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의 단체사
전교회 (傳敎會)
方相根(석문 가롤로) / <한국교회사연구소-‘교회와 역사’제314호 수록>
1. 설립과 발전
전교회는 1816년 마리 폴랭 자리코(P. Jarico, 1799~1862년)에 의해 프랑스 리옹에서 시작되었다. 그녀는 당시 신앙을 모르던 수많은 사람들과 그러한 영혼들을 구하기 위하여 외교 지방으로 나가 자신의 일생을 희생하면서까지 봉사 활동을 펼치는 선교사들에게 깊은 감명을 받고, 선교 사업을 돕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외교인들의 교화를 위해 하느님께 기도하고, 선교 신부들을 위하여 헌금하는 모임을 결성하게 된 것이다.
처음 10명을 단위로 조직된 이 모임의 회원들은 매일 선교를 위한 기도를 바치고, 매주 선교를 위해 헌금을 하였으며 또한 같은 일을 할 새로운 모임을 계속해서 조직해 나갔다. 그 결과 이 모임은 1822년 5월 3일‘전교회’라는 정식 단체로 발족하게 되었고 이듬해 교황 비오 7세로부터 인준을 받았다. 당시 리옹에 본부를 두고 있던 전교회는 각지의 회원들로부터 수합된 회비를 선교 지역에 보냄으로써 천주교의 선교 활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나아가 프랑스의 다른 교구는 물론, 유럽 제국과 아메리카 대륙으로까지 확대되어 갔다. 그런 가운데 창립 100주년이 되던 1922년 5월 3일, 교황 비오 11세는 이 단체에 보다 넓은 영역과 보다 보편적인 성격을 부여하기 위하여 교황청립 기구로 삼아 포교성성(지금의 인류 복음화성)에 소속시켰다. 이로서 전교회는 선교 원조를 위한 교회의 공식 기구가 되었으며, 본부도 리옹에서 로마로 옮겨졌다. 그리고 1926년 4월 14일에는 신자들의 선교열을 고취시키고 전교회 회원의 모집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10월 마지막 전 주일을 세계 전교 주일로 제정하게 되었다. 이후 세계 각지로 확대되어 간 전교회는 2000년 12월 현재 10년 국에 지부가 설치되어 있다.
2. 전교회의 회칙
전교회는 선교 사업을 위하여 매일 기도하고, 매일 일용비를 조금씩 절약하여 선교 사업을 도와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때 수납된 회비는 선교사들의 선교 비용과 각처에 성당과 학교를 건립하는 데 쓰이게 된다. 이 회에 들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신부에게 품청하여 그 성명을 회책(會冊)에 기록한 뒤 본회의 목적을 위하여 매일 <천주경>·<성모경>·<성 방지거 사베리오, 우리를 위하여 빌으소서>를 각 한 번 외우며, 본회의 목적을 위하여 매년 일정한 금액(1원)을 납부하면 된다. 이렇게 하여 회원이 된 자가 본회에서 정한 날에 고해 영성체하고 교황의 뜻대로 기도하면 전대사와 한 대사의 특전을 얻을 수 있다.
오늘날에도 전교회 회원의 의무는 성실한 신자 생활로 이웃 선교에 힘쓰며, 선교 지역 선교사들을 위해 전교회 기도문을 날마다 바치고 정해진 회비를 내는 것으로 규정되어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회원들은 선교 지역 신자들과 선교사들이 바치는 미사와 기도와 희생의 은혜를 받을 수 있게 된다.
3. 한국의 전교회
1) 박해 시대
한국 교회에 있어, 전교회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신부가 1857년 9월 14일 로즈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이다. 즉 여기서 최양업 신부는 1년 동안의 활동을 소개하면서, 181명의 신자를 전교회에 가입시켰다고 하였다. 이어 베르뇌(S.F. Berneux, 張敬一)주교는 1857년 11월 23일 자신의 활동 사항을 전교회 이사회에 보고하였으며, 1856년 중국 광동에 표류하였다가 입교한 제주 사람 고 씨(高氏)도 전교회 회원이었다고 한다.
이상의 기록에서 볼 때, 한국에 전교회 회원이 생겨난 것은 1857년 이전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전교회가 파리 외방 전교회의 활동을 후원하였고, 또 파리 외방전교회에서 한국 선교를 담당하였다는 점에서, 전교회의 존재는 1836년 프랑스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할 때부터 한국에 알려졌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한국의 전교회 회원은 1836∼1857년 사이에 처음으로 생겨났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박해 중에 있고, 경제적으로도 열악한 환경에 있던 조선의 신자들이 전교회에 가입했다는 사실이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전교회 회원의 의무는 기도뿐만 아니라 일정한 회비를 납부해야 하는데, 비록 적은 금액일지라도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에서 이것은 신자들에게 적지 않은 부담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양업 신부가 1년 동안 181명의 전교회 회원을 모집한 것은 조선 신자들의 나눔의 정신을 잘 보여 주는 것이며, 그만큼 당시의 신자들이 신앙적으로 철저했음을 말해 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2) 신앙의 자유기∼일제 시대
1876년 한일수호조약으로 문호가 개방되었고, 또한 1882년 이후 구미 제국과 조약을 체결하면서 천주교회에 대한 공식적인 박해는 끝났다. 특히 한불조약(1886년)이후 한국 교회는 신앙의 자유 단계에 들어섰고, 이를 계기로 활발한 전교 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그 결과 1887년에는 《한국 교회 지도서》(Coutumier de la Mission de Cor e)를 만드는 등 점차 교회 조직의 틀도 형성해 갔다. 그런데 이 《한국 교회 지도서》에는 여러 신심 단체들과 함께 전교회에 대한 내용도 소개되어 있다. 이것은 박해 시대 이래의 전통을 토대로, 한국 교회에서 전교회를 상당히 중요시했음을 말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1882년 이후의 교세 통계표에 서울·경기 지역을 비롯하여 전국에서 거들어들인 전교회 회비의 납부 상황이 기록되어 있는 것은, 전교회 회원이 박해 시대 이래 꾸준히 존재해 왔음을 보여 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일제 시대에 들어와서도 전교회는 꾸준히 활동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1915년 9월에 나온 《경향잡지》333호에는 전교회를 소개하면서, 신자들이 전교회에 들어 전교 활동에 힘쓸 것을 권고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조선 교회의 회원은 그리 많은 편이 아니었다. 이후 《경향잡지》에 소개된 통계를 보면, 1920년에는 549명, 1923년에 601명, 1928년에 400명, 1930∼1931년에는 400여 명이었고, 1인당, 1원씩 거두니 모인 회비도 400∼600여 원에 불과하였다. 이에 반하여 한국 교회는 전교회로부터 5∼8만원의 보조비를 받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1932년에 들어서면서 한국 교회는 전교회의 활동을 좀더 강화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1931년에 열린‘전 조선 주교 회의’(前朝鮮主敎會議)의 결정에 따른 것으로, 이때 결정된 사항들은 교황의 재가를 얻어 이듬해 9월 26일부터 시행하게 되어 있었다. 이 회의의 결정 사항 중 전교회와 관련해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전교 주일의 시행이었다. 즉 1932년까지 한국 교회의 첨례표에는 전교 주일을 기록하지 않았고, 신자들에게 반포하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1931년에 개최된‘주교 회의’에서 10월 마지막 전 주일이 전교 주일을 첨례표에 기록하고, 신자들로 하여금 특별히 기도하도록 결정하였다. 그러면서 1932년부터 전교 주일을 지키되, 첨례표에는 이듬해부터 기록하도록 하였고, 서울교구 부감목 비에모(P.Villemot, 禹一模) 주교를 조선 전교회의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이후 조선의 주교들은 전교회의 내용을 《전 조선 성교회 법규》에 수록하였을 뿐만 아니라(67∼68조), 전교 주일에 즈음해서는 통첩이나 특별 훈시의 형태로 전교회의 가입을 적극 장려하였고, 《경향잡지》도 사설을 통해 전교회의 가입을 권면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1933년 이후 전교회에 가입하는 신자들이 상당히 증가하게 되었다. 에를 들어 약현(藥峴, 현 중림동) 본당의 경우 1933년 전교회 입회자가 150여명이었는데, 이듬해에는 170명, 1937년에는 287명으로 크게 신장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특히 1935년에는 70여명의 소년과 50여 명의 소녀들까지 전교회에 가입함으로써 전교회에 대한 조선의 관심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3) 광복 이후∼현재
전교회에 대한 한국 교회의 관심은 1945년 광복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1949년 4월 5∼8일에 열린‘전 조선 주교 회의’에서, 한국 교회의 모든 감목들은 "전교회 회비는 매인당 1년에 100원, 단 아동들은 1년에 20원 이상으로 개정하여 금년부터 실시한다."고 결정하였다. 그만큼 한국 교회가 전교회에 커다란 관심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한편 전교회는 같은 교황청립 기구인 교황청 베드로 사도회(Pontifical Society of St. Peter Apostle), 교황청 어린이 전교회(Pontifical Missionary Society of the Holy Childhood), 교황청 전교 연맹(Pontifical Missionary Union)과 함께 교황청 전교 원조회에 속해 있다. 이 4개 기구는 그 창립 시기와 창립자가 달라 각기 독자적인 기구로 발전 되어 왔으나, 교황청에서는 1929년이래 그 조정의 필요성을 검토한 끝에, 사목적 필요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이들 사업의 총괄적인 통합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을 교황청 전교 원조회 산하에 소속시킴으로써 하나의 단일 기구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각각의 사업은 그 주체성을 보존하고, 그 고유한 목적을 추구하면서 고유의 규정을 소유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한국 교회에서도 1957년 무렵 교황청 전교 원조회 한국 지부를 처음으로 조직하였으며, 1960년에는 포교성성에서 전교회의 한국 지부장에 파디(J. Parady, 巴智) 주교(당시 청주교구장 겸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총재)를 임명했다. 그러나 이 사업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다가 1965년에 수원교구장 윤공희(尹恭熙, 빅토리노) 주교가 지부장에 임명된 후 다시 활기를 띠게 되었고, 1972년에는 한국의 전교회 회원이 2만여 명에 달하는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 교회는 전교회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후 한국의 전교회는 1980년 6월 2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인준한 ‘교황청 전교 원조회 정관’에 따라, 좀더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발전을 모색하고 있으며, 모든 신자들의 선교 의식 고취와 선교 사업 후원을 증진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00년 12월 현재 한국의 전교회 회원은 7,257명이다.
첨부파일: 전교회역사.hwp(35K)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