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집에서 거룩한 물로 거룩한 표시를 그으며 거룩한 책을 읽고
거룩한 노래 속에 거룩한 몸을 받아 모시고 사는, ‘거룩한 사람들….’
그러다 문득, 도대체 거룩함이 무슨 뜻일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일전에 봉성체를 다닐 때의 일입니다.
보통 봉성체를 가야 하는 집들이 연로하시거나 병드신 분들이기에,
질병이라는 음습한 기운을 하루 종일 맡다보면
돌아오는 걸음은 저도 모르게 맥이 탁 풀어지게 마련입니다.
때로는 자제 분들 중에 천주교 신자가 없거나
오랫동안 냉담을 하고 계신 경우 문도 잘 안 열어 주실 뿐만 아니라,
인사도 없이 당신 방으로 탁하니 들어가 버리면
죄인이 된 심정으로 앉은 자리도 여간 고역이 아닙니다.
하도 여러 집을 방문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신자들의 다양한 병고를 지켜보게 되는데,
신기한 것은 병의 정도에 따라 그 얼굴 표정들도 다 다르다는 점입니다.
우선 얼굴을 딱 보았을 때 불평과 불만이 가득한 사람들은
대게가 다리를 못 쓴다든지,
아니면 팔을 못 쓴다든지 하는 몸의 일부에 장애가 있으신 분들입니다. 그런데 그 얼굴이 정말 맑고 얼굴에 평화 가득하신 분들은
참으로 역설적이게도(!) 아예 얼굴 밑으로는 아무 것도
움직이실 수 없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밝고,
그 분들 입에서 더 많은 감사함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숱하게 경험하였습니다.
루시아 할머니는 30년 전에 철길에서 교통사고를 당하셔서
목 밑으로는 아무 것도 쓰실 수 없는 분입니다.
이미 서른 중반에 그런 사고를 당하셨으니 지금은 일흔이 다 되었지요.
할머니에게는 일흔이 넘으신 백발의 할아버지가 계신데
할아버지께서 30년이 넘게 할머니를 씻기시고 먹이시고,
대소변을 받아내신 것입니다.
그 댁엘 가면 얼마나 깨끗이 정리가 되어있고
화단에는 어여쁜 화초들로 풍성하던지
할아버지의 정갈하신 성품을 읽을 수 있습니다.
처음 사고를 당하고 너무도 고통스러우셨던 할머니가
제발 좀 죽여 달라고 사정을 하셨을 때,
할아버지께서 “우리 막내딸까지 다 시집 보내고,
그리고 난 다음 당신하고 나하고 같이 죽읍시다.” 하고
할머니를 달래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말이 좋아 삼십 년이지 그 세월을
오직 침대에서 누워 사셨으니 그 고통을 어이 헤아릴 것이며,
할아버지의 노고 또한 감히 상상도 못할 지경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어르신 댁에 들어가면,정말로 ‘환했습니다’.
일흔이 넘도록 곱게 늙어 가시는 할아버지와
깨끗이 침대에 누워 저를 기다리시는
할머니의 평화스럽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은
하루 동안의 병자 방문으로 지친 저에게
청량한 한 사발의 맑은 샘물 그 자체였습니다.
어느 날 할머니 댁을 찾아 갔는데
할머니께서 저에게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 하더니 뜬금없이
다음 달부터는 봉성체를 하지 않으시겠다고 하십니다.
무슨 소린가 싶어 그 이유를 여쭈니 매달 봉성체 날이 오면
예수님 모셔야 한다고 할아버지께서 새벽부터 일어나
집안 구석구석을 말끔히 소제하시고,
뜨거운 물 데워 당신을 씻기시고 준비를 하시는데
이제는 백발이 성성하신 할아버지에게 그 고생을 시켜드리고 싶지 않다고,
봉성체를 하지 않으시겠다 하십니다.
마음 한 구석이 찡해왔습니다.
그래도 말씀은
“에이 할머니에게 이런 수고를 해드릴 수 있어야
할아버지에게도 덕이 되겠지요. 할머니께서 이렇게 누워 계시니
할아버지께서 하느님에게 받을 상들이 늘어만 가는데,
할머니께서 그 공을 뺏으시겠어요? 안 그래요, 할아버지?”
고갤 돌려 어르신을 뵈니
할아버지는 그저 입가에 미소 가득 머금으신 채 고개만 끄덕이십니다.
30년을 누워 영감님의 수발을 받으며 살아오신 할머니는
그 수고가 죄송스러워 성체를 마다 하시고,
할아버지는 그런 할머니의 마음이 애틋해 미소만 지으시던
그 시선 속에서 저는 제 손에 들려 있던 성체를 보았습니다.
주님.
과연 무엇이 성체인지요?
바로 이 귀한 마음들이 성체가 아닌지요?
거룩하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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