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성인(9월16일)

2014. 9. 18. 오후 10:15:55

글자

♡9월 16일 오늘의 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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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고르넬리오(Cornelius)
 
축일  9월 16일 

로마(Rome)의 사제이던 성 코르넬리우스
(또는 고르넬리오)는 성 파비아누스(Fabianus)의
순교 이후 거의 14년 동안이나 지연되어 오던
로마의 주교로 선출되는 영광을 얻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교황 선출이 지연된 것은
데키우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문이었다.

그의 재임 기간에 이룬 주요 업적은
박해 동안에 배교를 선언했던 신자들과의
화해 정책이다. 그는 배교자들의 합당한 통회를
요구하지 않는 사람들을 단죄한 반면,
배교를 용서받을 수 없는 죄로 단죄하고,
교회가 그런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없다고 주장하던
노바티아누스(Novatianus) 일파를 공격하던
카르타고(Carthago)의 주교 성 키프리아누스
(Cyprianus)를 끝까지 옹호하였다. 한편 그는
배교자를 용서하는 권한이 교회에는 없을 뿐더러,
이제 자신이 교황이라고 선언했던 로마의 사제
노바티아누스와 그를 정점으로 모인 엄격파들을
단죄하여 교회의 평온을 회복하였다.
노바티아누스는 첫 번째 대립 교황이었다.

노바티아누스의 극단주의를 옹호하는 무리들은
재차 힘을 규합하였고, 동방에서 크게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러므로 코르넬리우스는
교회가 통회하는 배교자들을 용서하는
권한이 있음을 재천명하기에 이르렀다.
코르넬리우스의 제의로 251년 10월에 개최된
서방 주교들의 시노드(Synod)는
노바티아누스 일파의 가르침을 단죄하고,
교회의 질서를 바로 잡았다.

황제 갈루스가 253년에 또 다시 그리스도교
박해를 재개하자, 그는 첸툼첼레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당한 모진 고문의 후유증으로 인하여
순교자로서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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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니니안 (NINIAN) 니니아노(Ninian)
 
축일  9월 16일 

니니안, 니니아 혹은 닌니드 등으로 불리는
성 니니아누스(Ninianus, 또는 니니아노)는
성 베다(Beda) 시대의 사람이다.
성 아일레드(Aelred)가 기술한 니니아누스의
생애에 의하면, 그는 쿰브리안 브리턴의
어느 개종자의 아들로서 로마(Rome)에서
공부하고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 후
다시 칸디다 카사의 주교가 되어 고향
브리튼의 선교사로 돌아온 그는 참으로
열렬하게 복음을 전했다. 그는
투르(Tours)의 성 마르티누스(Martinus)
수도원에서 대리석을 가져다가 초석을 놓고
성당을 세웠는데, 이것이 ‘화이트 하우스’로
널리 알려졌고 선교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와 그의 수도자들의 노력에 의하여 인근의
브리턴인들과 발렌시아(Valencia)의
픽트인들이 개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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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둘치시마(Dulcissima)
 
축일  9월 16일 

성녀 둘치시마에 대해 알려진 것은 오로지
그녀가 옛 교황령이었던 이탈리아
수트리의 수호성인이라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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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로젤로(Rogellus)
 
축일  9월 16일 

성 로겔루스(또는 로젤로)는 그의 제자인
성 세르부스 데이(Servus Dei, 1월 13일)와
함께 순교하였다. 그는 에스파냐의 수도승으로
이슬람교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비난한 죄로
무언인들에 의해 코르도바(Curdoba)에서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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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루도비꼬 알러망 (L. Allemard ) 

축일 : 9월 16일

그는 베일리에서 14세기 말에 태어나
아비뇽 대학교에서 법률을 공부하여 박사학위를
받았고, 1409년에는 삼촌을 따라 피사 시노드에
참석하여 서방의 대이교 논쟁에 말려들게 되었다.
그는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된 마르띠노 5세를
지지하므로써 대이교의 막을 내리게 하는데
기여한 공로로, 마그론느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1423년, 그는 아를르의 대주교로 또 추기경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또 한차례의 격동기를 맞아
그는 로마에서 감금 되었지만, 아주 과감한
탈출에 성공하여 아를르 교구로 돌아왔다.
그의 시대는 한마디로 교회가 영혼 구령보다
외적인 여러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될 때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보여주던 때의 주요
인물이었다. 내적으로 아무리 거룩하더라도
교회의 외부 일에 휘말리면 어쩔 수 없는 문제에
직면하는 그러한 시대를 큰 대과 없이 살았다.
그는 가능하면 통회자의 삶을 살려고 노력했던
분으로 공경받는다. 그의 유해는
성 트로피모 성당에 안장되어 공경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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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루드밀라(Ludmila)
 
축일  9월 16일 

성녀 루드밀라는 슬라브 왕자의 딸로 태어나
보헤미아(Bohemia)의 공작 보리보이와
결혼하였는데, 남편도 자신이 다니던 성당의
성 메토디우스(Methodius)로부터 세례를 받게
하였다. 그들은 보헤미아의 첫 번째 성당을
세웠다. 그러나 왕가에서는 이 신흥종교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반대하기 시작했고,
설상가상으로 남편마저 운명하였다.
그녀는 덕스럽고 배움이 많은 부인이었다.
그녀는 늘 주민들을 돕고 있었기에 백성들은
그녀의 높은 덕을 늘 칭송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을 싫어하던 왕가의 손에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그녀는 체코에서
더 많은 공경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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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루치아(Lucy)

성 게미니아누스(Geminianus)
 
축일  9월 16일 

이탈리아 로마(Rome)의 순교자인
성녀 루치아(Lucia)는 중년을 넘은 부인이었고,
성 게미니아누스(Geminianus)는 젊은 교리교사였다.
그러나 그들의 역사를 신뢰할 수 없는 이유로 인해
1969년 그들에 대한 공경이 금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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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마르치아노(Marcian) 

성 아분디우스(Abundius)

성 아분단티우스(Abundantius)

축일  9월 16일 

로마 순교록에 의하면 사제인
성 아분디우스(Abundius)와 부제인
성 아분단티우스(Abundantius)는 로마(Rome)의
플라미니아 가도에서 순교했는데, 헤라클레스를
숭배하라는 명을 받고 거절하자 칼로
살해되었다고 한다. 그들의 유해는 1583년
예수 성명 성당에 안장되었다. 그런데
성 아분디우스가 사형장으로 가는 길에
로마의 원로원 의원인 성 마르키아누스
(Marcianus, 또는 마르치아노)가 방금 죽은
아들 성 요한(Joannes)을 안고 비통에 잠겨
지나가고 있었다. 성 아분디우스가 성 요한을
위해 기도하자 그 소년은 다시 살아났다.
그래서 성 마르키아누스와 성 요한은
그 자리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
그리고 함께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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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빅토르 3세(Victor III)
 
축일  9월 16일 

다우페리오 베네벤토 공작의 외아들인
다우파르는 베네벤토에서 태어났는데,
억지로 결혼시키려는 부친의 뜻을 늘 반대하고
지내던 중, 부친이 1047년의 전투에서
전사하자 은수자가 되었다. 그러나 가족들이
그를 억지로 집으로 끌고 갔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집에서 지내는 척 하다가
일 년 뒤에 다시 집을 뛰쳐나왔다.
그는 가족들이 찾지 못하도록 일부로
고향 마을에 있는 성 소피아 수도원에 살면서
이름을 데시데리우스라고 개명하였다.

그는 그 후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방랑생활을
하였으며, 살레르노(Salerno)에서는
의학을 공부하기도 하였다. 1053년에는
교황 레오 9세를 도와서 노르만인들과의
평화협상을 시도하였으며, 다음 해에는
빅토르 2세의 궁에서 활동하였다.
1054년 그는 몬테카시노(Monte Cassino)의
베네딕토회에 입회하여 원장, 교황청 대사
등을 역임했는데, 1058년에 교황으로
선출된 뒤에도 몬테카시노의 원장으로
계속 머물러 있었다.

그는 몬테카시노를 재건하고, 이 수도원을
유럽 학문과 문화의 전당으로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건축물과 예술 그리고 수도원의
규칙 등으로 특히 유명한 수도원이 되게 하였다.
그는 빅토르 3세란 이름으로 그레고리우스
(Gregorius) 교황을 계승하여 1086년 5월 24일에
착좌할 수 있었지만, 황제 측의 농간으로
1087년 5월 9일까지 착좌할 수 없었다.
이때의 대립교황은 클레멘스 3세(Clemens III)였다.
그는 불과 만 4개월 동안 교황직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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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비딸리스(vitalis)

축일 : 9월 16일

성 비딸리스는 은수자로 살던 중에
자기 주변에 모여든 제자들과 함께
노르망디와 브리타니의 접경 지대인
사비니에 대수원을 세운 분이다.
그는 나중에 유명한 설교가로서 수많은
사람들을 개종시켰다. 그가 잉글랜드를
여행하면서 설교한 기록도 남아 있다.
그는 성모 축일 성무일과를 주도하던 중에
선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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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세바스티아나(Sebastiana)
 
축일  9월 16일 

교회 전승에 의하면 성녀 세바스티아나는
사도 바오로(Paulus)의 제자로 신앙 때문에
순교하였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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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에디타(Edith)

축일  9월 16일 

성녀 에디타(Editha)는 잉글랜드(England) 국왕
에드가(Edgar)와 울프리다(Wulfrida)의 딸이다.
그녀의 어머니가 어린 딸을 솔즈베리(Salisbury)
근교의 윌튼에 있던 수녀원에 맡겼기 때문에
그녀는 이곳에서 짧은 생애를 마쳤다.
그녀는 윌튼 뿐만 아니라 다른 수녀원의
원장이 되는 것을 항상 거절하였는데,
그 이유로써 항상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우리는 모두 마르타와 같이 겸손한 자세로
자매들에게 봉사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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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에우페미아(Euphemia)
 
축일  9월 16일 

고대 저술가들과 교회는 성녀 에우페미아에
대하여 큰 소리로 찬양하고 있으나
기록상으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는 실정이다.
그러나 451년에 공의회가 열린 칼케돈
(Chalcedon)을 포함하여 수많은 지역에서
그녀를 높이 공경하고 있음은 사실이다.
그녀는 아마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당시에 순교한 듯하다.
당국이 그녀에게 온갖 고문을 다하였어도
죽지 않자, 마침내 야생 동물에게 던져 죽게
하였다고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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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치프리아노(Cyprian)
 
축일  9월 16일 

북아프리카 카르타고 출신으로 보이는
성 타스키우스 카이킬리우스 키프리아누스
(Thascius Caecilius Cyprianus, 또는 치프리아노)는
이교인 수사학자이자 법률가였고 또 교사였다.
그는 246년경에 노사제인 코일리키우스
(Coelicius)에 의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46세였다. 그는 즉시 당대의
저명한 성서학자이자 유명한 저술가가 되었다.
그는 곧 사제로 서품되었고, 2년 만에 카르타고의
주교로 축성되었다. 키프리아누스는 249년에
일어난 데키우스(Decius)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피신하였으나, 은밀히 피신처에서 편지
등을 보내는 방법으로 자기 교구를 계속
지도하였다. 그러나 그의 피신에 대한 논란이
끊임없이 계속되어 251년에 교구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미 많은 교구민들이 박해 동안에
배교하였고, 또 자신의 주교 선임을 반대하던
사제 노바티아누스(Novatianus)가 이단에
빠져 있음을 알았다. 노바티아누스 신부는
배교한 신자들에게 아무런 회개 행위도
요구하지 않고 교회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키프리아누스는 그의 지나친 관대함을 나무라고,
박해 당시 배교한 이들에 대한 교회의 규율이
준수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죽을 위험에 처한 배교자를 제외하고는
새 교황이 선출되기 전까지 배교자를
받아들이는 문제를 유보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251년 3월 교황으로 선출된
코르넬리우스(Cornelius)가 배교자들에게
관용과 용서를 베풀자, 노바티아누스는
지금까지의 입장을 바꾸어 배교자들은 영원히
교회에서 추방되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을
내세우는 배타적인 엄격주의자로 돌변하였다.
로마(Rome)의 주교로 선출될 것을 기대했던
그는 자신을 지지하는 주교로부터 주교품을
받고 대립교황으로 등장하며 이교적인 그룹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즈음에 키프리아누스는
그의 유명한 저서인 “가톨릭 교회의 일치”를
썼다.

252-254년 사이에 카르타고에는 몸서리치는
페스트가 창궐하였다. 키프리아누스는
온갖 수단을 강구하여 이를 물리치려고
노력하였으나, 그를 반대하는 신자들은
페스트를 키프리아누스의 탓으로 돌리고
비난하며 격렬하게 항의하기도 하였다.
이런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그는
“윤리에 대하여”란 책을 저술하였다.

그 후 얼마 뒤에 그와 아프리카의 다른 주교들은
교황 성 스테파누스 1세(Stephanus I)와의
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왜냐하면 교황은
이단자들과 분리주의자들이 베푼 세례도
유효하다고 인정한 반면, 그들은 이를 극구
반대하였기 때문이다. 255-256년에 열린
아프리카 회의는 이단자로부터 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재세례를 요구하는 결정을 내렸고,
키프리아누스는 교황 스테파누스 1세와
격렬한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

이 당시 로마 황제는 그리스도교의
모든 집회를 금지하고 또 모든 주교와 사제와
부제들이 로마제국의 공식 종교 예식에
참여할 것을 요구하는 칙서를 반포하였다.
키프리아누스는 이를 완강히 거부하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지방 총독인 파테르누스에
의하여 카르타고에서 50마일 거리에 있는
쿠루비스로 유배되었다. 또 다음해에는
모든 주교와 사제 그리고 부제들을
사형에 처하라는 황제의 칙령이 내렸다.
키프리아누스는 새 총독인 갈레리우스
막시무스가 부임하기 전에 소환되었는데,
그는 끝까지 이교도의 신에게 희생 제물
바치기를 거부하고 결국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그는 교회, 사목, 성서, 동정
그리고 배교자 문제에 관하여 수많은 신학
논문을 남겼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교
라틴 문학의 선구자로 추앙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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