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충만을 위한 안수기도”

2011. 3. 10. 오전 9:23:59

글자
 
 
 성령 세미나현장 녹취상태 그대로 실었습니다.
 

 

제 21차 남가주 성령안의 생활 세미나 6

 

제 6 가르침 : “성령 충만을 위한 안수기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요한복음 15장 5절의 말씀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주님의 말씀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밤새 편히 주무셨습니까? 밤을 설치신 분들이 있습니다. 너무 벅차서 잠이 안 와 설치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밤새 무슨 이야기가 그리 많은지, 술에 취하면 이야기가 많아진다고, 성령에 취하니까 이야기가 많아집니다. 성령에 취해 너무 용감해 지셔서 그런 걸까요? 남들 주무시는데 주무시건 말건 나 좋으면 그만이라고 밤새껏 이야기 하시는 분들이 간혹 계셨습니다.


 어느 날부터인가 제가 잠자는 습관을 바꿨습니다. 어느 때는 잠이 안 올 때가 있는데 그러면 내일 아침 미사 해야 하는데, 내일 무슨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꼭 자야 하는데 왜 잠이 안 올까하고 생각하면 그 생각 때문에 잠이 더 안 옵니다. 그러면서도 빨리 자야겠다는 생각으로 묵주기도도 하고 혼자 중얼중얼 온갖 기도문을 외웁니다. 그러다가 잠에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런 날이 문뜩 이런 생각이 났습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이 시간에 기도하라고 불러주셨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로 성령께서 그런 마음을 불러 일으켜 주신 것입니다. 그 다음부터는 잠을 잘 잘 수 있었습니다. 잠이 안온다고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나는 자고 싶어서 누웠지만 아직 기도하라고 안 재우시는 겁니다. 그러면 누워서 열심히 기도하고 때로는 신심서적을 읽기도 합니다. 몇 페이지까지 읽겠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냥 잠이 올 때 까지 읽습니다. 어느 때는 새벽 3시에 잠이 깹니다. 예전에는 더 자야하는데 왜 벌써 눈이 떠졌을까하고 생각했는데 요즘은“아, 하느님께서 지금 기도하라고 나를 깨워주셨구나.”라고 생각하고 일어나 성호경 긋고 주모경을 바칩니다. 그리고 다시 침대에 눕습니다. 또 어떤 때는 그냥 옷 입은 채로 사제관을 나와 성당으로 갑니다. 이른 새벽이라 누가 보는 사람도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성당에도 가고, 또 성모상 앞에서도 기도하고 그럽니다. 아마 누가 보면 저를 정신 나간 사람으로 볼 것입니다. 그렇게 나가서 기도하고 다시 들어와 침대에 누우면 잠이 잘 옵니다. 잠자는 법 편히 주무시는 법 알려 드렸으니 여러분도 따라해 보시기를 권합니다.


결국 마음을 어디에 두느냐 이것이 중요한 부분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불러 주셨으면 그 불러주신 시간에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그분 마음에 드는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분 마음에 드는 상태에 머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15,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열매는 가지에서 맺습니다. 가지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영양분이 필요합니다. 열매를 맺기 위한 영양분은 뿌리로부터 몸통을 통해서 가지까지 오고, 거기에서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 근원이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나를 잠잘 수 있게 해주시는 분도, 나를 깨워 주신 분도 주님이십니다. 


이번 성령세미나 중에 어떤 자매님이 머리가 아프다고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왜 그러시냐고 물었더니 잠을 못 주무셨답니다. 그래서 “잠 잘  주무실 겁니다.”라고 이야기 해 드렸습니다. 오늘 제 이야기를 들으셨으니 앞으로도 잘 주무실 것입니다. “그분이 나를 기도하라고 여전히 부르고 계시는 구나.” 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시키는 대로 기도하면 머리 가 안 아픕니다. 불면증으로 고생하시는 분들은 오늘 미사 중에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기도하면 다 이루어주십니다. 안 믿기시나 봅니다. 제 경험을 이야기했는데도 반응이 영 시큰둥 한 것 같습니다.


제가 샌디에고에 오기 전, 잠시 미 서부 여행 중에 들른 적이 있었는데 본당 신부로 오니까 어색했습니다. 샌디에고 신자들과 어떻게 적응하고 살아야 하나하고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처음에는 본당신자들이 여기 저기 데리고 다니며 구경을 시켜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근처의 쇼핑몰을 데리고 가셨는데 쇼핑몰 이곳저곳을 구경하다가 어느 가게 앞에 서서는 “여기는 비싼 물건을 파는 곳이랍니다.”라고 말씀 하시는 데 진열장 너머를 보니까 정말 값나가는 물건들이 눈에 띠었습니다. “여기는 명품을 파는 비싼 가게입니다.”라고 하시기에 “명품이 어디에 있는데요?”했더니  신자분이 “신부님, 들어가 보실래요?”하시기에 제가 그랬습니다. “명품이 어디 있기는 어디 있어요? 내가 명품인데, 그걸 어디서 찾으세요?”라고 했습니다. 하느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 사랑으로 빚어 만든 작품인 내가 명품이고 여러분이 명품인데 그 사실을 잊고 명품을 다른 곳에서 찾으니까 마음이 상할 때가 많은 것입니다. 명품을 두고 엉뚱한 곳에서 명품을 찾으며 다른 사람들과 비교합니다.


요즘 우리 신자들 보면 가방이 다 똑같은 것 같습니다. 무슨 XXX똥인가 하는 것 들고 다니면 그 사람 품위가 올라가 보입니까? 하느님이 나를 사랑으로 빚어 만드시고, 당신의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그것을 잘 빛내고 사는 것 그것이 중요합니다. 성장한다는 것은 그분 사랑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그분 마음에 드는 것을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행동으로 보여줄 때 성장하게 됩니다.


명품과 짝퉁의 구별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애인이 사준 것은....... 명품입니다. 그럼, 남편이 사준 것은 무엇일까요? 짝퉁입니다. 새벽 미사 때 들고 다니는 백은...... 짝퉁입니다. 비 올 때 우산 대신 머리에 받치면...... 짝퉁이고, 가슴에 품고 뛰면 명품입니다. 소중하게 간직하고 가슴에 품을 수 있는 것이 명품입니다. 그러니 명품을 다른 곳에서 찾지 마시고 주님만을 바라보면 명품이 내 안에 있습니다.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은사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분께서 나를 통해서 이 세상에서 이루고자 하시는 게 얼마나 많은데, 그것을 바라보지 않고 자꾸 다른 것을 바라보니까 내 안에 있는 것을 활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것을 잘 써야 빛나게 됩니다. 쓰면 쓸수록 내안에 계신 하느님이 빛나야 합니다. 부족함과 허물이 있는 제게도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 있기에 저는 그것을 그냥 드러낼 뿐, 활용하고 어떻게 쓸 것인지는 그분이 알아서 하십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자신을 하느님의 ‘몽당연필’이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그분 손에 쥐어진 작은 몽당연필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연필을 오래 쓰다 보면 부러질 때가 있습니다. 부러지면 쓸 수가 없으니 다시 깎아 써야 합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활동하고 기도도 열심히 하지만 때로는 무력감으로 침체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나에게 좀 쉬라고 하시는 구나.”하고 기다리면 그분이 다시 깎아서 쓰십니다. 그러니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그분의 도구입니다, 도구로 쓰시려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알맞은 은사를 다 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필요하실 때 그것을 끄집어 쓰시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주님께서 쓰시려고 하는데 안 내어 놓습니다. 자기 것처럼 꽉 움켜잡고 안 내어 놓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은 자주 써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사람에게 더 큰 은혜로움이 가기도 하고 또 나도 그것을 통해서 기쁨과 보람도 느끼고 그만큼 나도 모르게 커집니다. 주면 줄수록, 줄 수 있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런데 움켜잡으면 잡을수록 다른 사람에게 줄 수가 없으니 커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기에는 많이 가진 사람이 많이 나눌 것 같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아홉 개 가지면 짝을 맞춰야 한다고, 하나를 더해서 열을 만듭니다. 그것이 우리 인간의 기본적인 성향입니다. 그렇지만 실제로 그것을 포기하고 주면 줄수록 더 크게 줄 수 있는 능력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받은 은사는 잘 써야 합니다. 즉, 하느님을 위해서 써야 합니다. 주님을 위해서 써야 합니다. 공동의 유익을 위해 실천적으로 써야 그 쓰는 가운데 내가 커집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쓰여지기 위해서는 주님의 뜻을 늘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어제 어느 신부님께서도 말씀하셨지만 지위나 직책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점점 교만해집니다. 그래서 의식 있는 사람들은 그런 사람의 주변에 가기를 싫어합니다. 그런데 자기 스스로 낮은 모습을 하는 사람에게는 “저 사람, 참 겸손하다.” “저 사람에게는 뭔가 배울 게 있다.”하며 사람들이 모이게 됩니다. 바로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서 주신 은사를 잘 활용하기 위해서 첫 번째로 해야 할 것이 기도입니다. 어제 그룹대화 중에 어떤 자매님께서 “기도가 흔히‘하느님과의 대화’라고 말하지만 그렇게 깊이 생각할 것 없습니다.  내 옆에 하느님이 늘 계시다고 생각하는 것이 기도라고 생각합니다.”하셨습니다. 맞습니다. 기도가‘하느님과의 대화’라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정작 여러분이 기도하면서 하느님과 이야기를 하십니까? 더러는 ‘하느님과 대화’를 하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대부분 자신의 이야기만 일방적으로 합니다. 어느 때는 흥정도 하고 협박도 서슴없이 합니다. 이것 안 들어 주시면 안 된다고 협박하고 흥정합니다. 자신의 이야기는 다 쏟아놓고 그 다음은 주님이 이야기 할 차례지만 그때는 시간이 없다고 듣지 않고 나와 버립니다. 그러니까 기도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소리를 들어야 그분의 뜻대로 살 텐데 내 이야기만 다 쏟아 놓고 그분의 소리를 안 듣고 내 맘대로 삽니다. 


 예수님께서 특별하고 또 중요한 일이 있을 때는 항상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성경에서 산은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광야도 마찬가지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자리이지만 바로 그 자리가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바쁘고 식사를 하실 겨를조차 없이 바빴지만 이른 아침에 한적한 곳으로 가셨습니다. 거기 가서 홀로 기도를 하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을 파견하셨으니 파견하신 아버지 뜻에 맞는 행동을 하고 있는지 점검하기 위하여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아버지 뜻을 찾는 것’이것이 기도의 본질입니다. 침묵 속에 그분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바라고 계시는지, 그것을 알아야 말씀대로 실천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사를 기도 없이 함부로 쓰고 다니면 나 자신을 내세우려는 교만함이 생기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주님이 빛나지 않고 내 자신이 빛나기 때문에 결국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우리가 기도한다는 것은 아버지 뜻을 헤아리는 것입니다. 기도는 곧 사랑입니다. 주님께서 사랑자체이시고, 또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것도 사랑입니다. 그 사랑 안에 머무는 것 그 자체가 기도입니다.


 우리가 일상생활 중에 드리는 기도 중에는 54일 기도도 있고 9일기도, 자비의 기도 성령께 드리는 기도 등등 여러 가지의 기도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 기도가 다 좋다” 또는 “이 기도는 꼭 바쳐야 한다.”고 하면 “그런가?” 하고 너도나도 따라합니다. 9일 기도 중에 하루가 빠졌으니 이 기도는 효과가 없으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인지, 또 54일 기도 중에 하루가 빠지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까요? 그러면 그 동안 정성을 드려 기도 했던 기도는 무효일까요? 우리 신자들은 기도의 본질을 외면한 채 빠진 기도에만 매달립니다. 기도의 본 의미가 무엇입니까?  파우스트 성녀의 자비의 기도나 비르짓다 성녀의 15기도 등, 성인성녀들이 즐겨하던 기도가 있습니다. 그분들이 그 기도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께 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너무 교만해서 이 세상에 있는 좋다는 기도는 다 하려고 욕심을 부립니다. 그러니 기도하기가 힘들고 버겹게 느껴지는 겁니다.  기도 한다면서 그분의 뜻을 찾기보다는 기도문에 끌려다는 상황이 돼서 하루의 마무리 시간인 밤12시가 가까이 다가오면 하루 분량의 기도를 마차기 위해 난리법석입니다. 그러니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암기한 것 그저 외우고 있는 것 밖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제가 한때 허리가 무척 아픈 적이 있었습니다. 허리가 아프니까 허리 찜질을 해야 한다고 해서 숯가마 가면 참 좋다고 해서 제가 하도 허리가 너무 아파 어느 형제님을 따라 밤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저녁 12시도 넘은 밤에  여기저기 사람이 많았습니다. 숯가마 안으로 들어가니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열기가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그 더운 곳에서 용감하게도 9일기도를 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물론 안하는 것보다는 낫지만 숨도 쉬기 어려운 뜨거운 가마 안에서 머리에 수건을 질끈 매고 손에는 묵주를 들고 9일기도 책을 펼쳐놓은 채 온몸이 땀에 젖은 채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자기 볼일을 하면서 그런 기도가 과연 효과가 있겠습니까?  


 안 하는 것 보단 낫죠. 거기에서 아줌마가 이 머리 띠 딱 두르고 묵주잡고 9일기도 책 딱 피고 땀을 삐질삐질. 그 기도의 효과가 있을까요? 엄청 크죠. 안하는 것 보다 훨씬 낫죠. 그런데 하루는 목욕탕에 갔어요. 탕에 쑥 들어가서 쉬려고 탁 하고 있는데, 옆에 사람 보니까 묵주 반지를 꼈더라구요. 같은 지역이라 혹시나 알아볼 것 같아서 고개를 돌리고 있는데, 손을 탕 밖으로 탁 내밀고. 참 열심히 하는 사람 많아요. 한편으론 정도 가지만 그렇게 우리가 많은 기도에 끌려 다니고, 메여 있고 그러면 그런 것은 바람직하지는 않다. 자동차로 운전하면서 기도할 수 있죠? 얼마든지 묵주 기도할 수 있어요. 그런데 저는 그런 걸 권장하지 않아요. 할 수 있지만 자동차 운전할 때는 운전에 집중해야죠. 하느님과 함께 동행 하는 마음으로 얼마든지 기도는 할 수 있지만 정신 차려서 해야 할 것은 운전이거든요. 그것은 주와 부가 다른 거예요. 그죠? 그래서 저는 가끔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기도하면서 담배 피울 수 있습니까? 할 수는 있죠. 그렇지만 그 기도가 온전한 기도가 되느냐, 그건 아니죠. 기도하면서 담배 피운다면 기도가 우선이잖아요. 담배 피우는 건 하지 말아야죠. 기도가 주니까. 그런데 담배 피면서 기도할 수 있어요? 없어요? 담배 피우면서 기도할 수 있지, 주가 담배 피우는 것입니다. 담배 피우는데 부속으로 피우면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연기를 쫙 피우면서 나의 기도가 분향같이 하늘로 올라가라고, 그건 할 수 있어요. 중요한 부분입니다. 주가 무엇인지, 그  핵심이 무엇인지 우리는 항상 염두 해 두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기도한다는 것은 어떤 것을 많이 외우고 또 많은 기도를 하는 것도 좋지만 그것보다 더 소중한 것은 그분의 뜻을 찾는 것입니다. 그분이 도대체 무엇을 원하시는 걸까? 그것을 느끼고 그것을 그대로 행하는 겁니다. 그분의 뜻에 맞는 기도를 행하게 될 때 나는 나도 모르게 성장하게 됩니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영적성장의 첫 번째는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미 아는 이야기입니다, 할머니하고 할아버지하고 산보를 나갔어요. 그런데 오르막길에 할머니께서 너무 힘들어서 할아버지에게“할아범, 나 힘들어요, 업어줘요.”라고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사랑하기 때문에 등에 업고 갑니다. 할머니가 할아버지 등에 업혀서 가니까 미안한 마음에“할아범 나 무겁지?”그렇게 말했어요. 무거운 할머니를 업고 가던 할아버지가 은근히 심통이 나서 “무겁지, 한참 무겁지, 머리는 돌이지, 얼굴엔 철판 깔았지, 간은 부었지.” 라고 대꾸했습니다.


 머리가 돌이면 되겠어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이 머리가 돌이면 되겠어요?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서 간직해야 되는데 돌처럼 딱딱하면 안 들어가니까 안되지요. 여러분, 얼굴에 철판을 깔았습니까? 때로는 철판을 깐 것처럼 뻔뻔스러워야 할 때가 필요하긴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부드러워야 합니다. 돌 같으면 접근하기가 힘듭니다. 얼굴은 그 사람의 마음입니다. 여러분이 보시기에 저는 쌀쌀맞아 보이시지요? 멀리서 보니까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거지, 잘 보면 쌀쌀 맞아요. 찬바람이 돕니다. 그래서 멀리 있을 때가 좋은 거예요.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 멀리서 바라보면 멋있지, 가까이 가면 너무 많이 알게 되니까 힘들어집니다. 또 간땡이가 부었다는 것은 ‘겁이 없다. 주제파악을 못한다’라는 것입니다. 국어 공부한 사람은 주제 파악을 잘합니다. 산수 공부를 한 사람은? 분수를 잘 알고, 지리 공부를 잘하는 사람은 있어야 할 자리를 잘 알고, 미술 공부를 잘 하는 사람은? 자기 꼬라지를 잘 압니다.


 할머니가 기분이 나빠져서 할아버지 등에서 내렸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기분을 풀어주려고 애교를 부립니다. “할멈 나도 힘들다. 나 좀 업어주라.” 합니다. 힘이 들지만 간신히 업고 한발 두발 띄는데 할아버지가 그러는 겁니다. “할멈 나 가볍지?” 그러는 거예요. 이때다 싶은 할머니가 응수합니다.“가볍지 엄청 가볍지, 머리는 비었지, 허파에 바람 들었지, 입은 싸지.” 머리가 비어서 되겠어요? 하느님 믿는 사람이 머리가 비어서 되겠어요? “저사람 골빈 사람이다.” 라고 하잖아요. 그러면 그 사람이 제대로 하고 있다는 거예요? 못하고 있다는 거예요? 머리가 꽉 차야 되요. 하느님 말씀으로 차야 되는 거예요. 주님의 말씀을 채워야 되요. 머리가 비면 안돼요. 그래서 여러분들은 틈틈이 성경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


사실은 성경 말씀을 읽는 다기 보다는 듣는 거죠. 하느님은 말씀하시고 나는 듣는 거예요.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사랑하는 애인에게 편지 쓰는 그것이 뭐야? 성경이죠. 그 성경 말씀으로, 하느님 말씀으로 머리를 비우지 말고 채워야 되요. 입이 어떻다구요? 그대 입은 싸? 아니요. 입이 싸면 안 되지. 그냥 할 말 안 할 말 구별을 잘 해야죠. 성경 말씀에 보면 예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하라고 그랬어요. 그런데 우리는 그런게 참 잘 안되요. 예 할때는 아니오 하고 아니오 할때는 예하고 급히 급히 행동으로 옮겨버려요. 그렇게 급하게 활동하는 사람을 뭐라고 그래요? 추진력 있다고 그러죠. 자기가 자신 얘기할 때는 그렇게 얘기해요. 딴 사람이 그럴때는 생각이 없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본인은 추진력이 있어서 그렇데.


 입이 싸면 안되요, 하느님 믿는 사람은 절대 입이 싸면 안되요. 침묵해야 되요. 침묵. 그러면서 주님께 꼭 여쭈어봐야 되요. 정말 이 상황에 제가 무슨 말을 해야 합니까? 예 할 것 예하고 아니오 할 것 분명히 아니오 이거 생각해야 되요. 그래서 주님께서 들려주시는 말씀을 그 사람에게 들려줘야 해요. 왜? 머리 비면 안된다고 했잖아요. 하느님 말씀 채워야 된다고 그랬잖아요. 그 채웠는데 내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겠어요? 그 채운 것 안에서 뭔가 나오죠. 그럴 때면 “예 ”하고  “아니오”하고 분명히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면 허파에 바람 들었다는 얘기는 뭐예요? 주제를 모른다는 거예요. 내가 어떤 사람이 예요? 내가 어떤 사람? 하느님의 작품 요? 옆에 사람은 어떤 사람? 하느님이 만들다 실패한 작품이요. 맞아요? 자기는 온전한 작품이고, 옆에 사람은 실패한 작품이야, 그게 아니잖아. 똑같이 하느님의 작품이 예요. 그러면 내 주제를 파악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 받는 작품이다 걸작품이다 옆에 사람도 걸작품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 비판하고 심판하고 할 수 없죠. 비방할 수 없죠, 어떻게 비방해? 하느님의 작품인데, 그 사람도 하느님이 사랑하는 사람인데 내가 무슨 자격이 있어서 그를 비판하고 그럽니까? 성당에 이렇게 보면은 말 잘하는 분 참 많이 계시죠? 그죠? 저는 박사학위는 없지만 박사학위 받은 사람이 천지죠. 근데 그 박사가 만물박사요? 부분박사요? 대개는 부분 박사죠. 안 그래요? 저는 무슨 박사예요? 만물박사요? 기분은 나쁘지 않네요. 어떤 사람이 박사다 그러면 어떤 부분에 대해서 전공하는 거 아닙니까? 저는 신학을 전공하고 나중에 사회복지도 공부했지만 어쨌든 그 한 분야에서 아는 것이지 모두를 완벽하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죠. 여러 사람이 다양하게 아는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를 이루는 거잖아요. 함께 가는 거지. 그러면 서로의 뭐를 인정해줘야 되냐면 다양성을 인정해 줘야 하고 그 곳에 내 귀를 열어서 들을 줄도 알아야 되고 인정할 줄도 알아야 되는데 그게 참 쉽지 않습니다. 누구만 잘 났어? 나만 잘 났어. 그런 게 참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장한다는 것은 결국 그런 것을 절제할 줄 아는 것, 그리고 상대를 인정해 주는 것. 그러한 삶에 자꾸 가까이 갈 때 비로소 나는 나도 모르게 성장하는 겁니다. 그래서 두 번 째 말씀 드리고 싶은 건 뭐하라? 성경을 늘 옆에 두고 그 말씀을 들어라. 이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성경을 읽는 것은 하느님 말씀을 듣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또 뭘 이야기 하려고 합니까? 이 교재에서는? 봉사를 통한 성장 이렇게 이야기하잖아요? 봉사가 뭐예요? 앞 못 보는 게 봉사죠? 근데 받들어 섬기는 것을 봉사라고 그러는데 봉사하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저는 꽃동네라는 사회복지단체죠. 우리는 사회복지시설이다라고 이야기를 잘 하지 않습니다. 국가에서 보기에는 사회단체이지만 그 안에서 매일같이 미사봉헌하고 기도하고 또 사랑을 실천하는 사랑의 장이예요. 그래서 인간을 구원하는 ‘구원의 장’이다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밖에서 보면 복지단체예요. 그렇지만 우리는 내부적으로는 인간 구원의 장이다 이것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버림받은 사람을 많이 모시고 살았는데 그 버림받은 사람들이 왜 버림받았을까? 그 원인을 치유하는 교육장, 사랑의 교육장을 만들어요. 그래서 끊임없이 연수를 시켜요. 제가 거기에 연관이 되어서 일찍부터 거기서 살았어요. 제가 신부될 때 엎어져 있을 때 성인호칭기도 하잖ㅇ아요. 그러면 그때 나름대로 성인들의 도움을 청하면서 속으로 기도도 하고 그러죠. 그때 제가 무슨 기도를 했냐면 ‘저는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봉사할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라고 했어요. 그때는 아주 순수한 마음으로 한거죠. 그러고 나서 1년 보좌생활을 했는데 7월 5일날 들어갔는데 7월 5일날 나왔어요. 만 일년 다 되어서 나온 거예요. 그러고 나서 어디로 갔냐면 꽃동네로 갔어요. 꽃동네로 갔는데 미리 사전에 주교님하고 얘기가 되서 거기에 가게 됐는데, 주교님께서 선뜻 너 거기 가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어요. 꽃동네에 대해서 쭉 이야기 하시더니 그러고 나서 저한테 그러는 거예요. 반 신부는 어떻게 생각해? 그럼 아버지가 그 어려운 상황을 쭉 이야기 하고 너는 어떻게 생각해? 그러면 무슨 얘기예요? 알아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서 들으라는 거죠. 가라 는 거죠. 가겠습니다. 라고 말하고 일단은 갔습니다. 거기 가서 그렇게 살면서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내가 서품받을 때 기도한 게 이렇게 금방 들어 주냐, 본당도 나가고 그래야 되는데, 여기를 먼저 보내주나..’ 근데 거기서 많이 배웠어요. 거기가 경기도 가평에도 있고 음성에도 있고, 서울에도 있고, 강화도에도 있고 지금도 많이 퍼져 있어요. 미국에도 있고 필리핀에도 있고...지금은 많이 퍼져 있지만 그때는 초창기였어요. 경기도 가평에도 있었고 음성에도 있었고 대학교에도 있고 또 마지막에는 음성 꽃동네에 있다가 여기에 왔거든요. 뭘 말씀 드리려고 하는거면, 제가 봉사를 많이 했다는게 아니라 저희 봉사는 무슨 봉사였느냐? 미사하고 또 성사주고 또 그러면서 사람 많이 만나는 그러한 거였어요. 제가 그걸 언제 확 느꼈느냐 면? 저는 꽃동네에서 살 사람은 아니라고 느꼈어요. 언제 느꼈냐면, 어젠가 말씀드렸잖아요. 전 항상 5층에 살았거든요. 그 병동이 여러 개가 있었어요. 노인 요양원, 정신병 요양원, 심신장애 요양원, 병원, 부랑시설, 이 시설들이 곳곳에 나눠 있거든요. 그럼 제가 매일같이 다녀야 되요. 돌아가면서 미사해야 되고. 어째튼 그런거 해야 하는데 그 가장 힘들고 어려운 사람, 중환자실 위층에 제가 사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오르락내리락 그리며 가장 거기를 많이 보잖아요. 그리고 제가 잠자기 직전에는 항상 중환자실을 들어가서 한 바퀴 돌고, 40-50명 누워 계시거든요. 거기 꼭 들르고 나서 가서 갔어요.


 그런데 어느 날 가는데 막 불러요. 내가 신부인지도 모르고 불러요. 불러서 갔더니 당신 똥 싸셨데, 똥 치워 달라는 이야기 아니예요. 그럼 제가 얼fms 치워줘야 되잖아요. 근데 즉각 내가 두리번두리번 거리면 ‘어 봉사자 분이 왔네’ 그 봉사자를 즉각 부르고 있더라구요. 그러니까 그 봉사자분은 쪽 달려와서 금방 그 똥 부담 없이 만지고 씻어주는 거예요. 그때 내가 얼마나 창피했는지 몰라요. 그거 내가 봉사자를 불렀어야 되요? 닦어 드렸어야 되요? 닦아 드렸어야 되는거 잖아요. 야 내가 여기 10년을 살면서도 내가 그런거는 못하는 사람이었구나. 나의 성수는 이 성소가 아니구나. 그 똥을 만지면서 아주 기쁘게 할 수 있는 그 사람은 거기 사는 거잖아요. 그게 정말 성소죠. 성소는 사람마다 다 달라요. 은사가 다 달라요. 그걸 만지면 만질수록 뭐야? 기뻐지는 거야. 그치만 저는 거기서 몸은 살고 미사봉헌하고 강론하고 외부사람 만나고, 그런거는 하지만 막바로 그거는 못하더라구요. 그래서 은사가 다르구나. 내가 있어야 할 자리가 다르구나. 느꼈어요. 그걸 피하고 싶은 게 아니라 없으면 하겠지요. 그치만 마음을 다해서 하는 거랑은 분명히 다른 거거든요. 거기에 수도자 분들이 300명 넘게 있거든요. 그 사람들은 평생 그렇게 사는 거예요. 그런데 강론때 야단도 맞아요. 잘못한다고. 죽어라 그렇게 했는데 그래도 야단맞아요. 그래도 뭐 야단맞아도 그게어 흔들림 없이 하는 거예요. 왜? 자기는 좋으니까. 하느님께 받은 소명이 그거니까. 마더 데레사 수녀님도 그렇죠. 그런 삶을 사신 거죠. 끝까지. 어떤 사람들은 마더 데레사 수녀님도 하느님을 부정했다고 그런 소리를 하는데, 그분의 마음을 모르니까 그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사람이 살다 보면은 항상 어두운  밤이란게 있어요. 그냥 무엇인가 정말 하느님뜻 찾으려고 애를 썼는데, 이건가 아닌가? 그렇게 생각할 때도 있어요. 그것이 지나고 나면 더 큰 것이 주어지는데. 데레사 수녀님도 그랬잖아. 그래서 중간에 관뒀어요? 끝까지 그렇게 살다가 끝까지 갔잖아요. 그건 뭐예요? 그건 하느님이 늘 그 안에 계셨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거죠. 소명이 다른 거예요. 제가 거기에 있으면서 오웅진 신부님, 작은 예수회의 박성구 신부님, 부산의 오수영 신부님, 마더 데레사 수녀님 이렇게 이야기를 쭉 들어보니까 비슷해. 하시는 말씀이 비슷해. 왜 말씀이 비슷할까? 저분들이 저 책을 다 읽어 보셨나? 안 읽어 보셨데요. 그런데 이야기한 거 보면 똑 같아요. 왜 그래요? 자기가 받은 그 성소가 그것이기 때문에 그냥 삶에서 그대로 나오는 거예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살면 그냥 나오는 거예요. 거기에 따른 이유가 없어요. 사람마다 다른 성소가 있는데 그건 누구 것이 더 좋고 누구 것이 밑이다라고 말할 수 없어요. ‘너는 그렇게 대학까지 졸업하고 나와서 남의 똥오줌이나 치우고 있냐?’ 그렇게 얘기할 수 있어요. 그러나 정말 하느님 앞에 누가 더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느냐. 그 똥 치우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 일이예요.


 우리에게 주어진 은사를 정말 무엇을 위해서 써야 하느냐? 하느님의 뜻을 위해서 써야 합니다. 그러면서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면서 쓸 때 성장해요. 믿습니까? 그래서 여러분들이 있다가 내가 받은 은사가 뭘까? 한번 기도하는 시간도 갖겠습니다만 여러분들이 받은 은사를 한번쯤 확인하고 또 그것을 잘 공동의 유익을 위해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쓰려고 하는 게 중요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을 사용할 때 중요한건 뭐라고 했어요? 겸손이에요. 제가 그랬잖아요. 처음에 막 전화하고 은사 받았는지 막 확인해 볼려고 했다고 했잖아요. 그게 처음에 너무 벅차니까 그런 마음이 여러분께도 다 있을 꺼예요. 그런데 그거 함부로 하는 거 아니에요. 왜? 조금 시간을 두면서 다져져서 기도하면서 그것을 내안에 다져가지고 나와야지. 붕붕 떠서 나오면 안 돼요. 무슨 얘기인지 압니까? 그래서 여러분들 집에 가자마자 막 이렇게 할 것이 아니라 한 며칠간 기도 열심히 더 하면 하느님이 주신 그 은사에 감사하면서 그것을 잘 쓸 수 있도록 기도하면 겸손하게 그것을 활용할 수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그 겸손도 꼭 거기에 함께 가야 된다는 겁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봉사한다고 막 뛰쳐나가면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어요.


 우리가 교회 안에서 보면 교회 사명이 뭐냐면? 예언직, 왕직, 사제직 이렇게 이야기하잖습니까? 예언직은 뭐예요?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거예요. 그게 예언 직의 핵심이죠. 어떤 사람은 앞으로 있을 일을 시간별로, 날짜별로 알려주는 것을 예언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예언이 아니에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믿고 따라 살면 구원 받는다 이것이 예언의 핵심이에요.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주셨는데 그 분을 통해서 우리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는다 이게 예언의 핵심이예요. 그것을 전하는 거예요. 우리 구원해 준다는 그 기쁜소식을 전하는 것이 예언직이예요. 그 다음에 사제직은 뭐예요? 거룩함에 다가가는 것. 내가 완전한 사람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거룩함으로 가는 것. ‘성화’를 이야기 하는거거든요. 근데 우리 신자들이 착각 하는게 있어요. 우리 신부들이 사제 그러니까 사제직은 신부만 하는 거다 라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고 모든 그리스도인이라면 거룩해져야 할 예수님을 닮아야 할 그러한 예수님의 삶을 또 다른 그리스도의 삶을 비춰주고 살아야 할 의무가 있는데 그것이 사제직. 사제직이라고 합니다. 그 다음에 뭐가 있어요? 희생, 봉사해야 하는 무슨 직? 왕직. 어제 뭐 이야기했어요? King.king.king 이야기했죠? 다 높아지고 싶어지는 거예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지도자가 되면서 혼신의 힘을 다 받쳐서 여러분께 봉사하겠습니다. 봉사하겠습니다. 그러면서 실제로는 자기가 높이 올라가려고, 그 감투를 가지고 뭔가 부리고 지배하려고 그러죠. 그런데 지배하려고 그러면 지배당하는 사람의 마음이 좋아요? 안 좋아요? 소유하려고 하면 소유 당하는 사람의 기분은 나쁘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봉사라는 명목을 가지고 감투 쓰고 위에 올라가서 뭘 하려고 하는 사람이 종종 있어요. 그렇지만 실제적으로 그 왕직이라는 것은 희생, 봉사, 사랑의 직분이다. 이것을 우리는 항상 잊지 말아야 되요. 그렇다면 이러한 예언직, 왕직, 사제직의 그 삶을 우리 몸으로 비유해 본다면 예언직은 어디에 속할까요? 머리, 가슴, 손발 세부분으로 나눌 때, 예언직은 어디에 속할까요? 제가 지금 손을 어디다 올라고 있어요? 이렇게 눈치가 없다니까요? 손을 머리에 얹었다고 ‘손발’그러는 거예요? 아까 하느님의 말씀을 어떻게 해야 된다고 그랬어요? 저장을 해야 된다고 그랬잖아요. 표현이 좋네요. 저장해야 된데. 머리를 비우지 말라고 그랬잖아요. 하느님 말씀으로 채워야 된다고 그랬잖아요. 그러니까 이 머리 역할이 그런 거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깨우치는 거을 머리로 비유해 볼 수 있는 거죠. 그리고 가슴은? 가슴은 뭘로 비유해 볼수 있어요? 사제직. 성화, 거룩한 마음. 그다음에 왕직은 어디로 이야기 할 수 있어요? 손발로 이야기 할 수 있죠. 여러분들은 머리가 큽니까?. 가슴 큽니까? 손발이 큽니까? 가슴만 커? 그게 자랑이야? 손발만 커? 진짜 발이 크네요. 머리만 큰 사람은 가까이 가면 가까이 갈수록 매력이 있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면 밥맛 떨어지는. 나도 잘 났는데 지만 잘나서 내가 이야기 할 틈을 안줘. 뭔가 많이 들었으니까 가르치려고만 해. 그러면 밥맛 떨어져요. 속상해. 자기의 논리를 가지고 줄창 이야기 하는 사람들이 머리가 큰 사람들이예요. 어떤 사람은 가슴만 커. 제가 이런 이야기 강론하면 맞아 맞아. 오늘부터 시작을 해야지. 창세기부터 읽을까? 며칠 지나면 또 까맣게 잊어버렸다가 신부님 강론을 들으면 또 펴볼까 창세기,  또 펴볼까하고 마테오. 마땅하고 옳은입니다. 끄덕끄덕 그렇게 해야지 해야지 그렇게 가슴만 큰 사람이 있다고요. 또 어떤 사람은 손 발이 커요. 손발이 큰 사람은 오지랖이 넓다고 그래요. 오지랖이 큰사람은 바빠요. 왜? 바쁜지도 모르고 바빠요. 온 동네 오라고 하는데는 없는데 갈 데는 많아? 사사건건 돌아다니며 다 참견을 해야 속이 시원한 거예요. 근데 오지랖이 넓으면 안되죠. 그래서 우리는 머리만 커도, 가슴만 커도, 손발만 커도 안 되는거예요. 균형이 맞아야 되는 거죠. 하느님 말씀을 깨우치고 그것을 가슴까지 끌어내려야 되요. 근데 머리에서 가슴까지 내려오는 거리가 너무 멀어요. 그죠? 평생 거기까지 끌어내려오지 못하는 사람 참 많아요. 일생을 끌어내려오지 못하고 죽는 사람이 참 많다구요. 아는 것은 많은데 가슴으로 느껴서 다른 사람과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거죠. 하느님 말씀이 옳아, 요즘 세상에 그걸 어떻게 적용하느냐고 그건 옛날 예수님 시대의 얘기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구요. 그 하느님의 말씀이 마땅하고 옮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실천을 해야 될 거 아녜요? 살아야지 그대로. 그런데 지금당장 그렇게 살려니까 인간적으로 손해 보는 것 같아 그래서 못하는 거예요. 좋은 이야기는 좋은 이야기 인데 나는 느끼지는 못하는, 거부하는. 그래서 가슴까지 끌어 내린다는게 쉬운 일이 아니 예요. 그러나 우리는 가슴까지 끌어내려야 되요. 그런데 가슴까지 끌어내리는 걸로 거기에 멈추면 안 되죠. 어떻게 해야 돼? 실천이 있어야 돼.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열매는 없잖아요.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은사를 통한 열매는 어디에서 맺어진다? 손발에서 맺어진다. 행동할 때 겸손함으로 그분의 뜻을 헤아리면서 실천할 때 거기서 완성된다. 구원의 완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손발에서 완성 되요. 그래서 야고보서에서 보면,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 믿음은 죽은 것이다.” 이렇게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말씀을 잘 접하고 행동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무엇을 통해서 성장하느냐면 우리 성사 생활을 통해서 성장하는 거예요. 우리 본당 이야기를 해서 죄송합니다만, 우리 본당에 레지오가 조금 늘어서나 인제 여섯 개 셀기도팀이 다섯 개인가 있어요. 셀팀은 많이 늘었어요. 한 팀밖에 없었는데 많이 늘은 거죠. 어쨌든 숫자가 40명쯤 되시는 것 같아요. 성당자체가 규모가 작으니까, 그런데 제가 그 기도에 가능한 한 참석을 합니다. 저는 월,화,수,목,금 있는데 월요일은 쉬는 날이니까 무슨 회합은 잘 안가죠. 봉성체는 가지만 일부러 회합은 잘 안가요. 그렇지만 나머지 날은 돌아가면서 매번가요. 어느 팀은 안 들어가지만 다른 팀에 가면 있어. 저는 그거는 꼭 해요. 왜? 그래야 거기가서 밥 얻어 먹지. 어째튼 회합이 끝나고 밥을 나눠 먹으니까.


그런데 보면 성당에서는 얼굴을 못 보는데 그 모임에는 꼬박꼬박 오시는 분이 있어요. 그분 신앙생활 잘 하시는 거예요? 무엇이 중요해요? 미사가 절정이에요.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을 영접하는 내 안에 모시는 결정적인 순간에 영성체를 통해서 이루어지잖아요. 당신이 모든 것을 내어주는 것이 미사예요. 성체성사. 그 기도 중에 가장 중요한 기도가 미사 다 이렇게 보면 맞아요.  그런데 미사 참여는 안하고 그 구역 모임, 셀 모임에는 빠지지 않고 나오신다구. 그러면 거기에 있는 이 사람은 열심하다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제가 바라보는 관점에서는 거꾸로 되었다. 뒤집어야 되는데.


또 본당에서 생활하다 보면은 본당 회장은 그 본당신부한테 고해성사를 볼까요? 안 볼까요? 그분들은 대개 일년에 한번  누구한테 봐요?  판공성사할 때 외부에서 손님 모실때 외부손님께..그런데 열심히 한 신앙인은 자처하는 분은 정말 본당 신부한테 정기적으로 성사를 봐요. 단체장들도 마찬가지예요. 왜 자기에 있는 것을 다 고백하고 묵혀 두지 않아요. 그때그때 고해합니다. 근데 고해성사를 자주 보면 볼수록 볼거리가 생기지만 보지 않으면 볼거리가 생기지 않습니다. 왜 그래요? 그 만큼 마음이 무뎌지기 때문에요. 영혼이 맑아야 되는데 투명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흠이 가요. 쓰레기장에 쓰레하나 던지면 표가 나요? 안나요? 안나죠. 그러나 깨끗한 방에 티끌하나 떨어져 있어요. 그러면 표가 금방 나요. 그럼 그거 어떻게? 지저분한 것도 아니죠. 그렇지만 짚어서 닦잖아요. 그 집이 깨끗한지 안 깨끗한지 어디를 가보면 알아요? 화장실 가보면 알아요. 화장실 세면장 거울을 보면 알아요. 거울에 물 튀겨서 막 지저분한데 거기에 다 얼굴 보는 사람이 있잖아요. 그러면 그 집이 딱 드러나죠. 그거는 잘 보려고 닦고 그러는 건데, 자기 얼굴은 화장하고 그러는데 실제로 영혼의 상태를 점검하는 것은 우리가 사실 소홀하죠. 근데 고해성사 보는 게 지난번에 말씀을 드렸지만 정기적으로 한 신부님께 보는 게 중요합니다. 그래야 이 사람이 어떻게 성장하고 있구나. 어떤 문제를 안고 있구나. 이것은 여기를 건드려 줘야 원인부터 치유시켜 줄 수 있구나. 이런 것들을 빨리 알 수 있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한 신부님께 보는 게 좋죠 물론 누구에게 보셔도 상관은 없지만, 주치의가 있으면 좋잖아요. 근데 그 영혼의 거울에 비춰서 자꾸 나를 들여다봐야 내가 맑아 져요. 그 영이 맑아 져요. 고해성사 볼게 없다 생각하지 말고 정기적으로 성사생활을 하시는 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성령을 충만히 받았다 은사를 받았다 그 표가 어떻게 나타날꺼냐 성사생활을 잘 하느냐 안하느냐 이 세미나를 잘 받았으냐 잘 못 받으냐 는 어디에서 나타나? 바로 그런 성사 생활 하느냐 안 하느냐 거기서 나타나요. 본당 가시면 뭐 해야 돼? 본당 신부님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해야 돼, 협조해야 되요. 어떤 때는 자기 마음에 안 드는 때가 있어요. 저도 여기 저희 신자들 많지만 제가 오지 말라고 그랬어요. 왜? 제 이야기 다 들었는데 제가 가서 강론 하려면 자꾸 신경 쓰이잖아요. 내가 했던 이야기해야 되는데. 그래서 오지 말라고 그랬어요. 근데 부득부득 온대요. 그리고 어제는 우리 본당에서 행사가 있었거든요. 제가 무슨 행사를 했느냐면 가난한 사람들 고통 받는 사람들 돕는, 맥시코 고아원, 과테말라하고 거기에 도와주려고 돈버는 이벤트를 하나 했습니다. 현대 제네시스 시승식 하는 거 거기에 시승하면 앙케이트 조사하면 한 사람 앞에 25불을 주겠데요. 그런데 200명을 채워야 된데요. 그래서 우리 신자들 한 500명 나오거든요. 학생들 하고다 채우면 700명 정도 되요. 21살 이상으로 해야 된다 그래서 뭐 그거 못하겠나, 주일날 500명 나오는 게 까지껏 그거 못 하겠나 그래서 덜컥 약속을 했어요. 그랬는데 그분이 와서 설명을 해야 되잖아요. 그 회사 대표가 와서 설명을 하는거예요. 그런데 여기 토렌스 어디에서 개신교 감리교회에서 하셨데. 3000명 나오는데 240명 그 정도 됐데, 그러면서 저한테 아주 염려스러운 소리로 이야기 하시더라구요. 3000명 나오는데서 그 숫자 나왔는데 여기에서 200명 모으실수 있겠습니까 라고 얘기하는거예요. 그 분이 개신교 감리 교회 장로야. 그러니까 속이 어떻게? 한번 봐라.‘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어떻게든 해보겠습니다.’라고 말해놓고 보니까 정말 그날 토요일이고, 이게 제대로 나올 수 있게나 하는 생각이 막 드는 거예요. 약속은 해놓고 차는 왔는데 사람은 없어봐, 그거 낭패잖아요. 천주교 뭐가 돼? 망신이죠. 그래서 걱정이 되가꼬 막 얘기하면서 여기 오지 말라고 거기 시승식 참석하라고 그랬는데 부득부득들 온 거 아녜요. 제가 더 기도를 했죠. 이왕 이렇게 된거 하느님께 맞기자 그랬어요. 그래서 제가 전화 한번도 안 보다가 어제는 궁금하더라구요. 그래도 본당에 행사가 있으면 행사 마쳤는지 어땠는지 확인은 받아봐야 되잖아요. 침묵이지만. 그래서 방에 들어가서 전화를 보니까 메시지가 하나 와 있더라구요. 영어로 ‘father’라고 쓴게 아니고 ‘sinbunim gge’ 그렇게 눌러서 하셨더라구요. 330명 왔습니다. 정말 마음이 참 기뻤어요. 저녁에 확인했는데 330명. 저는 200명을 넘을까 막 걱정했는데 330이면 거의 배 정도 왔다고 보면 되죠. 아 이게 하느님께 맡기고 하면 다 또 다른 방법으로 채워 주시는 구나. 그래서 저는 본당 신부가 쏙 빠지고 자기네들 다 하라 했을 때, 그들이 또 어떻게 보면 훨씬 더 잘하는 거예요. 있으나 없으나 잘 하는 거예요. 그러면 저는 본당 가서 어떻게 하겠어요? 그 고마움에 더 잘해 드리겠지요. 그래서 하느님께 맡긴다는 거 중요하고 동시에 본당 공동체가 왔고 본당 신부님 뭐 이야기 하고 무어 하시겠다고 그러면 내 생각과 다를 수 있어요. 일단은 먼저 협력하는 거예요. 순종하는 거예요. 순종하면 기적이 생긴다고 그랬어요. 기적이라는 게 뭐예요? 어떤 뭐 앓던 사람이 벌떡 일어나는 거 이런 것이 기적입니까? 그게 아니라 하느님이 개입하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그 현장이 기적이에요. 그리고 저는 개인적으로 기적을 체험한 거죠. 200명 좀 안 넘으면 어쩌나 기도하고 그냥 맡기자하고 여기 왔는데, 전화도 한번도 안했어요. 그랬는데 그런 결과였음은 전 개인적으로 기적을 체험한 거죠. 하느님이 그렇게 개입하신 거예요. ‘


 여러분도 마찬가지예요. 여러분과 본당 신부님과 그리고 본당 여러 단체가 있는데 거기에 마음이 안 맞을 수 있지만 그 책임자를 통해서 이렇게 이렇게 하자 그러면 일단을 의견을 표출할 수 있지만 결정되면 그대로 가는 거예요. 그게 여러분들이 하실 일이예요. 그게 성장의 비결이다.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렇게 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래야 본당에서 성령 세미나 한다고 그러면 다 보내주죠.


 제가 꽃동네 오래 있었다고 그랬잖아요. 그런데 어느 날 환자 한 분이 오셨어요. 환자 한분이 오신 게 아니지 여러분들이 오셨죠. 여러분들 오셨지만 그 부인이 오셨어요. 마르타   )자매님이신데 기도해 달라고 부탁을 했어요. 당신 남편이 강남 성모병원에서 위암으로 고통 받고 있고 복수가 계속 차오르는데 하루에 다섯 병씩 빼내야 되는 그런 분이셨습니다. 병원에서도 다 끝났다 90% 간이 망그러지고 그래서 임종을 준비하라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그 부인은 얼마나 마음이 아파. 가슴이 답답하고 그러니까 기도하러 오신 거예요. 가평 꽃동네에 오셨는데 그 한자리 기도하는 마음으로 있었어요. 제가 그날 강론을 자기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지 말라고 그랬어요. 자기 자신, 가족을 위해서 기도하지 말고 자기보다 훨씬 고통 받는 그러한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라 그랬어요. 그 날 만큼은 그렇게 기도하라 그랬거든요. 그러면 그런 소리를 들을 때 그 아주머니 마음이 어땠을까?‘아 오늘 기도하러 잘못 왔구나. 나는 말야, 내 남편이 정말 고통스러워해서 그 남편을 위해서 온전히 기도하러  왔는데 저 신부는 초장부터 내 마음을 어떻게 했어? 상하게 만들었지 기분이 나쁘지 미사지향 서두에도 그랬지만 그날 강론은 계속 그랬어요. 다른 사람의 고통을 대신할 수 있는 그러한 기도를 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어요. 그랬는데 정말 그 아주머니는 그러한 강론과 또 미사봉헌을 통해서 집으로 가는 거예요. 다 끝내고 나서요. 한편으로는 마음이 무거웠어요. 강론에서도 그렇고 지향도 그렇고 끝까지 줄기차게 그러니까 내가 정말 그분 뜻대로 하라고 맡기긴 맡겼지만 한편으로 찝찝한 거예요. 그러고 나서 병원에 가는 거예요. 그런데 막바로 병원엔 못 가는 거예요. 왜? 미안해서. 당신을 위해서 내가 오늘 가서 기도해 주겠소 하고 왔는데 온전히 기도를 하지 못한 안타까움에 막바로 못가고 자기 집에 들렀다 하면서 느즈막히 병원을 갔어요.


 그런데 그 자매는 놀라운 체험을 했어요. 그날부터 배 복수가 빠지기 시작했어요. 그날부터. 탁 줄어버렸어요. 일주일 후에 그분 가족을 몽땅 만날수 있었어요. 그 분이 방지거    이신데 남편은, 서울 서의철 방지거이신데 그분을 모시고 저를 찾아왔어요. 신부님 감사합니다. 제가 신부님이 그런 강론을 해서 처음에는 마음이 상했는데 신부님이 하두 그렇게 말씀을 하셔서 제가 온전히 맡기고 기도했더니 이러한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하고 그 가족 시어머니, 시아버지, 아들, 딸, 그리고 남편 몽땅 다 온 거예요. 그래서 감사하다고 인사하러 왔어요. 제가 그때 이야기했어요. 치유라는 것은 정말 중요한 부분이다. 하느님께서 은총을 베푸신 거예요. 감사의 표현을 잘 하시라고, 혹시나 화해하지 못한 사람이 있으면 화해하고 또 용서를 청할 사람이 있으면 청하고  해줄 사람 해줘라. 이런 이야기 저도 모르게 했거든요. 그러고 나서 그 가족들 몽땅 고해성사 보고 갔어요. 그러고 나서 한 참 세월이 흘렀는데 어느 날 기도회의 미사가 끝났어. 기도회의 미사가 끝나자 마라 그 단상에 어떤 이쁜 아줌마가 쫓아오더니 덥석 껴앉는거 있지? 기분이 좋았을까? 신부님 저 아세요? 그러면서 덥석 껴안는거예요. 깜짝 놀랬죠. 속으론 좋으면서. 저 아시냐고 그러네 어어 그래서 제가 형제님은요? 그랬어요. 저 마르타예요. 2년 전에 세상을 떠났어요. 그러면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자기 남편 떠났는데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데요. 그러면서 이야기 하는 거예요. ‘신부님 저희 남편이 하느님을 온전히 알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제가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그러는 거예요. 하느님을 온전히 알고 떠났데요. 무슨 얘기 예요? 복수가 빠지는 것을 체험했어, 그리고 고해성사를 봤어요. 그리고 제가 이야기할 때 뭐하라, 용서할 것 용서하고 용서 청할 것 청하라 그랬는데 그것이 이루어 진거예요. 그래서 가족 간의 관계도 그렇고, 이웃간의관계도 그렇고 서로의 관계가 아주 좋아졌어요. 그래서 마음이 얼마나 편해요. 그러고 나서 그것이 다 풀어지니까 그 형제 어떻게? 세상을 떠난 거예요.  그러는 기간이 1년 반 정도 걸렸데요. 젊은 양반 50대 후반. 젊은 양반이 갑자기 그렇게 돌아가면 한이 맺히잖아요. 그렇지만 그러한 관계를 다 풀어놓고 1년 반정도 뒤에 떠난 거예요. 누구든지 다 떠나는 거 아니겠어요? 그렇지만 어떠한 상태로?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 품에서 가는 것 하고 그냥 떠나는 것 하곤 완전히 다른 거죠. 그래서 하느님 품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떠난 거예요. 그래서 본인도 기쁘고 주변의 그 가족도 모두 평화를 얻었구요.


 중요한 부분은 뭐냐? 하느님께 온전히 맡기는 거예요, 맡기고 동시에 무엇을 해야 되느냐,내가 변화된 삶을 사는데 있어서 하느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명하는 거예요. 말씀에 순명하는 거예요. 하느님의 말씀이 성경을 통해서 나에게 주어지기도 하지만 미사 강론 때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이 되잖아요. 그런 말씀을 거기에 전적으로 따라가면 그러한 기적이 생기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그럴 꺼에요, 까지 껏 치유 받았다는 게 뭐야, 1년 만에 죽으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잖아요. 그치만 그걸 체험한 사람은 그게 아니에요. 일년 이년 더 사는 게 문제가 아닌 거예요. 그 차원 이상인거죠. 소화 데레사 성녀는 아주 젊어서 돌아가셨어요. 그런데 그 편지를 보면, “어느 날 아침에 내가 죽어있거들랑 슬퍼하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 나를 필요로 해서 꼭 필요로 해서 나를 데려 간줄 아십시오.” 세월을 오래 살았다 적게 살았다 이 문제가 아니라 하느님을 온전히 차지했느냐 못했느냐 이게 중요한 거예요. 그래서 성령 세미나를 하는 것은 성령은사를 체험하도록 하는 것은 무엇을 위해서 하느님은 늘 너와 함께 있다 그것을, 현존을 느끼도록 해 주는 그러한 불 쑤시개 역할을 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끊임없이 성장 시켜야 되요. 여러분들의 생활 안에서 정말 하느님이 함께 계시다는걸 느꼈기 때문에 어떤 두려움도 없이 용기를 가지고 분명하게 이해할 것 이해하고 하느님이 원하는거 선택하고 그 선택을 통해서 성장하고 그 성장 과정안에서 하느님을 더 깊이 만나게 되는 은총을 더해가는 그 삶이 이어지는 거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들은 하느님 말씀에 순명하시고 또 동시에 여러분들에게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그 성직자들 수도자들 그 어떤 단체장들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메시지 전달될 때 그것에 순응하는 것 그것이 꼭 필요하다. 그 안에 내가 생각하지 못한 하느님의 손길이 하느님의 능력이 반드시 드러납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은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시간이 금방 갔어요. 그죠? 한 가지만 더 이야기 해드립니다. 교재에 보면은 교계제도를 통한 성장 나오거든요. 우리 신부는 어디에 속해 있느냐 하느님께 속해 있지만 하느님께 속해있는 그 과정 안에서 누구에게 속해 있느냐면 저 같은 경우는 주교님한테 속해 있습니다. 주교님한테 속해 있는데, 제가 어디 출신이냐면 청주교구 출신입니다. 그런데 샌디에고 교구에 와있습니다. 내가 누구 말을 들을까요? 이렇게 생각하니까 문제가 되는 거지요. 제가 지금 어디에 와있어요? 샌디에고 교구에 와 있으면 샌디에고 교구장님 말을 들어야죠 저 청주교구의 주교장 교구장님 말씀을 듣고 그냥 행동하면 어떻게 해요. 여기하고 한국하고 다른데. 한국 것만 따르면 되겠어요? 안되는 거죠. 이게 교계제도예요. 우리 교계제도 안에 있어서 주교님께 순명을 서약합니다. 그런데 그 교구장님께 서약을 하지만 동시에 내가 그 교구장님의 명을 받아서 샌디에고에 왔다 그러면 그 순간부터 너는 누구 말을 들으라? 샌디에고 교구장님 말을 들어라. 임해주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속지주의예요. 내가 있는 그 자리에 그 땅의 규범을 따라야 되는 사람이예요.


  그러면 한국 하고 여기하고 다른 부분도 있습니다. 틀린게 아니라 다른 부분들이 있어요. 그럼 다른부분에 있어서 여기에 따르는 거죠. 그럼 제가 한국 가면 한국 주교님 지시를 따르는 거죠. 제가 여기서 사목하면서 행정적인 것은 여기 주교님말씀을 따르는 거예요. 제가 여기 속해서 사니까요. 여러분도 마찬가지예요. 옆에 본당하고 하는 거 보니까 차등이 있고 좀 달라. ‘아 옆에 본당은 피정간대니까 돈도 지원해주고, 우리는 지원도 안 해주고’ 그럼 상대적으로 뭘 느껴요? 박탈감을 느껴? 배가 고파? 저쪽에는 이렇게 해주는데 여긴 뭐야 내 돈 들여가지고... 그렇게 생각할 필요 없다 . 그 본당은 그 본당대로 사정이 있는 거고, 이 본당은 이 본당대로 이렇게 가는 거고. 또 신부님 바뀌면 또 그 부족한 어떤 부분을 또 채워주고 또 채워주고  그러면서 순환 되는거 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비교하지 마라. 우리 교회는 주교님, 그리고 성직자 수도자님 그분들의 말씀을 따라 살고 그 밑에 평신도가 이렇게 있지만, 계급이 아니에요. 직책에 따른 역할의 분담이에요. 그래서 고유한 역할이 있을 때 아까 말씀드렸지만 저는 무슨 직분요? 지도자로서 직분요. 그 똥치우고 오줌치우는 그 봉사는 못해요. 그 위에 지도자 역할은 좀 해요. 그러한 역할은 다른 거예요. 그런 것에 대해서 이상하다 왜 이럴까 이러한 것들을 자꾸 생각하고 자꾸 입으로 전달하면 전달할수록 자기 속이 좁은 사람이다. 알 것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다 그렇게 되는 거에요. 어떤 사람이 말이 많으면 말 많은 그곳을 보고 그 사람을 확실하게 파악하게 되요. 신부는 많은 사람들을 알아요. 왜? 다 듣잖아요. 이사람 저사람. 그 안에 이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했는데 똑 같은 이야기를 정반대로 이야기해. 누구 말이 진실일까?  그걸 파악하지 않지.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그래서 교계제도 안에서 그 본당 신부님, 또 어떤 책임자 의 말에 순명하면서 따라가면 하느님께서 열매를 맺어주신다 이것을 말씀 드리고 싶어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받은 은사 성장시키시고 공동의 이익을 위해서 잘 써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느님 아버지 당신께서 주신 은사의 성장을 묵상했습니다. 우리가 받은 모든 은사들이 당신께서 주신 것이고 또 당신께서 원하시는 곳에 잘 써야 할 것임을 우리가 압니다. 그러나 혹시라도 어둠의 세력이 그것을 방해해서 그렇지 않은 나 자신을 위해서 쓸 수 있는 그러한 마음이 생길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마음이 생길 때 바로잡아 주시고 당신의 뜻을 헤아릴 수 있는 저희가 될 수 있도록 강복하소서. 말씀을 통해서, 성사생활을 통해서, 또 특별히 미사 안에서 당신의 사랑을 느끼고 또 뜻을 헤아리면서 하루하루 기쁨으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 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비하여 비나이다. 성부와 성좌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기도공동체성가

목록 전체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