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에게도 박수를!(펌글-정윤수칼럼)

2006. 1. 30. 오전 9:40:42

글자
심판에게도 박수를!
[종횡무진 1] 공격축구를 지향하면서 심판의 역할도 적극적으로 변화
 
축구 규정의 역사는 속도와의 전쟁이다. 국제축구연맹(FIFA)이 때로는 주저하며 승인하고 때로는 저돌적으로 추진했던 규정의 변천은 한마디로 '어떻게 하면 축구를 원시 시대의 감정 상태로 되돌릴 수 있는가'하는 노력의 일환이다.

축구의 매력은 한마디로 원시성. 모든 구기 종목은 전후반, 회, 세트, 쿼터 등으로 경기 시간을 제한하여 치르는데 유독 축구만이 이 제한성을 가볍게 무시한다. 야구의 경우 9회말에 이르기까지 무려 17번이나 공수를 교대하고 그 사이에 경기시간만큼이나 쉰다. 그러나 축구는 쉬지 않는다. 골키퍼가 공을 잡고 시간을 끌 경우 여지없이 옐로 카드를 받는다. 축구는 배구, 탁구, 테니스 등과 달리 상대 진영을 철저히 유린함으로써 승패를 결정짓는다. 한마디로 종횡무진, 상대 진영을 누비는 것이 관건이다. 점수 체계 역시 엄숙하다. 어떤 상황에서 넣어도 단 1점이다. 만루 홈런이나 3점 슛이 없다.

▲ 2002 월드컵 16강전에서 이탈리아를 꺾고 승리한 한국 대표팀의 세러모니
이처럼 축구는 고도 산업화 시대에 저 먼 원시 시대의 초원을 향해 거꾸로 달려가는 폭주 기관차다. 이처럼 온갖 제도와 규율을 이탈하여 드넓은 그라운드에서 펄펄 뛰는 축구에 대하여 인류는 열광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딜레마가 발생한다. 원시 상태를 동경하는 것이 축구라지만 마냥 원시 상태로 돌아갔다가는 순식간에 축구장은 폭력의 아수라장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어깨싸움이 '어깨들의 싸움'이 되고 태클이 상대방에게 영구적인 장애를 입히는 전술이 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축구가 아니며 동네 불량배들을 끌어 모아 치르는 난투극일 뿐이다.

이 대목에서 심판이 등장한다. 심판은 핸들링이나 골라인 아웃을 판정하는 단순한 역할을 떠나서 '원시성을 동경하는 선수와 관중의 욕구를 일정하게 충족시키면서 동시에 그것이 폭력의 장으로 변질되지 않게끔 조정'하는 역할까지 한다. 휘슬을 자주 불어도 안 되고 너무 안 불어도 탈이 난다. 자주 불면 원시적인 역동성이 상실된다. 경기가 재미없어진다. 선수는 뛸 맛이 안 나고 관중은 구경하는 재미가 없다. 그러니 휘슬을 아껴야 한다. 그러나 아끼면 아낄수록 폭력의 강도는 세진다. 팔꿈치로 코뼈를 가격하는 일이 심심찮게 일어난다.

▲ 선수들은 종종 심판에게 판정에 대한 설명을 요구한다. 그러나 심판은 그것을 설명할 의무가 없다
그런 점에서 심판을 'referee'라고 쓰는 것은 역설적이다. 난민을 뜻하는 'refugee'처럼 어미 '-ee'는 자기가 능동적으로 상황을 열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외부 요인에 의해 수동적으로 행동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가령 야구의 경우 심판을 'umpire'라고 쓰는데 이 때 어미 '-re'는 '-er'과 같은 뜻으로 자기 스스로 능동적으로 행동을 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teacher(교사)', 'pitcher(투수)', 'trainer(트레이너)' 등이 그 예인데 축구의 경우 심판이 어미 '-ee'를 달게 된 것은 지금 심판의 중대한 의무에 비추어보면 다소 역설적이다.

하지만 축구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그만한 까닭이 엿보이기도 한다. 축구에 심판이 없었던 시절, 영국의 옛 기록에는 마을 대항 축구가 끝나면 그 현장이 완전히 초토화 돼 부상자에다 심지어 사망자까지 발생했다고 한다. 그러니 다소간의 규칙을 정하고 심판의 역할을 둘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이 일종의 공식기록으로 남은 것은 1845년 영국의 이튼 스쿨에 심판이 처음 등장했다는 점, 크리켓 경기를 본떠 애초는 엄파이어(Umpire)라고 불렀다는 점, 1891년에 두 명의 엄파이어를 선심(Linesman)으로 보내고, 주심(Referee)이 경기를 관장하도록 했다는 점이다. 여기에 남은 시간을 계시하거나 선수 교체를 진행하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대기심(The Fourth Official)이 등장하는 것 정도를 더하면 지금의 축구 심판 형태가 정해진다.

그럼에도 역시 축구는 아드레날린이 폭발 일보 직전인 건각들이 뛰는 운동이고 그것을 관장하는 자 역시 '사람'이다. '사람이 하는 일인데' 완벽할 수 없는 것이 판정이고 그 때문에 울고 웃는 것이 또한 축구의 운명이다. 물론 개선해야 한다. 지난 2002 월드컵을 치른 후, FIFA가 심판 제도와 몇 가지 규칙에 대해 개선하려고 했던 것은 1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현대 축구지만 그 순간의 격렬함을 정확히 판정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반증하는 셈이다.

▲ 한 편의 축구 경기를 위하여 터치라인 바깥에 많은 사람들의 조연들이 있다
현재 FIFA는 좀더 공격적인 축구를 유도하고 골도 많이 작렬시키도록 해 그에 따라 관중도 많이 들고 시청률도 높아지도록(결과적으로 피파의 수입도 불어나는) 유도하고 있다. '공격적인 축구'를 지향하는 룰의 개정, 그에 따른 심판 역할의 적극적 변화는 의미 있는 일이다.

하지만 현행 축구 규칙을 지나치게 세밀하게 만들고 필요 이상으로 추가하여 축구의 '원시성'이 훼손되는 일은 피해야 한다. 완벽을 추구하지만 신의 영역으로 돌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그라운드의 숙명, 곧 시지프스의 바윗돌 아닌가.

지난 2002 월드컵의 경우, 독일을 결승에 진출시키고도 옐로 카드 누적으로 정작 자신은 결승전에 뛸 수 없어서 라커룸에서 펑펑 울었다는 독일의 미카엘 발락. 그러한 운명의 슬픔을 없애기 위해 결승전에 오르면 모든 카드를 소멸시키기로 하자는 식의 개정이 생긴다면 선수 개인에게는 행복이겠으나 축구가 지닌 '원시적 숙명성'은 훼손되는 것이다. 우리는 발락의 울음을 통해 삶의 불가피성을 함께 슬퍼하며 숙연해지는 것이다.

심판의 수를 많이 두거나 실시간 비디오 판정이 도입되거나 하면 그때부터 그라운드의 속도는 한없이 느려진다. 휘슬 소리는 끝없이 울려 퍼지고 예민한 순간이 오면 우르르 비디오 모니터 앞에 모여 옥신각신하게 된다. 이는 속도의 미학이 파괴되는 결과를 빚는다. 축구는 여전히 '사람이 하는 일'이다. 사람이 하는 미성숙하고 섬세한 영역에 정밀광학기계가 깊숙이 도입되는 것은 우주의 섭리에 많지 않다.

▲ 90분 동안 헌신하기 위하여 경기 전에 몸을 푸는 심판들
심판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축구의 신이 아니라 사람이다. 사람이 하는 일에 완벽이란 없다. 그러나 완벽을 추구한다. 선수와 더불어, 때로는 선수들보다 더 열심히 뛰고 성찰하고 판단하고 결정한다. 실수도 있지만 그 땀 역시 아름답다. 그것을 세부적인 룰을 추가하여 억지로 '완벽'하게 만들려는 시도는 축구장의 휴머니즘에 어긋나는 일이다

댓글 1

  • 2006년 1월 31일 오전 1:48

    보고십은데 명절 세해 복마니 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