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에 보면 하느님은 당신의 말씀을 거슬러 선악과를 따먹고 풀숲에 숨어있는 아담에게 '너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하느님이 아담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그렇게 물으신 것이 아니지요.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전지전능한 하느님께서 아담이 어디 숨어있는지 모를리가 없으셨지요. 이 물음은 아담에게 자신을 살피라는 촉구입니다. '내가 따먹지 말라던 선악과를 따먹은 지금 네 상황이 과연 어떠냐? 좋으냐, 나쁘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아담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지요. 우리 각자에게도 해당됩니다. 오늘도 하느님은 우리 각자에게 '너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내가 원하고 네가 목표로 한 모습에 가까이 가고 있느냐, 아니면 더 멀어지고 있느냐?'하고 물으십니다. 자신을 살피는 물음은 마주 대하기가 버거워서 피하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 물음은 우리를 한 단계 도약하게 해주고, 잘못된 길에서 벗어나 올바른 길로 돌아오도록 촉구하는 물음입니다.
하지만 잘못된 물음도 있습니다. 이런 물음의 특징은 '너 어디 있느냐?'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서 '지금 네가 와 있는 데에서 너는 결코 빠져나갈 길이 없다'고 보태면서 '나는 틀렸어, 가망없어'하는 절망감을 불어넣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질문이고 그릇된 마음살핌입니다. 하느님께 돌아서서 길을 찾아들도록 사람을 재촉한는 대신 돌아선다는 것이 가망없다고 속삭이면서 궁지로 사람을 몰아넣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낙담 속에 가라앉게 하거나 독기와 오기 속에서 제 멋대로 살게 합니다.
마음 살핌의 끝은 하느님에게로 향하는 길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 길을 가리는 마음 살핌은 악마적 속임수일 뿐입니다. 전자는 스승을 세번 배반하고도 주님께로 돌아서서 구원을 받은 베드로의 길이고, 후자는 스승을 팔아넘기고 절망 속에 자신의 목숨을 끊은 이스가리옷 유다의 길입니다. 어느 길을 가시렵니까?
- 손희송 베네딕도 신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