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가르침 : “예수님을 통한 구원”

2011. 3. 10. 오전 9:28:42

글자
 
 
       

          제 21차 남가주 성령안의 생활 세미나 3


 


 집이 아닌 곳에서 주무시려니 여러 가지로 불편한 점이 많으시리라 짐작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3박 4일간의 일정으로 성령 세미나를 한다는 것이 조금은 아쉽습니다. 좀 익숙해지려고 하면 떠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제 잠을 충분히 주무시지 못하셨으니 강의 시간에 조는 분이 계실 것 같습니다. 그때는 마음껏 주무시기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주무시라고 부른 거니까 잠이 오면 주무시면 됩니다. 꿈결에 들리는 소리를 들어도 좋고 깨면 깬 상태로 들어도 좋고 마음 편히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두 번째 강의의 주제는 《예수님을 통한 구원》입니다. 성경구절을 먼저 함께 읽고 그러고 나서 설명해 드리고 또 ‘생활 나누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나눠 드리는 상본은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로 루카복음 15장의 말씀인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관한 성화입니다. 이 성화에 대해 설명을 하기 전에 아래의 성경 구절부터 다 함께 읽겠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느님이 주셨던 본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잃어버렸습니다.”(로마3,23)

 

“우리가 대항하여 싸워야 할 원수들은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세력의 악신들과 암흑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의 악령들입니다.”(에페6,12)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14,6)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4,12)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잘못 때문에 죽음에 넘겨지셨지만,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되살아나셨습니다.”(로마4,25)


“여러분이 육에 따라 살면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로마8,13)


시작기도 하겠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 오늘 《예수님을 통한 구원》에 대해서 함께 묵상하려 합니다. 저희의 마음을 예수님께로 향할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려 우리에게 다가오셨다는 것을 우리가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열어주소서. 자비하신 주님, 당신 친히 우리 구원이 되셔서 이 세상에 오셨지만, 당신의 십자가를 바라본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너무도 힘이 듭니다. 당신이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는 너무도 어렵습니다. 이 시간, 십자가를 통한 당신의 구원이 우리에 대한 사랑이었음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우리 마음 안의 모든 연약함을 당신께 온전히 의탁할 수 있도록 저희를 인도하여 주시고 비추어 주소서. 당신 친히 우리 구원이 되셨다는 것이 우리에게 커다란 기쁨과 영광이 될 수 있도록 우리 모두를 열어 주소서. 당신께 온전히 맡겨 드리오니 당신 친히 이 시간을 주관해 주시고 당신께서 이루고자 하는 것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서 열매 맺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어제는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서 묵상을 했습니다. 오늘은 그 사랑의 구체적 표현인 《예수님을 통한 우리의 구원》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신자 한 분이 저한테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어느 날 매스컴과 신문지상을 통해 어릴 적부터 한동네에 살았던 고등학교 동창을 보게 되었답니다. 그 친구가 어느 날 신부가 되어서, 그것도 강론을 잘하는 유명한 신부가 되어 자신이 다니는 본당에 강사로 온다는 소식을 매스컴과 신문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저놈이 언제 신부가 됐지? 저놈이 언제 저런 유능한 신부가 되었을까 하며 그 친구의 강론을 들으러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하게 되었답니다. 학창시절의 그 친구에 대한 기억이 좋았다면 고민을 하지 않았겠지만, 기억이 좋지 않아서 갈까 말까 망설였습니다. 그 친구를 어려서부터 쭉 봐왔던 터라 그가 굉장히 괴짜고 주변 사람들이 ‘아무개’하면 다 알 정도로 지냈던 것 같았습니다. 그랬던 친구가 신부가 돼서 강론을 한다니 그를 보면 옛날 생각이 나서 “저놈이 옛날엔 아주 망나니였는데…”하는 생각이 들 것 같아 옛 친구인 신부의 강론을 들으러 갈 수가 없었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에서 과연 무엇이 중요한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누구나 과거는 있습니다. 과거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허물이 없는 사람도 없습니다. 누구나 다 과거와 허물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과거 없는 성인 없고 미래 없는 죄인 없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과거가 있고 아픈 상처도 있고 예기치 못한 일들로 말미암아 많은 허물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과거의 삶과는 다른, 새롭게 변화된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본다면 그 사람의 과거 모습보다는 지금 새롭게 변한 그의 삶을 알아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선입견 때문에 자기가 알고 있는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새롭게 변한 모습에 대해 거부반응을 가지고 바라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긍정적인 시선보다 부정적인 시선이 더 앞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망나니 같던 사람이 신부가 됐다니 변해도 너무 많이 변한 것이지요. 그 망나니 같던 친구가 신부가 됐다는 것 자체도 믿기 어려운데 더구나 강론을 잘하는 유명한 신부가 됐다는 것은 더욱더 대단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을 가능하게 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바로 그 예수님 때문에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그러니 그것이 얼마나 큰 축하를 받을 일입니까?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그런데 그 옛날의 선입견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것이 참 아쉽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많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처음에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습니다. 유다 율법을 신봉하는 바리사이파 바오로는 나자렛 예수의 추종자들을 찾아내 그들을 죽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하느님을 체험하고 나서는 그의 삶이 완전히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 바오로 사도가 이야기합니다.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내달리고 있습니다.”(필리3,13) 과거를 생각한다면 이 얼마나 뻔뻔스런 이야기입니까?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던 큰 잘못을 저지르고도 자신은 과거를 뒤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소리를 한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뻔뻔스러운 일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정말 과거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앞만 보고 달려갑니다. 바로 예수님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새로운 삶을 보여 주셨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인 후로는 과거에 메여 있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만 보고 내달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오로가 ‘이방인의 사도’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옛날의 자신이 잘못했던 허물에 묶여 있었다면 용감하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복음을 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예수님 때문에 내 삶이 새롭게 바뀌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전의 일들을 기억하지 말고 옛날의 일들을 생각하지 마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하려 한다. 이미 드러나고 있는데 너희는 그것을 알지 못하느냐?”(이사43,18)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지난 과거에 매여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믿는 사람은 그 자비의 심판보다도 자비에 우리 마음에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큰 사랑으로 감싸주시고 미래를 새롭게 열어주시면 그 미래에 우리를 맡겨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인간의 연약함 때문에 자꾸 과거로 돌아가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 심판보다 자비가 더 큽니다. 우리 허물보다도 죄보다도 그분의 자비가 더 큽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뽑으실 때 그 제자들의 성향이 다 제각각이었습니다. ‘마태오’는 세금을 거둬들이는 세리였는데 당시에 세금을 거둬들이는 사람은 좋지 않은 인상을 받았던 때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주머니를 털어서 국가에다 일부 받치고 나머지는 자기가 갖는, 그래서 공식적으로 죄인으로 취급받던 사람이 바로 세리였습니다. 혁명당원 ‘시몬’이라는 제자도 있습니다. 혁명당원이라면 요즘 말로 표현자면 데모꾼’이나‘앞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팔아먹은 유다도 있었고,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이야기했던 베드로도 거기에 있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그 제자들을 선발하는 데 있어서 예수님께서 그냥 뽑은 것이 아니거든요. 밤새도록 기도한 다음에 그 제자들을 뽑으셨습니다. 밤새도록 기도하셨는데 선택하신 제자들을 보면 인간적인 눈으로 판단할 때는 잘못된 선택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으로 보면 합당한 선택입니다. 그분의 마음은 우리의 마음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누가 봐도 부족하고 허물이 많아 보이는 세리, 혁명당원, 배반자 등등, 그런 사람들까지 품을 수 있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들을 새롭게 변화시키신 후에 주님의 도구로서의 역할을 하게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그 사람들의 삶이 바뀌었습니다. 그것을 주님이 하신 것입니다. ‘구원’이란 십 원에서 일 원을 뺀 것이 구원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살도록 마련해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달마야, 놀자」라는 제목의 영화는 궁지에 몰린 조직폭력배들이 피할 곳을 찾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어느 사찰로 숨어들게 되면서 벌어지는 해프닝을 그린 영화입니다. 그 영화를 보면 조폭들이 숨어들어온 사찰에 노승이 계셨는데 어느 날, 조폭들에게 깨진 항아리를 주며 그곳에 물을 부어 가득 채워 놓으라고 시킵니다. 조폭들이 깨어진 항아리에 열심히 물을 퍼붓지만 밑 빠진 독이라 물을 채울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스님께서 오셔서 그 밑 빠진 항아리를 뒤집어 놓습니다. 그러자 항아리에 물이 가득 찼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나는 너희를 이미 품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조폭들은 스님이 자신들이 조폭이라는 사실을 모를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 노승은 그들이 조폭이라는 것을 다 알고 계셨지만, 그들을 내쫓지 않고 함께 지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면모를 다 알고 계십니다. 성경에 보면 “인간의 영은 주님의 등불 그것은 배 속 온갖 깊은 곳까지 살핀다.”(잠언20,27)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뱃속 깊은 곳까지 들여다보십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알고 계시면서도 우리를 감싸 주시고, 우리를 품어주십니다. 그것이 우리에 대한 사랑입니다. 또 그 사랑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데 그 사랑의 표현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준 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으로써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확실하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생각할 때마다 십자가를 동시에 바라보아야 합니다. 십자가는 바로 구원의 십자가입니다. 따라서 우리 일상생활 안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도 겪고 힘든 고난들이 있을 때 예수님의 수난과 고통을 지금 내가 체험하는 순간이라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그 고통이 의미 있는 고통이 됩니다. 그 고통이야말로 주님과 일치하는 고통이 되는 겁니다. 그랬을 때 그 고통은 고통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을 이루게 됩니다. 내가 당하고 있는 것은 어떠한 잘못을 범해서 어떠한 벌로 주어지는 고통이 아니라 바로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바로 그 고통을 통해 나를 구원해 주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믿음 안에서 받아들일 때 기쁨도 주어지고 평화도 누리게 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를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해 주신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은혜가 여러분에게 가득히 주어지기를 기도합니다. 본당 신부로서 사목을 하다 보면 특별히 기억에 남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 중에‘이 표제 베드로’라는 분이 계셨는데 그분은 72살에 위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은 사시는 구역의 본당에 계시지 않고 공소에서 투병 중이셨습니다. 마지막에 몸이 불편하시니까 저에게 자주 전화를 주셨습니다. “신부님, 제가 하느님 마음을 상하게 해드렸습니다. 안 그러려고 했는데 마음을 상하게 해드렸습니다. 저 고해성사를 받고 싶습니다.” 그러면 제가 가서 고해성사 드리고 기도하고 돌아옵니다. 그러면 또 얼마 있다가 또 전화가 와요. “신부님, 안 그러려고 했는데 또 하느님 마음을 상하게 해 드렸습니다.”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면 제가 뭐라고 그러겠어요? “특별히 죄지을게 뭐가 있겠습니까? 주님, 용서해 주세요. 제가 또 엉뚱한 생각을 했습니다.”라고 기도하시면 됩니다.”또 조금 있으면 전화를 하십니다. ‘안 그러려고 그랬는데…’ 실제로 그 마음이 솔직한 마음입니다. 안 그러려고 그랬는데… 하느님의 손을 꼭 잡고 모든 고통과 어려움을 참아보려고 애를 쓰지만, 인간적인 한계를 느끼는 겁니다. 그래서 왜 이런 고통을 제게 주셨느냐고 자기도 모르게 투덜대고 원망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좀 시간이 지나고 나면 “또 내가 잘못했구나. 또 하느님 마음 상하게 해 드렸구나.”하는 마음이 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할아버지께서 또 전화를 주셔서 제가 할아버지댁을 방문했습니다.


 할아버지댁 앞마당에는 사과나무 등 과일나무가 많이 있었습니다. 때마침 가을이었는데 사과가 큼지막하게 열려 있었습니다. 할아버지가 계신 방에 들어갔더니 사과 상자가 가운데 놓여 있었고 그 안에 큼지막한 사과가 담겨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상자 위에 흰 봉투가 올려져 있었습니다.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 이게 제가 마지막으로 신부님께 드리는 선물이 될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드리는 선물…. 제 마음이 갑자기 짠해졌습니다. “제가 죽거들랑 제가 일생 다녔던 공소에 봉헌해 주십시오.”하셔서 제가 “그런 이야기를 저한테만 하시면 안 됩니다. 자식들 있는 데서 하십시오.”라고 말씀드렸더니 자식들이 다 모인 가운데 유언을 하시고 말씀을 제가 일일이 수첩에다 다 적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난 후 이틀 후에 정말 할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분의 유언대로 공소에서 장례미사를 봉헌하기 전에 제가 그분의 자녀들에게 조건을 달았습니다. 아버지 유언이 성당에서 미사 봉헌하는 것이었으니 자녀들은 미사를 봉헌하기 전에 고해성사를 보고 거룩함으로 새 삶을 시작하지 않는다면 장례미사를 봉헌해 주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아버지 원의를 통해 그분의 자녀들이 새 삶을 살게 되었으니 자제분들은 아버지를 통해 구원받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의 구원은 물론, 아버지를 통해서 자녀들도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 이후 저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뵙게 되면, 정신 있고 기운 있을 때 유언을 쓰시라고 꼭 이야기합니다. 저도 사제관 책상 오른쪽 서랍 맨 위에 놓여 있는 책 속에 유서를 넣어두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타고 다니는 자동차 오른쪽 캐비닛에도 유서를 보관해 놓았습니다. 본당 사목을 하다 보면 아무래도 자동차로 이동할 때가 잦기 때문에 언제 어떻게 될지 몰라 유사시 저의 장기가 필요한 사람에게 빨리 전달되도록 제 차 안에 유서를 보관해 놓았습니다. 언제나 하느님 앞에 당당해야 하고, 하느님을 꼭 잡고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 때문에, 그분이 보내주신 예수님 때문에 삶이 바뀌는 그 자체가 구원입니다.


 개신교 신자 분들은 천주교에는 구원이 없다고 말합니다. 개신교 신자가 천주교 신자들에게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하고 물으면 많은 신자 분들이 구원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확신이 없다는 겁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당신의 자녀로 불림을 주셨습니다. 거기에 응답을 하셨으니 이미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구원은 이미 왔습니다. 그러나 아직 완성은 되지 않았습니다. 완성은 세상 끝 날에 완성됩니다. 세상의 끝 날에 완성되는 것은 이미 오늘부터 시작한 그 안에 그 결과로써 주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미래를 희망하는 만큼 오늘을 확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구원은 바로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구원’ 그러면 마지막 날, 훗날에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하기 때문에 확신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구원에 대한 확신을 여러분이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구원에 대한 확신이 있으면 그만큼 삶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분이 나를 구원해 주시는데 내 허물을 용서해 주시고 새 삶으로 인도해 주시는데, 그리고 영생으로 인도해 주시는데 오늘을 허비할 수 없습니다.


 오상의 비오 신부님은 “과거는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고, 현재는 사랑으로 살고, 미래는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십시오.”라고 하셨습니다. 과거는 역사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는 것입니다. 미래는 신비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섭리에 맡겨야 합니다. 미래는 오늘을 통해서 옵니다. 오늘은 지금 이 순간은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인 오늘을 잘 살아야 합니다. 잘 산다는 게 어떤 겁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계명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3,34 )라고 하셨습니다. 그냥 우리가 막연히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확실한 사랑이 십자가에 매달려서 당신이 모든 것을 아낌없이 다 주고 떠나신 것입니다. 우리 허물과 죄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다 주고도 더 주고 싶어 하는 그 사랑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과거는 하느님의 자비에, 미래는 섭리에, 오늘은 사랑으로 살아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사랑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참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사랑한다면서도 실제로 상대방에게 부담을 주고, 아픔을 주고, 상처를 줍니다.


사자와 황소가 서로 사랑을 했습니다. 하루는 사자가 “오늘은 내가 음식을 준비할게.”라며 황소를 초대했습니다. 황소는 “오늘 저녁은 맛있는 걸 먹을 수 있겠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자가 황소를 위해 열심히 준비한 저녁메뉴는 쇠고기 요리였습니다. 사랑하는 황소를 위해 온 정성과 사랑으로 준비를 했지만, 막상 음식을 먹으려고 했지만 황소는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특별히 준비한다고 해놓고선 자신이 먹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지 않으냐고 화나서 따지니깐 음식준비를 한 사자도 화가 났습니다. “내가 어떻게 준비한 건데 왜 먹지 않는 거야?”하고  화가 서로 잔뜩 났습니다. 다음날, 이번에는 황소가 사자를 위해 음식을 준비했습니다. 열심히 음식을 준비했습니다. 여물로 맛있게 음식을 차렸지만 사자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아니었습니다. 사랑과 정성으로 준비했다고 하지만 그만큼 상처와 화가 남았습니다. 최선을 다했지만 상대방인 아닌 내 방식대로 최선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눈먼 최선은 최악을 낳는다고 했습니다. 최선을 다하고 열심히 하되, 바르게 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을 하되,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 그 사랑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바로 그곳이 천국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그곳은 지옥입니다.


 여러분, 부부싸움 해 보셨습니까? 가끔 하십니까? 그러면 이기십니까, 지십니까? 싸움은 이기려고 하는 것이니 악착같이 싸워서 이기시기 바랍니다. 오늘 주님이 가르쳐 주신 사랑대로 한다면 좋은 열매가 맺어지게 될 것입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바로 우리 삶의 자리에 있습니다. 시작과 완성이 그곳에 있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15,5)라고 하셨습니다. 가지는 나무에 붙어 있어야 살 수 있습니다. 살아 계신 그분에게 붙어 있어야 구원이 완성됩니다. 우리 일상 안에서 하느님의 손을 꼭 잡고, 주님의 손을 꼭 잡고 그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5장 9절을 보면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라고 적혀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즉,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말씀으로 구원이란 그분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므로 그분 사랑 안에 있는 그 상태가 천국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고해성사를 한 달에 한 번 정도 봅니다. 우리 남가주에는 한인 신부님들이 많이 계시는데, 한 달에 한 번씩 회합을 합니다. 제가 그 회합에는 빠지지 않고 꼭 참석합니다. 다른 여러 가지 일들도 있지만 고해 성사를 보기 위하여 참석합니다. 그런데 고해성사 본다는 것이 인간적으로 쉬운 일은 아닙니다. “아, 저 신부님은 내가 잘사는 걸로 알고 있는데 저 신부님께 가서 성사를 보면 우리 가정을 어떻게 생각하실까? 나를 어떻게 생각하실까?” 이런 선입견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부님이 과연 그렇게 생각하겠습니까?


한번은‘천주교 사제 연수’가 있을 때 제가 제일 뒷자리 가서 앉은 적이 있었습니다. 성사 볼 신부님을 정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앞자리부터 쭉 살펴보았습니다. 성사를 봐야 하는데 어느 신부님께 봐야 하나, 어느 신부님이 좋은 말씀을 해 주실까 하며 마음에 드는 신부님을 찾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한 신부님을 마음에 두고 그 신부님 휴식시간에 성사를 보기위해 기다리는데 어찌나 바쁘게 돌아다니시는 지, 금방 어디 가시고, 성당에서 잠깐 기도하시고, 그리고는 또 성당 옆 서점에 들어가시더니 한참 후에 신부님이 그곳에서 나오셨습니다. 그래서 얼른 달려가 신부님께 “제가 고해성사를 받았으면 합니다.”라고 하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하시며 길 한가운데에서 성사를 보려고 하셨습니다. 제가 너무 당황했습니다. 마당에서, 그것도 사람들이 막 지나다니는데 길 한복판에서 그러시는데 제가 “신부님, 성당으로 가시죠?”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하는 수 없이 쫓아가면서 “죄인에게 강복하소서. 저의 잘못한 죄를…”하며 죄의 고백을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이 밖에도 알아내지 못한 죄에 대해서도 통회 하오니 사하여 주십시오.” 했더니, 신부님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 사제의 죄를 사합니다. 아멘.”하시며 책을 뒤적거리시는 겁니다. 그래서 제게 책을 주려고 그러시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 책 저 서점에 있다.” 그러시면서 보속으로 1,2,3권 시리즈로 되어있는 책의 제목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책들을 모두 사서 읽었습니다. 제가 그 많은 신부님 중에 한 분을 고민 고민해서 정했는데 그런 신부님을 만난 것입니다. 한편으론 섭섭할 수 있지만, 그런 분을 만났다는 것은 나한테 꼭 알맞은 신부님을 선택한 것입니다.


 합동으로 성사를 볼 때 대부분 본당 신자들은 본당신부님이 계신 곳은 피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모르고 본당 신부님이 계신 곳으로 들어갔다가 본당 신부님을 만나면 말이 꽉 막힙니다. 그런데 본당 신부님이 용서해주십니까?  그 신부를 도구 삼아 하느님이 하시는 것이지요. 본당신부가 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나한테 꼭 필요해서 그분을 도구로 보내주셨구나.”라고 생각한다면 거기에 기쁨도 평화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준비를 못 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연약함입니다. 고해성사 보면 신부님과 신자 사이에 커튼이 있는데, 어떤 분은 자신 있게 마주 보며 성사를 보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럼 서로 피로합니다. 또, 감기에 걸려서 오시는 분도 있습니다. 자기를 보여주고 싶지 않아 성사를 볼 때면 목소리 쫙 깔아 변성을 합니다. 그렇게 한다고 신부님이 그분의 목소리를 모르겠습니까?  우리는 성사를 볼때 고해성사를 보는 신부와 함께 계시는 주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통해서 예수님을 통해서 도구로 선택한 사제를 생각하는 것이지, 그 사제 자체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용서를 청할 때 구원의 도구로 온 신부를 바라보니까 내 마음을 온전히 터놓지 못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구원의 장애가 됩니다. 구원은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구원을 이루시는 주님께 우리의 마음을 선물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다 내 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구원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자리에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잊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성사를 한 달에 몇 번 보십니까? 여러분 모두 자주 점검하는 게 필요합니다. 성사를 보지 않으면 안 볼수록 볼 것이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참 희한하게도 보면 볼수록 볼거리가 생겨납니다. 성사를 통해 마음이 맑아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영적으로 맑아지기 때문에 그분 마음을 상하게 해드리는 것을 금방금방 느끼게 됩니다. 영이 맑지 않고 무디면 잘못한 것을 잘못한 것으로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이런 것쯤이야….”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영이 맑으면 맑을수록 그분 거울에 나를 비추어 보기 때문에 고백할 것이 많아집니다. 죄를 많이 지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만큼 맑아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매일같이 거울 보시지요? 눈썹도 그리고, 화장도 하시는데, 그러한 정성으로 우리 영혼의 상태를 비추어 보느냐 하면 그렇지 못합니다.


영혼을 비추어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7,17) 하셨습니다. 진리는 곧 아버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그 진리의 말씀에 나를 비추어서 거기에 흐림이 있다면 그때그때 용서를 청해야 합니다. 그때그때 용서를 청하는 그 가운데 구원이 있습니다. 그만큼 그분과 내가 하나 되는 순간이기 때문에, 거룩함에 일치하는 순간이기 때문에, 거기에 구원이 있습니다. 구원은 우리 삶의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자 하는 마음에 있습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강조하신 사랑의 계명대로 살아가는 것에 구원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미운 사람을 보면 어떻게 바라봅니까? 미운 사람은 미운 대로 그냥 바라봅니다.  미워도 다시 한번! 그러나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미운 사람이 있을 때 두 가지 관점에서 바라보면 좋습니다. 저 사람 밉다, 저 사람 행동이 참 보기 싫다. 그러면 하느님께 여쭈어 봐야 합니다. 저 미운 사람을 왜 나한테 보냈을까? 미운 사람의 부족한 허물을 왜 내가 보게 되었을까?  그러면 답이 나옵니다. 나에게도 그런 모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통해서 나 자신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그 부족함을 다 포용할 수 있는 넉넉한 품을 가졌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       )성인은 “유혹을 받지 않고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완전히 알 수 없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바로 상대방을 통해서 내 속을 환히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지혜를 주셨다는 것 한 가지 보시고, 또 한 가지는 미운 사람의 부족함을 어떻게 할 것 인가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의 부족함을 채워 주라는 것입니다. 나를 하느님께서 도구로 쓰기 위해서 그걸 보여 주신 것이므로 그의 부족함을 채울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 두 가지 측면에서 바라보면 확실히 맞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내 마음의 상태를 바라보고 또 정화하고 거룩하게 해서 하느님 마음과 일치시키는 그것을 통해서 구원을 받고, 또 동시에 다른 사람을 내가 그의 부족함을 채워줌으로써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도록 내가 구원의 도구가 되는 겁니다. 이 두 가지 의미를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어려움을 주는 사람들과 만나는 것이 부담스럽고 외면하고 싶은 일입니다. 신부인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신부가 되어 처음 본당에 부임했을 때 그 본당은 공소가 네 곳이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본당에 수녀원이 없어서 수녀원을 짓는 계획이 추진되고 있었습니다. 시골 본당이다 보니 돈이 넉넉지가 않아 수녀원을 짓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공소를 방문하다 보니 본당 예산에 포함되지 않은 별도의 자신들 사업을 위해서 모아둔 것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공소에서 강론하며“하느님의 사업에 있어서 본당에서 추구하는 것을 가장 먼저 협력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합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돈을 본당의 수녀원 짓는 데 보태신다면 여러분이 필요할 때 하느님께서 그보다 더 많이 채워주실 겁니다. 알아들을 귀가 있으신 분은 알아들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며칠 후 공소 회장님이 저녁식사나 같이 하자고 해서 본당 회장님하고 그 공소에 함께 가서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약속 장소에 갔더니 공소 회장님만 나와 계신 것이 아니라 공소의 사목 위원들이 한방 가득히 앉아 있었습니다. 중국집에서 양장피, 탕수육 등, 한 상 가득 차려 놓고 술을 한 잔씩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니 취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한 사람이 “야 임마, 네가 신부면 다냐?”하며 소리를 치는 겁니다. 갑자기 음식 맛이 뚝 떨어졌습니다. 그때 주변 사람들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손뼉을 쳤을까, 치지 않았을까요? 손뼉을 쳤겠지요, 물론 속으로요. “너 말 잘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 네가 참 잘했다.”그렇게 생각했겠지요. 옆에서 “ 술 먹었다고 신부님께 그러는 거 아니지.”하면서 말렸지만, 실제 속으로는, “야, 너 잘했다.”했을 겁니다. 물론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자신들도 성당 짓고 신부님을 모시려고 열심히 돈을 모으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자신들의 공소보다 옆의 본당이 먼저 세워지고 신부님도 부임해 왔으니 부러움과 함께 마음의 상처도 생긴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준비해서 모아 놓은 것인데 옆에 본당 수녀원을 짓는다고 그 귀한 돈을 내놓으라 하느냐?”하며 마음의 상처를 받으신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새로 온 신부가 돈 모아 놓은 것 옆 본당을 위해 가져오라고 하니까 얼마나 화가 치밀었겠습니까? 저는 그런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아주 자신 있게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네가 신부면 다냐?” 라는 소리를 듣고 밥맛이 뚝 떨어져서 본당으로 돌아 온 제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여러 가지 상념에 마음이 진정이 안 되었습니다. 어디 가서 누구에게 하소연 할 수 있겠습니까? 사제관에 있는데 마음이 진정이 안 되어 성당 감실 앞에 가서 하느님께 기도를 올렸습니다. 제가 처음 신부 될 때, 성경 구절을 선택한 것이 있는데 그 성경구절이 떠올랐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필리2,5) 그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설교하고 다니실 때 “저 사람 미쳤다.”라는 소리도 들으며 그들로부터 온갖 모욕을 다 당하셨을 때 예수님의 마음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거기에 비하니 저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노여움도 분노도 한순간에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제가 욕했던 그 신자에게 전화를 먼저 했습니다. 벌써 15년 전의 일입니다. 그분이 제가 미국 올 때도 잘 챙겨 주셔서 정말 감사히 인사하고 왔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서로 친해졌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분은 저한테는 골칫덩이였습니다. 그 생각만 하면 밥맛 떨어지고 그랬는데, 그 사람은 저에게는 은총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가 처음 본당에 나와 열심히 한다는 것이 의욕이 지나쳐 제 주관대로만 일할 뻔 했었는데 그분이 제게 제동을 걸어 주셨으니 그것은 분명 은총이었습니다. 그때부터 그 일을 생각하며 더 깊이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마음 그대로 이러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처신하셨을까?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하고 심사숙고 끝에 행동에 옮기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분은 골칫덩이였고 미움의 대상이었지만 저는 그분을 통해서 인생의 한 획을 긋게 되는 은총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분은 제게 은총 덩어리입니다. 지금도 그분과의 관계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상처와 아픔을 주는 분, 어떤 때 보면 가슴 깊이 제쳐 놓고 싶고 대면하고 싶지 않을지라도 그분을 한발 물러서서 예수님의 눈으로,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본다면 은총의 도구이며 나를 통해서 그를 구원하고자 하신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정말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일상 안에 있습니다. 그분을 얼마나 헤아리고 그분의 사랑을 얼마나 행동으로 옮기느냐, 거기에 구원이 있습니다. 특별히 전혀 손 쓸 수 없을 만큼 그런 나쁜 사람은 없습니다. 또 완벽한 사람, 전혀 손쓰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사람도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 모세, 다윗, 유다, 베드로, 바오로 등등 다 잘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잘못을 통해서 자기의 연약함을 깨우쳤습니다. 하느님의 도움 없이는 그 길을 올바르게 걸어갈 수 없다는 것을 깨우치고 새 삶을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 매 맞은 순간을 새로운 삶의 시작으로 여겼다는 것이 은총이었습니다.


“모든 자녀가 다 받는 훈육을 받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사생아지 자녀가 아닙니다.”(히브12,8)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허물이나 잘못에 꾸지람이나 나무람을 받지 않는다면 참 아들이 아니라는 말씀으로까지 표현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때리고 그 사랑의 매를 받아들이면 은총이 되지만, 사랑의 매를 거부하면 은총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통한 구원을 갈망하지만, 예수님은 사랑의 징표로 십자가를 짊어지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다가오는 십자가를 내가 거부하면 그 안에 구원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구원은 우리에게 다가오는 여러 가지 어려움과 고통, 시련을 통해서 우리가 예수님이 짊어지셨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는 순간을 통해서 새롭게 만들어 주신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한편으로 우리가 알게 모르게 여러 가지 미신행위에 접할 때가 있었습니다. 사주팔자나 인터넷 통해서 점과 사주를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신문에 보면 ‘오늘의 운세’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을 한번 보게 되면 그것이 사람을 끌고 다닙니다. 아니라고 그러면서도 좋은 거 나오면 오늘 뭐 좋은 일 생기지 않을까 하고 기대하고 또 나쁜 운세가 나오면 “에이, 뭐 그냥  그런 거지.”하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그 말에 끌려 다니는 사람들을 자주 봅니다. 그것은 미신 행위입니다. 그곳엔 구원은 없고 구원을 방해하는 세력이 거기에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자기도 모르게 자꾸 접근하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단호하게 거절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숨결로 우리에게 영을 불어 넣어주셨는데, 영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육적으로 자꾸 생각하니까 거기에 자꾸 끌려 다니는 겁니다.


 저도 한때는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저희 어머니가 대단한 열정을 지니셨던 분인데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큰 집, 작은 집 할 것 없이 우리 집안을 어머니가 다 이루셨습니다. 우리 동네 어떤 분은 어머니께 이름을 지어 달라고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가만히 보니까 그 어머니께서 (    ) 같데, 우리가 보는 (     )가, 그쪽에 그런 분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 영향을 우리 어머니가 많이 받으셨습니다. 제가 학교에서 운동할 때 입었던 운동복 하의를 보면 항상 부적이 붙어 있었습니다. 시합 나갈 때 그것의 힘을 빌려서 잘하라고 그러셨습니다. 후에 영세를 받았음에도 계속 그러한 일들을 지속하였습니다. 어머니 믿음이 그리 크지 않았던지, 어느 날 옷장을 열어보니 옷장 맞은편에 뭐가 붙어 있었습니다. 부적은 부적인데 기도서를 찢어서 만든 부적을 그곳에 붙여 놓으셨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자신도 모르게 버릇이 되어 버린 습관을 벗어던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 모릅니다. 어머니가 하느님과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삶대로 살면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하며 영성체와 미사참례를 하지만 예전의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여전히 갖다 붙이시는 겁니다.


 그런데 그러던 어머니께서 조금씩 바뀌시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교포사목을 위해 미국에 간다고 하니깐 어느 날 어머니께서 시장에 나가 은 목걸이를 사오셨습니다. 제가 역정 낼 것을 알지만 그래도 사가지고 오셨다고 하시며 이 목걸이를 어머니라고 생각하고 꼭 하고 다니라고 그러셨습니다. 어머니께서 아들을 보내며 아쉬움과 그리움에 대한 사랑과 정이라 생각하여 미국에 와서 한동안 열심히 하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여름엔 그 목걸이가 옷 속에서 훤히 비쳐서 빼놓았는데 그 사실을 깜빡 잊고 한국에 볼일이 있어 목걸이를 잊은 채 그대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어머니께서 그거 왜 안 하고 다니느냐고 물으시기에 무거워서 풀어놓았다고 말했습니다. 어머니는 당신하고의 관계를 항상 생각하라고 그런 마음으로 해주신 것인데 그걸 떼놓았으니 많이 서운해 하시는 눈치였습니다. 어머니께서는 돌아가실 때 꼭 제 품 안에서 떠나고 싶다고 하십니다. 그러시면서 미국에 잘 다녀오라고, 제가 임기가 끝나는 5년 후 한국에 들어오면 그때 당신을 하느님께서 데려가실 것 같으시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래서 제가 한국에 안 들어가려고 합니다. 어쨌든 사람마다 자기도 모르게 삶에 젖어 알게 모르게 하는 미신적인 행위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떼어놔야 합니다. 그것을 떼어 내지 못하고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면 구원은 (     )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면 확실하게 믿어야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줘야 합니다. 그래야 거기에서 구원이 완성됩니다. 오늘 시작하면서 성경구절을  몇 가지 읽었습니다. 육적인 것, 영적인 것 구별해서 영적인 것을 확실히 선택하시길 바랍니다. 한 가지 더 읽겠습니다.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 주님의 말씀이다. 하늘이 땅 위에 드높이 있듯이 내 길은 너희 길 위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 위에 드높이 있다.”(이사55,8-9) 우리가 인간적인 생각을 한다면 순간적으로 기쁘고 달콤한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바라보면 지금 당장은 어렵고 힘이 듭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를 통해서 영원한 생명과 구원이 주어진다는 것을 잊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제가 나눠 드린 상본에 대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네덜란드의 화가 렘브란트가 그린 《돌아온 탕자》라는 작품입니다. 아버지의 눈을 한번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아버지의 눈이 사팔뜨기가 되어 있습니다. 작은아들이 집을 나갔지만, 아버지의 마음은 항상 집 나간 작은아들에게 가 있었습니다. 그 마음을 사팔뜨기로 표현했습니다. 저는 그게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작은아들이 자기가 받을 재산의 몫을 아버지께 달라고 하고는 돈을 들고 집을 나갔습니다. 아들이 달라니까 아버지가 다 줬습니다. 아들을 너무나 사랑한 아버지는 집을 떠날 수 있는 자유까지도 그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마음은 늘 작은아들에게 가 있었습니다. 매일같이 아들이 돌아올 그 길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눈이 짓물러 사팔뜨기가 되어 초점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작은아들이 아버지한테서 받은 유산을 가지고 객지로 떠돌며 사창가에서 모두 탕진하고 돼지먹이로 끼니를 때우다 굶어 죽게 생겼으니 고향에 돌아옵니다.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게 되었으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종으로라도 써주십시오.”하는 마음으로 아버지 집으로 돌아갑니다. 아버지의 큰사랑을 기억하기에 집으로 돌아갈 마음을 먹게 된 것입니다. 바로 그 따뜻한 품과 사랑을 아버지의 양 손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손을 보면 두 손이 서로 다릅니다. 아들을 감싸 안고 있는 아버지의 손이 서로 다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왼손은 힘줄이 두드러진 남자의 손이고 오른쪽 손은 매끈한 여자의 손임을 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강함과 어머니의 부드러움을 이 손을 통해 말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루카복음 15장의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생각할 때 아버지의 큰사랑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작은 아들의 회개는 아버지의 큰사랑 때문에 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큰아들은 아버지와 늘 함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큰아들이 마침 일하러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큰아들이 집에 함께 들어왔다는 기록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나가서 큰아들에게 “네 동생이 살아왔는데 축하해줘야 하지 않느냐?” “ 내 것이 모두 네 것이 아니냐?”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달래서 큰아들을 집안으로 들이려 했지만 큰아들이 집에 들어왔다는 이야기가 기록에 없습니다. 그것은 구원의 문은 항상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지만, 아버지가 손을 내밀고 늘 들어오라고 하지만, 자기가 안 들어오겠다면 어쩔 수 없다는 것입니다. 큰아들은 열심히 일하고 모든 정성을 다해서 아버지가 원하는 것을 모두 행했지만 마음은 거기에 없었습니다.


 집 나간 사람은 큰아들입니까? 작은아들입니까?  큰아들, 작은아들 모두 집을 나갔습니다. 큰아들은 비록 몸은 아버지 곁에 있 었지만, 마음은 거기 있지 않았습니다. 큰아들은 몸은 같이 있었지만 마음은 떠나 있었기 때문에 큰아들도 집을 나간 것입니다. 구원의 문은 모두에게 열려 있지만 결코 아무나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나를 온전히 맡길 때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 그리고 인간의 응답과 협력이 있어야 구원이 완성된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루카복음 묵상할 때 작은아들에게 초점을 맞추라고 하지만, 우리는 우선으로 아버지의 큰 사랑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 큰아들은 집에 있었지만 결국 집을 나갔다는 것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하느님 아버지, 오늘 예수님 통한 구원에 대해서 잠시 묵상했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당신의 자비와 사랑에 온전히 맡기고 당신께서 허락하시는 구원의 길로 우리가 한발 다가갈 수 있도록 저희를 인도해 주소서. 당신 친히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셨듯이 우리에게 여러 가지 어려움들 그것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고자 한다는 것을 우리가 깊이 받아들이게 하소서. 전능하신 주님, 당신이 저희의 삶의 모두임을 저희가 인정하고 당신으로 말미암아 모두가 구원받는 그리고 모든 이가 구원받을 수 있도록 도구로 쓰임 받는 저희가 될 수 있도록 강복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제 3 가르침 : “예수님을 통한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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