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겨울 편지

2007. 11. 27. 오후 3:13:58

글자
 
 
K 형!
 
그게 낡은 흑백영화였었지 아마... . 그래, 음악이 흐르고 있었어. 찌는 듯한 무더위로 꽤나 나른해 보이던, 텅 빈 술집 안이었지.
어느 구석에선가 라디오에서 칸초네가 아주 나지막하게 흐르고...
졸리 울 정도로...그랬어, 너무 졸리 울 정도로.
주인공이 전편을 거의 압도적으로 몰고 가던 추격 장면. 그런 긴장감 속에 불쑥 출입문을 열어 젖히고 들어선 곳이었지. 그런데 일순, 침잠의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그 묵직한 실내의 분위기. ...텅 빈.
그래서 착 가라앉은 느슨함과 나른한 멀미. 그런 한 여름 낮이었지.
그 속에 꿈꾸듯...졸리 운 칸초네가 있었어.
그리고는 그대로 기억 속에 박혀 버린 거야.

난 가끔씩 이런 낡은 기억들을 끄집어내어 회상이라는 것을 해보는데, 대개 그럴 때면 마음이 스산하던가 울적할 때가 많아. 그래서 빛 바랜 사진첩을 꺼내놓고 맥없이 들쳐본다던가, 아니면 휘어져 출렁거리는 낡은 레코드판을 걸어놓고, 배 깔고 엎어져 흘러간 팝송을 듣는다던가. 아무튼 그러고 나면 참 웃기는 거야. 산다는 게.
왜 이렇게 바둥바둥 살아가야 하는 건지?
하긴 자네나 나나, 뭐 그리 대단하게 살다 갈 위인도 아닌데 말이야. 그래서 이럴 땐 공연히 슬퍼져. 고만큼 살다가기를 이렇게 버거워서야 쓰겠는가 싶은 게.

그런데 말일세. 참으로 희한한 것이, 만주다 오사까다 해가며 바람에 구름 가듯 살다간 어느 양반이 있었는데, 아마 조강지처가 있던 본가에는 땡추중 절간 드나들 듯 했는가 보대. 그렇다고 무슨 독립운동을 한 것은 아니고, 그저 시조가락 하나로 세상을 떠돌던 풍류객이었지.
그리고 또 다른 한 양반은, 돈을 억수로 모아 사람들 입에서 "억!" 소리가 날 정도였다는데, 이 양반 사는 꼴이 누추한 집 한 칸이나 지니고 간신히 밥 먹고사는 영락없는 말단 공무원이라.
그래 하도 보기 딱해서 더 연로하시기 전에 훌쩍 여행도 좀 다니시고, 자시고 싶은 것 실컷 잡수시라 하니까 대뜸, "내는 간 떨려서 고렇게는 돈 못쓴다." 하더라구.
결국 그 양반 돈 한 푼 제대로 써보지도 못한 채 그대로 먼길 가시더구먼.

지금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중 양반은 괜히 마음이 짠하다 못해 아려오는 반면, 먼저 양반을 생각하면 지금도 어느 산천을 훠이훠이 다니시며, 시조 한 가락 멋들어지게 뽑으실 것만 같단 말일세.
어쨌거나 우리 모두 한세상 살다가긴 매한가지이고 보면, 그저 모나지 말고 둥글게 살다 가야지 싶더구먼. 그러니 좋은 생각만 하면서 서로 좋게 살다가자는 거지.
어차피 돈이란 게 잠시 제 호주머니 빌려주는 것이고 보면, 무어 그리 핏대 올리며 신경줄 잡아당길 일이 있겠는가.

이쯤에서 빙긋이 웃고 있을 자네 얼굴이 떠오르는구먼.
알아. 그냥...요즘 사는 게 하도 어수선해서 횡설수설 해 본 걸세.
아니면 내 진작에 성불했제.
그만, 평안하시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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