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복음말씀 - 이사야서 49장 15절-16절의 말씀입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보라, 나는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은 늘 내 앞에 서 있다.”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성부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많이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높고 깊고 넓은 사랑으로 우리를 감싸주시고 지켜 주시고 보호하시며 앞날을 열어 주십니다. 그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오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이곳에 불러 주셨습니다. 당신께서 뜻하시는 바가 있어서 우리를 이 자리에 불러 주셨습니다. 과연 하느님께서 나를 불러주신 그 뜻이 무엇일까를 헤아리고 또 그 안에 하느님의 능력, 하느님의 사랑이 가득 채워지기를 기도합니다.
저는“사랑합니다.”라는 인사를 벌써 15년 전부터 해 왔습니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사랑합니다.”라고 인사하곤 하지만 그때만 해도 굉장히 쑥스러워서 사람들이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한결같이 “사랑합니다.”라고 인사를 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랑이 이제는 많이 전해졌다 한편으로 생각하고 또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계명이 ‘사랑의 계명’인데 그 사랑을 일깨우고 또 새롭게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에서 저는 끊임없이 앞으로도 “사랑합니다.”라고 인사할 것입니다.
제가 박수 한 번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을 이렇게 와서 보니까 우리 샌디에고 성당 식구보다는 조금 점잖으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박수를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박수를 다섯 번 치는 건데 짝!짝! 짝!짝!짝!하고 그다음에 “사랑합니다.”를 크게 외치는 겁니다. 요한 1서 3장 18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할 것을 다짐하면서 “사랑합니다.”를 크게 외쳐 보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많이 사랑하시나 한 번 보겠습니다. 박수 다섯 번 시작!!!
여러분들도 서로 사랑을 해야 하는데 사랑도 잘해야 합니다. 내 방식으로 내 생각대로 사랑하면 사랑한다고 하지만 사랑받는 사람이 본의 아니게 상처받고 또 아픔을 겪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하되,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3,34)라고 하신 말씀처럼 그 모범을 따라서 사랑해야 합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이야기입니다. 황소하고 사자하고 서로 사랑을 했습니다. 서로는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황소가 마음먹고 음식을 준비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자가 맛있게 먹을 것을 생각하며 음식을 열심히 만들었습니다. 사랑과 정성을 가득 담아서 온종일 음식을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음식이냐면 풀(여물)로 만든 음식이었습니다. 사자가 와서 식사를 하려 하니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기대를 하고 왔는데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자기 생각만 하고 풀(여물)로 준비한 황소가 얄미웠습니다. 그런데 음식을 준비한 황소도 화가 났습니다. 온종일 사자를 위해 음식을 준비했는데 하나도 먹지 않자 화가 났습니다.자신의 성의를 무시한 사자가 너무도 미웠습니다. 다음날 사자가 황소를 저녁에 초대했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고기반찬으로 음식을 준비했습니다. 황소의 기분이 어떠했을까요? 기가 막힌 이야기입니다.
자신은 사랑과 정성으로 좋고 선한 일을 했다고 하지만 결국 마음 안에 남은 것은 기쁨도 보람도 아닙니다. 상처와 화만 남았습니다. 상대방도 마찬가지입니다. “눈먼 최선은 최악을 낳는다.” 최선에 최선을 다 했지만 눈이 먼 최선입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한 것이 아니라 내 방식으로 내 생각대로 했습니다. 내가 정성을 쏟은 만큼 상처도 더 크기 마련입니다. 사랑을 하면 최선에 최선을 다하되 눈을 뜨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올바른 사랑을 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참된 사랑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사랑으로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기쁨도 보람도 행복함도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사랑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요즘 날이 많이 덥습니다. 넌센스 퀴즈하나 내겠습니다.
가장 차가운 바다를 무어라 하는지 아십니까? 썰렁해! 그럼, 가장 뜨거운 바다는? 열바다!
그럼 가장 따뜻한 바다는? 사랑해! 그렇습니다. 가장 따뜻한 말은‘사랑해’입니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 눈이라도 마주쳐야지…’유행가 가사에 있는 말입니다. 그런데 눈도 잘 마주쳐야 합니다. 잘못 마주치면 바람납니다. 그러므로 눈도 잘 마주쳐야 합니다. 바로 예수님의 눈과 마주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도대체 나에게 무엇을 바라실까, 무엇을 기대하고 계실까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를 잘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분의 눈을 통해서 마음을 읽어야 합니다. 또 성모님의 눈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성모님이 예수님에게 다가가고자 하는 모든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니 성모님의 눈도 잘 바라보아야 합니다.
집안에서는 가족들 간의 서로의 눈을 잘 바라보아야합니다. 그들의 눈을 통해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냥 바라만 보면 안 됩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바라보아야 그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게 되고 또 채워줄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상대방의 눈을 자주 바라보십시오. 눈이 짓무르도록!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자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으며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바라볼 때 고통을 먼저 생각합니다. 힘겨운 것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 매달리신 그리스도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그분의 한없는 사랑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죽음의 고통 속에서도 용서와 자비를 베푸신 그분의 깊고 참된 사랑을 생각해야합니다.
로마서 5장 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우리에게 보여 주신 그분의 사랑을 일깨우고 그 사랑으로 우리도 살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한 의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당신 자비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거듭나고 새로워지도록 물로 씻어 구원하신 것입니다.”(티토3,5) 우리가 무슨 일을 잘해서도 아니고 우리가 어떤 자격이 있어서도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에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시어 우리 모두의 허물을 용서해 주시고 그 죄악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그분은 언제나 큰 사랑을 가지고 우리에게 오십니다. 어제도, 오늘도 오셨고 내일도 여전히 우리에게 오실 것입니다. 그 사랑을 끊임없이 느끼고 확인할 수 있도록 해 주시기 위해 성체성사를 설정해 주셨습니다. 성체 성사 안에서 당신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내어주고 그것을 받아 모심으로써 그 사랑을 매번 확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미사 안에서 성체성사 안에서 그분의 사랑을 잘 받아 모시고 또 그분의 마음으로 우리 이웃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여러분도 미사를 통해 예수님 을 모십니다. 그분이 사랑 덩어리로 우리에게 다가오신다는 것을 믿음 안에서 모십니까? 그것을 안다면 참으로 다행입니다.
제가 본당 신부로 첫 소임을 받고 의욕이 앞서 뭐든지 아주 열심히 하였습니다. 첫 부임지였던 시골 본당은 공소가 4개나 있는 곳이었습니다. 부임 즉시 예비자 교리반을 만들어 예비자를 모집한 후 열심히 교리 해서 세례를 주었는데 첫 영세자가 70명이 나왔습니다. 시골인 점을 감안하더라도 상당히 많은 분들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농촌이었기에 반 미사를 꼭 저녁에 했습니다. 저녁 미사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참례하는 열심한 새신자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영성체를 하지 않으시더라구요. 예수님을 모시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점잖게 그분에게 말씀을 드렸습니다.“혹시라도 잘못이 있거나 허물이 있으면 고해성사를 보시고 예수님을 모십시오!”하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부부가“신부님. 실은 우리 부부가 요즘 몸이 안 좋아서 병원에 다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밀가루 음식은 절대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제가 너무 기가 막혔습니다. 누구에게 교리를 배웠느냐고 묻지를 못했습니다. 왜냐면 저한테 배운 사람들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성체를 밀가루로 생각하는 분이 단지 그 부부뿐일까요? 예수님께서 미사 안에서 살아있는 주님으로 우리에게 오시지만 믿음 안에서 살아있는 분으로 받아 모시는 분이 도대체 몇 분이나 계실까요? 능력의 주님이고 사랑의 주님이지만 우리가 그분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니깐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쇄신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은총을 주려 해도 효과가 없습니다. 밀가루로 생각하는데 어떻게 거기에 하느님께서 역사하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모실 때 잘 모셔야 합니다.
제가 음성 꽃동네에 오래 있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꽃동네는 사랑의 결핍으로 가정과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갈 곳 없는 분들을 보살피는 사랑과 구원의 공동체입니다. 그곳에서 거의 십 년 동안 이런저런 도움을 드리고 저도 그분들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도움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거기엔 아무래도 나이 많으신 분들이 많습니다. 정말 다양한 분들이 오십니다. 봉성체를 할 때면 받아 모시는 성향들도 모두가 다 다릅니다. “그리스도의 몸!” 하면 “아멘!” 하고 모시는 분도 있지만 어떤 할머니는 제가 “그리스도의 몸!” 했더니 “이게 뭐야?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장난기가 발동하여 “빵!”했더니 할머니가“더 줘!”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보통 빵입니까?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양식으로 오시는 생명의 빵입니다. “나를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라고 하셨던 그 영생의 빵인 줄을 알고 더 줘!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 영생의 빵이라는 것은 생각하지 못하고 육적으로 먹는 빵으로 생각하고 “더 줘!”하셨습니다. 어느 할머니는 갈 때마다 “고맙게 또 왔어?”합니다. 저는 그 할머니 말씀에 대해 많이 생각했습니다. 하느님 앞에 허물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죄 많고 허물이 많은 사람임에도 그분은 언제나 우리를 찾아오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분에게 마음을 열어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지 그분은 언제나 우리에게 오십니다. “고맙게 또 왔어?”나의 허물에도 고맙게 사랑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그분. 얼마나 잘 모셔야 합니까?
제가 본당에서 어린 아이들에게 첫영성체 할 때 어느 어머니께서 제게 오셨습니다. “신부님, 첫 영성체때 우리 아이에게 신부님이 들고 계셨던 그 큰 성체, 반으로 뚝 자르신 것, 그것으로 주세요.” 다른 사람은 생각하지 않고 자기 자식은 신부가 거양성체를 한 것으로 주랍니다. 자기 자식만 생각하는 부모. 성체가 크면 그것을 영하는 사람도 커집니까? 예수님은, 능력의 예수님은, 사랑의 예수님은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 누구에게나 그 능력을 발휘하십니다. 역사 하십니다. 크고 작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느 날은 신자가 많아 나누던 성체가 모자라서 반으로 또 작게 쪼갰습니다. 그랬더니 우리 가족이“ 신부님, 이것 반쪽이잖아요.”합니다. 얼마나 서운하면 그런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예수님은 떼어 나누어진 빵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겁니다. 자신을 아낌없이 다 내어 주시면서 오십니다. 그것을 생각한다면 떼어 나누어진 그 빵을 모시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 빵을 모시면서 나도 내 옆 사람에게 이웃에게 그렇게 부서져서 나가야겠다는 그런 마음을 일깨운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어느 할머니는 열심히 봉성체 해 드렸더니 하루는 “신부님, 고맙긴 고마운 데 이제 그 하얀 것 그만 가져와.” 하십니다. 아무리 먹어도 어깨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고 약발이 안 든답니다. 그 하얀 것을 먹으면 육체적으로 병이 나았으면 좋겠는데 그것이 낫질 않는 답니다. 그래서 그 하얀 것 그만 가져오랍니다.
요한 묵시록 3장 20절에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 영국의 화가 홀만 헌트가 그린 성화 중에 ‘세상의 빛’이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등불을 들고 문고리가 없는 문을 두드리는 성화입니다.
그 문을 두드릴 때 안에서 자기가 하는 일, 시끄러운 일 이런 것을 하면 예수님이 아무리 두들겨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 문을 열어 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열어 드리지 않으면 밖에 계신 주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아무리 큰 은총과 능력과 사랑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우리에게 다가오지만 내가 마음의 문을 열어서 그분을 가슴에 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열매가 맺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그분의 큰 사랑을 또 내가 살아야 할 사랑을 생각해보아야합니다.
제가 음성 꽃동네에 있을 때 저의 숙소가 5층 건물 맨 꼭대기에 있었습니다. 그 옆엔 환자들이 입원해 있는 병원이 있었습니다. 병원과 제 방과의 거리는 직선거리로 20미터 정도의 가까운 거리입니다. 하루는 밖에서 온종일 일하고 밤늦게 잠자리에 들었는데 전화가 왔습니다. 전화를 받으니 병원에서 봉사하시는 수사님이셨습니다.“신부님, 우리 환자가 영성체를 하고 싶어 하는 데 어쩌지요?”하고 말했습니다. “지금이 몇 시 인데요?”저도 모르게 그렇게 퉁명스럽게 말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고 나니 저도 할 말을 못 하고 상대방도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침묵이 흘렀습니다. 기다림에 지친 수사님이 “오실 거예요? 안 오실 거예요?”하시자 “안갑니다!”하고 전화를 끊고 이불을 뒤집어썼습니다. 그러고 나니 마음이 불편하여 잠도 안 오고 또 평상시에 제가 병자성사는 언제든지 이야기 하라고 했던 기억이 났습니다. 이야기만 하면 즉각 달려가서 성사 주고 영성체도 해 드리겠다고 말로는 생색을 다 해놓고 막상 그런 일이 닥치니깐 입에서 뚝 튀어나온 말이 “안갑니다!”였습니다. 그날 온종일 제가 병원 근방에 있었는데 왜 낮에 부르지 않고 하필 밤늦은 시각에 이제 겨우 잠자리에 들려고 그러는데 이 시간에 부르느냐는 불만의 소리였습니다.
잠자리에 누워 있어도 마음이 불편하여 주섬주섬 옷을 입고 “빨리 가서 기도나 해 줘야지!”하고 중환자실 문을 열고 들어가서 기도해 드리고 성사도 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난 후 문밖으로 나오려 하는데 그 환자분이“영성체!”하는 거예요. 그래서 다시 돌아서서 “제가 오늘 성사 드리고 또 기도해 드리고 했으니깐 오늘은 편안히 잘 주무시고 영성체는 내일 하셔도 돼요.”그러고 난 후 다시 돌아서는데 더 큰 소리로 더욱 간절하게 “영성체”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왔습니다. 곧바로 제 차에 있는 병자성사 가방을 들고 성당 가서 성체를 모시고 그분에게 성체를 영해 들렸습니다. 그리고 난후 방에 오니깐 새벽 한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침대에 누워있는데 마음이 영 찜찜한 겁니다. 할 일 다 하고도 마음이 찜찜했습니다. 처음 수사님에게 전화 왔을 때 “기다리세요. 제가 금방 가겠습니다.”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안 간다고 했다가 마지못해 가고 더구나 성체 모시고 싶어 하는 병자에게 바로 성체를 모시게 하지도 않았고요. 결국 다 할 것을 좋은 마음으로 하지 못했던 것을 후회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참 찜찜했습니다. 밤새 잠을 설치고 다음날, 아침 6시 미사에 나갔더니 제대위에 메모지가 한 장 올라와 있었습니다. ‘새벽 3시 김정미 마리아 운명!’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았습니다. 43살인 그분은 자신이 곧 세상을 떠날 것을 알았습니다. 자기가 세상을 떠날 것을 알았기에 예수님 그분과 함께 가기 위해서 목자를 간절히 찾았는데 목자는 그 양의 음성을 듣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분이 평상시에 주님을 위한 갈망, 주님께 대한 사랑, 그분과 하나 되고자 하는 그 마음이 평상시에 다져지지 않았더라면 그 밤에 요청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분이 그런 준비된 삶을 사셨기에 결국 그렇게 요청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겸손한 자의 기도는 하늘의 구름을 꿰뚫는다고 했습니다. 신부가 원해서 했건 좋아서 했건 마지못해 했건 그분은 그분이 원하시는 모든 것을 다 차지했습니다. 신부에게는 공로가 안됩니다. 기쁨으로 사랑으로 다가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얻어야 할 모든 것을 하느님으로부터 얻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예수님을 모실 때 간절한 마음으로 사랑의 주님이 나에게 오신다는 마음으로 그분이 큰 기쁨이라는 것을 알고 모셔야 합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덥석 모시는 분이 계신다면 그분은 결국 밀가루를 먹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시는 그 사랑을 미사 때마다 확인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꽃동네에 있으면서 겪었던 이야기를 하나 더 해 드리겠습니다. 하루는 아침 일찍 전화가 왔습니다. 전화를 받으니 혹시 이러이러한 할머니 한 분 어제 들어오지 않았는지 물었습니다. 지난밤 중풍으로 몸의 반이 마비된 할머니가 비닐봉지에 양말 몇 켤레만 들고 길거리에 버려진 것을 직원이 모시고 왔는데 그분을 모신 다음날 전화가 온 것입니다. 제가 오셨다고 하고 다른 말씀 하지 마시고 바로 모시러 오라고 했더니 그분이 말했습니다. 자신은 그분의 딸인데 직장에 다니기 때문에 삼일만 기다려 달라고 했습니다. 삼일이 지나고 나흘째 되던 날, 그 따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분의 말이 자신의 친오빠가 엄마를 그곳에 버려두고 갔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오빠가 평상시에는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지만 그 행실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동네 사람이 중풍 걸린 어머니를 억지로 모시고 가는 아들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한 나머지 딸에게 연락했던 것입니다. 그 딸이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라서 꽃동네로 확인해 본 것이었습니다.
그날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 아들은 그의 아내가 남편을 얼마나 들볶았으면 자신의 어머니를 길에다 버렸을까 하고요. 그런데 그 딸이 어머니를 모시러 왔을 때 자신의 남편과 함께 왔습니다. 사위가 장모님을 모시고 갔습니다. 얼마나 아내를 사랑하면 아들도 버리는 장모를 기꺼이 모시고 갈까? 아들은 버리고 사위는 모셔가고…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 가…사랑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못하면 자기 부모조차도 버리는 것입니다.
“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3,18)하며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할 것을 요구하지만 우리 삶의 여정에서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때마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바로 그분의 사랑을 바라보면서 사랑을 일깨워야 합니다. 여러분들 사랑받고 싶으십니까? 사랑 받으면 행복하십니까? 그러나 사랑하고 그 사랑을 베풀면 더 행복해 집니다. 사랑하면 더 큰 부자가 됩니다. 하지 않기 때문에 그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제가 앞의 문장을 읽으면 여러분은“ 그래도 사랑하여라.”라고 큰 소리로 외쳐보시기 바랍니다.
그 사람이 원수 같다- 그래도 사랑하여라.
그 사람이 나를 욕하고 다닌다- 그래도 사랑하여라
그 사람이 말을 함부로 한다- 그래도 사랑하여라
그 사람이 싫어서 성당에 다니고 싶지 않다- 그래도 사랑하여라
그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상처받는다- 그래도 사랑하여라
그 사람은 고집불통이다- 그래도 사랑하여라
그 사람이 안 보이면 마음이 편하다- 그래도 사랑하여라
그 사람만 보면 밥맛이다- 그래도 사랑하여라
예수님의 제자 중에는 여러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스카리옷 유다도 있고 베드로, 혁명당원 시몬, 세리 마태오 등등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 제자 중에는 ‘배신자’도 있었습니다. 이스카리옷 유다는 물론 베드로와 나머지 제자들도 배신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잡으러 왔을 때 예수님만 남겨놓고 모두 도망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들이 배신할 것을 모르셨겠습니까? 여자 속은 밴댕이, 남자 속은 좁쌀이라고 합니다. 자기 속이 좁으면 상대방도 좁은 줄 알고 자신의 속이 좁으면 우리의 주님 속도 좁은 줄 압니다. 배신당한 사랑은 복수와 절망으로 이어지는 법이나 예수님은 배신한 제자들에게 성체성사를 통해 자신의 전부를 주는 사랑으로 승화시키셨습니다. 그만큼 그분의 마음은 넓고 크고 속도 깊으십니다. 이런 주님을 모시면서 우리 속은 왜 밴댕이 속이고 좁쌀입니까? 내 마음도 예수님처럼 키워야 합니다. 키워야 하는 그 마음, 그 힘, 그 능력을 어디서 받아야 합니까? 주님으로부터 받아야 합니다.
특별히 성체성사를 통해 예수님을 통해 살과 피를 통해서 우리는 힘을 받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그 힘을 받아야 합니다. 성체에 대해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영성체는 우리가 매일 겪게 되는 우리의 나약함을 치료하기 위해 먹어야하는 매일의 빵입니다.”하였습니다. 카를로 보르메오 성인도“우리 육신의 영양을 주기 위하여 빵을 먹어야 하듯이 우리는 영혼을 위하여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라고 하셨습니다. 또 마더 데레사 성녀는“ 성체로 그분께서 오시는 이유는 또 하나의 천국 우리의 영혼을 기쁨으로 채우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준비된 마음 없이 성체를 모시면 그분의 능력을 영적인 양식을 제대로 채울 수 없습니다. 우리가 미사 안에서 영성체를 제대로 하는 사람은 밖에서도 영적인 양식을 충분히 섭취하였기 때문에 밖에서도 빛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영적인 양식을 채우지 못했는데 어떻게 밖에서 빛나는 삶을 드러낼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맨 날 인상 찌푸리고 입이 주먹만큼 나와 있는 사람을 보고 성당 가고 싶은 마음이 들겠습니까? “열심히 신앙생활 한다는 사람의 얼굴이 왜 저래?”하고 이야기를 들을 때 한편으로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지 마세요. 그래도 성당 나오니깐 그만 한 겁니다.”
우리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되어야 그분처럼 능력의 주님으로 사랑의 주님으로 드러납니다. 그렇게 되면 그 주변이 빛나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게 됩니다. ‘우거지 신자’란 인상 찌푸리는 신자가 아니라 ‘우아하고 거룩하고 지적인 신자’를 말합니다. 사랑의 영양분을 바로 성체 안에서 살아계신 예수님을 통해 섭취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때때로 고해 성사 중에 그분을 위해 기도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면 바로 제 곁으로 오시라고 청합니다. 그러면 안수도 해주고 기도도 해 주는데 그 고해성사가 아주 중요합니다. 허물 부족함 때문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지만 고해성사를 통해 행복해 집니다. 회개를 통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사야 43장 18절에 보면 “ 예전의 일들을 기억하지 말고 옛날의 일들을 생각하지 마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하려 한다. 이미 드러나고 있는데 너희는 그것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미 지난 일들을 깨끗하게 씻어버리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기회를 우리 주님께서 주십니다. 그러한 새 삶을 통해 준비된 마음 안에 예수님을 모시게 될 때 그 안에 반드시 성령께서 역사 하시어 주님의 능력을 드러나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좀 더 기도도 잘하고 영적으로 성장하고 그러한 차원 높은 신앙생활을 원하면서도 실제적으로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성경도 보지 않습니다. 성경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데 그 말씀을 듣고 들은 바대로 행할 때 그 열매가 맺어지는 것을 잘 알면서도 안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소명이 있는데 예언직, 왕직, 사제직이 있습니다.
예언직(豫言職)’이란 구원의 진리, 즉 복음을 선포하는 임무를 말합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으면 그분을 통해서 구원을 얻습니다. 그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머리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많이 듣고 머리에 채워 놓아야 그것을 전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느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말씀을 통해 기준을 정해 내 삶의 바른길을 걸어갈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은 머리만 큽니다. 들은 것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가슴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사제직(司祭職)’이란 모든 사람이 거룩해야 할 소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것을 하느님께 드리고 하느님의 은총을 인간에게 베푸는 거룩한 소명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5,48) 라는 말씀대로 그 완전함을 닮아가야 합니다. 이것을 가슴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머리에 든 그 말씀을 가슴까지 끌어내어야 합니다. 그런데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거리가 제일 멀다고 합니다.
‘왕직(王職)’이란 다른 사람을 위해 스스로 낮아져서 다른 사람을 섬기고 봉사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손발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런 예언직, 왕직, 사제직을 수행해야하는데 머리만 커서 되겠습니까? 머리가 큰 사람은 말만 많아서 시끄럽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가슴만 큽니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마땅하고 옳다고는 하나 실천을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가슴에만 남아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손발이 커서 매일 매일이 바쁩니다. 오지랖이 넣습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이 왜 바쁜지를 모르고 바쁜 사람입니다. 말씀을 들었으면 가슴으로 끌어내리고 손발로 실행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손발에 가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손발에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 그 행위를 통해서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모두 이 세상에서 평신도로서 그리스도의 예언직, 왕직, 사제직의 직무를 잘 수행하고 있는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한국에는 신자들의 집이 주로 아파트가 많아 가정 방문을 할 때 미리 연락하고 계획을 세워서 방문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고 없이 방문할 때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소록을 항상 차 안에 가지고 다녔습니다. 예고 없이 가정을 방문하여 벨을 누르면 “누구세요?”합니다. “저 신분데요.” “어머, 신부님 어쩐 일이세요? 연락하고 오시지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그 잠깐이 몇 분이에요? 그 잠깐이 한참입니다. 문이 열려 안으로 들어가서 주인과 이야기라도 할라치면 차 끓인다, 과일을 깎는다 하며 분주합니다. 그런데 제가 방문한 목적이 먹고 마시기 위해서가 아니잖습니까? 화장실에 들어가려고 문을 열어보면 급하게 치우느라 온갖 잡동사니를 집어넣은 것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마태24,42)라고 하셨습니다. 그분이 언제 오실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준비함을 의미합니다. 준비한다는 것은 깨어 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분은 그만큼 바쁩니다. 주님께 해야 할 몫을 다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활동도 열심히 하고 집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해야 할 일을 다 해야 합니다. 부부가 같은 신자라고 그걸 어느 한쪽 사람에게만 떠맡기면 안 됩니다. 일을 맡은 사람은 집에 와서 피곤하니깐 옆 사람에게 당신이 대신 좀 해라, 그것도 못하느냐 하고 짜증을 부리게 됩니다. 성당 일로 바쁘니 나 좀 챙겨주라 그런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사랑이신 주님이 우리에게 다가오시면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내 옆 사람에게 진정으로 사랑하고 그것을 행동으로 보이는 사랑을 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성당에도 집안에도 계시다는 것을 잊지 말고 주님을 위한 조화로운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성당 와서 미사 참례하고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하는 사람들은 그 만큼 영적으로 풍요해집니다. 그런데 그 풍요로움을 가슴에만 품고 있어도 안 됩니다. 그것을 끊임없이 베풀어 주고 나눠줘야 합니다. 실천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용서하라, 자비를 베풀어라, 사랑하라, 이런 말씀을 듣고도 그대로 행하지를 않습니다. 그러니 열매가 없습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2)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으면 들은 대로 실천해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 나오시면서 거울을 보고 오셨습니까?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도 가꾸지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서도 가꿉니다. 상대방을 위해서 가꿉니다. 그런데 거울을 보고 내 얼굴에 무엇이 묻었다든지, 지저분하면 닦아 냅니다. 그럼, 우리 마음에 영혼의 거울은 무엇입니까? 바로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비추어 거기에 부족한 것이 있다면 빨리 고쳐야 합니다. 그것을 행하게 될 때 거기에 하느님의 축복과 영광이 분명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사랑하십시오. 부족함에도 사랑하십시오. 그 사랑을, 그 사랑의 힘을, 그 사랑의 능력을 예수님께 분명히 받으시기 바랍니다.
어느 사람이 병원에 갔더니 병원 게시판에 이런 짤막한 글이 붙어 있었습니다.
『전갈에 물린 사람이 하루 만에 퇴원했습니다. 뱀에 불린 사람이 사흘 만에 퇴원했습니다. 사람에게 물린 사람이 며칠이 지났지만 아직도 혼수상태입니다.』
사람에게 물리면 약도 없습니다. 사람이 화가 나서 악에 받치면 거기에서 독소가 나옵니다. 코브라 독보다도 더 강한 독이 나옵니다. ‘시안’이라는 독인데 헝겊에 떨어뜨리면 헝겊이 다 녹는답니다. 보신을 위해 개를 잡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개를 잡을 때 육질을 연하게 하기 위해 때려잡습니다. 개가 분노와 고통으로 화가 나니깐 속에서 독이 쏟아져 나와 그 고기를 녹이기 때문에 고기가 부드러워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일을 하고 선한 일을 하고 지극 정성을 다했어도 마음 안에 화가 남아 있다면 이것은 잘못된 사랑입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하고 또 주님을 모심으로써 삶을 끊임없이 일깨워야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은 능력입니다. 사랑 자체이신 주님을 매일 모시는 것이 능력을 드러내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가장 큰 행복이 되기를 권고합니다. 앞으로 미사 참례 열심히 하십시오. 미사 참례에서 구경꾼이 되지 말고 성체를 꼭 모셔서 그 힘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