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 잡게 하여라

2014. 1. 30. 오전 6:53:36

글자

 

자리 잡게 하여라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곳에는 풀이 많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자리를 잡았는데,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 되었다.(요한 6,10)

 

네 복음서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다. 요한복음에서는 기적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내적 - 외적 동기를 더 잘 발견할 수 있다.

 

외적 동기는 보잘것없는 것을 내놓는 것에서 일어났다. 곧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지만 그것을 주님께 내놓을 때 그분이 불려주신다는 것이다.

이는 빵을 양적으로 불린 동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기적 이야기의 내적 동기, 곧 질적인 동기는 '자리를 잡아 앉혀주는' 행위에 있는 것 같다.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베풀기 전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곳에는 풀이 많았는데 사람들이 풀 위에 자리를 잡자 예수님께서는 비로소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나누어 주셨다. 사실 그곳이 풀밭이든 길바닥이든 돌밭이든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또 서거나 앉거나 엉거주춤 바위에 걸터앉아 있거나 그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하지만 굶주리고 허기진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내주는 자리에서도 예수님은 그들을 아무렇게나 다루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곧 풀밭이라는 안락한 곳으로 그들을 안내하고 편안한 자세로 자리 잡게 한 다음 오십 명씩, 백 명씩 팀을 짜서 질서 정연하게 음식을 나누어 주신 것이다.

 

무의탁 노인들을 돌보는 시설에 있는 친구 수녀님은 전화할 때마다 미사다 기도다 회의다 출장이다 해서 연락이 안 되는 것은 다반사고 겨우 통화가 되어도 얼른 안부만 묻고 끊어야 한다. 바쁜 일정에 공연히 방해될까 싶어서다.

 

수녀님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삼시 세 끼 수발은 물론 세탁 수발과 매일 혈압을 체크하고 투약과 간병 등 건강 수발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환절기나 동절기, 무더위가 극심한 하절기, 아니 일년 열두 달 수시로 긴급사태에 대비해야 한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사는 것 같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원래 늘 배고프고 편찮으신 분들이니 그분들한테는 적당히 하시고, 수녀님이나 건강 챙기세요." 아토피와 건선, 여름에도 긴 소매 속으로 다닥다닥 보이던 땀띠로 고생하는 수녀님이 안쓰러워 공연한 어깃장을 부리며 전화를 끊는다. 가끔 그곳을 찾아갈 때면 노인들을 지극정성으로 돌보는 수녀님들을 만난다. 우리 집보다 더 정갈한 반찬과 더 깨끗한 시설이 나를 부끄럽게 한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평안하고 밝은 웃음 소리를 들으면서 그 모두가 그분들의 희생과 노고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고맙기 그지없다.

 

풀밭에 편안하게 자리를 잡게 한 후 베푼다는 것은 바로 그런 보살핌을 말하는 것이다. 얻어먹는 사람이니 아무것이나, 아무렇게나 주는 것이 아니다. 무의탁 노인, 버려진 아이들이라고 추위와 배고픔만 피해도 다행이라는 마음으로 도와주는 것이 아니다. 못 먹고 못 입고 못 배운 사람들이니 쓰다 남은 것으로도 감지덕지하라는 마음으로 나누는 것이 아니다. 나눌 때 어떤 마음 어떤 자세로 나누어야 하는지를 오천 명의 굶주린 사람들을 풀밭에 '모시고' 있는 예수님의 자세에서 배운다. 그야말로 지극정성을 다해 그들을 돌보아 주시지 않는가. 그러니 어찌 풍요로운 기적이 일어나지 않겠는가.

 

오천 명이 배불리 먹었다는 것은 양적 포만감만 뜻하는 것이 아니다. 따듯하고 귀하게 대접받았다는 데 더 배가 불렀을 것이다. 사실 아무리 양이 많아도 배가 고플 수 있고, 양이 적어도 배부를 수 있는 것이 사람이다.

 

그날 기적의 시혜자인 오천 명은 그 어떤 잔치 자리에서도 경험하지 못한 영적 - 육적인 만족을 누린 것이다. 그러니까 그날의 이야깃거리는 열두 광주리에 채우고도 남을 만큼 두고두고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해 내려온 것이다.

 

 

-주님의 향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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