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는 어떤 사람인가?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인가?

2011. 10. 19. 오후 9:23:01

글자
사제는 어떤 사람인가?
[하나되어 다시읽기-16]
 
2011년 10월 19일 (수) 09:43:24 하나되어 .
 

<하나되어> 1990년 12월호에 살렸던 이 글의 제목은 "사제는 어떤 사람인가?"이지만, 결국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던져진 질문이기도 하다. 글 속의 '사제'를 '우리 그리스도인'으로 대치해서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편집자

   
▲예수의 삶에 매료당하여 예수님의 의지대로 살아가겠다고 결단을 내린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나자렛 사람 예수가 이 땅에 태어나서 살아간 삶을 자신의 삶과 한번이라도 대면한 사람이라면 근본적인 변화에 직면하게 된다. 예수의 인격에서 풍기는 매력에 이끌려 본 사람은 근본적으로 자신의 사고와 삶의 태도가 뒤틀려져 있음을 깨닫게 된다. 예수의 자유로움과 연민에 마음을 연 사람은 뭔가 다른 삶의 양식을 선택해야 한다는 심각한 도전을 받는다.

도대체 99마리 양을 버려두고 한 마리 양을 찾아나서는 바보가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에는 우리는 너무 똑똑하고 현명하다.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죽어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억지를 진리로 받아들이려면 우리는 굉장한 갈등과 고통을 피할 수 없다.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진정한 초월이며 구원이라는 사실을 우리의 현실에서 실천하려면 우리는 즉시 사랑할 수 없는 인간의 모습에서 좌절을 한다. 더군다나 하느님 나라가 죽은 다음의 갈 수 있는 내세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며, 사람들이 함께 더불어 사는 그 곳에서부터 시작한다는 역설을 깨닫는다면,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버리고 다른 가치를 찾게 될 것이다.

한술 더 떠서 마음의 가난을 말하며 무방비 상태로 어떤 현실적인 방책 없이 무조건 신뢰하라는 엄청난 요구를 하는 예수님에게 부와 인재들과 완벽한 조직과 권력과 명예를 지닌 종교는 어울리지 않는다. 교회를 보호하고 복음을 수호하고 주목받는 세련된 종교로 남기 위하여 능력과 재산과 힘을 구하는 태도는 하느님의 사랑과 창조와 역사를 이끄시는 성령에겐 어울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예수의 삶에 매료당하여 예수님의 의지대로 살아가겠다고 결단을 내린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진짜배기 예수님을 알고 그 만남의 경이로움과 기쁨에 겨워 가장 작은 사람으로 머무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자유인은 어떤 사람들일까?

돈이 인간을 움직이고 돈을 벌기 위해서 가장 인간적인 가치들을 외면하는 현실 속에서 예수님의 복음이 과연 아무런 저항 없이 받아들여 질 수 있을까?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주고 있기에 가난하신 하느님을 체험한 사람들이 자신들도 모든 것을 주려고 할 때 세상의 부와 지배와 능력을 추구하는 사람들과 마찰이 없을까?

이런 질문들은 현실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겐 아무 의미가 없을지 모른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들을 생각하고 있는 한심한 사람들을 예수님께선 원하시고 있다. 그리고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인 교회도 원하고 있다.

하느님의 가치대로 살아가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을 위하여 성령께서는 일꾼들을 만들어 내신다. 그 일꾼들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인 '사제'라고 교회는 말한다. 사제는 대접받음과 존경의 대상이 아니다. 권위와 힘과 능력을 지닌 엘리트는 사제와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면 사제는 정말 어떤 사람이어야 하나? 

   
▲사제로 서품된 사람들도 인격적인 결함과 삶에서 얻은 상처로 신음하고 있다. 사제는 오히려 이 사실을 숨기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이해시키는 사람이다.

사제는 근본적인 회개를 한 사람이다

이기적인 욕망과 자아에 집착하려는 인간의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바로 자신에게 보는 사람은 용서받을 필요가 있음을 느낀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스스로가 얼마나 집요하게 방해하고 있는지 알고, 그래서 극복해야 할 악이 내안에 있다는 진실을 아는 것이 먼저 필요하다. 

사람을 최고의 가치로 두고 함께 살아가는 삶을 기쁘게 받아들이기 위하여 우리는 거짓가치와 논리를 밝혀내야 한다. 어떤 삶이든 어린 시절이 있고 그 시기에 형성된 성격과 마음과 가치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리고 사람은 자라나면서 크고 작은 상처를 받고 산다. 그 상처를 묻어두고 그 상처에 매몰될 때 우리는 성숙한 인간이 되기 어렵다.

있는 그대로 자신을 드러내고, 있는 그대로 살아가는 해방된 인간은 세상을 맑게 할 수 있다. 자기 안에 자유로움과 연민이 없이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신을 아낌없이 주는 일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자신을 긍정하지 못하는 사람은 무조건적인 사랑이 지금 자신에게 주어지고 있다는 신비를 알 수 없기에 사랑받기 위해서 자신을 그럴듯한 포장으로 감싸고 외적인 인정을 끊임없이 갈망하게 된다. 이럴 때 그 사람은 재산과 명예와 권력과 쾌락을 무의식적으로 계속 추구하게 되고 모든 관심이 자아에만 집중되기에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실제로 불가능하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이 이런 상태에서 외롭게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사제는 이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근본적으로 분리된 사람일까? 내 생각에는 물론 아니다.

사제로 서품된 사람들도 인격적인 결함과 삶에서 얻은 상처로 신음하고 있다. 사제는 오히려 이 사실을 숨기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이해시키는 사람이다. 그래서 용서와 사랑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하느님은 사랑이라는 사실을 온 몸으로 체험한 사람이 사제이다.

근본적으로 회개란 자신이 만들어낸 하느님을 포기하고 살아계신 하느님이 자신의 내면을 변화시키도록 두 손을 벌리는 것이다. 그래서 자아에 갇히고 괴로움을 당하고 희망을 버린 것이 하느님이 아니라 자신이었음을 깨닫는 것이다. 자신은 죄인이고 그 죄인이라는 사실이 하느님께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마음으로 부터 기뻐하게 되는 것이다.

하느님은 개별적으로 우리 각자를 사랑하시고 인간을 사물로 대하지 않고 숨 쉬고 약동하는 생명으로, 인격으로 존중해 주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우리의 삶은 근본적으로 변화되기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근본적인 회개이다. 이 회개 없이 사제는 사람이 뭔지를 모른다. 이 회개 없이 어떤 인간이든 그 인간을 소중히 대하고 마음을 다해서 그 사람의 말을 들어주고 그 사람을 그 사람으로 인정 할 수 없게 된다.

회개한 인간은 사랑하기 시작한다. 새로운 시각으로 이웃을 바라보고 그 이웃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이 힘차게 활동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사랑만이 인생의 전부이며 사랑하는 것만이 자신의 일로 생각하게 되는 사람이 바로 사제인 것이다. 

   
▲영의 이끄심에 민감한 사람이 바로 사제이다. 영의 이끄심에 민감한 사제는 조작과 독선과 아집과 소유를 버린다. 그런 사제는 겸손하고 협동하며 사람들의 요구에 응한다.

사제는 끊임없는 내면으로 들어가는 사람이다.

예수의 삶은 기도였다. 기도는 자아완성을 위한 수단도 아니며 복을 받기 위하여 하느님을 조종하는 무기도 아니다. 기도는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인간을 인간으로 긍정하는 것이다. 기도는 우리 삶의 중심이 사랑임을 긍정하며, 사랑하기 위하여 마음을 비우는 행동이다. 진정한 혁명은 기도에서 시작한다. 사회의 구조적인 악을 개선하기 위하여 가장 필요한 것은 영을 살리는 것이다.

제도의 힘을 빌어서 제도 안에 안주해서는 인간을 살리지 못한다. 모든 인간은 사랑하고픈 갈망이 있다. 이 갈망이 우주의 원리이며 인간의 삶의 근본임을 일깨우는 것이 바로 우리 안에 영을 살리는 것이다. 이 사랑의 갈망은 비우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가난한 마음과 단순한 삶의 양식 없이 영은 살아나지 못한다. 권력을 추구하고 안락하고 보장된 안전장치를 마련하기 위하여 애쓸 때 우린 영과는 반대의 삶을 살기 시작한다.

영과 반대되는 삶이란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고 보호하고 강화하기 위한 삶이다. 정치권력, 경제적인 부, 사회적 지위, 편리하고 사치한 문화 등 이런 모든 삶들에 이끌리게 된다. 그래서 가진 자의 편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고 가진 자의 삶의 양식을 취하게 된다. 그럴 때 나오는 태도는 고립과 권위주의와 지배와 독단과 우상숭배와 억지다.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지 않을 때 우리는 이 세상과 저 세상으로, 육체와 영혼으로, 종교와 세속으로, 의로운 자와 죄인으로, 가난한 자와 부유한자로, 누르는 자와 눌리는 자로 세계를 분열시킨다. 내면으로 보지 않을 때 우리는 사람에게 차등을 둔다. 진정한 인격적인 만남이 없는 겉 만남, 거짓만남에 자신을 파묻는다. 우리가 이런 쌀쌀하고 위선적인 관계에 만족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내면을 보는 일이다. 허영과 위선의 탈을 벗기 위하여 우리는 내면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러니 거대하고 거창한 제도나 행사를 걷어치우고 작고 소박한 사랑과 나눔으로 향하기 위하여 우리는 영에 이끌리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

영의 이끄심에 민감한 사람이 바로 사제이다. 영의 이끄심에 민감한 사제는 조작과 독선과 아집과 소유를 버린다. 그런 사제는 겸손하고 협동하며 사람들의 요구에 응한다. 그리고 한 인간의 아픔과 고민과 갈등에 마음을 다해 응답하며, 그 성실함으로 교회 공동체 됨을 위하여 진지한 행동을 하고 사회의 불의에 온몸으로 저항하게 된다. 그래서 더 좋은 세상을 건설하기 위하여, 이 땅에 하느님나라를 건설하기 위하여, 가장 작은 곳에서 실천하기 시작한다.

   
▲분명한 사실은 예수님은 권력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의 직업은 목수였지 종교지도자나 권력자가 아니었다. 있는 그대로의 예수님의 모습은 거창하지도 현란하지도 않다. 그분은 인류의 참스승 이었지만 마음이 가난한 사람에게만 그러하다.

사제는 예수님의 사고방식대로 사는 사람이다

하느님 뜻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사람이 예수님이다. 늘 본질적인 것을 추구하고 내적으로 변화된 자유인이 예수님이다. 인간의 근본적인 갈등을 대면하고 극복한 예수님은 사랑으로 변화되었다. 인간을 사랑하는 것과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같은 것이라고 가르친 스승이 예수님이다. 그래서 종교적 권위나 정치적 권력을 비롯한 제도나 이데올로기보다 한 인간의 존엄성이 더욱 위대하다는 선언을 예수님은 하게 된다.

예수님이 가르친 하느님나라는 99마리 양보다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는 사랑이다. 겉보기에는 아무리 작아 보여도 인간의 본질적인 것이 드러나는 것에 하느님나라는 현존한다. 하느님 나라는 공동체에서 시작한다. 하느님 사고방식대로 살아가는 공동체는 작아 보이지만 세상을 구원한다.

나를 벗어나서 이웃과 함께 살아가는 길만이 진정한 구원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준 사람이 예수님이다. 억눌린 사람, 갇힌 사람, 가난한 사람들의 존엄성을 인정하고 그들에게 다가가서 하느님나라의 주인들이 바로 그들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 사람이 예수님이다. 높게 되고 성공하는 삶이 아니라 낮은 곳으로 십자가를 향하는 삶이 곧 부활의 삶임을 인간 역사 안에서 나타내 준 분이 예수님이다. 무방비 상태로 하느님의 부르심에 아무 미련 없이 자신을 맡길 때 하느님의 일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증거한 사람이 예수님이다.

분명한 사실은 예수님은 권력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의 직업은 목수였지 종교지도자나 권력자가 아니었다. 있는 그대로의 예수님의 모습은 거창하지도 현란하지도 않다. 그분은 인류의 참스승 이었지만 마음이 가난한 사람에게만 그러하다. 그분은 진정 힘 있는 분이지만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만 그렇다고 인정되는 분이다.

예수님을 따라 산다는 것은 엄청난 도전이며 변혁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의 사제일 수 없다.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을 보러 오셨고 그들의 어려움을 진지하게 나누지 못하는 사람은 예수님과는 거리가 멀다.

자신의 안전장치를 포기하지 않고 부서지려는 태도 없이는 예수님의 사제가 될 수 없다. 자신이 처한 현실을 직시하고 무엇이 인간의 본질적인 삶인지를 깨어서 보지 못하는 사람은 거짓 예언자이다. 절망 속에서 희망을 갖고 죽음 속에서도 새 생명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타인에게 해방감과 자유로움을 증거 할 수 없다. 우리의 일상생활을 늘 하느님의 눈으로 보고 의미를 찾는 훈련이 안된 사람은 예수님의 인격을 나타내 보일 수 없다.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고도 두려움 때문에 가리워 버리는 사람은 하느님의 일꾼이 아니다.

우리시대에 필요한 사제는 적어도 예수님의 이상대로 살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고 아파하는 사제이다. 그래서 깊이 기도하고 끊임없이 자신욕망을 기쁘게 포기하고 자유롭게 되는 사제가 필요하다. 사랑이 뭔지를 알고, 사랑하는 훈련을 포기하지 않고 참사랑을 체험한 사제가 필요하다.

한 인간의 문제와 역사와 사회의 문제를 늘 함께 보고 진정한 인간 공동체 건설을 위해서 비젼을 제시하고 그 비젼 대로 사는 사제가 필요하다. 직무상의 사제직과 모든 신자들이 공통적인 사제직이 본질적으로 같은 것임을 인정하는 사제가 필요하다. ‘더 이상 거짓과 불의가 선으로 포장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모두가 자유롭게 서로 사랑하는 세상이 되면 좋겠다’ 는 희망을 우리의 사제들이 마음속에 품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장차 올 평화스런 왕국 
 

이새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나오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돋아난다.
지혜와 슬기를 주는 영,
경륜과 용기를 주는 영,
야훼를 알게 하고 그를 두려워하게 하는 영이 내린다.
그는 야훼를 두려워하는 것으로 기쁨을 삼아
겉만 보고 재판하지 아니하고
말만 듣고 시비를 가리지 아니하리라.
가난한자들이 재판을 정당하게 해 주고
흙에 묻혀 사는 천민의 시비를 바로 가려 주리라.
그의 말은 뭉치가 되어 잔인한 자를 죽이리라.
그는 정의로 허리를 동이고 성실로 띠를 띠리라.
(이사야 11,1-5)

<출처/하나되어 1990년 12월, 제58호>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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