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찬미예수님
알렐루야! 알렐루야! 어둠을 이기시고 우리 주님께서 부활 하셨습니다. 알렐루야!
모두들 기쁜 부활 맞이하고 계시겠지요.
저는 부활의 기쁨을 잔잔하게 맞이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해마다 맞는 부활이 늘 똑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지 않는 것은 분명 주님의 은총이겠지요. 우리가 부활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는 없지만 해마다 다른 모습으로 맞이하는 부활 속에서 그 진정한 의미를 조금씩 발견할 수 있겠지요. 이번 부활을 맞이하면서 제게 와 닿은 복음 구절은 “이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 (마태 28장7절) 라는 천사의 말씀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당신이 사랑하시던 성모님과 제자들을 먼저 찾지 않으시고 왜 “갈릴래아”로 가셨는지? 그리고 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라고 천사는 말씀하셨는지. 그 말씀을 묵상하다가 “갈릴래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치열한 삶의 현장을 가르킨다”는 고신부님 말씀이 떠 올랐습니다. 예루살렘이 이상향이었다면 갈릴래아는 그 이상향을 바라보며 자신들의 척박한 삶을 일구어 가는 서민들의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우리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셨다는 것은 “당신 부활의 의미를 우리의 치열한 삶 속에서 찾기 원하신 것은 아닐까?”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분께서 저보다 먼저 제 삶의 터전으로 가셔서 마련해 두신 부활의 의미가 무엇인지 제 주위를 꼼꼼히 살펴가며 부활을 보내야겠다는 생각도 같이 해 보았습니다.
‘이상적’이란 말이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왜곡되어 해석되어 지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습니다. 이번 주 예레미야서 (24-39장)에서도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이 예레미야가 그들이 원하는대로 예언해 주지 않는다고 하여 그를 박해하고 죽이려 합니다. 어찌보면 예레미야를 죽이려 했다기 보다는 주님의 말씀이 듣기 싫었던 것이겠지요. 달리 말하면 주님께서 그들이 원하는 말만 해주기를 원했던 것이겠지요. 그러고 보면 지금 우리의 모습도 별반 그들과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나의 삶 속에서 주님의 뜻을 찾기보다는 모든 것이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나의 뜻대로 주님께서 이루어 주시기를 바라는 모습들이 그런 것이겠지요.
이번 부활동안 저는 주님께서 당신 부활의 의미를 제 삶 어느곳에 어떤 모습으로 숨겨 두셨는지 찾아보려고 합니다. 오늘 그것 중 하나를 찾았습니다. “길들지 않은 송아지 같은 저에게 주님께서 순종을 가르치시어 제가 순종을 배웠습니다.”(예리미야 31장18절)
모두들 기쁜 부활 맞으시기를 기도하면서
2008년 부활팔일축제 목요일 새벽에 김시몬 드림.
알렐루야! 알렐루야! 어둠을 이기시고 우리 주님께서 부활 하셨습니다. 알렐루야!
모두들 기쁜 부활 맞이하고 계시겠지요.
저는 부활의 기쁨을 잔잔하게 맞이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해마다 맞는 부활이 늘 똑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지 않는 것은 분명 주님의 은총이겠지요. 우리가 부활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는 없지만 해마다 다른 모습으로 맞이하는 부활 속에서 그 진정한 의미를 조금씩 발견할 수 있겠지요. 이번 부활을 맞이하면서 제게 와 닿은 복음 구절은 “이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 (마태 28장7절) 라는 천사의 말씀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당신이 사랑하시던 성모님과 제자들을 먼저 찾지 않으시고 왜 “갈릴래아”로 가셨는지? 그리고 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라고 천사는 말씀하셨는지. 그 말씀을 묵상하다가 “갈릴래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치열한 삶의 현장을 가르킨다”는 고신부님 말씀이 떠 올랐습니다. 예루살렘이 이상향이었다면 갈릴래아는 그 이상향을 바라보며 자신들의 척박한 삶을 일구어 가는 서민들의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우리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셨다는 것은 “당신 부활의 의미를 우리의 치열한 삶 속에서 찾기 원하신 것은 아닐까?”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분께서 저보다 먼저 제 삶의 터전으로 가셔서 마련해 두신 부활의 의미가 무엇인지 제 주위를 꼼꼼히 살펴가며 부활을 보내야겠다는 생각도 같이 해 보았습니다.
‘이상적’이란 말이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왜곡되어 해석되어 지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습니다. 이번 주 예레미야서 (24-39장)에서도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이 예레미야가 그들이 원하는대로 예언해 주지 않는다고 하여 그를 박해하고 죽이려 합니다. 어찌보면 예레미야를 죽이려 했다기 보다는 주님의 말씀이 듣기 싫었던 것이겠지요. 달리 말하면 주님께서 그들이 원하는 말만 해주기를 원했던 것이겠지요. 그러고 보면 지금 우리의 모습도 별반 그들과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나의 삶 속에서 주님의 뜻을 찾기보다는 모든 것이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나의 뜻대로 주님께서 이루어 주시기를 바라는 모습들이 그런 것이겠지요.
이번 부활동안 저는 주님께서 당신 부활의 의미를 제 삶 어느곳에 어떤 모습으로 숨겨 두셨는지 찾아보려고 합니다. 오늘 그것 중 하나를 찾았습니다. “길들지 않은 송아지 같은 저에게 주님께서 순종을 가르치시어 제가 순종을 배웠습니다.”(예리미야 31장18절)
모두들 기쁜 부활 맞으시기를 기도하면서
2008년 부활팔일축제 목요일 새벽에 김시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