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제일 갖고 싶은 마음이 다른 이의 아픔을 공감하는 것입니다. 너무 이성적으로 살기 때문에 마음이 차가워져있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신생아들은 다른 아이의 울음을 듣고 저절로 따라서 울게 됩니다. 물론 자신의 울음소리를 녹음해 두었다가 다시 들려주면 자신의 울음소리로는 울지 않습니다. 다른 이의 아픔을 느끼는 좋은 심성이 우리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라고 세상에 나와 살게 되면서부터 다른 이의 고통을 먼저 ‘동감’ 하기 보다는 ‘판단’하게 됩니다. 남의 아픔보다는 먼저 나를 찾게 됩니다. 그러면서 힘들어하는 사람을 볼 때는, ‘왜 저렇게 살까?’ 하고 판단하기도 합니다.
사랑은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상대가 ‘기쁠 때 함께 기뻐하고 슬플 때 함께 슬퍼하는 한마음’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죽고 부활하셔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 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빛이 세상에 왔지만 세상은 빛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한 마음으로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이가 아프면 어머니도 아이의 아픔을 보면서 마음이 아픈 것처럼 사랑은 같이 기뻐하게 하고 같이 아파하게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성모님께서 골고타에서 당하신 고통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누가 어머니만큼 아드님의 고통을 함께 느낄 수 있었겠습니까? 어머니는 아드님과 한 몸으로써 차원이 다를 수는 있지만 거의 같은 고통을 겪으십니다. 한 몸이 된 두 사람이 서로 다른 고통의 무게를 느낄 수는 없습니다. 같은 고통을 느낀다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마리아의 일치를 나타내주는 것입니다.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픔을 겪어야만 하신다는 의미는 바로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와 성모님이 서로 한 몸으로 일치하지 않는다면 우리 구원도 완성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자신을 ‘만지지 말라’라고 하신 것처럼 죄인인 우리들은 그리스도와의 직접적인 완전한 일치에 도달할 수는 없습니다. 성모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거룩한 삼위일체 관계에 참여할 수 있는 것처럼 교회도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 성모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와 온전한 관계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모님의 고통에 가장 근접하게 느끼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그만큼 사랑하고 있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슬퍼하고 애통해하는 것처럼 우리도 그 슬픔에 참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슬픔은 곧 기쁨으로 바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로 예수님은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지금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너희가 기뻐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