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토화

2009. 5. 7. 오후 9:24:30

글자

시릴로 형제님이 물었습니다.

혜화동 성당 제대화의 의미가 뭐냐고.

예술가가 창조한 작품이니 작가의 의도가 있지 않겠느냐고.

 

그러면서 제대를 보며 느낀 당신의 소회를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마치, 성 금요일 세 시, 바로 골고타를 형상화한 거 같아.

그 순간,

태양은 빛을 잃고 산천초목이 두려움에 떨며 공포에 휩싸였던 바로 그 순간.

그래서 제대화에 그려진 태양은 이미 황금빛이 아니고 어두운 흙빛이지.

나에게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숨을 거둔 그 순간의 풍경으로 보여."

 


혜화동 홈피에 가서 '백동 성미술'을 살펴봤지만 제대화에 대한 설명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사순 시기를 보내는 저에게는 그분의 말씀이 예사롭게 스쳐가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미사를 드리다 문득 '초토화'라는 단어가 가슴으로 들어왔습니다.

초토화는 '초토가 됨. 또는 초토로 만듦'이라는 뜻이군요.

그리고 초토는 '불에 타서 검게 그을린 땅'이나

'불에 탄 것처럼 황폐해지고 못 쓰게 된 상태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구요.

사순에 바라보는 제대화는 초토의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다시 모든 것이 끝나버렸습니다.

종을 구원하시려 넘겨주신 아드님마저 죽여버린 인간의 죄,

그 두려운 겟세마니의 밤이 지나고

인간 예수가, 참된 어린양으로 살해된 그 순간.

차마 다 알 수 없는 절망이 발목을 휘어감아 숨을 쉴 수도 없는 어둠의 땅......


그리고 부활을 지냅니다. 하지만 여전히 사방이 초토입니다.

난 초토화한 세상 한켠에 서 있습니다.

그냥 기뻐해도 될까,

보지 않고 듣지 않고

모르는 체 관계없는 체

그냥 일상을 고마워하며

봄날 분분한 꽃자락에 그 향기에 취하며 가벼워지면 되는 것일까.

밥을 먹고 잘 자고 공부한답시고 행복해하고...

이렇게 그냥 살아가도 되는 것일까.


하지만 어둠으로부터 빛이 시작된 성야미사에서도

여전히 지독한 어둠 속에,

혹은 환한 빛 속에 있는데도 기실은 암흑인 세상,

힘없어서 유린당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과

기가 막히는 많은 상황들 때문에 온전히 마음이 열리지 못했습니다.

 

제 영혼은 여전히 동굴에 갇혀서

멀리서 울고 있는 사람들의 상처를 그저 아파하고만 있습니다.

모든 어둠, 기가 찬 어둠이 여전히 목젖에 걸립니다.

순간순간 깊은 곳에서 치밀어오는 그 어둠을

잊을 수가, 버릴 수가 없습니다.

버릴 수가 없어서 난 여전히 어둠 속에 있습니다.

 

저 초토로부터 부활의 동굴 문이 열리고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의미'가 도래하리라고 희망하지 못하는

제 작은 그릇을 돌아봅니다.

희망을 찾지 못한 채

아파하고만 있는 제 얕은 바닥을 들여다봅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그 작고 얕은 세계에서 발버둥치고 있는 나약한 존재,

바로 나 자신을 대면합니다.

 

미안합니다, 아직 꽃 필 가슴이 없습니다.


댓글 2

  • 2009년 5월 11일 오후 11:23

    뒤로 가만히 다가가서 안아주고 싶은데.....로사씨를!!

  • 2009년 5월 14일 오후 6:43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어 첫 번째 말씀이 '용서'이셨듯이 우리는 그 용서를 수없이 되 뇌이면서도 찰거머리 같이 붙어다니니 소금이라도 갖고 다녀야 겠습니다. 두려우십시니까? 또는 주저하시는 겁니까? 주님께 온전히 맡기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