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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혹시라도 예수님께서 내가 아닌
다른 제자를 특별히 총애하신다고 해도 그것은 나와 상관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나는 이미 죽고
다른 제자는 살아 있다 하더라도,
주님께서 그것을 바라신다 하더라도 그것은 나와 상관이 없습니다.
이것이 내가 주님을 따르는 데에
결코 장애가 될 수 없고 또 되어서도 안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황제의 판결을 받으러 로마에 도착하여 집에 갇혀 있습니다.
하지만 갇혀 있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는 “아무 방해도”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예루살렘에서 유다인들에게 반대를 받는다 해도,
또 총독이 그에게 아무런 죄가 없다고 생각하였지만 자기가
계속 죄인 취급을 받는다 해도 그에게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가 후대의 선교사들이 하듯이 그렇게
선교사 파견 예식을 하고 축복을 받으면서 떠났든,
죄인으로 호송되었든 그것은 그에게 상관이 없습니다.
더욱이 그것이 ‘방해’가 될 수는 없습니다.
사도행전은 이렇게 끝납니다.
여기까지만 살펴보면 그의 앞날은 불확실합니다.
사도행전 저자는 그가 로마에서 순교했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나 그것도 상관이 없습니다.
오로지 어떤 식으로든 하느님의 말씀이
세상의 중심인 로마까지 도달했다는 것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여기에서 멈추고
그다음에 전개되는 상황은 더 이상 쓰지 않습니다.
이러저러한 많은 일이 우리의 발목을 붙잡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대부분의 경우,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내가 주님을 따르는 데에,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데에
‘방해’ 사유가 된다는 점에 유념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사심 없이 사도들과 같은 담대함으로
주님을 따를 수 있는 믿음을 주시기를 청해 봅니다.
각 개인에게는 주님에게서 받은 고유한 소명이 있습니다.
바오로에게는 그리스도교의 개척자 모습이 두드러집니다.
그는 이방인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전한 위대한 선교사였습니다.
베드로에게는 주님의 양 떼인 하느님의 백성을
부양하고 다스리는 목자의 모습이 돋보입니다.
요한에게서는 그리스도의 증인의 모습이 강조됩니다.
이처럼 베드로 사도가 주님의 양 떼를 양육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그의 소명이었다면, 요한 사도는 장수하면서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적을 증언하는 것이 부활하신 주님의 뜻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소명과 능력은 서로 다릅니다.
또한 각 개인에게는 하느님께 나아가는 고유한 길이 있기 때문에
상당히 서로 다르고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길과 나의 길을 비교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고 위험한 일입니다. 오늘 부활하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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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매일 미사-
♬ 이길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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