하실지 모릅니다. 하느님은 우리 삶의 여정에 날마다 끊임없이 은총을 주십니다. 다만 내가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할 뿐입니다. 성경에 보면, 두 소경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많은 군중과 더불어 예리코를 떠나실 때에, 눈먼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하고 외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가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하고 외쳤습니다.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하고 물으시자, 그 눈먼 이가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하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하고 이르시니, 그가 곧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마르10,48-52참조)
우리가 은총을 체험하고 싶은데 체험하지 못하는 것은 아직도 내 믿음이 그만한 성장을 하지 못한 탓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믿음을 성장시킬 수 있도록 일깨워야 합니다. 그 믿음을 일깨우는 방법이 바로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10대에는 철모르고 산다고 합니다. 20대는 이팔청춘, 환상적으로 살고, 30대는 삼삼하게 살고, 40대는 사족을 못 쓰고 사랑하면서 산답니다. 50대는 오기로 삽니다. 자식 키우고 정신없이 보냈는데 대학까지 보내면 끝날 줄 알았는데 그게 끝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기로 살아야 한답니다. 60대는 주책으로 삽니다. 주님이 책임져 주시기 때문에 주책으로 삽니다. 사랑의 주님이 우리를 책임져 주십니다. 그것에 대한 믿음, 그것이 우리를 치유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해 주는,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행하던지 믿음을 가지고 행하여야 합니다.
여기 오기 전에 전화를 받았습니다. 요즘에는 성당에 전화가 자주 오는 편입니다. 제가 “성당입니다.”하고 전화를 받으면 말을 안 하고 가만히 듣고만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 날 사모하는 걸까요? 조용히 침묵하다 끊어버립니다. 며칠 전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노니 …” 하시며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제가 “그랬어요?” 했더니, “여기가 지옥이다.”합니다. 속으로 “제가 지금 전화를 받는 것이 지옥입니다.”하고 슬며시 수화기를 내려놨습니다. 그런데 오는 날 아침에 전화가 또 왔습니다. “성당입니다.”했더니 “넌 누구냐? 나 예순데…” 그래서 슬며시 수화기를 놨습니다. “예수라고? 예수님?”그때부터 생각했습니다. 그게 참, 예수님한테 정신을 너무 몰두한 나머지 정신이 약간 이렇게… 그래서 그런 분들도 치유 받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주님이 어떤 분인지, 어제는 지옥이고 오늘은 예수고 … 이런 흔들림이 없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이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변해도 좋습니다. 주 하느님 당신 안에 뿌리내릴 수 있다면.” 주님 안에 제대로 뿌리내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흔들림이 많아집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다!” 하며 두려워 소리를 질러 댔습니다. 베드로가“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하자 예수님께서 “오너라.”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갔습니다. 그러나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그만 두려워진 나머지 물에 빠졌습니다. 주님만을 바라보고 걸어갔을 때는 잘 걸어갔습니다. 순간 폭풍이 몰아치니까, 풍랑 쳐서 물속에 빠져버렸습니다. 주님이 거기에 계시지만 어떤 시련, 고통이 오면 그때야말로 내 믿음이 어떤 상태라는 것을 확실히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인데 우리는 많은 경우에 넘어지고 맙니다. 그때야말로 한 단계 믿음을 끌어올릴 때입니다. 여러분들 마음속에 미운 사람이 있습니다. 보기 싫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럴 때 내 마음속이 어떤지 정확히 살펴보는 겁니다. 그 정도의 사람도 내가 품지 못하고 그동안 주님을 믿고 하느님의 사랑이라고 믿고 살아왔는데 결국 그 정도도 품지 못하는 내 속을 확실하게 보는 것입니다. 그 원수 같고 골칫덩이 같던 사람이 바로 은총 덩어리입니다. 골칫덩어리가 아니라 은총입니다. 그 사람을 통해서 나를 알고 내가 성장할 수 있는 계기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기에 그 사람은 은총덩어리입니다.
제가 첫 본당 신부로 나갔는데 본당 수녀원이 공사 중이었습니다. 소임지인 본당에는 네 개의 공소가 있었는데 정작 수녀원 공사 중인 본당에는 돈이 별로 없고 오히려 공소에는 비교적 돈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강론할 때 과부의 헌금 이야기를 하며 공소도 마찬가지이니, 공소에 있는 돈을 하느님의 몫으로 우선 수녀원 짓는데 내 놓는다면 그다음은 그것보다 더 풍요로움으로 채워주신다는 강론을 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있다가 한 공수회장님이 “신부님, 저녁이나 하시겠습니까?”하여 본당 회장님하고 가서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중국집이었는데 여러 가지 음식이 과하게 차려져 있었습니다. 술 한 잔씩 돌리고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르자, 한 신자 분이“야 네가 신부냐? 신부면 다냐?”그러는 겁니다. 갑자기 술이 확 깨며 정신이 돌아왔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표정을 보니 “그래 너 잘한다.”하며 속으로 박수 치고 있는 듯했습니다. 그 사람들 입장에서는 어느 날 젊은 신부가 와서 그동안 애써 모은 돈을 가져오라니 화가 난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본당 신부에게 할 말이 따로 있지, “신부면 다냐니…” 그만 기분이 있는 대로 상한 제가 두말도 않고 본당 회장님과 함께 그곳을 나왔습니다. 제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오는데 다른 분들이 그 사람에게 신부님께 그러면 안 된다고 나무라는데 그것은 인사치레일 뿐, 속마음은 모두 박수를 치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전했으니 속 시원해하는 눈치였습니다. 사제관으로 돌아왔어도 그 속상한 감정은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나름 열심히 하려고 하는데 이런 소릴 들었으니 어디 가서 하소연해야 합니까? 어디 가서 잘했다고 자랑하고 다니겠습니까? 마음이 진정이 안 되어 성당에 가서 기도했습니다. 제가 신부 될 때 성경 구절 선택한 것이 필리피서 2장 5절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간직하라고 그랬는데 신자 한 분이 그런 이야기를 했다고 어쩔 줄을 몰라 하다니…. 예수님 마음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예수님 곁에는 유다도 있었고, 세 번이나 배반했던 베드로도 있었고 그밖에도 예수님을 배반했던 제자들 속에 계셨는데도 그들을 다 품은 그분의 마음을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수화기를 들고 먼저 그 사람한테 미안하다고 하니 그쪽에서도 자신이 결례했다고 죄송하다 하고 그러다 보니 그분하고 사이가 아주 좋아졌습니다. 제가 미국 오기 전에도 식사 대접하고 왔습니다. 그 원수한테 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젊은 혈기에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하려고 했던 것에 대해 그분이 브레이크를 걸어주셨던 겁니다. 그분 덕에 제가 다시 예수님만을 생각할 수 있었고 또 무엇을 하더라도 지혜롭게 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한순간에 큰 상처를 받았지만 그것을 통해서 저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는 은총의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골칫덩어리가 아니고 복덩어리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 나의 복덩어리라고 생각하십시오. 옆 사람한테“복덩이입니다.” 라고 해보십시오. 복덩이 같은 소리합니까? 이 세상에는 전혀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그렇게 나쁜 사람도 없고 전혀 남의 도움이 필요 없을 만큼 그렇게 완벽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과거 없는 성인 없고, 미래 없는 죄인 없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 앞에선 모든 사람이 다 죄인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에겐 희망이 있습니다. 죄와 허물에도 사랑으로 다가오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예수님이 계시다는 게 얼마나 큰 기쁨이고 희망인지 모릅니다. 오늘 저도 우리 신부님께 고백성사를 받았지만, 좋지 못한 습관에 자꾸 걸려 넘어집니다. 그러면 고해성사 보기도 참 미안하고 껄끄럽기까지 합니다. 그럴 땐 베드로 사도를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일등 사도로 반석을 삼은 베드로도 가다가 넘어졌는데 하물며 나 같은 사람이야 더하지 않겠습니까?
하루는 제가 고백성사를 보려고 우리 신부님들 연수를 하는데, 맨 뒷자리에 가서 앉았습니다. 오늘 고해성사를 봐야겠다고 생각을 하니 한 신부님이 딱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쉬는 시간마다 그 신부님 나올 때를 기다리며 있었습니다. 우리 교육회관 위에 큰 성당이 있고 그 성당 옆에는 큰 서점이 있었는데 그 신부님이 서점에 들어가셔서는 통 나오실 기미를 안 보이는 겁니다. 한참을 기다리니 신부님이 책을 잔뜩 안고 나오셨습니다. 그래서 달려가서 신부님께 “신부님, 저 고해성사 좀 봐야 하는데요?” 했더니 길거리 한복판에서“어, 그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그러시는 겁니다. 사람들이 막 지나다니고 성사를 보시는 신부님도 걸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 걸어가시는 겁니다. 제가 그 신부님 뒤를 쫓아 걸어가며 성사를 보았습니다. “이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에 대해서도 통회하오니 사해 주십시오.” 하고 말을 끝내자“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 사제의 죄를 사합니다.”하시면서 보시던 책을 뒤적거리시더니 “이 책 저 서점에 있으니 거기서 사서 봐요.”하시며 보속을 책읽기로 주셨습니다. 저는 책을 뒤적거리시기에 저한테 책을 주시려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저보고 사보라는 겁니다. 많은 책을 사셨으니 한 권 정도는 주셔도 좋으련만 …. 보속으로 주신 책이 하필 3세트로 된 것이라 책 세 권짜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많은 신부님 중에 좋은 소리 한번 들어보겠다고 해서 제 나름대로 찍은 신부님이 하필이면 그 신부님이셨던 겁니다. 그러니 뭐 신자 분들은 어떻겠습니까? 본당 신부님께 성사 안 보려고 많이 그러지요? 어떤 신자 분들은 제게 진지하게 질문합니다. “신부님, 고해소에서 목소리만으로 신자들을 알아보실 수 있습니까?”
치유자이신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사제를 통해서 그에게 필요한 은총을 전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사를 보기까지 준비하는 마음을 하느님은 다 아십니다. 제가 길거리에서 그 신부님께 성사를 보고 보속을 받았다고 죄의 용서가 안 되었겠습니까? 성사를 그분한테 보려고 준비했던 그러한 과정을 하느님은 이미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신부님이 격식을 갖춰 제대로 보속을 안 해줘서 뭔가 석연치 않다는 생각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그 순간 그 신부를 선택해서 그에게 은총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주시는 그대로 받으면 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다는 데 왜 내가 이러쿵 저러쿵 이야기를 합니까? 하느님이 보시기에 꼭 맞아서 거기에 알맞은 것으로 주셨는데, 그것을 통해서 그 사람을 성장시키고 그 사람의 마음을 쇄신시켜 주시는데 왜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합니까? 그것은 하느님의 은총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통일신라를 이끈 명장 김유신은 무술과 시를 좋아했던 만큼 술도 무척 좋아했습니다. 술을 좋아하던 김유신 장군이 우연히 천관이라는 기생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천관이 있던 기방 출입이 잦아졌고 급기야 이 소문이 퍼져 김유신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아들 김유신을 불러 놓고 걱정을 하자 다시는 출입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김유신이 피곤함에 못 이겨 말 등에서 졸고 있는 사이, 백마는 전에 가던 길을 달려 천관의 집으로 김유신을 데려갔습니다. 바로 김유신이 졸고 있는 사이 어둠의 세력이, 악의 세력이 그를 끌고 갔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죄악으로 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의 주님의 항상 바라 봐야 합니다. 그분이 우리의 치유자이십니다. 우리의 어두운 모든 것을 다 깨끗하게 씻어 주시고, 새롭게 출발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혹시 우리 마음에 어둠이 있더라도 좌절하지 마십시오. 절망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옆에 사제가 있습니다. 주님을 통해서 보내주신 사제가 거기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사를 보시고 새롭게 출발하십시오.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크나큰 은총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 어디가 중요합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미래를 보고 살아야 합니다. 과거는 지나간 것이기에 역사라고 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과거는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고, 미래는 하느님의 섭리에 맡겨라." 라고 하셨습니다. 과거는 끄집어내서 되씹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바리사이인들과 율법 학자들은 과거에 매여 살았습니다. 철저히 과거에 매여 있어서 예수님께서 오셔서 당신의 새로운 가르침을 주셔도 율법에만 매여 있었습니다.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철저하게 현재에만 매여 살았습니다. 그래서 고위직에 많이 포진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미래가 없기 때문에 오늘 잘 먹고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사람들이었기에 거기에만 머물러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오늘이라는 것은 한편으로 내일을 바라보는 오늘이어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의 제자들, 당신의 목숨을 내 놓고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도 역시 성령을 받은 다음에야 비로소 세상 밖으로 나갔습니다. 목숨을 아끼지 않고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성령을 받은 다음에 그들이 취한 행동입니다. 그들이 자기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밖에 나가서 복음을 전한 것은 미래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통해서 구원이 주어진다는 것, 영원한 생명이 주어진다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을 바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미래를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통해서 구원받는 그 영원한 생명, 그 생명을 바라보면서 오늘을 살아야 됩니다. 우리는 오늘을 통해서 미래가 주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주신 오늘을 선물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선물로 주신 오늘을 사랑으로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확실하게 주어진 명령, 계명이 사랑입니다. 그분이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오늘을 살 때 그분께서 약속해주신 미래가 사랑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미래를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십시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미래가 우리에게 기쁨이고 행복이라면 오늘 겪는 여러 가지 어려움 기꺼이 극복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이 그 안에 솟아나게 됩니다. “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이 곡식 단 들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시편126,5-6) 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약속해주신 하느님의 나라, 그 영원한 생명, 그것이 기쁨으로 자리한다면 오늘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희생하고 봉사하고 사랑을 베푸는 것이 기쁨입니다. 우리가 삶의 방식을 하느님의 사람으로 바뀌는 그 과정이 치유 과정입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삶으로 마음이 바뀌면 육체적으로 치유도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런 치유가 오늘 이 자리에서도 이루어지고, 점진적으로 이루어지고, 미사 안에서도 이루어지고 매 순간순간 이루어진다는 것을 분명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한 1서 4장 7절에서 8절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사랑이신 하느님을 알고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혜로움을 받아들이려 한다면 사랑하십시오. 많이 사랑하십시오. 내 방법으로 사랑하지 말고, 주님이 가르치고 모범을 보이신 그 사랑으로 사랑하십시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내가 원하는 때, 원하는 방법으로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기도하고 하느님께 매달리는데, 우리는 그 기도 방법도 바꾸어야 합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때에 하느님이 원하는 것을 하느님이 주시도록 그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기대하는 것보다 하느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것이 더 풍요롭고 알차기 때문입니다. 이번 성령 세미나를 통해 치유자이신 하느님을 잘 바라보기 바랍니다. 치유의 하느님은 어떤 한 곳에 가두어진 그러한 하느님이 아니십니다. 우리 일상 삶의 여정 안에서 동행하시면서 거기에서 치유를 일으켜 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자캐오가 돌무화과나무 위에 올라갔습니다. 나무 위에 올라갔어도 주님이 봐 주시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어떤 나무에 올라갔건 나무 위에 올라갔는데 주님이 봐 주셨습니다. 나무 위에 올라갔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제로 능력이 있는 주님이 보고 베풀어 주셨다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은총 더하기 인간의 협력, 즉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은총을 주시되 바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서 주시고자 합니다. 당신께서 주신 그 인간의 자유의지, 그것을 꺾지 않으십니다. 그 자유의지를 존중해주시면서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고 선언해 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께 대한 우리의 마음을 열고 여러 가지 치유를 원하고 있는 만큼 그 치유는 우리 삶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믿고 한 순간순간 깨어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당신은 능력의 하느님으로, 사랑의 하느님으로, 치유의 하느님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그러나 당신의 그 모든 것들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준비가 부족합니다. 그 마음을 열어주시고 그 상처 난 마음에 당신 치유의 손길을, 능력의 손길을, 사랑의 손길을 펼치시어 그것을 통해서 당신의 영광을 들어내 주소서. 알게 모르게 받은 많은 상처들을 당신께 기꺼이 맡기오니 그것을 받아 주시고 헤아려 주시고 그 안에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 주소서. 믿고 구하는 기도 기꺼이 들어주신다고 하셨으니 당신의 말씀 모든 것을 믿음으로 받아 안게 하소서. 믿는 대로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라 하신 당신의 마음을 헤아리고 거기에 대한 강건한 믿음을 지키고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 모두를 강복해 주소서. 믿음은 숙명을 낳고, 숙명은 기적을 낳는다는 사실을 우리 마음에 받아들이시고 당신의 말씀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행할 수 있는, 그 안에서 행복하고 복을 누릴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대표로 강복하소서. 주님 우리 연약한 모두를 당신께 드리오니 치유의 하느님으로, 능력의 하느님으로, 사랑의 하느님으로 우리를 감싸 주시고 보호하시고 지켜주시고 앞길을 열어주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