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사업의 수호자(성 프란치스꼬 하비에르)

2001. 3. 15. 오후 2:04:54

글자

성 프란치스꼬 하비에르』(1506-1552)

 

    동양에 복음을 전한 선교사 중에 가장 유명한 분은 두말할 것 없이 성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일 것이다. 그는 1506년 4월 7일에 스페인의 나바라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불행이 당시 스페인 국내에는 전란과 기타 재화가 계속되어 가정은 차차 쇠퇴되었으나 양친은 프란치스코를 파리에 보내어 대학에서 고등지식을 연마케 하였다. 그때, 같은 대학에 성 이냐시오가 이었다. 이냐시오는 프란치스코와 파베르라는 학생과 같이 지냈는데, 그때부터 새로운 수도회를 창설하고자 유능하고 경건한 동료를 물색하던 중 프란치스코에 착안하고, 하루는 "사람이 온 천하를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는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습까?"(마태 16,26)하신 성경 말씀을 들어 그의 속을 떠보았다.  

 

    프란치스꼬는 그 말을 다만 일소에 붙일 뿐 이었다. 그러나 후에 심사숙고한 끝에 그 말씀 속에는 참으로 엄숙한 진리가 들어있음을 깨닫고, 마침내 1533년 이냐시오에게 지도를 청하고 그를 영신의 아버지로까지 부르게 되었다. 그들은 또한 네명의 동지를 얻어 6명이 새로운 수도회 예수회를 조직하고 8월 15일의 성모승천 축일의 경사스러운 날을 택하여 몽 마르뜨르 성당에서 청빈과 정결의 서원을 바치고 팔레스띠나 순례를 기약하였다. 어느날 인도인을 안고 가다가 너무 무거워 넘어진 꿈을 꾸었다. 이를 이상히 생각하여 돌료에게 이야기하였는데, 얼마후 그 꿈의 실현을 보게 되었다. 즉 1537년 6월 24일 하비에르가 신부가 된후 포르투갈의 국왕은 그 나라 식민지인 인도에 예수회 선교사를 파견하도록 이냐시오에게 요청하였으므로 두 명의 형제를 보내기로 하였는데, 그중 한 명이 신병으로 눕게 되어 하비에르가 그 임무를 대신 맡게 된 것이다.

 

    프란치스꼬는 인도령 고아에 도착하자 곧 활동을 개시하였다. 그시민들은 도덕상으로 매우 한심스러울 뿐 아니라, 풍속마저 저속하여 갖은 죄악을 범하고도 보통으로 여기며 부끄러워할 줄 몰랐다. 수개월이 경과하자 모든 것이 현저하게 개선되어 갔다. 성인의 교훈과 그의 실천궁행에는 아무도 항변하는 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란치스꼬가 인도에 온 것은 그런 신자들을 위해서 보다 오히려 진리의 빛을 받지 못한 이들을 위해서 였다. 그는 매일같이 열렬한 활동을 하면서도 극기 고행의 생활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거의 매일 대재를 지키고 가끔 철야 기도를 하였다. 하느님께서도 그의 이 거룩한 생활을 기꺼이 여기시어 보수로 천상적 위로와 환희를 주시었다.

 

    그는 사또미 한지로오라는 일본일을 만났다. 프란치스꼬는 그에게 교리를 가르치어 성세를 주었다. 또한 그 사람 입에서 일본은 아름다운 나라요 주민들을 모두 선량하다는 말을 듣고 그 나라로 향할 생각이 간절하였다. 그래서 당시 고아에 파견되어 있던 포르투갈 국왕의 대리인 총독의 허락을 받고 1549년 6월 24일에 일본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어려운 고비를 거듭한 항해를 마치고 프란치스꼬가 가고시마에 도착한 것은 그해 8월 15일이며 일본의 수도에서 전교하기 위하여 난관을 무릅쓰고 교오또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당시 오오닌이래의 내란으로 아무 열매도 거두지 못하고 돌아서게 되었다.

  

    프란치스꼬는 1551년 11월 일찍이 일본을 떠났다. 그의 체류기간은 짧았으나 일본의 사도임에는 재언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는 일본에 들어온 최초의 신부였고, 일본에 최초로 교회를 설립한 공로자인 것이다.

 

     그는 후에 중국에 전교하려고 광뚱 근처에 있는 산첸섬에 이르러, 거기에 체류하며 대륙에 들어갈 교통편을 찾던 중 잠시 한 명의 중국인과 말라바르인인 한 신자와 셋이 어느 초막에서 구차한 생활을 하며 대기하였다. 그러나 그곳에서 병을 얻어 죽음을 앞두고 4일 동안 고투하면서  항상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며 단 한마디의 불평도 입밖에 내지 않았다. "다윗의 후예 예수여! 나를 불쌍하게 여기소서" 이 기도를 최후로 46세의 나이에 성스러운 생애의 막을 내리었다. 유해는 고아에 이송된 뒤 오늘에 이르까지 조금도 부패되지 않아 얼굴이 산 사람과 같다 한다. 그의 시성식은 1622년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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