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군보는 원래 개성(開城)의 유명한 양반 가문에서 출생했으나 벼슬을 하던
조부가 죄를 짓자 부친과 함께 상민으로 신분을 감추고 상경하여 선공감
(繕工監)에서 일하며 미천하게 살았다.
천성이 선량하고 겸허했으므로 30세경 천주교를 알게되자 곧 입교하여 유방제
신부에게 성세성사를 받았고, 그후로는 홍살문 근처에서 아내와 함께 성사를
받으러 상경하는 시골 교우들을 돌보았는데 자녀 14명을 가난과 병으로 잃어
버렸고. 자신 또한 가난과 병에 시달리면서도 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
에게 헌신적으로 봉사하고 인내와 극기의 신앙자세를 잃지 않아 모든 교우들
의 귀감이 되었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 박해가 일어나자 그해 4월 (음력 3월) 밀고되어 아내
와 함에 체포되었는데 포청에서의 형벌과 고문은 참아냈으나 형조에서는
참아내지 못하고 배교하였다.
그러나 석방되자마자 배교한 것을 뉘우치고 형조에 들어가 배교를 취소하며
다시 체포해 달라고 간청했고, 그것이 거절당하자 5월 12일 (음력 3월 그믐)
고문의 여독과 염병으로 들것에 실린 채 형조판서가 다니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형조판서에게 직접 자신을 체포해 줄 것을 요구, 그날로 체포되어
5월20일(음력 4월7일) 포청에서 곤장 25도를 맞고 이튿날 새벽에 순교했다.
그때 그의 나이 41세였다.
김 아가타는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나 전혀 신앙을 모르고 살다가 친정언니의
열심한 권면으로 늦게 천주교를 알게 되어 교리를 배웠는데 기억력이 나빠
12단(十二端)도 제대로 외우지 못했지만 하느님을 알고 믿고자 하는 열의는
대단하였다.
이렇게 열과 성을 다해 교리를 배우던 중 1836년 10월 김 아가타는 김업이
막달레나,한 아기 바르바라 등과 함께 천주교 서적을 숨긴 죄로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교리에 대한 질문에 김 아가타는 "나는 오직 예수, 마리아밖에
모릅니다"라고 신앙을 고백했고,혹형과 고문을 이겨낸 후 형조로 이송되었다.
형조에 갇혀 있던 교우들은 예수, 마리아밖에 모르는 김 아기가 왔다고 그녀를
반겨 맞아 주었다.그후 형조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김 아기는 형집행의 유예로
3년을 옥살이 한 끝에 옥중에서 대세를 받고 1839년 5월 24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니 그때 나이 53세였다.
(8, 10과 함께 체포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