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열을 넘어선 평화
몇 해 전에 아버지, 동생 둘과 전남 순천에서 서울 집까지 함께 내 차로 올라온
적이 있습니다.
약 5시간의 이 여정에서 가장 힘들어했던 사람은 아버지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과거에 아버지로 인해서 받았던 상처들을 동생들이 하나씩 꺼내놓으며
어렸을 적에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꺼내놓았기 때문입니다.
서로의 입장과 생각을 강한 어조로 이야기하다가 결국에는 아버지가 '미안하다'
라고 하시며 어렵게 인정하면서 일단락되었습니다.
운전을 하고 있던 저는 '우리 가족에게 자신들의 속마음을 내놓는 좋은 시간도
생기는구나!' 라고 하며 내심 기뻐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분열되어 있는 듯 보이는 이 시간동안 동생들은 과거의 상처들을
열어놓고 치료하는 시간이었고, 아버지는 자신이 몰랐던 자녀들의 상처들을
들여다보고 용서를 청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도 사람과의 관계에서 이런 시간이 필요했나 봅니다.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이지만 실재로는 진심 어린 사랑의 관계가 부족하고 이기적인
자아로 가득 찬 사람들의 마음에 예수님을 보내어 화끈한 성령의 불을 놓아야 했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느님의 뜻과 계명보다는 적당히 자신이 살고 싶은
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오로지 당신 뜻대로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는 성령의
불을 놓아야만 했습니다.
이런 고난의 과정이 있어야 관계 회복이 가능합니다.
사람들의 회개를 이끌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흠 없는 희생제물이
필요했고 예수님은 그것을 행하러 이 땅에 온 것입니다.
과거의 삶을 청산하고 새로운 하느님의 사람으로 거듭나는 세례를 베풀려고
예수님은 자신이 그것을 먼저 받았으며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 그것을 완성했습니다.
이로써 하느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령께서 할 일은 다 하셨습니다.
이제 사람들이 할 일이 생긴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따를 것이냐?
아니면 자신이 살던 대로 살 것이냐? 예수님을 따를 사람들과 기존의 삶을 쫓아가는
사람들 사이에 분열은 하느님이 주시는 참된 평화를 이룩하는 데 필요한 과정입니다.
한국 사회는 학연·혈연·지연 등으로 연결되어 하나의 끈을 형성합니다.
이러한 끈에 연결되면 문제의식 없이 그 그룹에 매여서 자신의 소리를 못내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비복음적인 사회적 경향에 대해서 외치는 소리가 되어야 합니다.
자신이 속한 그룹에서 소외됨과 분열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참된 평화를 이룩하기
위한 그리스도인의 소리를 내는 것이 필요합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
-윤종식 티모테오 신부(가톨릭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