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 삼림장의 경치 (백두산에서 약 5km 정도 내려오는 길에 원시림 지대)
중국천주교회 순방기 (4)
♣ 중국천주교의 동향
일반적으로 우리 한국 신자들이 중국 천주교회에 대한 인식은 중국 교회는 바티칸과 신앙적 교류가 두절된 중국 독자적인 교회라고 인식 하고 있다. 그래서 중국 교회를 이질시하고 중국교회와 접촉을 갖는 것은 무위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현지를 가보면 어떠한가? 중국교회는 겉보기엔 우리교회(정통의 교회)와 다른 것은 전혀 발견 할 수 없다, 우리와 똑같은 교회의 모습으로 전례와 기도, 계명의 준수 등을 이행 하고 있다. 더욱이 최근 들어 중국 교회는 많은 변화가 이뤄져, 6년 전 내가 중국을 처음 방문 했을 때 분위기와는 달랐다. 어딘지 모르게 거리감이나 긴장감 등이 사라지고 지금은 그 같은 분위기는 별로 찾아 볼 수 없었다. 이번 방문 시 그들은 우리의 방문을 환대하고, 대화를 나누려는 접근성을 보여주었다. 뿐만 아니라 우리와 만난 신부님 신자들은 한결같이 한국교회와 친교를 원했고, 한국교회의 도움으로 자기들의 교회가 쇄신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원했다. 이러한 동향은 나로 하여금 퍽 의아스럽고 혼란스러움을 주었다. 중국의 종교 정책이 바뀐 것 일가? 그렇지는 않는 것 같다. 다만 그들의 경직성이 많이 완화 되고 있는 듯 했다, 중국교회에 대한 깊은 지식이 없는 내가 일시 방문하여 느낀 현황을 속단 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귀국 후 나는 이를 석연하게 정리하고 싶어. 명동에 있는 바오로 서원에 가서 중국 천주교에 관한 참고 서적을 찾아보았다. 마침 『 하나인가, 둘인가? 중국천주교회의 미래-장춘선신부 지음 』과 『 중국 천주교회사-서양자 지음』의 참고서적을 찾아 구해 보았다. 저자 장춘선(장쑤우센) 신부님은 로마 우르바노 대학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취득 후 대만의 보인(輔仁)대학에서 교의신학을 가르치며 가톨릭과 개신교 신학계에서 널리 알려진 신학자이다. 서양자씨는 대만 대학 유학중 중국천주교회에 관하여 다년간 연구 했고, 종교에 관한 여러 책자를 저술했으며 현재 수원대학 강사로 재직 중인 학자이다. 이 두 분의 책을 정독 하면서 새로운 식견을 얻게 되었고, 방문 시 보고 느꼈던 내 견해를 비교 연상 하며 중국교회에 관한 새로운 지식을 정리 할 수가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중국 교회에 관하여 간략 하게 기술 해 보겠다. 먼저 공산 정권하에 중국교회의 변천과정을 살펴본다.
본계에서 약 30km정도 가면 약 3km를 배를 타고 가면서 석류동굴울 구경한다. 그 앞 경치
♣ 공산치하 수난과정
● 1949년 10월 1일 공산 정권인 중화 인민 공화국이 창건 되었다. 마르코스, 엥겔스, 레닌, 모택동주의 의 공산정권은 종교의 존립을 수용할 수가 없었다. 이들은 모두 유물사관에 뿌리를 둔 무신론주의자로 천주교는 자본주의 제국주의 의 선봉자로 보고 반듯이 추방 되어야 할 존재로 보았다. 모든 종교 중 천주교는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국제적인 여론을 의식한 나머지 천주교를 금하는 것이 아니라 멸(滅)하려는 정책을 폈다.
● 1950년 6월 15일 한국 전쟁의 발발로 중공이 개입하자 이곳저곳에 잠재해 있던 반혁명 분자들과 반공 게릴라들의 활동이 격화되었다. 공산당들은 천주교인들이 반공선전을 하고 인민정부의 전복을 꾀하려 한다는 구실로 위기감을 조성하여 교회 내에 반혁명세력을 색출하고 소위 三自革新敎會 라는 것을 추진해 나갔다 삼자 혁신 교회란 自養(경제적으로 자립),自傳(복음을 중국인 자신의 힘으로 전파), 自治(중국교회는 자율적으로 다스림)를 말한다, 중국은 오랫동안 외국인 주교들이 교회를 이끌어 왔으므로 중국인들에게 전통적인 식민지 교회 인상을 짙게 풍겼다. 공산당들은 교회의 이런 모순을 이용 하였으며 중국인의 排外心理를 교묘히 이용했다. 이때를 분수령으로 중국 교회는 바티칸과 소원해지기 시작 하였다. 북경성당에는 붉은 오성기가 나부끼고 교회입구에는 비난벽보가 붙었다.
●중공은 순교자를 내지 않기 위하여 반혁명세력이니, 스파이 활동을 했다느니 죄명을 씌어 학살하였다. 1950년에서 1951년까지 12개월간 반혁명죄로 체포 살해된 사람이 100만정도 되는데 천주교교우가 상당수 차지하였다. 대륙 천주교는 1951년 하반기부터 통일된 지도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 1951년 8월 교회 내에 중국 공산당의 정책에 편승 하거나 사주를 받은 일부 사제와 신자들은 북경에모여 천주교 혁신 위원회를 구성했다. 이들은 북당 추기주교관에 교황사진을 떼고 혁신회 간판을 걸다
이때부터 혁신위원회는 삼자운동의 기치를 내걸고 반제 애국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 하였다, 이때부터 중국교회는 사실상 분열되어 혁신회의 성직자, 신자와 이를 거부하는 신자들이 생겼으며 이를 거부 하는 신자들은 혁신회에 가담하지 않고 혁신회 간판이 붙어 있으면 미사에 참석지 않았고 혁신회 신부의 강론도 듣지 않으려 했다. 이때 교우들은 80%가 냉담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 1955년 말경에는 대륙의 거의 모든 교회가 중공정부의 손에 들어갔다. 중국은 많은 천주교 성직자나 신자들을 감옥에 구금하여 감옥안의 공장에서 가혹한 노동을 시켰고, 사상개조 될 가능성이 없는 사람은 한밤중에 처형 했다. 또 勞改營(사상노동개조 수용소)이라는 수용소로 보냈는데. 이는 노동을 통해 사상을 개조 한답시고 반혁명 지식분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하였는데,,수많은 성직자, 신자들이 이 수용소에 끌려가 노동을 하며 고통스런 생활을 했다. 이 무렵 동북지방에서 사목을 하던 우리나라 신부도 애국교회를 거부한다는 죄로 체포되어 수용소에 끌려가 노동을 하였다.
압록강 건너 북한의 신의주가 보인다
♣ 애국교회와 지하교회
● 1957년 8월 3일 중국 당국의 회유책에 동조하는 일부 성직자와 신자들로 주동이 되어 중국 천주교는 하나의 애국조직으로 사회주의 길을 걷게 되었고 공식적으로 바티칸 교황청과 단절을 선언하고 중공 공산당의 감독을 받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애국교회의 모체인 것이다.
● 중국은 주교가 대부분이 외국인 이였으며 중국인 주교도 감옥에 감금되어 있는 상태이므로 공석이 많았다. 중국 당국의 지시를 따른 전국 천주교 대표자 회의(애국회원이 주류를 이룸) 에서는 自選 自聖을 해야 한다고 주교 선출을 하기로 했다. 그래서 사회주의를 열애하고 그들의 혁명사상을 동조하는 요광유 신부를 주교로 선출하고 선거결과를 교황청에 알렸으나 교황청은 이를 승인 하지 않았다.
● 중국 당국은 애국교회에 가입한 신부를 “진보신부”라 하였고 애국교회에 가입한 교우를 “진보 교우”라 하였다. 중국당국은 교우들에게 공산정책을 학습시키고 성직자들에게 애국이론을 학습시켰는데, 이 학습회에서 우파 성직자와 좌파 성직자, 우파 교우와 좌파 교우가 드러나게 되었으며, 당국은 우파를 비판하는 이들을 색출하여 애국교회에 가입 하도록 압력을 넣었다, 이에 불응하는 교우는 처벌하였다. 애국교회에 가입하지 않은 성직자와 교우들은 은밀히 지하교회인 가정교회를 이루어 비밀리에 신앙을 이어 갔다.
● 1966년은 문화 대 혁명이 일어났다. 동기는 모택동, 임표등 일파가 반대파인 온건파 유소기 등소평등을 몰아내기 위하여 문화정풍운동이라는 미명으로 청소년으로 조직된 홍위병을 앞세워 반대세력을 일소하고, 독재정치체제를 수립한 정치 혁명이다. 이때에 교회는 애국교회나 지하교회가 다 박해를 받았으며, 교회가 거의 문을 닫았다. 홍위병의 연령은 20세 미만으로 반혁명분자들을 끌고 다니며 살해 했다. 이때 많은 성직자와 교우들이 갖은 수모를 당했고. 사상노동 개조 수용소로 끌려갔고 살해되기도 했다. 홍위병들은 교회와 성상 등을 파괴했고, 성서는 모두 수집하여 불질러버렸다. 신부들 중엔 타의로 혹은 자의로 결혼한 신부가 생겼다.
● 1976년 모택동이 서세하고 4인방(강청, 왕홍문, 장춘교, 요문원)이 체포되면서 끝이나고등소평의 영향력이 득세하기 시작했다. 등소평은 먼저 과거 30년 동안 교회를 박해함으로서 받았던 국제적인 비난을 면하기 위해서 교회를 개방했다.
● 개방 후 중국의 종교정책은 “종교의 자유” 라 하여 종교 활동이 자유스러운 것처럼 표현하지만 이는 중국식 종교자유요 사회주의에 바탕을 둔 종교의 자유이다. 그래서 당국의 압력과 억압이 완전히 풀린 것은 아니다. 단계적으로 안화 되어 가고 있을 뿐이다.
신의주(좌편) 와 중국 단동(우편) 을 연결하는 조중 압녹강 신철교
다음 계속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