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국, 존 테리를 닮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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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1%의 가능성을 잡아라-② ‘포스트 홍명보’ 조병국 지난 28일 발표되었던 새로운 국가대표팀 명단을 보면서 이관우 최성국 권집 등과 함께 필자의 눈에 띄는 반가운 이름이 있었다. 바로 성남의 ‘국가대표급 포백’을 이끌고 있는 조병국 선수였다. 일찌감치 ‘포스트 홍명보’란 찬사와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한국 축구를 책임질 대형 수비수로 승승장구했었지만, 조병국의 축구인생은 그런 기대와 찬사에 걸맞지 않은 것들이었다. 최소한 성남으로 이적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 일본, 일본, 일본... 지난 2003년 4월 16일, 서울 월드컵경기장에서는 일본과의 친선경기가 열렸었다. 라이벌 팀 간의 경기답게 전후반 내내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었고, 경기는 득점 없이 0-0으로 끝을 맺는 듯 보였다. 경기장을 가득 메운 6만 4천여 명의 축구팬들은 일본을 통쾌하게 꺾어주길 기대했지만, 그 바람은 다음으로 미뤄야 하는 것처럼 보였다. 주심의 경기 종료 호각을 기다리던 후반 추가시간, 일본의 마지막 공격이 이어지고 있었다. 우리 진영 아크 외곽에서 일본의 나가이 유이치로가 슈팅을 쏘았는데, 골문 앞을 지키던 조병국이 나가이의 슈팅을 슬라이딩하며 걷어냈다. 하지만, 조병국이 애써 걷어낸 공은 문전으로 쇄도하던 나가이의 발에 다시 맞고 말았고, 이 공은 이운재의 키를 훌쩍 넘겨 그래도 골망을 흔들었다. 결코, 원하지 않았던 결과였지만 조병국의 이 실수로 한국은 일본에 어이없고 기분 나쁜 승리를 헌납하고 말았고, 최선을 다해 경기장을 누빈 조병국의 마지막은 참으로 허탈하고 쓸쓸한 것이었다. 팬들은 자책골에 가까운 실수를 범한 조병국을 비난하기 시작했고, 조병국은 오랫동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일본과의 악연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같은 해 7월 23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한국과 일본 올림픽대표팀의 친선경기에서 올림픽대표팀의 신분으로 경기에 출전한 조병국은 다시 한 번 통한의 눈물을 흘려야 했다.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던 승부의 추는 전반 21분 최태욱이 시원한 중거리 슈팅을 터트린 한국 쪽으로 급격하게 기울었다. 대표팀과 축구팬들은 환호했고, 지난 4월의 어이없는 패배를 막 갚아주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그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반격에 나선 일본의 이시카와가 우리 진영 아크 왼쪽에서 강한 중거리 슈팅을 연결했고, 이 공은 거짓말처럼 또 다시 조병국의 발을 맞고 굴절되어 그대로 골문 안으로 빨려들어갔다. 또 다시 거짓말 같은 자책골을 기록하자 조병국은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고,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수비수로서는 기억하기도 싫은 기억이 두 번이나 연이어 대표급 경기에서 그것도 일본전에서 터져 나왔고, 조병국에 대한 비난 여론은 끊이지 않았다. 100번의 선방에도 불구하고 1번의 실수가 치명적인 수비수이기에 조병국이 받은 상터는 더 크고 깊었다. 당시 22세의 어린 유망주는 그렇게 한풀 꺾였고, 조병국은 긴 슬럼프에 빠지고 말았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조병국은 수비수로서 한국이 8강에 오르는 데 기여했지만, 아직도 일본전에 대한 악몽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많은 팬이 아직 조병국을 완전히 용서하지 못했었다. 부상, 그리고 트레이드 2002년 조병국은 연세대를 중퇴하고 수원 삼성에 입단했다. 홍명보의 대를 이을 중앙 수비수란 기대감으로 조병국을 지켜보는 눈은 많았다. 당시 국가대표팀 감독이었던 움베르투 코엘류 감독도 조병국에 대해 ‘아시아에서 찾기 힘든 대형 수비수’라며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때부터 조병국의 바쁜 ‘대표’ 생활은 계속 되었다. 수원 삼성의 소속팀 일정은 물론이고, A 대표팀과 올림픽 대표팀을 두루 뛰어다니며 그야말로 강행군을 계속해야 했다. 더군다나 당시는 홍명보의 은퇴로 차기 중앙 수비수를 선별하는 작업이 한창이었던 터라, 조병국의 피곤한 이중 삼중 생활은 계속되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뛰어다닌 지 1년을 조금 넘겼을까? 조병국의 몸에 조금씩 무리가 찾아왔고, 이 무시 못 할 피로의 누적은 곧바로 잦은 부상으로 연결되었다. 2004년에는 같은 발목을 무려 3번이나 부상당했고, 어깨 탈구는 습관성이 되어버렸다. 부상이 이어지자 소식 팀인 수원의 경기는 고사하고 대표팀에서도 점점 멀어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재활에만 매달려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월드컵을 2년도 채 남겨두지 않았던 당시, 조병국의 마음은 지친 몸 상태보다 더욱더 지치고 조급해졌다. 그가 그라운드에 나서는 시간이 조금씩 줄면서 그를 기억했던 팬들은 하나 둘씩 그를 잊어갔고, 조병국은 지난 일본전에서의 실수를 만회할 기회는커녕 리그 경기에도 출전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2005년 1월. 조병국은 팀 동료인 고종수와 함께 전남으로 트레이드되었다. 김남일과의 트레이드였다. 이 상황에서도 조병국은 이적의 중심이 되지 못했고, 팬들의 시선은 싼값에 팔리는 조병국 대신, 허정무 감독 아래서 부활을 기대하는 고종수와 수원의 새로운 중원 해결사를 맡을 김남일에게만 쏠려 있었다. 벌써 많은 사람이 조병국을 잊어버린 것이었다. 전남에서도 부상으로 출전 기회를 잡지 못하던 조병국은 다시 성남으로 이적했고, 잦은 이적과 끊이지 않는 부상으로 자칫 ‘그저 그런 선수’로 전락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마저 들게 했었다. 존 테리를 닮은 센터백, 조병국 작은 신장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탄력을 이용한 탁월한 헤딩 능력과, 수준급의 위치 선정은 가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첼시의 센터백인 존 테리를 떠올리게 한다. 비슷한 신체조건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플레이 스타일과 경기에 임하는 투지가 참 많이 닮았다. 존 테리는 중앙 수비수로서 그리 크지 않은 키지만 이런 신체적인 약점을, 높은 점프력과 빠르고 정확한 판단력 그리고 놀라운 예측 수비로 커버하고 있다. 조병국이 아직 존 테리에 버금갈만한 실력과 경기를 펼치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가끔 조병국의 경기를 지켜보노라면 프리미어리그의 그가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만큼 닮았다. 성남으로 이적한 조병국은 이른바 ‘국가대표급 포백 라인’을 김영철과 함께 이끌며 성남의 전기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가끔 경기 집중력이 떨어져 불안함을 보이는 문제점은 말끔히 해결하지 못했지만, 이번 시즌 조병국의 경기력은 ‘포스트 홍명보’라 불렸던 과거의 투지 넘치는 그의 모습에 많이 근접했다. ‘일본’의 악몽에서도 벗어난 듯했고, 무엇보다 빠른 판단력이 정상 궤도에 오른 모습이었다. 그리고 몸싸움에서도 밀리지 않으면서 조금씩 대형 센터백으로 성장해나가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잃어버렸던 자신감을 찾았다는데서 기인한다. 조병국은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에 ‘포스트 홍명보’라는 기대를 받으며 성장했지만, 홍명보와 너무 다른 길을 걷고 있다. 그리고 홍명보란 이름에 어울리는 경기를 펼치기엔 아직 갈 길이 멀다. 하지만, 현재 한국 축구에서 조병국만큼 홍명보에 근접한 잠재력을 갖고 있고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선수 또한 없다. 그만큼 아직 조병국에게 거는 기대는 크다. 그리고 선수는 팬들과 축구계의 그런 기대를 경기력으로 보답해야 할 의무가 있다. 조병국의 어깨가 더 무거워져야 할 이유다. 존 테리를 닮은 한국 축구대표팀의 차세대 센터백 조병국. 불운했던 지난날의 터널은 이제 완전히 빠져 나왔다. 지금부터 한국 축구를 위해, 그리고 자신을 위해 더 큰 선수로 다시 태어나길 기대해본다. |
(펌글)
축구에 관심있는 분들은 조병국을 알지만...
그러면 존테리는 아는가?
열심히 축구를 보고 관심을 갖는 수 밖에 없습니다.
다른것도 할 일이 많고 바쁜데...
그러면 할 수 없고...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배우고 알고 노력하면,
차별화되고 한단계 업그레이드된 축구를 할 수 있다고..
그리고 오늘은 말복인데
여러분들은 어떠한 보양식으로 하루를 보내는지 궁금합니다.
삼계탕,보신탕,오리백숙,닭백숙...
돌아가신 장모님께서 해주신 토종닭(노란 국물)백숙과 장인께서
직접 잡은 보신탕은 생각하면...

★...충남 예산군 덕산면 수덕사에서 석달간의 여름철 집중 수행인 하안거에 들어갔던 스님들이 8일 해제일(종료일)을 맞아 안거를 마치고 만행을 떠나기 위해 사찰을 나서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