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세상'간송미술관
'훈민정음 원본'서 신윤복'미인도'까지 국보급 가득
문화독립운동가 간송 전형필선생 탄생100년… 비장의 명품 100선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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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저것들이 소중하다 해도 어떻게 공주에 있는 전답을 죄다 처분할 수 있느냐. 남들이 뭐라는 줄 아냐? 문전옥답 팔아 사금파리 사는 미친 사람이란다."
1937년 어느날, 간송 전형필이 고려청자 수점을 인수한다며 공주의 5000석 전답을 팔아치우자 보다 못한 어머니가 불호령을 내렸다. 서른한살의 간송은 어머니에게 한사코 이해를 구했다.
"어머님! 제가 하는 일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일이니 믿어주십시요."
당시 간송은 영국인 변호사 갯스비가 수십년 동안 모은 청자를 처분한다고 하자 도쿄로 날아가 이를 서둘러 인수했다. 이런 처사는 조선인에게 '금싸라기 땅을 팔아 사기그릇을 사는 바보'로, 일본인에게는 '나라도 없는 주제에 골동품을 모으는 놈'으로 손가락질 받았다. 하지만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ㆍ1906~1962) 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문화민족이라고 당당히 밝힐 수 있다. 나라 잃은 설움에 빠져있던 시절, 간송은 일본으로 흘러갈 뻔한 귀한 문화재를 지키기 위해 전재산을 쏟아부었다. 문화독립운동가였다. 그가 없었다면 대한민국의 '문화재 식민 상태'는 더욱 심화됐으리라는 게 전문가들 진단이다.
요즘 그가 수집한 문화유산들을 보기 위해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은 인파가 넘친다. 교과서에서나 접할 법한 국보급 명품 100점이 '간송 탄신 백주년 특별대전'이란 이름으로 딱 2주간(~6월4일) 공개됐다. 그동안 간송미술관은 매년 봄ㆍ가을 두 차례 보물창고를 열고, 기획전을 열어왔다. 전시는 2주에 그쳤다. '봄에 한번, 가을에 한번 간송 전시를 보면 1년이 흘러간다'는 말도 그래서 나왔다. 올해는 특히 탄신 100주년전이어서 평소 볼 수 없는 '간송 대표선수'가 한꺼번에 나와 미술 애호가의 마음을 더욱 설레게 한다. 전시작은 대부분 국보, 보물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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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이 국보, 보물급 미술품을 손에 넣을 수 있던 것은 삼박자가 맞아서다. 우선 조선시대 최고 지주였기에 가능했다. 자손이 없던 큰 아버지댁 양아들로 들어간 간송은 25세에 생가와 양가 통틀어 유일한 적손(嫡孫)이 됐다. 당시 상속 받은 재산이 10만석. 인촌(仁村) 김성수의 재산이 3만석이었다니 유산의 규모가 짐작이 된다. 배우개(종로) 상권을 장악한 것은 물론, 가진 땅이 서울 일원과 황해도 연안, 충청도 공주 서산까지 뻗쳤다.
둘째로 좋은 조언자를 만났기 때문이다. 일본 와세다 법대를 나와 망국의 한을 되씹던 간송은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였던 춘곡 고희동과 위창 오세창과 교유하며 민족미술에 눈을 떴다. 휘문고보 미술교사로 간송의 은사였던 춘곡은 "암흑시대를 밝힐 수 있는 길은 민족문화재를 수호하는 것"이라고 가르쳤고, 위창은 간송에게 서화골동의 감식안을 키워줬다. 간송은 두 은인의 도움을 받아 25세 때부터 죽기 직전까지 서화와 도자기를 수집했다.
마지막으론 간송의 담력과 배포, 세상 욕심을 초월한 문화 애호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간송은 10만석에서 나오는 양곡은 물론, 갖고 있던 땅도 아낌없이 팔았다. 그가 사들인 미술품은 수천 점에 달한다. 특히 신윤복의 '혜원전신첩', 기와집 수십채 값에 해당되는 '청자상감운학문매병' 등 명품이 수두룩하다. 겸재 정선, 추사 김정희, 단원 김홍도의 서화도 모두 일급이다. 불쏘시개가 될 뻔 했던 겸재 정선의 해악전신첩을 거둔 이도 바로 간송이다.
간송은 반드시 수집해야 할 문화재에는 조금도 돈을 아끼지 않았다. 일제시대 집 한채 값인 1000원에 나온 훈민정음 원본을 1만1000원을 주고 사면서 1000원을 수고비로 건넨 일화는 너무 유명하다. 그래서 간송 손에 유일하게 전해지는 '훈민정음 해례' 원본이 들어왔고, 국보 70호로 지정돼 우리 곁에 있다. 간송은 골동상들이 "이 정도 받으면 횡재다"고 생각하는 매도금액의 서너배 높게 값을 지불했다. 결국 좋은 물건이 간송에게 모일 수밖에 없었다. 시대의 명품은 톱 클래스 수집가에게도 딱 세번 나타난다고 한다. 그 기회를 놓치면 영원히 명품의 주인이 될 수 없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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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간송은 어떤 미술품을 얼마에 샀는지를 절친한 지인에게조차 일절 얘기하지 않았다. 기록으로 남기지도 않았다. 오로지 민족문화를 지키고, 후대에 전하는 일에만 골몰했다. 간송은 또 재정 위기에 몰렸던 보성고보를 인수했으나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재산을 잃고 힘든 시기를 보내다 1962년 급성 신우염으로 삶을 마감했다. 그가 1938년 설립한 보화각은 1965년 간송미술관으로 개칭됐고, 1966년 한국민족미술연구소가 설립돼 유물을 본격 정리, 연구하기 시작했다. 최완수 실장은 "간송의 컬렉션은 우리 역사를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라며 "이들 문화재가 없었다면 어떻게 겸재와 추사를 연구하고, 기록만 갖고 갑론을박으로 일제의 식민사관을 바로 잡을 수 있겠느냐"고 되물었다.
간송 소장품은 우리의 얼이다. 조상의 숨결이다. 파리의 루브르, 피렌체의 메디치미술관 컬렉션과도 바꿀 수 없다. 예컨데 훈민정음 초판본은 지구상에 한 권밖에 없는 세계문화유산이고,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이며 겸재 정선의 그림과 혜원의 전신첩은 금액으로 환산할 수 없는 문화재다. 그래서 뜻있는 인사들은 안타까움을 금치 못한다. "그토록 낡고 누추한 곳에 우리문화의 자존심을 방치햐야 하는가." 간송미술관은 1938년 개관 이후 거의 창틀 하나 안 바뀐 채 이어져 낡을대로 낡은 상태다.
간송미술관은 아직 개인 미술관이다. 미술관 등록을 하지 않았다. 정부 당국도 선뜻 나서기 힘든 대목이다. 간송미술관이 소장 중인 국보 보물급 문화재가 제 격에 맞는 공간을 차지하고, 제대로 숨쉬며 전세계와 대화할 수 있는 날이 오려면 간송 관계자들과 정부 당국이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짜내야 한다. 그날은 과연 올 수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