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적 관용과 그리스도인의 일치

2009. 12. 17. 오전 12: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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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관용과 그리스도인의 일치

 

1. 일치 왜 그다지도 어려운가?

 

요한복음 17장 20절에서 26절까지의 예수님의 말씀을 보도록 하자.

 

† 나는 이 사람들만을 위하여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들의 말을 듣고 나를 믿는 사람들을 위하여 간구합니다. 아버지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될 것 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나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내가 이 사람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은 이 사람들을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으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이며 또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이 사람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맡기신 사람들을 내가 있는 곳에 함께 있게 하여 주시고 아버지께서 천지창조 이전부터 나를 사랑하셔서 나에게 주신 그 영광을 그들도 볼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의로우신 아버지, 세상은 아버지를 모르지만 나는 아버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이 사람들에게 아버지를 알게 하였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수난을 예고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남기신 말씀이다. 대사제의 기도라고도 하고, 에수님의 유언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말씀은 당신이 이 세상에 오셔서 하고자 했던 일들의 총체적 목적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기도라고도 하고, 에수님의 유언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말씀은 당신이 이 세상에 오셔서 하고자 했던 일들의 총체적 목적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유난히 강조하고 계신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당신의 제자들 더 나아가 인류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의 일치를 위해 하느님께 간곡히 기도하신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게 되는 것도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일치를 이룰 때 가능하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신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은 많은 경우에 불일치를 경험한다. 관대함이 넘치는 따뜻한 사랑보다는 인색함이나 냉정함, 혹은 무관심이 우리의 인간관계를 지배하고 있다.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있지만, 우리들은 흔히 자신의 생각을 인정해 주는 사람 혹은 자신의 생각과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과 쉽게 어울리게 된다. 그렇지만 우리는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보다는 자신과 생각을 달리 하는 사람을 더 많이 만나고 접하게 된다. 자기와 다른 생각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을 대할 때 우리가 흔히 취하게 되는 행동은 다른 생각을 지니는 사람들을 자신의 생각이나 신념으로 종속시키려 하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의 생각에 자신이 지배될 것을 두려워하여 자신 안으로 숨어버리는 폐쇄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다.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경향이나 자신 안에 숨어버리는 배타적인 경향은 우리들 삶을 무의미하고 불행하게 만들고, 인간관계를 왜곡시키고 있다. 고도의 물질문명이 발달한 현대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고독을 느끼고 외로움에 고통을 당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관계의 단절(하느님과 관계, 인간과의 관계)에 있다. 그리고 이 관계의 단절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만을 생각하는 비관용적이고 배타적인 태도에서 기인되는 것이다.

 

신앙의 문제 혹은 종교의 영역에서도 이러한 비관용적인 태도가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주었고 현재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다. 단적인 예로 같은 그리스도를 믿고 고백하면서도 한국의 가톨릭 신자들은 개신교를 열교라고 부르고, 개신교 신자들은 가톨릭 교회를 마리아교라고 생각한다.가톨릭 교회에서 열교란 교회의 교도권을 통해 확인되고 선포된 '믿을 교리'중에 하나라도 고의적으로 믿지 않는 종파를 말한다. 가톨릭 교회는 이러한 열교인들에게 교회 공동체로부터 추방하는 파문을 선고하였고 파문을 받은 사람은 자기 자신의 불신에 대한 회개가 없다면 구원받을 수 없다고 가르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가톨릭 신자들이 개신교를 열교라고 부르는 것에는 그들이 구원될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의미가 은연중에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개신교 신자들이 가톨릭 교회를 마리아교라고 부르는 것에는 가톨릭 신자들의 마리아 신심에 대한 무지와 함께 가톨릭에 대한 무의식적인 적대감이 표현되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들의 태도는 근본적으로 일치를 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과는 배치되는 것이다. 오늘날 종교들 간에 혹은 그리스도인들 간의 비 관용적인 자세가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과 배치되는 것이고 따라서 일치를 위해 서로 노력해야 한다는 자각이 점점 확대되고 있는 이는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2. 타종교인들의 구원 문제

 

1) 비그리스도교인들의 구원에 대한 교회의 전통적인 견해

 

그리스도 교회는 예전부터 인간이 구원되려면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고백해야 한다고 가르쳐 왔고 지금도 가르치고 있다. "교회 밖에서는 아무런 구원이 없다"(DS 802. 870.)라는 정식이 교의로 확정된 이후 이것이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이었다. 1442년에 소집된 플로렌스 공의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이러한 교회의 전통적인 입장을 단적으로 대변하고 있다. "우리 주이시며 구세주의 말씀으로 설립된 로마 성교회는 가톨릭 교회 밖에서 존재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만일 이들이 죽기 전에 교회에 들어오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수 없고 오히려 악마와 그의 졸도들을 위해 마련된 영원한 불에 빠지게 되리라고 굳게 믿고 선포한다"(DS 1351). 계속해서 교회의 이러한 입장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도 계속 견지되고 있다. "공의회는 성경과 성전에 의거하여 나그네 길에 있는 이 교회가 구원에 필요한 것이라고 가르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한 분만이 중재자시요 구원의 길이시며, 이 그리스도는 당신 몸인 교회 안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믿음과 세례를 필요성을 강조하시면서, 동시에 교회의 필요성도 확인하신 것이니 문을 통해 집에 들어오듯이 사람들이 세례를 통해서 교회에 들어 오기 때문이다"(교회헌장 14항, 선교교령 7항).

 

 

2)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견해

 

교회는 초세기에서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시종일관 구원에 있어서 교회의 절대적 필요성을 주장해 왔다. 이러한 믿음과 주장 안에는 세계에 존재하는 다른 종교, 다른 문화에 대한 일종의 우월감이 작용한 것이 사실이고, 이러한 우월감은 그리스도교가 다른 세계에 전파되는데 장애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그리스도교는 아직 소수 종교이다. 서구의 그리스도교 국가는 거의 모든 국민들이 그리스도교 신자인데 반해서 우리나라는 소수가 그리스도교 신자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불교나 유교 혹은 다른 종교를 믿고 있다. 동양의 여러 세계 종교는 물론 종교 박람회장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많은 민족 종교 혹은 소수 종교들이 혼재한 한국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이들 다른 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협력하며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제2차바티칸 공의회는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에서 힌두교, 불교, 기타 종교에 대한 항목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가톨릭 교회는 이들 종교에서 발견되는 옳고 성스러운 것은 아무것도 배척하지 않는다. 그들의 생활과 행동의 양식뿐 아니라 그들의 규율과 교리도 거짓없는 존경으로 살펴본다. 그것이 비록 가톨릭에서 주장하고 가르치는 것과는 여러 면에 있어서 서로 다르다 해도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진리를 반영하는 일도 드물지 않다. 그리스도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 그 분안에서 사람들이 종교 생활의 풍족함을 발견하고 그 분 안에서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당신과 화해시키셨음을 교회는 선포하고 있으며 또 반드시 선포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다른 종교의 신봉자들과 더불어 지혜와 사랑으로 서로 대화하고 서로 협조하면서 그리스도교적 신앙과 생활을 증거하는 한편 그들 안에서 발견되는 정신적 내지 윤리적 선과 사회적 내지 문화적 가치를 긍정하고 지키며 발전시키기를 모든 자녀들에게 권하는 바이다(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 2항)."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회는 이제 극복할 수 없는 오류의 처지로부터 자기 탓없이 교회 밖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구원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교회 밖에서의 구원 가능성을 원칙적으로 인정하지 않던 교회의 전통적인 입장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서 처음 수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점은 누구나 구원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 뿐만아니라 교회가 또한 필요하다는 것이 교회에 의해서 포기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3. 그리스도교의 분열과 재일치

 

1) 그리스도교의 분열

그러면 이제는 그리스도교 안에서 갈라진 다른 형제들과의 일치 문제를 살펴보자. 그리스도교는 본래 하나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의 토대는 예수 그리스도 한분 뿐이기 때문이다. 모든 그리스도교가 같은 삼위일체 하느님, 같은 그리스도를 믿고 고백하면서도 여러가지 다른 요인에 의해서 나뉘어져 있다는 사실은 하나의 스캔달이 아닐 수 없다. 이 시간에 그리스도교가 분열된 이유를 모두 살펴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교회의 분열은 단지 종교적 신앙의 요인뿐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혹은 인간적인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인 변수로 작용하였던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그리스도교의 분열은 크게 두 번 있었다.

 

그 첫째는 동방에서 생긴 것으로 에페소와 칼체톤 공의회의 교리 표현 방식에 대한 논쟁과 후대에 와서 동방의 총주교좌와 로마 주교좌 사이의 교회적 결합의 단절로써 생겨난 것이다. 두번째로는 16세기에 마르틴 루터에 의한 종교개혁으로써 여기에서 국가별 혹은 신앙별로 여러 교단이 로마 주교좌에서 갈려 나갔다.

 

 

2) 교회의 일치운동

 

개신교가 1910년 '에든버러 세계선교회'에서 교회 일치운동을 시작한 이래로 교회 안에서는 계속해서 일치운동이 이루어져 왔다. 특히 가톨릭 교회는 1965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서 일치운동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치운동이라고 하면 교회의 여러가지 요구와 시대의 요청에 따라 그리스도인들의 일치를 위하여 일어나고 계획되는 활동과 사업을 지칭한다. 즉, 첫째로는 갈라진 형제들의 상태를 공평하고 옳게 표현하지 못함으로 그들과의 관계를 어렵게 만드는 말과 판단과 행동을 제거하려는 모든 노력을 말한다. 그리고 각기 자기 공동체의 교리를 깊이 설명하고 그 특징을 명백히 말해주는 대화를 말한다." 공의회는 또한 그리스도교의 일치를 회복하려는 노력이 평신도들이나 사목자를 막론하고 온 교회에 부과된 의무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러한 정신과 그 맥을 같이하여 1960년에 이미 교황청 산하에 '그리스도교 일치 사무국'이 설치되어 일치를 위해 노력해 왔다.

 

 

 

4. 일치! 대화를 통하여

 

분명 신앙은 하느님이 일회적인 방법으로 또 전세계에 대한 구속력을 가지고 자신을 계시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이 신앙은 자유롭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지 강제로 주입되어서는 안된다. 자유롭지 못한 어떤 상황에서 신앙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신앙의 본질에 어긋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은 자 유인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심으로써 우리들이 당신 의 무한한 사랑을 자유롭게 받아들이기를 원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참된 관용의 정신으로 다른 그리스도교인들을 대하고 그리스도교 일치를 위해서 그들과 함께 기도하고 노력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관용이라 하여 모든 것을 긍정하는 것은 옳지 못한 태도이다. 참된 관용은 신앙을 받아들이고 보존하는 자유를 보증해 주는 것이지, 성급히 무엇이 신앙의 진리라고, 더구나 신앙의 진리 같은 것 은 없다고 판단해버리는 것이 아니다. 참된 관용은 점유자의 독선과 지배욕과 자만을 배격한다. 참된 관용은 자기 지식이 단편적임을 알고 있다. 그래서 같은 그리스도교의 다른 신앙 공동체 안에서도, 그리고 그리스도교 신앙을 극도로 비판하거나 거부하는 사람들에게까지도 그리스도의 흔적을 찾아낼 줄 안다.

 

현대에 와서 종교적 관용과 그리스도인의 일치에 대한 당위적 주장이 많이 운위되고 있음에도 상황은 그리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다. 우리의 현실은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원하시던 일치의 모습과 거리가 먼 것이 사실이다. 종교적인 불일치 뿐만 아니라 오늘날 세계 안에 많은 불화와 분쟁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모든 사람들이 서로 상대방을 이해하려 하기 보다는 자기의 생각만을 고집하기때문이다. 따라서 공동체적 존재로 창조된 인간은 진정한 대화를 통해 상대방을 이해할 때 일치는 가능한 것이다. 대화란 단순히 지식을 나누거나 논쟁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다운 대화는 서로의 인격을 나누는 것이고, 존재를 나누는 것이며, 마음을 나누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교적인 대화는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며, 상대방 안에서 살아 계시고 임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참된 그리스도교적 대화는 열린 마음으로 함께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몇가지 근본정신이 공통적으로 전제되어야 한다.

첫째, 대화는 진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부정과 불의를 위한 것은 대화가 아니라 음모나 작당에 지나지 않다. 언제나 참된 것을 추구할 때 진정한 대화가 가능하다.

둘째, 대화는 사랑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마음으로는 미워하면서 겉으로는 웃고 대화한다면 그것은 거짓 대화에 불과하다.

세째, 대화는 공동선을 추구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자기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관대한 마음을 지닐 필요가 있다.

 

 

 

5. 이 사람들이 하나되게 하소서

 

가톨릭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모든 사람들의 구원자라고 믿고 고백한다. 세례를 받고 성체성사에 참여함으로써 구원을 얻게 된다고 믿고 있다. 이것은 결코 변할 수 없는 절대적 진리이다. 신앙인들은 어떤 경우에도 이 진리를 양보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진리를 받아들이고 내면화하는 것이 곧 다른 사람들을 거부하거나 배척하거나 단죄하는 것일 수는 없다. 우리는 끊임없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이고 모든 것 안에서 진리 자체이신 하느님을 볼 수 있는 관대한 마음이 필요한다. 가톨릭 신자가 된다는 것은 불교 신자, 개신교 신자, 유교 신자, 통일교 신자 혹은 무신론자와도 관용의 정신으로 함께 대화하고 공동선을 위해 함께 노력하도록 불리우는 것이다. 바로 그리스도께서 원하신 일치를 위해 자신을 봉헌하는 것임을 잊지 말자. 매일 매일의 삶을 통해서 일치를 이루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6. 참고문헌

 

1. 한국 교회사 연구소, 한국 가톨릭 대사전, 1985.

2.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1983.

3. 하나인 믿음, 분도출판사, 1982.

4. 박도식, 가톨릭 교리사전, 가톨릭출판사, 1991.

5. 김웅태 편저, 가톨릭 교리, 도서출판 지혜, 1991.

6. 믿는이의 편지, 천주교 서울 대교구 홍보국, 1988.

7. 심상태, 그리스도와 구원, 성바오로출판사, 1984.

8. 이탈리아 주교회의 신앙교리 문화 위원회, 주여 당신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성바오로출판사, 1987.

9. 독일 가톨릭 교리교육 협의회, 현대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삶, 광주 가톨릭대학교 전망편집부, 1990.  

 

 

  ( 자료 출처 : 성바오로 선교네트 http://www.paolo.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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