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세례자에게 세례를 받은 후 예수님은 본격적으로 복음을 선포합니다: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 복음 전도를 위해서 예수님은 동역자들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갈릴래아 호수가에서 몇 명의 제자를 부르신 후,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며 회당에서 가르치고 기적을 베풀었다고 합니다. 오늘의 말씀은 복음을 위해 온몸을 던진 예수님의 진솔한 삶을 요약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태오는 복음서 작가들 중에서도 유독 '하늘나라' 라는 표현을 좋아했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다는 유다교의 전통에 따른 것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출애 20,7)는 십계명을 생각나게 만드는 부분입니다. 그에 따라 유다인들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하느님의 이름(야훼)에 모음을 붙여놓지 않았는데 자음만 가지고는 발음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늘, 땅, 바다의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따 새긴 우상을 섬기지 못한다"(출애 20,3)라는 계명도 있는데, 그 계명에 따라 하느님을 생각나게 하는 인간의 조각상이나 인물화마저 제조를 막았습니다. 모두 하느님의 이름과 모습을 함부로 부르거나 만들 수 없도록 원천 봉쇄한 조치입니다.
예수님이 전하는 복음은 '하느님 나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아니 예수님의 말씀 하나, 일거수 일투족은 모두 '하느님 나라'를 향한 것이라고 말해야 옳을 지 모르겠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우리에게 와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이 하느님 나라가 이 세상으로 힘차게 파고 들어오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직 하느님의 나라는 오지 않았는데, 하느님의 궁극적인 통치는 역사의 종말에나 가야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하느님 나라의 시간성을 두고 흐르는 긴장을 '이미, 그러나 아직'이라는 신학적인 용어로 표현합니다.
제2독서인 1고린 1,10-13.17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가 자신을 세례를 베풀라고 보낸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러 보냈다고 말합니다. 고린토에서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는가'를 빌미삼아 파가 갈라진 사태를 보고 자신의 입장을 강변한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이라는 용어는 공유하지만 내용은 차이가 나는데, 예수님에게는 '하느님 나라'가 복음의 내용이었고, 바오로에게는 '예수님' 자체가 복음의 내용입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당연히 후자의 것입니다. 이사야는 원수를 쳐부수는 하느님의 능력을 언제나 감동 넘치는 언어로 표현합니다(이사 8,23-9,3). 특히 하느님께서 이방인에게도 빛이 되신다는 언급은 복음(하느님 나라)이 가지는 보편적인 성격의 근거가 되는 구절로 보입니다.
예수님이 전한 '하느님 나라'는 언제나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만들어 줍니다. 지하철 전도사들이 부르짖는 '예수 천당, 불신 지옥'에 등장하는 천당(天堂)이 바로 '하느님 나라'와 같은 개념이고, 노숙자에게 전해지는 따뜻한 죽 한 그릇으로도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앞당길 수 있다는 강론도 들을 수 있습니다. 과연 '하느님 나라'란 무엇일까?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두고 우리에게 어떤 일을 맡기신 것일까? 그리스도인이라면 두고두고 풀어야 할 과제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복음이 어떤 난관에도 사라지지 않고 2천년 동안 먼길을 건너와 낯선 땅 한국에도 전해졌고, 지금도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놀라운 위력은 무엇보다도 거기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서울대교구 사무처 홍보실
하느님의 나라
2005. 1. 23. 오전 10: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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