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박해(辛酉迫害)
1801년(순조 1)에 일어난 가톨릭교도 박해사건으로 순교자가 52명이었다.
1800년(정조 24년) 6월(음) 천주교에 대한 비교적 온화한 정책을 써왔던 정조가 승하하자, 모든 정세는 천주교와 남인에게 더욱 불리하게 되었다. 정조의 뒤를 이어 순조(順祖)가 겨우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게 되고, 대왕대비(大王大妃) 정순왕후(貞純王后-영조의 계비) 김씨는 섭정이 되어 모든 정사를 마음대로 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왕대비는 원래가 노론벽파(老論僻派)에 속해 있었으므로, 집권하게 되자 천주교도들과 남인 시파(詩派)를 일망타진하려 하였다. 그러나 국상(國喪)으로 즉시 박해를 시작할 수는 없었다. 국상이 끝난 지 얼마 안된 그해 12월 17일(음)에 중인(中人) 최필공(崔必恭)이 다시 구속되고 그의 사촌 동생인 필제(必梯)가 잡혔다.
이어 정초에는 배교자 김여삼(金汝三)의 밀고로 서울의 회장 최창현(崔昌顯)을 위시하여 수많은 교인들이 잡혀 포청은 갇힌 사람들로 가득 찼었다. 이어 정월 10일(음)에는 공식 박해령을 내려,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에 의거, 전국의 천주교인을 빠짐없이 고발케하고, 회개하지 않는 자는 역적으로 다스려, 뿌리째 뽑도록 하라는 엄명을 전국에 내리었다.
엄명을 내린 지 9일 만인 10(음)일 명도회장(明道會長) 정약종(丁若鍾)의 책고리짝이 발각되는 뜻하지 않은 사건이 일어나 박해에 박차를 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양근(楊根)에서 박해를 피해 한양으로 이사왔던 정약종은 신변이 점점 위험해지고 있음을 느끼고, 가지고 있던 천주교 서적과 성물(聖物), 그리고 주문모(周文謨) 신부의 편지 등을 담은 책고리짝을 보다 안전한 곳으로 옮기려다 발각된 것이었다.
이예 천주교를 엄단하라는 상소문이 연달아 올라와, 마침내 2월 9일(음) 이가환(李家煥), 홍낙민(洪樂敏), 정약용(丁若鏞), 이승훈(李承薰)을 잡아다가 국문(鞫問)하기 시작하였고, 이어 권철신(權哲身), 정약종(丁若鏞)도 잡혀 의금부에 갇히었다.
남인의 중요한 지도자인 동시에 천주교의 지도급 인물들인 이들의 국문은 2월 10일(음) 시작하여 26일(음)까지 계속되었다. 결국 그들 중 정약종, 홍낙민, 최창현, 홍교만(洪敎萬), 최필공, 이 승훈 등 6명은 참수되고, 이가환, 권철신은 옥사하였으며, 정약용, 정약전은 배교하여 경상도와 전라도로 각각 유배되었다.
박해는 지방으로 확대되어, 충청도 `내포(內浦)의 사도'라고 불리던 이존창(李存昌)이 2월 9일(음) 공주(公州)옥에 갇히었다. 한양으로 압송되어 2월 26일(음) 정약종 등과 함께 사형이 언도되었으나 이틀뒤 공주로 다시 이송되어서 참수로 집행되었다. 여주(驪州)와 양근의 천주교인들은 전년도에 이미 잡혀 한양으로 압송되었고, 그들의 결안(結案)이 확정된 후 각기 본고향으로 보내 사형에 처하여 일반 대중을 경고케 하였다.
이리하여 3월 13일(음) 여주 성문밖에서 5명이 순교하였는데, 그들은 원경도(元景道), 임희영(李喜永), 최창주(崔昌周), 이중배(李中培), 정종호(鄭宗浩)등이다. 양근에서도 같은 무렵에 10여명이 처형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뛰어 난 순교자는 유한숙(愈汗淑)과 운유오(尹有五)였다.
4월 2일(음)에는 또다시 6명이 사형에 처해졌는데, 정약종의 아들 철상 (哲祥)과 최필공의 사촌인 필제(必悌)와 중인 정인혁(鄭仁赫), 그리고 여교우 윤운혜(尹雲惠), 정복혜(鄭福惠)와 이합규 등 이었다.
2월 말(음) 남인의 주요인물들이 모두 참수 또는 옥사, 유배됨으로써 끝난 것으로 보였던 박해는 3월12일(음) 주문보 신부의 자수로 가열되었다. 신부는 조선에 입국한 이래, 주로 강완숙(姜完淑)의 집에 거처하면서 전교에 힘써왔는데, 포졸들이 그의 거처를 탐지하고 덮쳤으나, 미리 이를 알아차린 주신부는 다른 곳으로 피하여 체포를 면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의 도피로 집주인 강완숙 일가와 많은 교우들이 갑혀 들어가자, 주신부는 자기로 인하여 많은 교우들이 고통을 받게 됨을 알고 자수키로 결심하게 되었다. 주신부에 대한 국문으로 이희영(李喜英), 김이백(金履白), 김건순(金健淳), 강이천(姜彛天) 등 9명이 잡히였으며, 주신부를 한 때 궁안으로 피신시킨 사실과 세려를 받은 일이 드러나, 은언군(恩彦君) 이 인(李絪)의 처 송씨(宋氏)와 그의 자부(子婦) 신씨(申氏)에게는 사약(賜藥)이 내려졌고, 그 여파로 강화(江華)에 유배 중이던 은언군 자신에게도 사약이 내려졌다.
주신부는 4월 19일(음) 군문효수(軍門梟首)되고, 그 이튿날에는 김건순, 이희영 등이 서소문 밖 형장에서 쳐형되었다. 주신부를 6년간 헌신적으로 도왔던 강완숙도 2월 24일(음) 아들 홍필주(洪弼周)와 함께 잡혀, 궁녀 강경복(姜景福), 전 궁녀 문영인(文營仁), 최인철(崔仁喆), 김현우(金顯禹) 등 8명이 5월 24일(음)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었다. 함께 사형선도를 받은 고광성(高光晟), 이국승(李國昇), 윤 점혜(尹占惠), 정순매(鄭順每) 등 4명은 각기 고향으로 이송되어 처형당하였다.
7월에 들어서서는 강완숙의 아들 홍필주와 김종교 (金宗敎)가 순교하였다. 전주(全州)에서는 3월(음) 부터 박해가 시작되었는데 유항검(柳恒儉), 유관검(柳觀儉) 형제를 비롯하여 일가족이 많이 체포되었다. 유관검이 고문에 못 이겨 많은 교우들의 이름을 대니, 불과 몇 일만에 200여명이 옥에 갇히였는데, 대부분은 배교하여 석방되었다.
이들에 대한 문초가 계속되는 동안, 소위`양박청래'(洋舶請來) 계획이 탄로되어 이와 연관된 이우집(李宇集), 윤지헌(尹持憲), 황심(黃沁), 김유산(金有山) 등이 잡히게 되고, 이 연줄로 옥천희(玉千禧) 등이 잡히게 되었다. `양박청래' 관련된 이들은 한양으로 압송되어 곧 사형을 언도받아 다시 전주로 이송되어, 9월 17일(음) 능지처참으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신유박해는 황사영(黃嗣永)의 체포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황사영은 정약용의 고발로 이미 2월11일에 체포령이 내렸으나, 7개월이 넘도록 그의 행방을 찾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황사영이 북경 왕래자의 하나라는 유관검의 고발로 말미암아, 9월 25일에 잡히자, 황심의 자백으로 황사영도 9월 29일(음) 은신처인 충청도 제천(堤川) 배론에서 잡히게 되었다. 함께 피신 중이던 김한빈(金漢彬)도 같이 잡았다.
황사영은 2월 10일(음) 박해가 일어나자 이 곳으로 와 숨어살면서, 박해로 폐허가 된 조선 교회의 실정과 조선 교회의 재건과 종교의 자유를 얻기 위해 양박(洋舶)을 청하는 내용의 <백서>(帛書)를 작성한 곳도 이 곳에서였다. 황사영은 곧 한양으로 압송되어 황심, 김한빈, 그리고 곧 이어 잡혀 들어온 옥천희와 현계흠(玄啓欽) 등과 함께 문초를 받았다.
그 중 김한빈과 황심은 10월 24일(음) 판결을 받고, 그 이틀날 참수되었다. 황사영만은 <백서> 작업과정에서 정약용, 정약전 등과의 공모 여부 를 가리기 위해 정약용과 정약전 등이 다시 잡혀 왔으나, 황사영의 단독적인 것이라는 주장과 공모에 대한 증거가 없어, l1월 5일(음) 황사영에게 대역부도죄가 선고되어, 그날로 능지처참의 사형이 집행되었고, 옥천희와 현계흠도 함께 참수되었다.
황사영과 그와 관련된 자들을 신문하고 있는 동안 동지사(冬至使)가 출발해야 할 시기가 다가왔다. 그런데 이번 박해에 저명인사들이 많이 관련되었을뿐만 아니라, 청국인 주문모를 처형한 사변을 변명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으므로 조정에서는 조윤대(曺允大)를 동지사 겸 진주사(陳奏使)로 임명 하는 동시에 가지고 갈<토사주문>(討邪奏文)의 내용과 진주방법 등을 구레체으로 검토하였다.
<토사주문>은 대제학(大提學) 이만수(李晩秀)가 작성하였고, 주문내용의 증명으로 <백서>의 사본도 갖고 가기로 하되, 그 중에서 불리한 내용은 이를 삭제하여, 그 내용을 대폭적으로 축소시킨 소위<가백서>(暇帛書)를 가지고 갔다.
이렇게 해서 황사영 사건이 일단락되자 조정에서는 박해의 전말과 옥사(獄事)를 변호하는 반교문(頒敎文)을 준비하면서, 아직도 처결되지 않은 사학죄인은 세 전(歲前)에 그 집행을 끝내도록 지시하였다.
드디어 12월 22일 토사교문(討邪敎文) 즉 <척사윤음>(斥邪倫音)이 반포됨으로써 공식적으로 신유박해는 끝나게 되었다. 즉 이미 내려진 사형선고는 이를 속히 집행할 것과, 미결 사학죄인에 대한 신문도 세전에 끝낼 것이고, 더 이상의 수사는 하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이에 따라 한양에서는 이경도, 변득중, 권상문 등 15명이 12월 26일(음) 순교하였고, 전주에서는 유항검의 처 등 일가친척들이 12월 28일(음)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마지막 공식적인 사형집행이었다.
이렇게 해서 가혹하고 잔인했던 신유박해는 끝났는데, 박해로 희생된 자들의 수는 처형된 자가 약 100명, 그리고 유배된 자가 약 400명으로 도합 500명 선에 달하였다. <토사교문>의 반포로 피비리내 나는 학살은 일단 멈추었으나, 천주교를 국가의 원수로 단정함으로써 앞으로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가할 수 있는 법적근거를 마련한 셈이 되어, 천주교 전파에 커다란 장애물로 등장하였다.
어쨌든 신유박해로 교회의 지도급 인사들이 거의 사라졌을뿐만 아니라 살아남은 교인들도 유배를 당했거나 생명유지를 위해 산간벽지로 숨어 들어 가톨릭신앙의 전국적 확산을 촉진하였다. 이로써 종래의 지식인 중심의 조선가톨릭교회가 서민사회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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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박해(辛亥迫害)
1791년(정조 15년)에 있었던 박해. 전라도 진산에서 윤지충(尹持忠)과 그의 외종사촌 권상연(權尙然)이 제사를 폐하고 신주(神主)를 불태운 이른바 진산사건(珍山事件)으로 인해 발생하였다.
1791년 5월(음) 모친상(母親喪)을 당한 윤지충은 북경교구장 구베아(Gouvea) 주교의 제사금지령에 따라 이해 8월 그믐(음) 제사를 지내지 않고 신주를 불태워 땅에 묻었고 권상연도 윤지충을 따라 신주를 불태웠다.
그러나 윤지충의 친척과 이웃들이 윤지충과 권상연을 무군무부(無君無父)의 불효자로 고발함으로써 이 사건이 서울에까지 알려지게 되자 척사자(斥邪者) 홍낙안은 진산군수 신사원에게 편지를 보내 피신한 윤지충과 권상연의 체포를 독촉하는 한편 좌상 채제공에게는 두 사람의 처형과 천주교 탄압을 요청하는 장서를 올렸고 이러한 홍낙안의 장서를 시작으로 천주교 배척의 상소가 끊이지 않게 되었다.
이로 인해 11월 28일(음11월 3일) 교주(敎主)로 고발된 권일신(權日身)과 서학서를 들여온 이승훈(李承薰)이 체포되고 이어 서울에서 최필공(崔必恭)을 비롯한 11명의 교우가, 충청도에서는 이존창(李存昌) 등을 비롯한 많은 교우들이 체포되었고 이와 함께 회유책으로 천주교서적을 없애고 자수한 천주교인들에게는 죄를 묻지 않는다는 내용의 포고문이 전국에 붙게 되었다.
그후 12월 8일(음11월 13일) 윤지충과 권상연이 참수되고, 이승훈은 배교했음에도 불구하고 면직되고, 권일신은 유배가는 도중 사망하고, 그 외의 교우들은 배교하고 석방됨으로써 박해는 일단락 되었다. 그러나 그 결과 서학서의 구입이 금지되고 이미 들여온 홍문관(弘文館)의 서학서도 불태워지는 등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더욱 강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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