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젤라에게 하는 늦은 남도여행기

2009. 7. 11. 오후 3:46:43

글자

새벽미사하고 일찌감치 길 떠날법도 하련만 도무지 고치지 못하는 병 늦잠, 10시 미사도 빠듯하게 겨우 드리고, '성북에서 출발' 하고 시작한 그대 안내서를 들고 길 떠나

구례도착하니 오후가 중간-. 화엄사가는 길은 얼마전 까지만 해도 세계에서..했다지만 다시 고쳐썼다나,한국서 젤로 예쁜 길이라고.  뭐 설명 안해도 아름다운 길이 참으로 아름다운 길이 쭉 뻗어 있는데

나무란 놈이 서로 하늘서 만나 가지랑 잎사귀를 서로의 품 속에 쑤셔놓고, 바람 왈강왈강 지나가게 내버려 두고 마음껏 비비고 만지고 주무르는데 상당히 노골적이더만!  허, 저것들 꽤는  좋겠다, 치- 부러움 넘버 원.

구례사람들 이 좋은 지네 동네 놔 두고 뭣땜에 서울 와서 산다냐-  서울이 뭐 그리 별 거라고- 냄새나고 사람들 격 없고 먼지나고 시끄럽고-  이름도 구수한 구례, 지리산 산자락에 턱 하니 안겨 있는 구례에 태어나 구례에서 사는 사람은 복 받은 사람들, 내가 구례사람이라는 걸 자랑으로 아는 사람은 더 없이 복 많은 사람들, 근데 왜 우린 내 손의 좋은 것을 모를까, 꼭 떨어뜨려 깨진 후라야 '아차, 그랫구나' 한다니까  .  깨달음 넘버 원.

연곡사 지나 쌍계사 옆 그 멋진 길 - 그 길 12키로 가면 노고단 닿는다는 그 정말로 멋진 길 - 다 못 가고 돌아왔다. 하늘은 저 위에서 저리도 파란데 어쩌자고 그 길은 그리도 컴컴 한지. 나무들이 무슨 데모 막는 전경처럼 햇빛을 막아 앞이 안 보이는데 오는 이도 가는 이도 없는, 새소리조차도 안 들리던 그 길-   이리구불 저리 구불한 돌 박은 흙길이 참으로 매력적인데  어지간한 나지만 겨우 2키로 남짓 걷다가 무섭더라. 그 아까운 것 놔두고 돌아 왔다. 돌아오는 내 발소리 터덕터덕 울리는데 치- 친구하나 있었음, 부러움 넘버 투. 눈앞의 좋은 것도 내 것 아닌 것 어쩔 수 없다- 깨달음 넘버 투.

화엄사쪽으로 다시 돌아와 산자락의 모텔서 하루밤 자는데- 챙겨간 와인하고 안주 꺼내 저녁대신 먹으며 책 읽다가 갑자기 주위가 참 조용하다는 걸 느꼈다. 내가 묵은 방 앞이 바로 계곡이라 물소리 요란한데 왜 문득 한기처럼 조용함이 느껴졌는지 몰라. 쓰고 있던 돋보기 벗어놓고 책 내려 놓고 비스듬히 기대 앉아 빈 잔에 와인따르면서 혼자 궁시렁 거린 말, 치- 뭣들 그렇게 바쁘담, 좀 나랑 같이 놀아주지, 부러움 넘버 스리

화엄사였는지 쌍계사였는지 잊었는데 암튼 대웅전 앞 뜰에서 아주 은은하고 고급한 향기가 내 코를 슥 지나가는 거야, 응? 이건 말로만 듣던 성모님 향기 아냐? 정말로 잠시 그렇게 생각했다니까,  근데 내가 서있는 이쪽 옆에 어른 주먹만한 치자 꽃이 두 그루에 환하게 피어 있는거야. 치자향기 좋아해서 뉴욕집에서부터 기르다가 수십번 실패, 한번도 제대로 맛보지 못한 나한테 그 광경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어. 그리고 그 향기는 내 여행을 축하해주는 선물이었고. 하루종일 이 향 맡는 대웅전 안 부처님 참 좋으시겠다, 부러움 넘버 포,    

 화개장터가 볼 거 없다고 누가 그랫어, 아니던데, 재밋더라, 무슨 암호같은 약초들과 나물들, 이상한 맛이 나는 끓인 물.  주는대로 몇 잔 얻어 마시고, 차를 돌려 최참판 댁으로 향한다. 참, 국사암이란 곳 앞에 있는 1200살 된 느티나무 얘기 빼먹었다. 그 둘레 내 걸음으로 14걸음, 대단하지, 그 나무 등걸에 손 대고 말 했다- 사람들이 혹 나쁘게 굴어도 용서하세요, 정말 멋지세요, 존경해요 하고.   

최참판댁 둘러 보다가 용이와 월선이의 사랑, '니 한 없제?' 물어 보는 용이한테 죽어가는 월선이가 '야,한 없슴더' 대답하는 그 애틋함 때문에 혼자 찔끔 울었다. 한 없을까? 없을 수도 있겠다. 한평생 쌓인 한도 한 순간 풀어질 수 있다니까, 사랑은 얼마나 해야 신물이 날까, 언제쯤이나 사랑에 무덤덤해질까, 도무지 사랑하고 싶지 않아 질수도 있을까, 사랑은 언제나 난제, 깨달은 넘버 스리. 최참판댁 대문에서 내다보이던 들판에 작은 탄성을 보냈다, 한폭의 완벽한 수채화였다. 밀콩국수로 점심인지 저녁인지 먹고 이제 향일암 간다.

여수가는 국도 좋았다, 산끼고 구불구불 올라갔다가 바다가 보이는 길로 다시 내려가고 - 그렇게 한 서너시간, 날이 저물어 경치는 물론 운전도 재미없어져서 숙소를 찾았는데, 첫번째집은 귀벽산장같아 걸음아 날 살려 돌아나왔고 향일암이 한 10키로 남은 곳에 들렀는데, 그 집 주인이 마침 제 친구들을 불러 한잔하는 중, 그래 나도 끼어 같이 한잔하는데 안주는 방금 잡아 온 문어 삶은 것, 아까 낮에 잡은 장어 구이, 홍합과 김장할 때 넣는 시퍼런 것 이름 뭐지 지렁이 같은 것, 미안, 그것 두개 같이 무친 것, - 아 내가 너무 행복해서 안 시키는 노래를 다 했다. 그 사람들 참 행복하게 살더라, 아베마리아 불렀더니 저거 우리나라 말 아니제 하고 서로 물었지만 무슨 상관이랴,  바다에서 건진 것으로 서로 해 먹이고 먹고 웃고 그러고 살더라, 치- 나는 왜 어이타가 떠나 살게 되었는고 가고파라- 부러움 넘버 5

향일암에서 10만원짜리 돌거북 사들고 경건하게 절 하던 여인, 성모님 그 소원이 무어든 들어주세요 나도 옆에서 거들었다. 싱겁대도 괜찮아, 그 당시 난 소원이 없었거든, 내 소원이 없어야 남 소원을 빌어줄 수 있는거야 깨달음 넘버 포. 여수 오동도에 가서 실컷 걷고, 그 길은 환하고 사람도 많아서 걸었다, 이틀을 더 자면서 남해도 가고 통영도 가고 부산도 들르고 다시 통영에 와서 회 먹고

그리고 고속도로로 곧장 집으로 향했다.  집에 두고온 치자 물 줘야지, 죽을라, 내 어린치자에도 언젠가 어른 주먹만한 꽃이 피어주기 않을라나-  내 믿음도 그렇게 자라나길, 우리 모두의 삶도 쌍계사 그 치자나무 향기처럼 향기 나길- 아 참으로 그렇게 살 수 있길, 삶의 끝에 '니 한 없제' 하는 누군가의 말에 '야 한 없슴더' 말할 수 있길.   

 

 

댓글 1

  • 2009년 7월 11일 오후 4:29

    안젤라보다 내가 먼저보고 답글달아 미안해 하는거 아닌지 몰러... 특정인을 지정하면 더 보고잡은게 사람의 마음인가~ 재밌게 잘 보았습니다! 나도 가고싶은 곳입니다. 신혼시절 土地 보려고 주부생활인가 하는 월간지 나오는 날 기다리던 생각이 나네요

소곤소곤 사랑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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