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0일 오늘의 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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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데레사 요르넷 이바르스(Teresa Jornet Ibars)
축일 : 8월 20일
카탈로니아 태생인 복녀 데레사는
수도회를 창설하기 전에 학교 교사로 지냈다.
그녀는 "경로 수녀회"를 창설했고,
1957년에 시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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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레오비질도(Leovigild)
성 크리스토포루스(Christophorus)
축일 8월 20일
성 레오비길두스(Leovigildus, 또는 레오비질도)와
성 크리스토포루스(Christophorus)는
에스파냐의 코르도바(Curdoba)에서 통치자
아브탈 라흐만 2세(Abd ar-Rahman II) 치하에서
순교하였다. 성 레오비길두스는 사제였고
성 크리스토포루스는 수도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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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루치오(Lucius)
축일 8월 20일
원로원 의원이었던 성 루키우스(또는 루치오)는
아프리카 프톨레마이스(Ptolemais)의
키레네(Cyrene)에서 동료들과 함께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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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마리아 데 마씨아스(M.Mattias)
축일 : 8월 20일
마리아 데 마씨아스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흠숭하고,
어린이의 교육 사업을 목표로 하는 수녀회를
창설하고, 비오 11세의 인가를 받았다.
변호사이던 요한 데 마씨아스씨의 맏딸로 태어난
그녀는 라지오와 캄파니아 사이의 발레꼬르사에서
자랐고, 가스팔 델 부팔로 성인의 사업을 듣고
큰 감명을 받은 차에, 그분의 제자이며 후일 자신의
지도자가 되신 가경자 요한 멜리니 신부를
만나게 되었다. 1834년, 그녀는 소속교구의
주교로부터 학교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자,
단지 여교사가 되는게 아니라, 수도회의 창설을
꿈꾸고, 다음해부터 동조자를 물색케 되었다.
1837년, 그녀는 가정의 어머니들을 위하여
"영신수련"을 지도한 게 큰 성공을 거두게 됨으로써
부모들이 학교에 관심을 갖게 만들었으며,
1840년에는 두 번째 학교 문을 열었다.
이리하여 이 수녀회로 날로 발전하여 오늘에
이르는 것이다. 그녀는 수도회의 확장을 위하여
애쓰던 중, 로마에서 운명하니, 61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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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막시모(Maximus)
축일 8월 20일
프랑스 투르(Tours)의 주교
성 마르티누스(Martinus)의 제자인
성 막시무스(또는 막시모) 수도원장은
투르에 시농(Chinon)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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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르나르도(Bernard)
축일 8월 20일
테셸랭 소렐(Tescelin Sorrel)과
몽바르드 영주의 딸 알레(Aleth)의 아들인
성 베르나르두스(Bernardus, 또는 베르나르도)는
부르고뉴(Bourgogne) 디종(Dijon) 근교의
가족 성(城)인 퐁텐(Fontaine)에서 일곱 아들
가운데 셋째로 태어났다. 그는
샤티용(Chatillon)에 가서 공부하면서 청운의 꿈을
펼치고 있었으나, 1107년 어머니의 죽음으로
많은 충격을 받고서 수도생활을 추구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원래 시토회의 설립자 3명 가운데 한 명은
아니었지만 흔히들 그를 시토회의 설립자로 부른다.
그가 새로운 수도회인 시토회에 입회한 해는
1112년 4월인데, 그 때 그는 자기 형제 4명을
비롯하여 모두 30명의 친척, 친구들과 함께
베네딕토회 규칙의 엄격한 해석을 따르기 위하여
1098년에 설립된 시토회에 들어갔다. 그들은
원장이던 성 스테파누스 하딩(Stephanus Harding)
으로부터 대단한 환영을 받았다.
1115년에 베르나르두스는 스테파누스 하딩의
지시에 따라 12명의 수도자와 함께 부르고뉴와
샹파뉴의 경계지역에 있는 클레르보라는 고립된
계곡에 수도원을 세우기 위해 파견되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엄격한 규율과 엄격성 때문에
약간의 어려움에 봉착하였으나, 그의 성덕이
수많은 제자들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이때 그 수도원의 이름을 발레 답신트에서
클레르보로 바꾸었고, 당시 68개의 시토회
수도원의 모원이 되었다.
그 후 베르나르두스는 자신의 학덕과 지덕을
활용하여 수도원의 외부 일을 처리하게 되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유럽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사 중의 하나가 되어 통치자와 교황의 자문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그는 대립교황인
아나클레투스 2세의 요구에 대항하여 1130년의
인노켄티우스 2세(Innocentius II) 선출의
합법성을 지지하였다. 또한 그는 로테르 2세를
황제로 인정하도록 롬바르디아(Lombardia)
사람들을 설득시키는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1140년부터 그는 공적으로 설교하는 일을
시작하여 놀라운 명성을 얻었다.
1145년에는 전에 클레르보의 수도자이던
에우게니우스 3세(Eugenius III)가 교황으로
선출되자, 그는 교황직의 의무에 대한 글을
교황 앞으로 보내어서, 로마(Rome) 교황청의
남용을 자제하고, 교황이 항상 목전에 두어야 할
종교적 신비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였다.
교황 에우게니우스는 그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었으므로, 그를 랑그도크(Languedoc)에
파견하여 알비파(Albigenses) 이단을 대항하여
설교토록 하였고, 프랑스와 독일에 제 2차
십자군 원정의 열기를 북돋우는 특사로 임명되었다.
이러한 여러 가지 활동과 심각한 건강 문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왕성한 저술가로도
유명하다. 그의 서한과 “아마(Armagh)의
성 말라키아의 생애” 그리고 “신애론”이
영어로 번역되었고, 자신의 수도자들에게 행한
강론은 “아가”로 묶었다. 그는 자신의 저술과
설교에서 성서를 광범위하게 인용하는 이유를
“말씀을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박아 주기 위함”
이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그의 저서와
신심은 오늘의 신자들에게도 깊은 감명을
주고 있다. 그는 다양한 기질과 믿음을 가진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으며,
‘꿀처럼 단 박사’(Doctor Mellifluus)란
칭호를 얻었다. 교황 비오 8세(Pius VIII)가
그를 1830년에 교회학자로 선언하였다. 그는
스콜라 학파 이전의 신학자이며, 때로는
‘마지막 교부’로 불리기도 한다.
그의 문장은 꿀벌통이고 양조업(자)의
수호성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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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위인, 그는 오늘날 '세기의 골키퍼' ,
'세기의 화해자'이제는 더 이상 어떤 편에서도
충격을 가하지 않는 '세기의 정당한 공격수'등
너무도 많은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그러나 그는 '12세기의 인물'이다.
여기에는 아무런 의심도 논쟁도 없다.
이 위대한 인물은 바로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이다.
교황의 조언자, 제2십자군의 설교자, 신앙의 옹호자,
분열의 치료자, 수도원의 개혁자, 성서 학자,
신학자이며 웅변적인 설교자,어떤 명칭에서도
그는 보통 사람과는 구별이 된다.
이 모든 자질이 있었음에도 베르나르도는
젊어서부터 은둔하는 수도 생활로 돌아가고자 하는
열망을 갖고 있었다.
1111년, 그의 나이 20세에 베르나르도는
시토 수도원에 들어가기 위해 집을 떠났다.
그의 다섯 형제와 두 명의 삼촌과 30명의
젊은 친구들이 그를 따라 수도원에 들어갔다.
쇠퇴해 가던 공동체가 4년 안에 베르나르도 아빠스와
더블어 '윔우드'골짜기 근처에 새집을 짓기에
충분할 정도로 생기를 되찾았다.
열성적인 이 젊은이는 타인에게보다도 자기 자신에게
많은 요구를 했다.
쇠약해진 몸이 그를 더욱 더 끈기 있고 이해심 있게
만들었다. 그 골짜기는 얼마 후 클레르보 즉
빛의 골짜기로 이름이 바뀌었다.
중재자로서, 상담자로서 그의 능력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수도원 문제에서부터 오래된 분쟁의 해결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마음을 쏟았다.
그는 로마의 몇몇 사람들의 감정을 건드린 경우도 있었다.
베르나르도는 교황의 수위권을 옹호하는 일에 헌신했다.
그는 로마로부터 온 걱정스러운 편지에 답하며
로마에 있는 훌륭한 사제들로도 교회의 일치를 이루기에
충분하다고 대답했다.
만일 그들의 관심을 끌 만한 어떤 일이 생겼다면
베르나르도가 제일 먼저 그들에게 알렸을 것이다.
그 후 베르나르도는 무수한 분열을 진압하고
대립 교황주의와 맞서 로마 교황에게 유리하도록
해결하였다. 로마 교황청은 베르나르도에게 전유럽의
제 2 십자군들에게 설교하도록 설득했다.
그의 설교는 너무도 열광적이어서 대부대가 모였고,
마치 십자군의 승리가 확실한 것 같았다.
그러나 군인과 그들 지도자들의 이상은
베르나르도 아빠스의 이상과는 달랐으므로
십자군 계획은 완전한 군사적 파멸과
윤리적 타락으로 끝이 났다.
베르나르도는 십자군의 타락에 대해 여러 가지 면에서
책임을 느꼈다.
이 무거운 부담이 그의 죽음을 재촉하여 그는
1153년 8월20일에 세상을 떠났다.
설명 ; 교회 안에서 베르나르도의 활동은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욱더 적극적인 것이었다.
그의 노력은 원대한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그는 이와 같은 활동들은 그에게 힘과
하느님의 가르침을 가져다 준 오랜 시간의 기도와
명상에서 도움을 받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일생은 성모님께 대한 깊은신심에 의한 것이었다.
성모님에 대한 그의 설교와 저서들은 아직도
마리아 신학의 기초가 되고 있다.
인용 ; "위험과 의심과 어려움에서 성모님을 생각하고
성모님을 부르시오. 그분의 이름을 계속 부르시오.
결코 당신 마음을 비우는 것을 괴로워 마시오.
그리고 당신은 성모님의 기도의 도움을 더욱 명백히
얻기 위하여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 걸어가는 것을
소홀히 하지 마시오.
성모님의 안내를 받으면, 당신을 결코
길을 잃지 않을 것이오.
그분이 당신 마음 속에 계신 한, 당신은 현혹되지 않으며
그분이 당신 손을 잡아 주시는 한 당신은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분의 보호를 받는다면 당신은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일 그분이 당신에게로 걸어오신다면, 당신은
권태롭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그분이 당신에게
호의를 보이신다면 당신은 목표에 도달할 것입니다."
(성베르나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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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사무엘(Samuel)
축일 8월 20일
히비르인들이 판관 시대의 느슨한 동맹 체제에서
중앙집권적 왕정으로 넘어가는 단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이가 기원전 11세기에 활약한
성 사무엘('하느님의 이름' 또는
'그의 이름은 하느님이다'라는 의미)이다.
그는 구약성서에서 당시 유대인 남자가 맡을 수 있는
지도자 역할, 즉 제사장 · 판관 · 예언자 ·
군대 지휘관 등을 모두 맡은 인물이었다.
사무엘 상권 1-16장에 나타난 사무엘의 활동은
주로 사울 왕의 활동과 관련되어 있다.
에브라임 산악지대에 사는 라마다임 출신의
수브 사람 엘카나와 그의 아내 한나는 야훼께
빌어서 아기를 얻었는데(1,1; 1,20), 이렇게
태어난 아기를 한나는 나지르인의 서원으로
실로 성소에서 봉헌하였다(1,11. 28; 2,11; 3,1).
엘리 사제 밑에서 야훼를 섬기던 소년 사무엘은
어느 날 밤 하느님의 계시를 받았는데,
그것은 불경한 아들들을 둔 엘리의 집안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이었다(3장). 이 계시는 사무엘이
‘야훼의 예언자’로서 활동하는 최초의
계기가 되었다.
4-6장은 히브리인들이 블레셋군에게 패하여
계약의 궤를 빼앗기고, 엘리의 가문이 멸망하고,
실로 성소가 파괴된 내용이다.
블레셋에게서 계약의 궤를 돌려받은 후에
사무엘은 판관이 되어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하라고 경고하였고,
블레셋의 침략으로부터 백성들을 구하였다(7장).
그는 이스라엘의 판관으로서 죽는 날까지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며, 해마다 베델과 길갈과
미스바를 순회한 후 자신의 집이 있는
라마(Ramah)로 돌아오곤 하였다. 그는
이스라엘을 두루 다스리며 야훼께 제사드릴
제단도 쌓았다(7,16-17). 사무엘은 나이가
많아지자 자신의 두 아들 요엘과 아비야를
판관으로 임명하고 브엘세바(Beer-Sheba)를
다스리게 하였다(8,1-2).
이어 서로 다른 왕정 설립 설화들이 언급되어
있는데, 사무엘은 시대의 피할 수 없는 요청에
부응하기 위해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웠다는 것이 그중 하나(9,1-10. 16)이다.
한편 또 다른 성서 구절(7,3-8,22; 10,17-19; 12,1-25)
에서는 백성들이 직접 투표로 사울을 왕으로
선택하였다고 나온다. 하지만 사무엘은 왕정
설립 요청이 이스라엘의 유일한 구원자요 왕인
야훼를 변절하는 행동이라고 비난하면서
마지못해 왕정 설립에 동의하였다. 사무엘은
특히 고별사에서 백성들에게 야훼의 명령을
거역하지 말라고 경고하였다(12장).
15장에 보면 사무엘과 사울의 사이는
돌이킬 수 없이 갈라진다. 사무엘은 죽는 날까지
사울을 두 번 다시 만나지 않았고, 야훼가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웠던 것을
후회한 일을 생각하며 통곡하였다(15,34-35).
이러한 내용은 앞선 성서 구절(13,13-14)에
이미 나와 있다. 다윗과 함께 나욧으로
내려가 있던 사무엘을 찾아간 사울이 그 앞에서
예언 황홀경에 빠져 버린 이야기(19,18-20)를
비롯하여, 사무엘은 죽은 후(25,1; 28장)에도
혼백으로서 계속해서 사울의 왕정사에
등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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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아마둘(Amadour)
축일 8월 20일
성 아마둘은 프랑스 로카마둘의 성모 성당의
전설적인 창립자이다.
그는 성녀 베로니카(Veronica)와 결혼하였는데,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 때 팔레스티나(Palestina)를
벗어나 프랑스 지방으로 가서 보르도(Bordeaux)
등지를 누비며 복음을 전하였다.
그는 로마(Rome)로 가서는 성 베드로(Petrus)와
바오로(Paulus)의 죽음을 증언하였으며,
다시 프랑스 지방으로 돌아와서 선교 활동과
병행하여 여러 곳에 수도원을 세웠다.
베로니카가 죽자 그는 케르시의 은수자가 되어
성모 성당을 지어 그녀를 추모하였다고 한다.
로카마둘이라 부르는 케르시의 성당은 가장
유명한 성소가 되었다. 어떤 이는 이 분이
곧 오세르(Auxerre)의 주교 성 아마토르(Amator)라고
하나 근거는 희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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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오스윈(Oswin)
축일 8월 20일
성 오스윈은 633년 그의 부친인 데이라의 국왕
오스릭이 웨일스(Wales) 왕 카드왈론에 의해
살해되었을 때, 웨식스로 잡혀가 그곳에서 세례를
받고 교육도 받았다. 성 오스왈두스(Oswaldus)가
머시아(Mercia)의 펜다 왕과의 전투에서 패함으로써
그가 데이라의 왕이 되었다. 그는 데이라의
그리스도교화를 위하여 헌신적으로 활동하던 중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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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필리베르토(Philibert)
축일 8월 20일
프랑스 남서부 가스코뉴(Gascogne) 출신인
성 필리베르투스(Philibertus, 또는 필리베르토)는
르베(Rebais)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으나,
수도자들 간의 불화 때문에 그곳을 떠나
클로비스 2세 왕이 하사한 네우스트리아(Neustria)의
땅에 쥐미에주(Jumieges) 수도원을 세웠다.
그 후 엉뚱한 사건에 연루되어 추방된 그는
누아르무티에(Noirmoutier) 섬에서 또 다른
수도원을 세우는 등 수도생활의 모범으로서
존경을 받았다.
오늘의 성인(8월20일)
2014. 8. 20. 오전 7: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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