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신유박해 역사 신문 1호(1801년 2월)

2001. 2. 4. 오전 11:0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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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박해 역사 신문 1호] 정순왕후, 천주교 금지령 '척사윤음' 발표

 

 

신유박해 순교 200주년을 맞아 신유박해의 전체 과정을 독자들에게 더욱 생생하고 사실적으로 제시하기 위해 2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당시의 시점에서 신문 형태로 보도하는 '역사 신문'을 특집 기획으로 마련한다. 평화신문은 매월 한 차례씩의 '역사 신문' 기획과 함께 다양한 특집으로 신유박해와 초기 교회 순교자들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한다. <편집자>

 

[사진설명 : 정순왕후의 박해령으로 검거된 천주교 신자들이 포도청에 끌려와 오라에 묶인 채 신문을 받고 있다. 사진제공 KBS]

 

1801년 2월 어린 순조(11) 임금을 대신해 수렴청정을 하고 있는 대왕대비 김씨(정순왕후)가 22일 천주교 금지령인 '척사윤음(斥邪윤音)'을 발표했다.

 

대왕대비는 교서에서 "사학(천주교)은 아비도 임금도 없어서, 인륜을 무너뜨려 스스로 되놈(夷狄)이 되고 어리석은 백성들을 짐승(禽獸)의 처지로 내몰고 있다"고 지적, "각 읍 수령은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엄수하여 통장의 책임 아래 사학의 무리들을 적발, 징치토록 하라"고 명했다. 대왕대비는 또 "개전의 뜻이 없는 사학 무리가 있으면 역률로 엄히 다스리라"고 지시했다.

 

지금까지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조정에서 직접 박해령을 내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더욱이 대왕대비는 지난해(1800년) 6월 정조가 급서한 후 순조를 대신해 수렴청정에 나선 직후부터 "사학이 서울에서부터 시골까지 불길 번지듯 번지고 있으니 사학 배척 방도로 코를 베어 씨를 없애겠다"고 말한 바 있어 그 어느 때보다 천주교 탄압의 열기가 가열될 것으로 보이며 그 여파도 전국적으로 파급될 것으로 전망된다.

 

또 이번 박해령은 선대 임금인 정조의 "정학(正學)이 밝아지면 사학은 저절로 없어진다"는 개방적인 대천주교 정책과는 달리 최고 사형까지 구형토록 하는 강경책이어서 당분간 공포 정치가 지속될 예상이다.

 

한편 1801년 1월 현재 전국의 천주교 신자들은 대략 1만 여명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주로 남인 실학계열의 양반들과 중인들이 지도층으로 있으며 양민들과 천민들도 상당수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미니해설] 오가작통법이란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이란 다섯 집을 한 통(統)으로 조직하여, 강도 절도를 방지하고 환란을 서로 구제하며 각종 조세의 납부를 독려하기 위하여 마련한 법. 성종 16년인 1485년에 흉년에 대비해 5가구를 한 통으로 조직, 생활 상태를 감독하고 부역과 조세에 이용하도록 제도화됐으며, 이 법이 전국적으로 시행된 것은 숙종 1년인 1675년 때부터라고 한다.

 

대왕대비 김씨는 이 오가작통법을 통해 5가구를 한 통으로 묶어 서로 동태를 파악하게 해 그 안에 천주교인들이 있으면 포청해 고발토록 하고, 만약 천주교인이 있는데도 고발하지 않을 경우 한 통 사람들이 서로 연대 책임을 지도록 한 것이다.

 

 

'척사윤음' 발표 배경과 전망 - 조직적 박해, 천주교 존립 위기

 

우려했던 천주교 박해령이 마침내 발표됐다. 사실 대왕대비 김씨가 천주교를 박해하리라는 것은 조심스럽게 점쳐지고 있었다. 지난해(1800년) 말 정조의 장례식이 끝나고 얼마 안돼 대왕대비 김씨는 조선 전역에 천주교를 금하면서 천주교 신봉자들을 불법자로 여겨 체포하도록 관헌들에게 명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여기 저기에서 천주교인들이 체포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설 명절이 되면서 박해가 잠시 뜸해지는 사이에 많은 교우들은 포졸들을 피해 숨을 곳을 찾아 은신해 들었다. 이런 가운데서 척사윤음이 발표된 것이다. 이미 한양에서는 천주교회 평신도 총수인 최창현을 비롯해 많은 천주교인들이 잇따라 체포됐고, 전국적으로 천주교인들에 대한 검거 선풍이 몰아닥치고 있어 이번 박해가 얼마나 어디까지 이어질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조정의 이번 조치가 권력 다툼에서 비롯된 정치적인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이 강하게 일고 있다. 이미 정조의 장례식 직후 대왕대비의 수렴첨정이 시작되면서 천주교에 호의적인 시파 중신들이 대거 파직된 반면에 노론 벽파들이 대거 등용돼 심환지가 영의정에, 이시수는 좌의정에 서영보는 우의정에 그리고 김조순이 병조판서 등에 제수됐다.

 

이와 관련, 시파 남인계열의 한 관계자는 "정순왕후의 이번 조치로 노론 벽파를 축으로 한 보수 반동이 우려된다"며 "정조의 개혁 정치를 계승하는 것은 우리 시대의 과제이며 이번 신유사옥은 노론 벽파의 정치 공세"라고 주장했다.

 

천주교측도 "이번 천주교 금지령은 그 배경에 정치적 이해관계가 커 수용할 수 없다"며 "조정은 이로 인해 파생될 민심 동요와 신자들의 숭고한 죽음에 대해 책임져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무튼 조정의 이번 조치로 천주교 측은 그 존립 자체마저 위협받을 만큼 심각한 위기에 봉착해 있다. 그러나 천주교인들이 탄압을 피해 흩어지면서 오히려 천주교세가 전국적으로 확산될 가능성도 적지 않다.

 

 

 "죽음으로 천주신앙 증거하겠소"

 

대왕대비 김씨의 척사윤음 발표로 천주교 교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가 이뤄지고 있는 가운데 천주교계 지도자들은 조정의 발표가 천주교에 대한 그릇된 이해에서 나온 것이며 따라서 관헌들에게 체포되더라도 결코 배교하지 않을 것이라는 결의를 다지고 있다.

 

조정으로부터 체포대상 1호로 지목되고 있는 중국인 주문모 신부는 천주교는 사교가 아니라 대단히 공정하고 지극히 올바르며 아주 신실된 도리이며 종교라며 척사윤음의 내용을 정면 반박하고, 자신은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서는 순교도 마다 않겠다고 밝혔다.

 

조선 천주교회 초대 명도회 회장을 맡고 있는 정약종(41, 아우구스티노)은 "조정에서 천주교 신자를 임금도 아비도 모르는 짐승이라고 하는데 천주는 천지의 큰 임금[大君]이시며 큰 아비[大父]이시다"며 "임금과 부모에게 효를 행하는 것과 같이 천주께 효도[大孝]를 봉행하는 것이 무슨 잘못이냐"고 반박했다.

 

대중들에게 천주교를 전하기 위해 한글 교리서 &#39;주교요지&#39;를 펴낸 그는 "하느님께서 모든 인간을 차별없이 똑같이 창조하셨기 때문에 천주교 신자들은 반상을 구분하지 않는다"며 "천주교를 진리라고 믿기에 나라에서 금해도 고칠 마음이 없고, 비록 만번을 형벌 아래 죽더라도 조금도 뉘우칠 마음이 없다"고 말했다.

 

남인 출신 양반인 홍낙민(64,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진사는 "내가 섬기는 천주는 사람과 만물을 만든 주제자시다"고 주장하면서 "나는 천주를 위해서 죽음으로 천주교 신앙의 진리를 증거하고자 한다"고 순교 의지를 밝혔다.

 

또 선왕 정조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던 황사영(27, 알렉시오)은 "앞으로의 박해 추이를 지켜본 후 교황청에 한국 교회의 사정을 알려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외교적 노력에 힘써줄 것을 요청할 것"이라고 말했다.

 

 

최창현 평신도 총회장 체포돼

 

[사진설명 : 최창현 총회장이 옥중에서 천주교는 사교가 아니라 우주만물의 주재자이신 천주 성삼을 믿는 진리의 종교임을 고백하는 호교문을 쓰고 있다. 그림 탁희승]

 

1801년 2월.

 

최창현(47, 요한) 조선 천주교 평신도 총회장이 조정의 천주교 박해령 발표 하루 전인 21일 포청에 의해 긴급 체포됐다.

 

그동안 포청의 수배를 받아 피신 생활로 병이 난 최씨는 치료를 받기 위해 자정 무렵 자택으로 돌아가다 배교자 김여삼의 밀고로 체포됐다고 소식통들이 전했다. 김여삼은 무뢰배들을 정보원으로 삼아서 교우들을 찾아다니며 "포청에 고발하겠다"고 협박해 돈을 갈취해온 인물로 천주교회 내에선 요주의 대상으로 알려져 왔다.

 

최 회장은 현재 포청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으면서 중국인 주문모 신부의 행방과 전국의 교회 조직망을 털어놓으라고 강요받고 있으며, 배교 압력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 포청의 한 관리는 최 회장이 포청에 끌려가자마자 치도곤 13대를 맞는 가혹한 형벌을 당했으나 주 신부의 행방을 자백하지 않고 포도부장에게 천주 십계와 조상 숭배의 헛됨을 설명했다고 전했다.

 

형조는 이번 최씨의 체포가 현재 조선에 잠입, 활동중인 중국인 주문모 신부와 교회 지도자들을 압박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밝혔다.

 

형조는 최씨 체포에 이어 박해령이 발표된 22일부터 한양을 비롯해 전국 도처에서 천주교 교우들을 잇따라 체포하기 시작했다. 한양의 좌·우 양 포도청에는 체포된 천주교 교우들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교회 지도급 인사들은 이미 체포를 피해 잠적했고, 아직 포졸들이 양반층이나 부유층 유력 인사들의 체포를 꺼려해 주로 서민들과 부녀자들을 주로 잡아들이고 있는 실정이다.

 

또 조정에서는 천주교인의 검거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신대현 총융사를 포도대장으로 임명하고, 이유경 좌포도대장을 경질했다. 그러나 신임 신 포도대장은 부임하자마자 옥에 갇혀 있던 배교자들을 석방해, 이 사실이 대왕대비전에 알려지면서 대왕대비 정순왕후가 대노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창현 그는 누구인가

 

최창현(崔昌顯)은 1754년 서울에서 출생한 중인 계급 역관 출신으로 이벽의 권유로 1784년 세례를 받고 천주교에 입교했다. 최창현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했고 성격이 온순한데다 활동적이고 덕망이 높아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열고 그를 따랐다는 게 주변의 평.

 

황사영은 그의 인품에 대해 "언제나 표양이 순수하고 말수가 적고 정의로워서, 누구든지 의혹이 생기거나 곤란을 당해 몹시 근심할 때도 그의 얼굴만 한번 보아도 자기가 당하고 있는 어려운 처지가 그다지 큰 일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고 말했다.

 

강론에도 뛰어난 그는 1791년 신해박해 이후 조선 천주교회의 지도자로 신자들로부터 존경 받았고, 윤유일 등 밀사를 중국 북경교구에 파견, 주문모 신부를 입국시키는 데 크게 공헌했다. 그는 또 1790년 초 한문본 "성경광익"과 "성경직해"를 번역해 한글본 "성경직해광익"을 간행하기도 했다.

 

1794년 주문모 신부 입국 후 조선 천주교회 총회장으로 임명된 그는 주 신부를 도와 명도회와 그 하부 조직인 육회를 조직, 조선 천주교회의 기틀을 잡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는 등 체포될 때까지 20여년간 전교활동에 힘썼다.

 

<평화신문, 612호(2001년 2월 4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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