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선교의 사명
1) 선교의 개념
선교란 교회로부터 파견된 복음의 전파자들이 온 세계에 가서 복음 전파의 임무와 아직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백성들과 집단에 교회를 부식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독특한 사업(선교 교령6)을 말한다. 교회를 부식하는 임무는 그리스도를 전혀 모르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교회 공동체 안으로 인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미 교회의 일원이 된 이들이 끊임없는 쇄신을 통해서, 보다 완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숙할 수 있도록 그들의 모든 생활을 복음화하는 행동까지 내포하는 것이다(현대의 복음선교 18,15).
모든 인간을 향해 교회가 선포하려는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실현된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구원이다. 즉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의 선물인 구원을 모든 이에게 베푸셨다는 선언(현대의 복음선교 27)이다.
2) 교회의 선교 사명
교회는 인간을 복음으로 불러 그리스도 안에 새로운 하느님의 자녀가 되도록 인도하며, 또 인간의 생활 자체가 하느님의 섭리에 부합되게 변화시켜 가는 것을 근본 사명으로 한다.
첫째, 선교는 문자 그대로 이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며 자기 자신을 투신하는 일이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마르 10,45)
둘째, 선교는 구원사업의 핵심적인 행위로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과제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9-20)
이렇게 예수께서는 또한 제자들도 세상에 파견하심으로써 교회가 탄생되며, 고로 교회의 사명은 선교라고 볼 수 있다.
셋째, 선교는 하느님의 명령임과 동시에 우리에게 내리시는 가장 큰 은사이다.
힘써 남을 사랑하고 성령의 선물을 간절히 구하십시오. 특히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은혜를 간절히 구하십시오.(1고린 14,1)
은혜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으로, 우리도 복음 선포를 통해 비로소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모범적 선교사이신 예수의 사랑으로 선교할 때 비로소 참된 선교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① 유일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수 없다ꡓ(요한 14,6). 우리가 교회의 기원을 회고할 때에, 그리스도께서 만민의 유일한 구세주요, 그분 홀로 하느님을 계시하고 하느님께로 만민을 인도할 수 있는 분이심을 분명히 인정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사람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이름은 이 이름밖에는 없습니다ꡓ(사도 4,12).
② 하느님 나라와 회개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습니다. 여러분을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오ꡓ(마르 1,15).
하느님의 계획은 ꡒ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일치하는 것이다ꡓ(에페 1,10).
③ 땅 끝에 이르기까지ꡓ의 파견(사도 1,8)
파견 명령 - 마태 28,20; 마르 16,15-18; 루가 24,46-49; 요한 20,21-23
마태 28,18-20 - 예수께서 다가오셔서 말씀하시며 그들에게 이렇게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능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여러분에게 명한 것을 모두 다 지키도록 그들을 가르치시오. 보시오, 나는 세상 종말까지 어느 날이나 항상 여러분과 함께 있습니다.
3) 새로운 복음화
요한 바오로 2세가 강조하는 ꡐ새로운 복음화ꡑ란 결국 기존의 선교 혹은 복음화의 개념과는 달리 교회 외적인 성장(확장)뿐만 아니라 교회 내적인 진정한 복음화, 즉 회개와 쇄신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는 데에 그 본질적인 의미가 있다. 요한 바오로 2세가 명시하듯 이 새로운 선교 열정을 위한 교회 공동체의 성숙을 이루는 것이 그 목적인 것이다.
따라서 이제 복음화 즉 선교는 외향적 개념뿐만 아니라 내향적 개념을 포괄하는 의미로 확대된다. 다음은 교황 바오로 6세의 말이다.
우리 시대는 마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정신으로 심리적이고 사목적으로 교회를 다시 세울 것을 필요로 한다. 즉 교회를 갱신해야 하는 것이다.
◎ 사도적 권고(바오로 6세의 현대의 복음 선교)
인류의 쇄신 - 복음의 힘으로 인류를 내부로부터 변혁시켜 새롭게 하는 것
만일 세례를 받아 새 생명을 받고(로마 6,4) 복음적인 생활(에페 4,23-24; 골로 3,9-10))로 새로워진 사람들이 없었다면, 새로운 인류는 태어나지 않을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과 구원계획에 배반되는 인간의 판단기준, 가치관, 관심의 초점, 사상의 동향, 사상의 원천, 생활양식 등에 복음의 힘으로 영향을 미쳐 그것들을 역전시키고 바로잡는 데 있다고 하겠다.
문화의 복음화 - 복음화에 있어 중요한 것은 복음화가 문화를 마치 겉치장하는 것처럼 장식하는 것이 아니고 문화의 깊은 근원에까지 생명력 있게 복음화하는 것이다.
◎ 하느님 나라에 봉사하는 교회(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교회의 선교사명) - 교회는 하느님 나라에 봉사한다.
1. 회개 : 교회는 회개에로 초대하는 설교를 함으로써 하느님의 나라에 봉사한다.
2. 친교 : 교회는 공동체들과 지역교회들을 건설하여 타인에게 개방하고 타인과 사회에 봉사하고, 인간 제도들을 이해하고 인정하도록 신앙과 사랑을 성숙시킴으로써 하느님의 나라에 봉사한다.
3. 전달 : 교회는 하느님의 나라를 표현하고 하느님의 계획을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데 도움을 주는 복음적 가치들을 세상에 전파함으로써 하느님의 나라에 봉사한다.
- 교회는 전 인류에게 구원의 성사이고, 교회의 활동은 그의 메시지를 수락하는 사람들에게 국한되지 않는다.
이처럼 교회가 선교의 방향을 외적 포교에서 내적 회개로 전환하게 된 근본적인 동기는 신앙을 보존키 어렵게 만드는 현대의 새로운 사회적이고 인간적인 상황과 맞서는 데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세례를 받은 사람은 많지만 복음화된 사람은 드문 유럽 및 현대사회는 그러므로 당연히 선교의 대상에 포함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2. 방문선교
방문선교는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가장 좋은 선교방법이다. 즉 두 사람씩 짝을 지어 가정과 직장을 방문하여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다.(루가 10,1 ; 마태 18,19 ; 마르 6,7 ; 전도 4,9-12 ; 교본 39장)
이때 방문자는 교회 명찰을 차고, 묵주를 쥐고, 선교가방을 들고 활동하면 상대편에서 안정감을 갖는다. 선교하는데 지나친 강요는 금물이다. 사랑으로 무장된 단원들은 좋은 표양으로 주민들을 접촉하고 대화를 한다.
각 교회는 사제를 중심으로 일치된 공동체가 있다. 한국천주교회의 실태를 보면, 일만명 이상의 신자를 관리하는 큰 교회가 있는가 하면, 이백명 정도의 소규모 교회가 있다. 대개 큰 교회는 주임사제와 보좌사제가 계시며 수도자 3~4명 정도가 성무를 담당하고 있다. 그래서 수많은 신자의 사목에 애로가 없지 않다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와 사회에 봉사코자 하는 단원들은 사제의 지도를 받아 적극적인 활동을 하여야 한다.
단원들은 자기를 희생하여 믿음의 생활을 하고, 거룩한 주님께 의합하여 봉헌된 자세로 민족의 복음화에 정성을 다하여야 한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심과 같이 이웃의 영혼을 사랑하며 내가 그 일을 하지 않으면 누가 할 것인가를 반문하면서 피나는 고통을 감수하며 방문을 하여야 한다. 레지오는 하느님께서 주신 큰 사랑과 은총에 보답할 줄 아는 예의바른 자녀로서 교회와 사회에 봉사하는 마음이 앞서야하고, 실천하는데 정성으로 다해야 한다. 이웃 형제들을 방문하여 사랑의 인사를 나누며 그들과 친교를 맺으면서 기도하는 착한 벗이 되어야 한다. 레지오 사도직의 활동을 하느님의 거룩한 성소로 말미암은 줄 알아야 하며 이의 실천을 위해서 성실한 태도와 신뢰를 받는 신자가 되도록 온 정성을 다해야 한다.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고 신앙에 굶주리고 있음을 먼저 알아야 하며, 정신적 빈곤의 퇴치운동에 솔선수범하는 적극적인 태도를 가져야 한다. 이러한 성스러운 평신도 사도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성서의 말씀을 잘 알고 탐구하는 성실한 신자가 되어야 하며, 이웃의 다정다감하고 선한 인상을 가진 따뜻한 벗이 되어 주어야 한다.
단원들은 교우집이나 외인집을 방문하여 건전한 여론을 듣고 상담도 하여 해결이 곤란한 사항은 사제에게 보고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중개 역할을 해야 한다. 요즘은 통신시설이 좋아서 앉아서 다 파악할 수 있다고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전화로 인사를 나누는 겅우도 있지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직접 방문하여 손을 잡고 인사를 나누는 것이다.
[1] 냉담자를 찾기 위하여
가정 방문은 가장 어려운 활동이지만 가장 훌륭한 열매를 거두는 활동이다. 모든 교회에서는 일년에 1~2회의 영세식을 가지는데 비하여 냉담자가 증가되고 있음도 부인할 수 없다. 물론 여러 가지 형편에 의해서 쉬고 있겠지만 대단히 안타까운 일이다.
냉담자의 경험담에 의하면, 교회에 못 나가는 심정은 비할 수 없이 답답하고 우울하다고 한다. 항상 마음이 교회에 있으면서도 어떤 때 거리에서 사제나 수도자 혹은 안면이 있는 신자를 만났을 때 죄책감을 느낀다고 했다. 사실 솔직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하느님께서 불러 주신 그 은혜를 어떻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이 인지상정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동료요, 벗인 우리가 먼저 그 냉담 교우를 찾아가서 그 동안의 소식도 전하고 다시 새 생활을 하도록 권유하여야 한다.
냉담자의 가정을 방문할 때는 반드시 교회의 주보나 신문 등 소식지를 전달해 주어야 한다. 냉담자 가정을 파악하게 되면 매주마다 한 번 정도 방문하는 성의가 있어야 한다. 그러면 방문자의 정성에 감탄하여 교회에 나간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자주 권유함으로써, 그 냉담 교우는 새로운 신앙생활로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냉담자를 발견하기 위한 방법이 특별히 있을까? 본당 사무실에서 교적을 확인하는 것이 가장 과학적인 방법이다. 냉담자 교적부를 보면 주소가 있다. 그러나 그 주소로 찾아가면 이사가고 없는 경우도 있다. 이럴 경우에 바로 동사무소에 가서 부탁하면 주민증록을 옮긴 주소를 파악할 수 있다. 언제 어느 지역으로 이사갔다는 것이 파악되면 바로 방문이 있어야 한다. 웬만한 거리가 되면 직접 방문하여야 하고 먼 거리가 되면 그 행정구역의 교회로 통신연락을 하여 파악하도록 한다. 주민등록이 옮겨진 동사무소에 가면 냉담자 가정으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요즘은 모든 동사무소나 면사무소에 전산 시스템이 설치되어 더욱 사람 찾는데 편리한 세상이 되었다. 한 마리의 양을 찾는 목자의 심정으로 평신도는 주위부터 철저한 사명감을 가지고 냉담자를 찾아야 한다.
다음의 방법으로는 호구 방문하는 것이 좋다. 평신도는 모두가 선교사란 인식을 굳게 가져야 한다. 평신도는 교회의 한 몸으로서 교회 발전과 영혼을 구원하는 안내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
어느 일본의 무신론자가 입교한 후, 서울과 부산간의 33회에 해당하는 거리를 도보로 활동했다고 한다. 개신교의 한 신자는 일년에 242세대를 전교했다고 한다. 기도하며 방문하니까 다 이루어졌다는 경험담을 듣고, 우리도 정성을 다하여 방문하면 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수년 전의 경험이다. 어느 주일 오후에 본당의 모든 행사가 끝난 후, 수도자 한 분을 모시고 방문을 가던 중에 시 외곽의 포도밭 옆길로 가게 되었다. 무르익은 포도 한 송이를 사기 위해 여주인을 불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여주인은 우리 일행의 반대편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피하는 듯한 모습을 했다. 나는 여주인에게 가서 포도를 달라고 했더니 아무 대답 없이 울고 있었다.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그 여주인은 냉담자로서 항상 하느님께 죄책감을 가지고 생활하다가 수도자를 멀리서 보고 울어 버린 것이다. 처녀시절에 영세하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는데 결혼하고서 남편의 반대로 냉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또한 지역 내의 주민들과 친교를 도모하고 조경사에 동참하는 생활 태도가 중요하다 하겠다. 주민행사에 참여하다 보면 냉담자를 많이 발견하게 된다. 냉담자는 선종하기 전까지는 반드시 회개하고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지금 바로 본 자세로 돌아와야 한다. 하느님의 품안으로 돌아와야 한다. 평신도의 부단한 정성에 의해서 냉담 교우들이 하루 빨리 돌아오도록 함께 기도하며 열심히 방문해야 한다.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에게 손짓하심으로써 우리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신다. 냉담 형제들과 손을 잡고 성체 앞에 나가야 한다. 평신도가 그 일을 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는가?
[2] 교회의 좋은 인상을 위하여
사회를 떠나서 교회는 존재할 수 없다. 교회는 사회의 정신적 본산지로서 주민들이 정신적 가난에서 벗어나 서로 돕고 사랑하며 생활하도록 영향력을 미치며 나아가서 영혼을 구원해 주는 성스러운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성교회의 신자는 물론이요, 주민들에게 여러 교육을 통하여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며 하느님의 사랑을 나누는 보람된 생활을 하도록 지도하고 있다.
평신도들은 교회에서 평생교육을 받고 있다. 미사 성제를 통하여 그리고 각종 신심단체의 참여로, 혹은 정기적인 신자 피정을 통하여 알찬 교육을 받고 영성생활을 하고 있다.
교회의 교육은 교육 중의 교육이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생활하고 사랑을 나누는 생활을 하도록 지도하고 성령의 뜨거운 은총으로 굳은 신앙인이 되도록 교육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 생활하도록 교육을 많이 받고, 신자끼리는 그런대로 형제애를 발휘하며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런데 외인들이 흔히 말하기를 가톨릭 신자는 친절감이 부족하다고 한다. 사랑의 표현이 소극적이라고 한다. 즉 모두가 무심하다고 한다. 정말로 외인들이 말하듯이 가톨릭의 신자들이 모두가 친절하지 않고 사랑이 없어 보인다면 크게 회개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사랑의 공동체가 왜 이런 모습으로 사회에 비치게 되었을까?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다고 보기에는 수긍이 가지 않으나, 사랑의 표현이 부족하다는 점은 모두가 이해가 갈 것이다. 원래 인사는 마음과 행동이 일치해야 하는데 마음은 그렇지 않지만 행동에 있어서 뒤따르지 않기 때문에 이런 인상이 되지 않았는가 생각한다. 이러한 오해를 불식시키고 또한 사회의 불신의 벽을 제거하는 마음으로 주민들을 방문하여 평화의 인사를 전함으로써 교회의 좋은 인상을 심어주는 일에 적극적으로 활동해야 한다. 몇해 전의 모 일간지에 발표된 기사지만, 현재 한국에서 여러 종교단체가 있지만 가톨릭 만큼 사회복지 시설에 희사하고 봉사하는 종교가 없다는 실례를 보도하였는데, 사실 우리 가톨릭 만큼 국가, 민족에 공헌하는 종교와 단체가 없다고 본다. 물질뿐만 아니라 정신적 부분에서도 더욱 그러하다.
단원들은 하느님의 효성어린 자녀임과 동시에 사회의 건전한 구성원이다. 평신도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느님의 나라 건설이라고 할 때 주민이 모인 곳에는 어디든지 가서 참여하고 기회를 잡아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주민들에게 영향력을 미쳐 변화시키는 일에 열성적이어야 한다. 기회를 마련하여 우리가 모신 사제를 소개하고 주민들이 모실 수 있도록 분위기를 변화시켜야 한다. 사제는 주민의 도덕적 심판관으로서 그분의 말씀이 도덕적 규범이 되도록 영향력을 주어야 한다.
교회의 지체인 단원들은 부단한 피정과 교육을 통하여 모범적인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신자로서 또한 사회인으로서 훌륭한 인품과 생활을 영위하여 주민의 좋은 벗이 되어야 한다. 사실 사회인으로 처신하기도 퍽이나 어려운 일인데 더군다나 평신도 사도직의 수행까지 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렵고, 또한 방문과 만남의 자세로 생활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민족의 복음화란 커다란 목표를 향하여 생활해야 할 때이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당연한 의무임을 인식해야 한다.
모든 단원이 교회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면 사회에 좋은 인상을 심어줄 수 있다. 다만 배운대로 실천하지 않기 때문에 사회에 여러 가지 형태로 비추게 되는 것이다.
먼저 모든 크고 작은 불신의 벽과 사욕을 던져야 한다. 성화되는 길을 알았으니 성화되는 일에 정성을 다하여 자신이 성실한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자신의 신앙이 흔들리고 확신이 없으면 사회를 변화시킬 수도 없고 변화시키고자 하는 사명감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사회에 보이는 교회는 어떻게 비춰질 것인가?
자신을 태워 빛을 내는 초가 되어야 한다. 단원들은 그래서 피나는 고통과 나태와 싸워 자신을 먼저 수련을 하는데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너무나 겸손한 자세로 혼자만이 기도하고 착실히 개인 생활만 해서도 안 된다. 사회는 가톨릭 운동가를 필요로 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언젠가 가톨릭에 나갈 수 있는 기쁨을 가질 것을 갈망하고 있는 주민들이 많다는 것을 절감하고, 매일 한 사람씩 방문하여 성교회의 인상을 바르게 심는데 정성을 다하여야 한다.
방문은 교회와 사회와의 거리를 좁혀주는 역할을 한다. 방문을 통하여 교회가 지역 사회의 현실을 빨리 파악할 수 있고 그들과 친근감을 갖게 된다.
[3] 선교하기 위하여
너희는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꼬 16,15). 곧 당신께서 지상의 모든 가르침을 완성하고 승천하시기 바로 전에 이 마지막 말씀을 하신 것이다. 이 말씀을 그리스도 신자 생활의 주조를 이룬다.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항시 꺼지지 않는 열성을 가지고 모든 사람을 찾아 나서야만 한다. 그런데 때로는 이 본질적 요소를 저버리고 있다. 교회의 우리 안에서나 밖에서 사람들을 찾지 않고 그대로 버려두고 있다. 이렇게 주님께서 승천하실 때 주신 명령을 저버린다고 하면, 거기에는 비싼 대가가 따를 것이다. 은총의 흐름이 막히고, 믿음이 줄고 쇠퇴하여 그 불이 꺼져버리는 막대한 손실을 가져올 것이다. 주위를 돌아보면 얼마나 많은 곳에서 이런 무서운 대가를 이미 치르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모든이란 말씀을 썼을 때는 진실로 모든 사람을 가리키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을 당신의 눈앞에 그리면서 그들 각자를 위해서 갖가지 고난을 당하셨다. 그들 하나 하나를 위해서 주님께서는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를 지고, 못박히고 창에 찔리고, 군중의 멸시를 당하고, 무수한 슬픔과 헤아릴 수 없는 고뇌를 겪고, 몇 번씩 졸도하고, 임종의 고통을 당하고, 마침내 갈바리아 언덕 위에서 숨을 거두시기까지 하셨다. 이처럼 큰 고난을 헛되게 해서는 안 된다.
모든 사람을 위해서 아낌없이 흘리셨던 그 고귀한 피는 이제 그 모든 사람들에게 전달되어야 한다. 그리스도 신자로서의 사명감 때문에 우리는 온 누리의 모든 이에게 다가가지 않으면 안 된다. 가장 보잘 것 없는 이들, 가장 위대한 사람들, 가까운 데 있는 이들, 먼 데 있는 이들, 보통 사람들, 극히 사악한 사람들, 악마 같은 사람들, 가장 외로운 등대지기, 갱생한 윤락가 여성들, 나병 환자들, 잊혀진 사람들, 술과 악습에 젖은 사람들, 전쟁터에 있는 이들, 숨어사는 이들, 가기 싫어하는 곳들, 떠돌이 인생, 지극히 비천한 집, 얼어붙은 황무지, 불볕의 사막, 숨막히는 밀림, 그리고 무지개가 걸려 있는 땅의 끝까지도 찾아가야만 한다. 온화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눈살을 찌푸리지 않으시도록 우리는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찾아내야만 한다.
한국은 지금 선교하기에 황금기를 맞이했다. 오랜 전통을 가진 단일민족이 근대사에 얼룩진 외침과 민족간의 이념분열로 한 민족으로서 없어야 했던 불행한 일들이 발생하여 감당하기 어려운 수난을 겪었다. 그리고 아직까지 그 아픔은 게속 되고 있다. 최근에는 물질적 가난은 어느 정도 해결된 듯 하지만 정신적 가난이 날이 갈수록 가중되어 불안정한 사회에서 불안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리하여 불신의 풍조가 더욱 깊어가고, 무엇인가 방황하는 상태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지금 우리들은 물질적 가난을 퇴치하는 일과 더불어 정신적 가난을 퇴치하는 큰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영혼이 메말라 가는 이 민족의 각자에게 희망을 가지고 주어진 여건에서 성실히 생활할 수 있는 길을 안내하고 격려하는 성업에 평신도들은 헌신해야 할 의무가 있다. 하느님의 생명의 말씀으로 새 삶을 영위하도록 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급선무인 것이다.
현재, 이 땅에는 400여 교단에 300만 명의 신흥 교도가 날로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정신적 가난에 시달린 백성이 달콤한 그들의 선전에 무조건 따라 가서 잠시나마 정신의 안식을 찾고자 하는 몸부림임이 틀림없다. 신문에 보도된 내용만 보더라도 대단한 갈등을 가지고 있다. 가정을 뒤로하고 산중에 기거하는 등 많은 사건들이 난무한 현실을 방관만 하는 우리들이 되어서도 안 된다.
더군다나 평신도마저 도덕적 용기를 발휘하지 못한다면 방황하는 형제들을 누가 인도하며 또한 신흥 종교의 늪에 빠져들도록 한다면 얼마나 무능하고 죄스러운 행위인가?
이러한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방문을 통하여 현장 활동에서 성취될 수 있다고 본다. 방문을 열심히 하면 영혼이 고갈되어 방황하는 그들의 영혼을 구제할 수 있다. 그래서 계획적인 방문을 시도해야 한다.
방문의 방법은 여러 행태가 있다. 많은 사람이 모인 장소를 택해도 좋고, 주택가를 방문해도 좋으며 직장을 방문해도 좋다. 그 지역에 애경사가 발생하면 가장 먼저 찾아가서 그분들과 함께 나누는 착한 이웃이 되도록 친근감을 주어야 한다.
의사가 환자의 진찰을 통하여 병명을 파악한다. 그 병명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여러 신체의 부분을 조직적으로 검사하여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신체 모든 부분을 직접적으로 대하여야 한다. 어부가 고기를 잡기 위해서도 마찬가지로 세밀한 방법으로 작업을 해야 한다. 그물을 던져도 보고, 낚시로 잡아도 보며 그 외 방법으로도 시도해야 할 것이다. 즉 고기를 잡기 위해서는 사전의 준비가 필요하게 된다. 어디로 갈 것인가? 그 곳의 여건은 어떠한가?
방문을 하려면 언제 어떻게 대화할 것인가를 사전에 충분한 기도와 준비가 있어야 한다.
단원들은 누구나 선교사이다.
어떤 가정을 방문하고자 하면 먼저 그 가정의 형편을 파악해야 한다. 파악할 수 있는 데까지 알고서 방문해야 한다. 만약에 호구방문을 하고자 할 때에는 순서에 따라 차례로 방문을 실시해야 한다. 다세대 가옥에 가면 한 가정도 빼지 않고 모두 방문을 해야 한다. 특별한 계획이 없으면 먼저 친지 가족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좋다. 가능하면 친지의 가족 생일을 기억하여 축하 카드를 보내면 좋은 인상을 갖게 된다. 조경사에 반드시 인사를 드리면 좋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살아가는 불쌍한 영혼들에게 그렇게 살도록 방관해 온 우리들에게 먼저 책임이 있다.
가정에 손님이 찾아오면 반갑게 대접을 하는 가정이 있는가 하면 거부감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우리가 교우집이든 외인집이든 방문하면 어떤 대접을 받을 수 있을까? 대단히 궁금한 일이다. 우선 반가운 손님으로 대접할 것으로 생각한다. 각박한 세상에서 평화의 인사를 나누며 영혼 구원을 위해 방문한 귀한 손님이며 인생의 안내자인데 외면 당할 수 있겠는가? 가톨릭에 대한 국민의 인상은 대단히 좋아서 누구나 대화를 할 수 있고 친교를 가질 수 있다.
선교 방법으로 방문선교만큼 효과적인 것은 없다. 계속적인 방문은 선교의 지름길이다. 또한 단원이 가장 하기 쉬운 방법이다. 방문하다 보면 뜻밖의 곤욕스러울 때가 있다. 그것은 교회를 비방하고 교우를 욕하며 시비를 걸어오는 경우이다. 이럴 때에는 인내를 가지고 사랑으로, 대화를 통해서 오해를 해소시키는 일을 해야 한다. 오히려 그런 사람이 쉽게 입교하게 된다. 인간은 사랑으로 감화를 받는다. 어느 교회나 입교하기 전에 주민의 원성을 받았던 사람이 있다. 어떻게 저런 사람이 교회에 다닐 수 있을까? 하고 이상하게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사람은 옛날 그 사람이 아니다. 변화된 새 사람이 된 것이다.
레지도 사도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그리스도 정신으로 온전히 무장되어야 한다. 묵묵히 일하는 농부가 되어야 한다. 농부는 들판의 벼포기의 하나 하나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다. 병든 벼포기에 더욱 관심을 가진다. 골고루 잘 자라도록 농부는 바라고 있다. 우리도 농부의 심정과 같아야 한다. 모든 주민이 함께 하느님의 사랑을 받도록 평등의 사상을 가지고 사랑의 손길을 써야 한다.
한 번 방문해서 입교하는 경우도 있고 수십 번 방문하여 입교하는 경우도 있다. 긴 세월동안 결단하지 못한 사람이 오히려 감사한 생활을 하는 경우도 있음을 볼 때, 사람을 인간의 생각으로 판단하기는 퍽이나 어려운 일이다.
손님을 환영하는 집은 망하지 않는다고 했다.
방문할 때 신흥종교 신자들을 만날 수도 있다. 이들은 대개 아래와 같이 주장한다.
① 자기네 종교만이 하느님의 참조직이라고 믿는다.
② 자기네 조직으로부터 나온 가르침 외에는 어떤 학자가 해설한 참 진리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③ 자기네 조직에서 나온 것이면 무조건 참으로 받아들이고 믿는다.
④ 자기네 출판물을 통해서만 성서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다.
⑤ 자기네들만이 옳고 다른 모든 이들은 전부 틀렸다고 확신하는 어리석은 고집을 가지고 있다.
⑥ 자기네들만이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계승된 무리라고 믿는다.
⑦ 십자가의 보혈로가 아니라 자기들의 행위로 구원받고자 한다.
⑧ 십계명 외에 많은 지침을 만들어짐을 지우므로 신도들의 멍에를 무겁게 한다.
⑨ 예수님도 천사도 모르는 때를 예언한다.
⑪ 사랑은 강조하나 사랑이 없다. 한 해가 다가도 고아원, 양로원 한 번 찾아갈 줄 모른다.
⑫ 폐쇄적 집단을 형성하여 우물안 개구리가 되게 함으로써 조직에 대한 비판조차 할 수 없는 영적 수용소를 이룬다.
⑬ 타종교와의 연합과 친교를 거부하고 의견 교환마저 단절하여 넓은 이해와 넓은 견해, 넓은 지식을 포용하지 못함에 따라 폭넓은 판단력을 상실하게 됨으로써 속으면서도 속는 줄 모르고 거짓을 진리라고 확신한다.
⑭ 자유롭고 폭넓은 교육과 연구를 배제하고 판에 박힌 문답 주입식 의식화 교육방법을 취함으로써 인간들을 획일적 로버트 기계로 만든다.
⑮ 신학을 인간의 윤리와 인간 과학에 부합시켜 해결코자 함으로써 성서를 왜곡시키게 하고 신앙을 유물론적 정치 이데올로기화 한다.
교리를 성서에다 맞추는 것이 아니라 성서를 교리에 맞춘다.
성서구절에 대하여 이 말씀은 어디에 있다고 말하지 않고 끌어다 맞춤으로써 당치도 않은 성구를 아무데나 마구 적용시킨다.
내 신앙이 중한 것만큼 남의 신앙도 중하게 여길 줄 아는 겸손이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