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하느님은 악을 그냥 놔두실까?
이뻐서는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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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 글입니다.
하느님의 섭리와 악의 존재
●선과 악에 대한 문제는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교리들 중의 하나이다. 하느님은 이 세상과 온 우주 만물을 질서 있고 선한 세계로 창조하셨다. 하느님께서 지혜와 섭리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만물에는 질서가 있으며 하느님의 선하신 의도로 태어난 피조물은 하느님으로부터 선을 나누어 받고 있다. 하느님께서 질서 있고 선한 세계를 창조하셨다면, 악은 어디서 왔으며 왜 존재하는 것일까? 이것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의문거리이기도 하다. 이 질문은 오늘날 여러 가지 고통과 비인간적인 상황, 인권이 유린되는 현장에서는 더욱 절박한 문제로 다가온다. 하느님은 인간의 자유를 소중히 여기시기에 인간이 자유를 잘못 사용하여 저지른 악을 허용하신다. 하지만 악을 그대로 방치하지 아니하시고 악에서도 선을 이끌어 내신다.●
선과 악에 대한 문제는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교리들 중의 하나이다. 하느님은 이 세상과 온 우주 만물을 질서 있고 선한 세계로 창조하셨다. 하느님께서 지혜와 섭리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만물에는 질서가 있으며 하느님의 선하신 의도로 태어난 피조물은 하느님으로부터 선을 나누어 받고 있다.
창세기에는 하느님께서 사물을 만드실 때마다 ''보시니 좋았다''라는 표현이 매번 반복되어 나온다. 특히 인간의 창조 때에는 ''매우 좋았다''고 하였다(창세 1, 4. 10. 12. 18. 21. 31).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존재로서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고 알아듣고 그 뜻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리고 하느님은 인간에게 온 우주 만물을 선물로 주시며 그것을 다스리고 관리하도록 인간에게 맡기셨다(창세 1, 26-28).
하느님은 당신 섭리로써 온 우주 만물을 그 존재의 궁극적인 목적인 완전한 상태에 도달하도록 이끄신다. 인간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만물을 자유로이 다스릴 책임을 갖고 있으므로 "하느님의 협력자"(1고린 3, 9; 1데살 3, 2)가 되며 하느님 나라를 위해 일할 때 선한 행동이 된다.
1. 하느님의 섭리와 악의 존재
하느님께서 질서 있고 선한 세계를 창조하셨다면, 악은 어디서 왔으며 왜 존재하는 것일까? 이것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의문거리이기도 하다. 이 질문은 오늘날 여러 가지 고통과 비인간적인 상황, 인권이 유린되는 현장에서는 더욱 절박한 문제로 다가온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이것을 세 가지 구조로 조명한다. 즉 창조의 선성, 죄의 비극, 인내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이다.1)
(1) 창조의 선성: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당신 섭리로 ''선하고 좋은 것''을 창조하셨기에 창조된 모든 것은 하느님의 선성(善性)을 갖고 있다. 그리고 하느님의 선한 의도가 있기에 피조물 각각의 존재들이 나름대로 하느님의 섭리 질서 안에서 가치를 갖는다. 하느님은 이처럼 선을 창조하셨기에 악의 원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2) 죄의 비극: 하느님께서 정하신 질서와 조화를 깨뜨린 것은 자유로운 지능을 가진 천사들이 타락하여 인간을 죄로 유인한 원죄로부터 모든 죄의 비극이 시작되었다. 죄의 유혹에 빠진 인간은 그 결과를 감수해야 했기에 죄의 비극이 있게 되었다. 그 결과 인간은 죄, 악, 죽음의 고통에 놓여 있게 되었다.
(3) 인내하시는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죄의 상태에 불행하게 놓아 두지 않으시고, 하느님 은총의 도움을 힘입어 죄를 피하고 악을 극복할 수 있도록 사랑으로 이끄신다. 그러한 인류 구원 계획을 가지고 하느님께서는 인간과 계약을 맺으시고, 당신이 사랑하는 아드님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어 구원 사업을 하게 하셨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청에 의하여 성령이 파견되어 교회와 인간을 거룩하게 하시며, 하느님 말씀을 따르는 이들을 한데 모이게 하여 교회를 형성하였으며, 교회 내에 성사들을 제정하시어 은총을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인간들이 자신의 자유 의지로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고 따르게 함으로써 구원으로 이끄시는 것이다.
2. 선과 악의 공존
이 세상에는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밀과 가라지의 비유''(마태 13, 24-30)에서도 밀과 가라지는 추수 때까지 공존한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완전한 상태로 만들었다기보다 각 사물들이 자신의 본성을 가지고 보다 완전한 상태로 나아가는 ''진행의 상태''로 창조하셨다.2) 하느님의 이러한 계획에 따라 보다 더 완전한 것을 향해 가는 과정 중에 생성과 소멸, 건설과 파괴의 과정을 겪게 되며, 물리적 선과 물리적 악이 공존하게 된다.3)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들 중에 지성과 자유 의지를 가진 천사와 인간은 자유로운 선택과 더 나은 선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의 궁극적 목적을 향해 가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4)
3. 악의 허용
자유 의지를 가진 천사와 인간은 자신이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선물인 자유 의지를 가지고 하느님의 뜻과 일치하여 선을 지향해야 한다. 그러나 천사와 인간은 하느님의 뜻을 저버리고 자유로이 죄를 지을 수도 있는 것이다.
죄란 창조의 질서와 목적을 깨뜨리는 것으로서, 하느님께 대한 영광과 자신의 최종 목적인 구원을 위한 질서를 깨뜨리는 것이다. 여기에 윤리적 악이 들어오게 된다. 따라서 인간이나 천사가 타락하여 저지른 악에 대해 하느님께서 그 원인이 될 수는 없다. 다만 하느님은 당신이 만든 피조물들에게 주신 선물인 자유를 존중하여 그것을 허용하는 것이다.
구약 성서의 욥은 하느님께서도 악을 허용하시는가에 많은 의문을 가졌었다. 그러나 인간은 하느님의 섭리를 헤아리지 못하여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느님은 피조물이 저지른 악에서도 선을 이끌어 내시는 분이시다.
이 점에 대해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최상의 선이므로, 만일 악 자체에서 이끌어 내실 충분한 능력과 선하심을 가지고 계시지 않다면, 당신의 피조물들 안에 어떠한 악도 존재하도록 방치하지 않으실 것이다."5)
4. 악에서도 선을 이끌어 내시는 하느님
하느님은 인간의 자유를 소중히 여기시기에 인간이 자유를 잘못 사용하여 저지른 악을 허용하신다. 하지만 악을 그대로 방치하지 아니하시고 악에서도 선을 이끌어 내신다.
창세기에 나오는 야곱의 열두 아들 중에 요셉은 형제들의 시기와 질투로 인해 아랍 상인들에게 몸이 팔려 이집트에 노예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 속에서 요셉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지혜로 파라오의 꿈을 잘 해석하여 이집트의 재상이 된다. 그는 곡식을 잘 관리하여 지독한 흉년에도 이집트 사람과 인근 나라의 주민들까지도 살려 낼 수 있었다. 그뿐 아니라 이스라엘과 열두 아들 가족들이 이집트로 이주하여 행복하게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요셉의 형제들이 저지른 악을 통해서도 선과 행복으로 이끌어 주셨다.
이러한 관점에서 인류의 원조들이 자유로이 저지른 원죄를 통하여 하느님은 구세주를 세상에 보내시어 인류를 구원하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왜 원조들이 죄를 짓지 않도록 막지 않으셨는가 하는 의문이 있다.
이에 대해 성 대 레오 교황은 "그리스도의 형언할 수 없는 은총은 마귀가 질투로 우리에게서 빼앗아 간 것보다 더 훌륭한 것을 우리에게 주었습니다"6)라고 했으며, 성 토마스 아퀴나스도 같은 취지로 말했다. "인간이 죄를 지은 이후에도 더 높은 목적을 향하도록 운명지어졌다는 것은 불합리한 것이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더 큰 선을 이루어 나가시기 위해 악을 허락하신다. 이 때문에 성 바오로는 ''죄가 많아진 곳에 은총은 넘쳐흘렀습니다''(로마 5, 20)라고 말했으며, 부활 찬송(Exultet)은 ''오, 복된 탓이여, 너로써 위대한 구세주를 얻게 되었도다'' 하고 노래한다."7)
인류의 원조들이 저지른 죄악으로부터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최고의 선을 얻게 되었으므로, 하느님은 인간이 저지른 악을 통해서도 선을 이끌어 내신다. 원죄 이후 인간이 저지른 가장 큰 윤리적 악은 구세주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죄악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들이 저지른 죄악을 용서하시고, 그 죄악에 희생되어 죽으신 예수님을 사흘 만에 부활시키시어 구속의 은혜를 주셨으며, 그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대리하는 교회라는 또 하나의 선을 갖게 된 것이다. 이처럼 하느님은 어떠한 악에서도 선을 이끌어 내시는 분이다.
5.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 그리스도의 죄와 죽음과 악에 대한 승리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모든 죄와 악을 없애시고 인간을 선과 구원으로 이끌어 주시는 구세주이시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에게서 이러한 면을 보고 이렇게 고백하였다.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 29. 36). 세례자 요한의 선언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의 죄를 없애고 죄로 이끄는 악을 쳐부술 최후의 승리자이시다.
예수님의 등장과 함께 그때까지 지배하던 악의 세력들이 물러나고, 악으로 인해 고생하던 이들이 해방되었다. 그리스도의 승리는 악으로 인해 고생하던 이들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승리는 악으로 인해 저질러진 결과들로부터 인간을 구출하고, 그 악의 세력을 없애는 것이다. 악의 결과들은 죄와 죽음이다.
인류의 원조들이 지은 최초의 죄인 원죄는 인류에게 공통적으로 내려진 악의 경향을 말한다. 사도 바오로는 "한 사람이 죄를 지어 이 세상에 죄가 들어왔고 죄는 죽음을 불러들인 것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죽음이 온 인류에게 미치게 되었습니다"(로마 5, 12)라고 하였다. 원죄의 결과는 마치 한 나라가 전쟁에 패하여 승리한 나라의 속국이 되는 것과 같다. 원조들이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 죄를 짓게 된 것은 인류의 후손들이 모두 죄의 세력에 놓여 있음을 말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죄와 죽음과 악을 이기는 힘은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순종, 온전한 자유를 가지고 순명하는 일이며, 성령과 함께 하는 삶,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가르침을 따르는 삶이다.
사도 바오로는 "죄는 세상에 군림하여 죽음을 가져다주었지만 은총은 군림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게 하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합니다"(로마 5, 21)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러면 은총을 풍성히 받기 위하여 계속해서 죄를 짓자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로마 6, 1) 하고 반문한다.
그것은 절대로 그럴 수 없는 일이다. 사도 바오로에 의하면 세례를 받는 일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난 것이므로, 죄의 권세에서 벗어난 이상 어떻게 그대로 죄를 지며 살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로마 6, 2-8). 우리는 그리스도의 세례를 받음으로써 죄의 권세를 벗어나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육체의 욕망에 굴복하지 말고 정의의 종이 되어 거룩한 사람이 되어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누려야 한다는 것이다(로마 6, 12-22). 그러므로 "죄의 대가는 죽음이지만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영원한 생명이 된다"(로마 6, 23).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며 원죄로 잃었던 영원한 생명과 인간의 자기 완성의 은총을 그분의 구속 공로로 되찾아 주신 선과 은총의 승리자이시다.
† 성서의 가르침
·아담과 그리스도
아담의 범죄의 경우에는 그 한 사람 때문에 죽음이 군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은총의 경우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풍성한 은총을 입어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거저 얻은 사람들이 생명의 나라에서 왕 노릇할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 은총의 힘이 얼마나 더 큽니까! 그러므로 한 사람이 죄를 지어 모든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은 것과는 달리 한 사람의 올바른 행위로 모든 사람이 무죄 판결을 받고 길이 살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과는 달리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법이 생겨서 범죄는 늘어났지만 죄가 많은 곳에는 은총도 풍성하게 내렸습니다. 그래서 죄는 세상에 군림하여 죽음을 가져다주었지만 은총은 군림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게 하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합니다(로마 5, 17-21).
1) 「가톨릭 교회의 교리서」(CEC), 309항.
2) 「가톨릭 교회의 교리서」(CEC), 310항.
3) 토마스 아퀴나스, "이교도 논박" 3, 71; 「가톨릭 교회의 교리서(CEC)」 310항.
4) 「가톨릭 교회의 교리서」(CEC), 311항.
5) 아우구스티노, 「교리 요강」, "신앙과 희망과 사랑", 11, 3;
「가톨릭 교회의 교리서」(CEC), 311항.
6) 교황 대 레오,「강론」, 73, 4;「가톨릭 교회의 교리서」(CEC), 412항.
7)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 대전」 3, 1, 3, ad 3;「가톨릭 교회의 교리서」(CEC), 412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