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계로 본 광복 70년…GDP 3만1천배 이상 불어났다
송고시간 | 2015/08/10 10:52
평균 가구원 수 1952년 5.4명 → 2010년 2.7명
10만 명당 자살 1983년 8.7명 → 2013년 28.5명
(세종=연합뉴스) 우리나라 국민 1인당 총소득(GNI)이 근 70년 만에 420배가량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수출액은 전 세계 수출 총액의 3.1%를 차지하며 세계 6위 규모로 올라섰다.
자동차도 1946년 1천대에서 지난해 1천575만대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통계청이 10일 발간한 '통계로 본 광복 70년 한국사회의 변화' 책자에 따르면 한국 사회는 해방 이후 지금까지 질적, 양적 측면에서 그야말로 상전벽해를 겪었다.
광복 이후 70년간 '한강의 기적'을 이루는 등 최빈국에서 선진국 진입 단계에 이르는 천지개벽의 역사를 쓴 것이다. 그러나 자살률이 1983년 10만 명당 8.7명에서 2013년 28.5명으로 증가하는 등 그늘도 커졌다.
◇ 명목 국내총생산(GDP) 477억원→1천485조원…3만1천 배 '폭풍 성장'
광복 이후 한국 경제는 최근까지 고도성장을 거듭했다.
명목 국내총생산(GDP)은 1953년 477억원에서 2014년 1천485조원으로 3만1천배 이상 증가하면서 세계 13위로 올라섰다. 1인당 GNI(국민총소득)는 같은 기간 67달러에서 2만8천180달러로 420배가량 증가했다. 중앙정부, 지방정부, 기금을 합친 일반 정부의 GDP 대비 총지출 규모도 1970년에는 20%에서 지난해 32%로 증가했다. 조세부담률은 1953년 5.6%에서 2013년 17.9%로 올라갔다.
1964년 1억 달러에 불과했던 수출은 지난해 5천727억 달러로 세계 6위 수출국으로 올라섰다. 수출품은 19060년대에는 철광석, 1970년에에는 섬유류, 1980년대에는 의류가 1위였다가 1992년부터 반도체가 1위로 올라섰다.
경상수지는 1990년대 중반까지 적자 기조를 보이다가 1998년 이후부터 흑자 기조로 전환됐다. 외환보유액도 지난해 말 3천636억 달러로 외환위기이던 1997년 204억 달러보다 18배나 증가했다.
산업 구조도 격변했다.
1953년 48.2%이던 농림어업 비중은 지난해 2.3%로 감소했다. 이 과정에서 중화학공업육성정책으로 자동차는 세계 5위, 선박 건조량은 세계 2위, 철강 생산량은 세계 6위에 달하는 등 제조업 비중이 지난해 30.3%에 달했다. 서비스업은 1980년대 이후 비중이 크게 증가하면서 지난해 59.4%를 차지했다. 외횐위기를 맞은 1997년 말 396.3%에 달했던 제조업 부채비율은 2013년 92.9%로 대폭 줄었다
남성 경제활동참가율은 1963∼2014년 78.4%에서 73.7%로 감소한 반면에 여성 경제활동참가율은 37.0%에서 51.1%로 증가했다. 제조업 월평균 근로시간은 1970년 232시간에서 지난해 186.7시간으로 감소했다. 노동조합 조직률은 1977년 25.4%에서 2013년 10.3%로 줄어들었다. 1인당 명목 개인처분 가능소득은 1975년 22만9천원에서 지난해 1천66만원으로 증가했다.
구매력평가(PPP) 기준으로 환산한 2013년 1인당 개인처분가능소득은 2만1천402 달러로 미국의 49% 정도였다.
소득불평등 정도를 보여주는 지니계수는 1990년 0.266에서 2010년 0.315로 악화됐다가 지난해 0.308로 개선추세로 돌아섰다.
소비자물가는 2014년이 1965년보다 36배 높았다.
◇ 승용차 1천대→1천575만대, 대학생 3만→213만명
사회부분의 각종 지표에서도 비약적인 성장세가 나타났다.
2010년 인구주택총조사에서 한국의 총인구(내국인)는 1949년 2천17만명보다 2.4배 늘어난 약 4천799만명으로 나타났다. 외국인 숫자는 2013년 158만명에 달했는데 이는 1948년 2만명에 비해 79배 증가한 것이다.
한편 전체 인구에 대해 65세 이상 고령인구의 비중이 1990년 5.0%에서 2010년 11.3%로 높아졌고, 출생아수와 합계출산율은 2005년 각각 43만5천명과 1.08로 역사상 가장 낮은 수준을 기록하는 등 '저출산·고령화' 문제가 심화하고 있다.
평균 가구원 수는 1952년 5.4명이었던 것이 핵가족화와 1인가구 증가로 2010년에는 절반 수준인 2.7명을 기록했다.
인구 1천명당 혼인건수인 조혼인율은 1970년 0.4건에서 2014년 2.3건으로 늘었다.
1970년 61.9세에 그쳤던 기대수명은 44년이 지난 2014년 81.8세로 약 20세가 늘었다.
인구 1천명당 의사 수는 1949년 0.22명에서 2013년 2.18명으로, 의료기관 수는 1955년 5천542곳에서 2012년 5만9천519곳으로 모두 10배가량 증가했다.
1965년 대비 2013년 17세 남자의 평균 키와 몸무게는 각각 9.5㎝, 13.9㎏ 늘었다. 같은 나이 여자는 3.9㎝, 5㎏ 늘었다. 학생 수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특히 대학생 수가 1952년 3만명에서 2014년 213만명으로 대폭 증가했다.
해외관광이 크게 늘면서 1988년 처음 10억달러를 넘은 내국인 여행경비는 2014년 현재 200억달러에 근접하고 있다.
1955년 불과 2만9천명이 가입했던 유선전화는 2012년 4천764만명으로 거의 1인당 1대꼴이다. 이동전화 서비스 가입자는 1982년 300명에서 매년 폭발적으로 늘어 2012년에는 전체 인구보다 많은 5천235만명이 됐다. 1946년 약 1천대에 불과하던 승용차 등록대수는 지난해 총 1천575만대로 폭발적인 증가를 보였다.
광복 직전인 1944년 총 도로연장은 2만5천㎞였지만 2005년에는 10만600여㎞에 달했다.
인구 100만명당 도로 교통사고 사망자 수는 1990년 288명에서 2013년 101명 정도로 떨어졌지만, 여전히 OECD 주요 국가들 가운데에선 높은 수준이다.
자살률은 1983년 인구 10만 명당 8.7명에서 2013년 28.5명으로 증가했다.
여성 국회의원비율은 1948년 초대국회 당시 1명에서 현재 47명으로 늘었다.
환경 부문에서 한국 주요 도시의 미세먼지는 2000년대 중반 이후까지 대기오염 환경기준을 초과했으나, 2012년부터는 대부분 환경기준을 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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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Z 사고 당시에도 전우애·기강은 빛났다…TOD 영상에 '또렷'
2015/08/10 10:30



국방부는 DMZ 폭발사고 원인 규명을 위한 합동조사단 조사 결과 사고 현장에서 수거한 폭발 잔해물이 북한군의 목함지뢰와 일치한 것으로 분석했다고 10일 발표했다.
합동조사단은 국방부 전비태세검열단 부단장 안영호 준장을 단장으로 해 총 24명으로 구성됐으며 지난 6~7일 현장 조사를 벌였다.
사고 지점은 북한 GP(비무장지대 소초)에서 남쪽으로 930m, 군사분계선(MDL)으로부터 남쪽으로 440m, 우리 군 GOP(일반전초)로부터 북쪽으로 2km 지점이다.
북한군이 DMZ 안의 MDL을 440m나 남쪽으로 넘어와 목함지뢰를 매설했다고 군은 설명했다. 목함지뢰는 소나무로 만든 상자에 폭약과 기폭장치를 넣어 만든 일종의 대인지뢰로, 살상 반경은 최대 2m에 이른다.
안 준장은 "폭발물은 북한군이 사용하는 목함지뢰가 확실하다"며 "우리 작전병력을 해칠 목적으로 적이 의도적으로 지뢰를 매설한 것이 확실하다"고 밝혔다.
특히 그는 "사고 지점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내리막 경사지이고, GP 인근 추진철책을 설치할 당시 통문(폭 1.5m)의 남쪽 지역은 지뢰제거를 완료했다"면서 "지난달 22일에도 사고 지점에서 정상적으로 작전했고 폭발물 잔해 분석 결과 유실된 목함지뢰일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말했다.
목함지뢰 매설 시기는 해당 지역에 지난달 24일부터 26일까지 150㎜ 호우가 내렸고, 북한군 GP 병력이 같은 달 25일 교대한 것으로 미뤄 지난달 26일부터 지난 1일 사이일 가능성이 크다고 군은 추정했다.
DMZ에서 북한군이 매설한 지뢰에 의한 사고는 1966년~1967년 사이 드러난 것만 여섯 차례 있었으며 이번에 48년 만에 발생했다. 유엔사 군사정전위원회 측도 이를 심각한 정전위반 사례로 평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안 준장은 "수거한 철재 잔해물이 녹슬거나 부식된 것이 없고 소나무로 만든 목함 파편에도 부식 흔적이 없을뿐더러 강한 송진 냄새가 난다"면서 "오래전에 매설됐던 것이 아니라 최근에 매설된 것으로 평가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상단과 하단부에 2개의 자물쇠로 채워진 통문의 아래쪽에 두 팔을 넣을 수 있는 공간이 형성되어 있었다"면서 "통문을 열지 않고도 통문 북쪽에서 남쪽으로 지뢰를 매설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목함지뢰는 지난 4일 오전 7시35분과 40분에 GP 인근 추진철책의 통문 하단 북쪽 40㎝(1차), 남쪽 25㎝(2차) 지점에서 각각 폭발했다.
당시 김모(23) 하사가 통문을 먼저 통과했고 하모(21) 하사가 두 번째로 통과하다가 지뢰를 밟아 우측 무릎 위, 좌측 무릎 아래 다리가 절단됐다.
김 하사는 사고를 당한 하 하사를 통문 밖으로 끌고 나오다가 자신도 통문 남쪽에 묻힌 지뢰를 밟아 우측 발목이 절단됐다.
군은 하 하사가 다친 지점의 1차 폭발 구덩이가 2차 폭발 구덩이보다 크기 때문에 북한군이 통문 북쪽에 목함지뢰 2발을, 남쪽에 1발을 각각 묻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북한의 목함지뢰 매설 의도와 관련, 탈북자 단체의 대북 전단 살포에 대한 보복 또는 이번 달 실시되는 을지프리덤가디언(UFG) 연습을 방해하거나 도발 주체를 놓고 남남 갈등을 유도할 목적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합참의 한 관계자는 "도발 주체를 모호하게 만들어 UFG 연습을 앞두고 남남 갈등을 일으키고 정상 실시를 방해할 목적도 있는 것 같다"면서 "남남갈등을 유발해 안보와 국방태세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고강도가 아닌 손쉬운 도발 방법을 선택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고 말했다.
합참은 북한군 소행으로 판단되자 각 군 작전사령부에 대비 태세 강화 지시를 하달하고 DMZ의 다른 통문과 작전도로에 지뢰가 매설됐을 가능성에 대비해 주의 지침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군 특이 징후를 사전에 포착하고도 이에 대비하지 못한 것 아니냐는 지적에 대해 합참의 한 고위 관계자는 "현장에서 지뢰나 부비트랩, 매복조 등에 대비해 필요한 조치를 더 했어야 했다"면서 "현장 지휘관의 전술조치에 과오가 있었다. 송구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작년 말부터 북한군이 DMZ 일대에 지뢰를 매설하는 특이 동향이 포착됐는데도 국방부와 합참에서 적절한 대응지침을 일선 부대에 하달하지 않은 채 사건만 터지면 일선부대와 현장 지휘관에게 책임을 돌리는 태도는 무책임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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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파주=연합뉴스) 김귀근 이영재 기자 = 지난 4일 북한군 목함지뢰에 의한 폭발사고 당시 우리 군 비무장지대(DMZ) 수색대대 장병이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전우애를 발휘한 모습이 군 감시장비에 고스란히 담겼다.
사고 당시 열상감시장비(TOD)로 촬영된 영상을 보면 수색대원들은 전우 2명이 잇달아 쓰러진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후송작전을 펼쳤다. 후송을 하면서도 엎드려 자세로 북한군 공격에 대비하는 장면도 또렷하게 나타났다.
군은 지난 9일 사고 현장을 방문한 언론에 TOD로 찍은 생생한 영상을 공개했다.
군에 따르면 부사관 2명이 북한이 매설한 목함지뢰를 밟아 폭발한 순간 직후부터 수색분대장 정교성 중사와 수색대대 박선일 주임원사가 사고 현장을 지휘했다. 당시 현장에는 8명이 있었다.
수색대대 최고선임인 박 원사는 이번 수색 작전에 동반했다. 대대 주임원사는 정기적으로 수색 작전에 동반한다고 한다.
지난 4일 오전 7시35분, 추진철책 통문을 열고 두 번째로 진입한 하모 하사가 목함지뢰를 밟아 사고가 나자 정 중사가 주저없이 통문 북쪽으로 뛰어들었다.
1사단 수색대대에 7년째 근무한 정 중사는 그간 410여회 수색작전 경험이 있는 베테랑이다. 그는 폭발 충격으로 상체가 추진철책 철조망에 걸린 하 하사를 지혈하면서 "내가 경계할 테니 빨리 후송하라"며 전우들을 다그쳤다.
정 중사는 올해부터 전방 GOP(일반전초) 사단에 보급된 응급처치키트를 열어 지혈했다.
통문 남쪽에 있던 의무병 박모 상병이 오른발은 통문 북쪽에, 왼발은 통문 남쪽에 두고 서서 응급 지혈을 마치고 정 중사가 부축해 나오는 하 하사를 맞았다.
이때 통문 남쪽에 있던 박 원사가 통문으로 이동했고 3명이 힘을 모아 하 하사를 통문 남쪽으로 끌어냈다.
박 원사는 1사단 수색대대에서 병 생활부터 25년째 근무한 박 원사는 DMZ 작전에 700여회 이상 참여했다.
박 원사와 의무병이 좌·우측에서 하 하사 상체를 부축하고 뒤쪽에서 하체를 손으로 받쳐 나오던 김모 하사가 또 지뢰를 밟았다. 폭발 충격으로 3명 모두 쓰러지면서 잠시 정신을 잃었다.
적으로부터 공격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한 나머지 장병은 모두 포복 자세를 취했다. 다치지 않은 장병은 포복자세로 통문 남쪽 경사진 둔덕으로 이동해 휴대한 총기를 북쪽으로 겨냥했다.
이 과정에서 쓰러진 김 하사를 장병들이 낮은 자세로 끌고 나오는 장면이 TOD에 찍혔다.
인근 GP에서 출발한 병력 6명이 들것을 들고 도착했다. 이어 1분 후 4명이 추가로 들것을 가지고 도착해 후송 작전이 시작됐다. 1차 폭발 15분 만인 오전 7시50분에 환자를 들 것에 싣고 응급헬기장으로 향했다.
나머지 병력은 전투 대형을 갖추고 후방을 경계하며 오전 8시에 현장에서 철수하고 상황은 종료됐다.
합참의 한 고위 관계자는 "상당히 긴박한 상황이었지만 한 명도 어디에 숨었거나 소극적으로 작전에 임한 인원 없이 전우를 구출하려고 노력했다"면서 "열심히 훈련했고 사명감으로 작전에 임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