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 15일(다해) 성모 승천 대축일
오늘 전례
오늘은 '하느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께서 지상 생애를 마치신 다음 하늘로 불려
올라가셨다는 신앙 교의에 따라 성모님의 승천을 기리는 의무 축일이다.
성모님의 승천은 성경에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초대 교회 때부터 내려오는 전승에 따른
것이다.
1950년 비오 12세 교황은 성모 승천의 신비를 '믿을 교리'로 선포하였다.
성모 승천은 그리스도 안에서 산 모든 사람이 누리게 될 구원의 영광을 미리 보여 주는
'위로와 희망의 표지'이다.
하느님께서는 성자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하늘로 불러올리셨습니다.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신 하느님 안에서 우리도 기뻐하며,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승천으로 우리에게 희망을 주신 하느님을 찬미합시다.
입당송 | 묵시 12,1
하늘에 큰 표징이 나타났네.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 별로 된 관을 쓴 여인이 나타났네.
제1독서 |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둔 여인. 묵시 11,19ㄱ; 12,1-6ㄱㄷ.10ㄱㄴㄷ
화 답 송 | 시편 45(44),10.11.12.16(◎ 10ㄷㄹ)
◎ 오피르 황금으로 단장한 왕비, 당신 오른쪽에 서 있나이다.
○당신 사랑을 받는 여인들 가운데, 제왕의 딸들이 있고,
오피르 황금으로 단장한 왕비, 당신 오른쪽에 서 있나이다. ◎
○들어라, 딸아, 보고 네 귀를 기울여라. 네 백성,
네 아버지 집안을 잊어버려라. ◎
○임금님이 너의 미모에 사로잡히시리라.
임금님은 너의 주인이시니, 그분 앞에 엎드려라. ◎
○기쁨과 즐거움에 이끌려, 임금님 궁전으로 들어가는구나. ◎
제2독서 | 맏물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다음은 그리스도께 속한 이들입니다.
1코린 15,20-27ㄱ
복음환호송 |
◎ 알렐루야.
○ 성모 마리아 하늘로 오르시니 천사들의 무리가 기뻐하네. ◎
복 음 |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습니다.
루카 1,39-56
영성체송 | 루카 1,49.48 참조
전능하신 분이 나에게 큰일을 하셨으니, 모든 세대가 나를 복되다 하리라.
감사송
(영광스러운 마리아의 승천)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오늘 하늘에 오르신 분, 하느님을 낳으신 동정 마리아께서는
완성될 주님 교회의 시작이며 모상으로서
이 세상 나그넷길에 있는 주님의 백성에게
확실한 희망과 위안을 보증해 주셨나이다.
모든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의 아드님께서
동정 마리아의 몸에서 사람이 되시어 이 세상에 태어나셨기에
주님께서는 마리아의 몸이 무덤에서 썩지 않도록 섭리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저희도 천사들의 무리와 함께 주님을 찬미하며
기쁨에 넘쳐 큰 소리로 노래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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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성모승천 대축일 메시지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5)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은 성모 승천 대축일입니다.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하늘로
불러올리셔서 우리들에게 희망을 주신 하느님을 찬미합시다.
또한 분단국인 우리나라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분단의 상처와 아픔을 극복하고 화해와
평화 통일을 이루어 온 겨레가 함께 하느님을 찬미하는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기원합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성경에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초대 교회 때부터 내려오는 전승이며
1950년 비오 12세 교황은 성모 승천의 신비를 '믿을 교리'로 선포하였습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실하게 산 모든 사람이 누리게 될 구원의 영광을
미리 보여 주는 '위로와 희망의 표지'가 됩니다.
성모 마리아는 온 생애 동안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속 깊이 새기며 실천한 참된
신앙인의 모범입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는
위대한 신앙고백으로 하느님의 인류 구원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협력자가 되셨습니다.
교회가 성모 마리아께 '교회의 어머니, 신앙의 어머니'로 특별한 존경을 드리는 것은
무엇보다 그분의 크신 신앙으로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의 승천은 우리 모든 신앙인에게도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다는 희망을 선사한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닙니다.
성모 승천 대축일인 오늘은 우리나라가 일본의 압제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되찾은
광복절이기도 합니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해방 후 6.25전쟁으로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을 겪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가난과 고통의 시절을 지내면서도 그 세대 모든 분들의 노력과 희생으로
세계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단기간에 경제 성장과 민주화를 이룩했습니다.
빠른 발전은 많은 장점도 있었지만 동시에 사회의 부작용도 함께 겪어야 했습니다.
좋은 전통적인 관습은 점차 사라지고 극심한 물질주의와 이기주의가 만연하며 생명경시
풍조 팽배와 빈익빈 부익부의 현상은 더욱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디지털 환경의 발전으로 하나의 지구촌이 되어 전 세계
수많은 나라 사람들이 서로 간에 예전에는 생각도 못 한 지대한 영향력을 주고받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국가 간에 전쟁이 계속되어 하나의 지구촌이 된 세계 공동체가 함께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은 양국 국민들에게는 물론이려니와,
전 세계의 경제와 생활에 커다란 악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전쟁은 이유를 불문하고 가장 큰 악행으로 평화를 깨뜨리고 많은 사람들을 죽음과 죄악과
폭력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또한 두 해가 넘게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코로나 팬데믹 현상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위협하고 경제적 어려움과 지속적인 고통을 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위기의 상황에서 교회는 성모님을 모범 삼아, 험하고 힘든 세상에 사랑의 다리를
놓아야 하며, 교회 자신이 다리가 되어야 합니다.
'교황님'을 뜻하는 라틴어 단어가 '폰티픽스'(Pontifix)인데, 이 표현은 '다리'(Pons)와
'만들다'(fare)라는 단어의 합성어로서 그 어원이 '다리를 놓는 사람'이란 뜻을 지니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성모 승천 대축일을 맞으며 세 가지 점을 함께 새기고 싶습니다.
첫째, 교회는 지루한 팬데믹 현상으로 느슨해진 신자들의 믿음의 삶에, 하느님께로
다가가는 신앙의 다리 역할을 더욱 충실하게 해야 하겠습니다.
성모님은 이 순간에도 한 사람이라도 하느님의 나라로 인도하기 위해 끊임없이 주님께
전구하고 계십니다.
교회는 초심으로 돌아가 초대교회에서 그 방법과 해답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초대교회가 복음을 살며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했는지를 잘 묵상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둘째, 교회가 적극적으로 나서 실제적인 나눔과 도움을 주고받도록 하는 사랑의 다리가
되어야 합니다.
공동선을 지향하는 국가와 각종 단체, 개인들을 도와, 나눔이 필요한 이들을 적극적으로
연결시키는 사랑과 나눔의 다리가 되어야 합니다.
서로를 연결시키고 만나게 할 때, 더욱 깊은 상호 이해와 통교가 가능할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과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누는 사랑의 나눔은 모든 인간이 하나로 일치하는
인류 가족이 되길 바라셨던 예수님의 뜻에 바탕을 둔 것입니다.
고통을 당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베푸는 것은, 세상이 아무리 죄악과 증오와 폭력으로
물들었다 하더라도 여전히 빛나는, 그래서 더욱 소중한 사랑의 나눔입니다.
셋째, 교회는 사회의 갈라진 마음을 치유하고 상대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통합의 다리가
되어야 합니다.
사회의 구성원은 각자 정치적 견해가 다르고, 사회적 지위가 다르다 하더라도, 서로 적대적인
존재가 아니라 함께 공존하는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점을 존중해야 합니다.
이러한 존중은 연대성의 가치를 깊이 알게 해서, 우리는 서로 연결된 존재이며, 동시에
연결될 수밖에 없는 공동운명체의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도 함께 존중하고 공존해야 하며,
서로의 잘못을 용서하고, 서로 도움이 필요한 우리 모두가 부족한 사람들이라는 겸손함을
지닐 때, 나와 다른 상대방을 더욱 존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와 신자들 모두 험하고 고통스러운 이 세상에 ‘신앙의 다리, 사랑의 다리,
통합의 다리’가 되어 세계와 국가, 사회가 겪고 있는 많은 문제와 어려움들을 교회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의 도우심으로 지혜롭게 극복할 수 있게 기도합시다.
성모님께서 우리를 진리와 지혜의 길로 인도하시며 도와주실 것입니다.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천주교 서울대교구장•평양교구장 서리 정순택 대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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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48.49)
성모님의 기도를 마음에 담아 봅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하셨던
어머니의 기쁨이 제 마음에도 차오르길 청하고, 그 기도가 제 입에도 담기길 희망해
봅니다.
두 손 모아 기도하던 그 모습 그대로 하늘로 들어 올림 받으셨던 성모님처럼,
언젠가 저도 하느님 곁에서 그분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게 되길 간절히 바라봅니다.
그러한 희망으로 오늘도 성모님께 깊은 상경지례(上敬之禮)를 올립니다.
-사진 설명:이스라엘, 복되신 동정 마리아 방문성당:김문숙 요셉피나 | 가톨릭사진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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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될 주님 교회의 시작이며 모상"이신 마리아
오늘은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하늘로 불러올리신 사건을 기념하는 성모 승천
대축일입니다.
지상 생활을 마치신 성모님께서는 무덤의 부패를 겪지 않고 하느님 나라의 영광에
참여하도록 하늘로 불러올림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성모님께서 하늘로 올려지심(Assumptio)은 미래 모든 그리스도인이 누리게 될
종말론적 희망이자 그에 대한 보증입니다.
오늘 성모님의 대축일을 지내며 어머니 마리아의 모습을 다시금 기억하고 싶습니다.
1. 경청의 모범이신 마리아
우리가 복음에서 처음 만나는 성모님은 가브리엘 천사의 인사를 받던 나자렛
소녀였습니다.
천사와 마리아의 만남에서 첫 말문을 연 것은 가브리엘이었습니다.
평범한 일상에 들이닥친 놀라운 신비 앞에서 마리아는 마치 침묵하듯 천사가 먼저 말하기를
기다렸습니다.
놀라 소리를 지르거나 겁먹고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이 소녀는 천사의 말을 기다렸고, 그 인사말을 경청하였습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
하지만 놀라운 천사의 인사말이 마리아에게는 선뜻 이해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마리아는 무척 인상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1,29).
마리아의 반응은 되묻는 게 아니었고, 거부하는 것은 더욱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 어머니는 그 시작에서부터 '잘 듣는 사람'
'들은 바를 가슴에 깊이 간직하고 곰곰이 생각하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는 바로 그리스도인이 하느님 앞에서 지녀야 할 자세이기도 합니다.
베들레헴 목자들의 말을 들었을 때(2,19 참조)도,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수님을
되찾았을 때(2,51 참조)도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신 성모님은 경청하는 신앙인의
모습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십니다.
2. 듣는 것은 모든 이가 실천해야 할 과제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이웃들의 이야기도 잘 들을 수 있습니다.
듣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자신의 태도와 습관과 관련된 것이기에 일관성을 갖습니다.
곧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는 것과 이웃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그 이상으로 상대의 말을 알아듣는 것의 중요성을
깨닫고 이를 배워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이웃이나 본당공동체, 더 나아가 사회 안에서 생각과 의견이 달라 생기는 갈등들은 상대방을
존중하며 용기 있게 대화를 나눔으로써 풀릴 수 있습니다.
서로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마음에 간직하며 성령께서 들려주시는 말씀을 기다리는 훈련을
거듭할 때, 우리 안의 분열이 극복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실천이 없다면 우리 삶은 조금도 개선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의 삶을 돌이켜 볼 때, 하느님과 이웃의 목소리를 듣는 일에서도 이렇게 해온 것은
아니었는지 반성해봅니다.
만일 그렇다면, 들음의 모범을 보여주신 성모님을 닮도록 노력하는 일이 더욱 필요하겠습니다.
3. 시노달리타스(Synodalitas)의 지속과 활성화를 위하여 경청과 관련해서, 우리는 상반기에
소중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세계주교시노드 경청모임을 실시한 것입니다.
우리 교구에서는 5,500명이 넘는 신자가 참여하여 2,000회가 넘는 경청모임이 열렸습니다.
참여해주신 모든 형제자매님과, 본당공동체, 각 위원회 그리고 사도직 단체에 다시 한번 깊이
감사드립니다.
세계주교시노드 초반, 일부에서는 경청모임이 시노드에 형식적으로 참여하는 단발성 이벤트로
여겨지거나, 여러 건의사항을 모으는 작업 정도로만 인식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경청모임을 통해 많은 교우가 하느님 성령과 이웃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위로를 받고 나아갈 길을 찾는 역동적 체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가장 소중한 결실은 성령과 이웃들 안에서 ‘교회의 주인공’이 되는 경험을 한 것입니다.
이는 단지 자기주장을 관철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서로에게 귀를 기울이며 성령께서 이끄시는
바를 함께 찾고자 했던 노력의 열매입니다.
이러한 경청모임이 교회의 본질을 구현하는 신앙 활동으로서 앞으로도 꾸준히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작게는 구역반 모임 또는 사도직 단체에서부터 본당 사목평의회와 본당공동체 전체 차원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실시되기를 희망합니다.
지금까지 모여진 하느님 백성의 목소리를 반영할 방안을 본당 또는 공동체 차원에서 모색하는
일은 물론, 특히 본당에서는 매해 사목계획을 수립할 때 경청모임을 다시 한번 적극적으로
활용해보기를 권고합니다.
교구 차원에서도 그동안 모여진 목소리를 실질적으로 반영하고 시노달리타스를 계속 실현하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이에 "의정부교구 시노달리타스 위원회"를 새롭게 출범하겠습니다.
이 위원회는 본당, 지구, 교구 차원에서 시노달리타스가 우리 교회 삶과 사명의 본질이 되도록
도움을 주는 동반자 역할을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의정부교구 형제자매 여러분,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 깊이 품은 나자렛의 작은
소녀는 훗날 교회의 가장 뛰어난 모범이 되었습니다.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 후 나온 응답에는 짧지만 강렬한 힘이 있었고, 이로써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다리가 놓이게 되었습니다.
마리아께서는 오늘 하늘의 오르심을 통해 그 다리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십니다.
하느님 나라를 향한 나그넷길에서 '바다의 별'로 빛나시는 성모님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안내자가 되십니다.
여러분 모두, 그분의 모습을 닮아 주님의 말씀과 그 뜻을 깊이 품고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 공동체 차원에서 시노달리타스를 살아가는 의정부교구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성모님을 하늘로 불러주신 예수님께 찬미와 흠숭을 드리며, 여러분과 가정에 주님의 축복을
전합니다.
-2022년 성모 승천 대축일 의정부교구장 이기헌 베드로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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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에서 만나는 성경 말씀:벳자타 못과 안식일 논쟁
제가 예루살렘에서 살 때 가장 적응하기 어려웠던 건 '집에 갇혀 심심한' 안식일이었습니다.
유다인들과 같이 살아서 안식일 아침에는 찬 음식을 먹고, 전기와 가스는 자동 타이머가
들어오는 시간에만 쓸 수 있었습니다.
버스도 끊기고 상점도 죄다 닫아 독서와 산책 말고는 할 게 없었지요.
나중에는 집에서 푹 쉰다며 나름 위안할 만큼 발전했지만, 안식일을 지키려 가방도 들지 않는
유다인들을 보면서 벳자타 못에서 일어난 안식일 논쟁도 떠올리곤 하였습니다.
벳자타 못은 예수님께서 오랜 병자를 낫게 하신 곳입니다(요한 5,1-18). 하필 그날이 안식일이라
논쟁이 벌어졌지요.
벳자타 못은 정결 예식터였습니다. 유다인들이 성전에 들어가기 전, 몸과 봉헌 제물을 씻던
저수지입니다.
성전 주변에는 이런 예식터가 여럿 있었는데, 실로암(요한 9,7)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벳자타 못은 기원전 8세기에 처음 만들어진 걸로 추정됩니다.
이후 기원전 200년에 대사제 시몬이 물 공급량을 늘리려고 저수지를 하나 더 만들어 두 개가
됩니다.
요한 5,2에서 벳자타 못은 주랑 다섯 채가 딸린 곳으로 묘사됩니다.
곧 주랑 다섯 채가 저수지 둘을 감싸는 ‘해 일’(日)자 모양인데, 예루살렘 성 북동쪽의
"양 문"(2절) 바깥에 있었습니다.
양 문은 제물로 쓸 양을 성전에 데려갈 때 통과한 문이라 붙여진 이름인데요, 그 전에 양을
벳자타에서 정결하게 씻었습니다.
주랑 아래에는 못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물이 출렁거리기를 기다렸다고 합니다.
천사들이 내려와 물을 저어주는 거라고 여겨(공동번역 참조) 치유 효과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오랜 병자를 보시고 "건강해지고 싶으냐?"(6절)하고 물으십니다.
'물이 출렁일 때 자기를 넣어주는 사람이 없다.'고 그가 답하자 예수님은
"네 들 것을 들고 걸어가거라."(10절)는 말씀으로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유다인들이 이를 알고 예수님을 박해합니다(16절).
여기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신 게 문제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은 '들 것을 들고 걸어가게 하신 것'이 문제였습니다(10절).
중병인 경우에는 치료 행위가 율법에 저촉되지 않았습니다.
안식일에 짐을 나르면 안 된다는 규정이 예레 17,21-22에 나오기 때문에, 이를 고려하면
유다인들은 당연한 반응을 보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금령에는 숨은 뜻이 있었습니다.
노동하는 백성이나 종에게는 안식일이 은혜로운 날이지만, 그들을 부리는 부유층에게는
환영받는 날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안식일 파기는 부유층의 욕심 탓에 일어났을 공산이 크므로, 안식일에 짐 나르는
행위는 약자 착취에 해당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배경을 염두에 두면, 벳자타 못 가의 병자가 들 것을 나름으로써 율법을 어겼다는 것은
너무 편협한 해석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좋은 일은 해도 된다"(마태 12,12)고 선언하시며 형식주의에 따른
안식일을 개혁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안식일이 이런 가르침을 전해줍니다.
바로 창조 때부터 세상의 모든 피조물에게 선물처럼 주어진 날이므로 너무 일에만 매달리지
말고 정기적으로 영육간의 휴식을 취해 창조주 하느님의 현존을 되새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김명숙 소피아 (의정부교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