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 순교자들의 이름 대신에
충안 서산시 '해미성당'
"우리가 딛고 있는 이 자리에서는 서있기도 죄송하고 앉아있기도 죄송하고 모든 게 그저 죄송할 따름입니다."
해미성당 주임 안상길 사도 요한 신부(53세)의 말대로 이곳 해미 성지에 서면 참으로 죄송스럽다. 100여 년의 박해 기간 동안 잔인하게 희생된 3천여 명의 순교자들이 발 디디는 곳 어딘가에 묻혀있기 때문이다. 대부분 서민 출신으로 이름도 남기지 못한 무명 순교자들이라 그런지 기념성전 하나 없어 더욱 그러하다.
성지 어귀에 15년 전에 세운 조그마한 해미성당이 있지만 성지 안에는 성당이 없어 연간 수만 명에 이르는 순례자들은 축사처럼 생긴 천막에서 미사를 드려왔다. 1935년에 발굴한 순교자들의 거룩한 유해도 이 천막 안에 모셔져 있다.
마흔한 살에 늦깎이 신부가 되어 쉰을 넘긴 안 신부가 지난해 2월 시골 본당인 이곳 해미성당으로 발령을 받자 후배 신부들은 "형님, 팽 당한 거 아뇨?" 하고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주교님께서 저를 이곳으로 보내시면서 성지에 걸맞은 성전을 지어보라고 하시더군요. 처음엔 난감하기만 하고 사명감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유해 참배를 하면서 생각이 달라졌어요. '좋다. 한번 해보자.' 하고 궁리 겸 묵상을 하다 보니까 그분들이 아이디어를 주시더라고요."
제삼천년기의 시작을 앞두고 3천이란 순교자의 숫자가 갑자기 의미 있게 다가오면서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무명 순교자 숫자대로 3천 명의 후손들의 정성을 모아 성전을 봉헌하고픈 마음이 생겼어요. 가능하겠다는 느낌이 팍 왔지요. 뜻하 지 않게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전국 신자들의 마음을 모을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어요."
이렇게 해서 교회 신문에다 무명 순교자 성전 건립을 위한 3천 명 회원 모집 광고를 냈다. 대성당과 유해 참배실을 짓는 데 30억 정도가 들 것으로 보고 이를 3천 명으로 나누어 1구좌당 100만 원씩 3천 명의 정성을 모은다는 내용이었다. 시골 본당 예산으로는 광고비 대기도 버거워 본당 신자들은 걱정을 했지만 효과는 놀라웠다. 해미 성지의 사연을 담은 첫 광고가 나가자마자 하루에 40통의 전화가 걸려와 전화 받느라고 다른 일을 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해미 성지는 거의가 무명 순교자이기 때문에 그분들의 이름 대신 후원하는 회원들의 이름을 비문에 새기기로 했습니다. 순교자 한 분에 한 명의 회원이 '맨투맨'으로 마치 주보성인을 모시듯이 말입니다. 정성을 보탠 이들에게는 천국에서 보상이 주어지겠지만 지상과 천상이 연계된 교회 아닙니까. 이 세상에서 이렇게 봉헌자 이름을 새기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웅덩이에 수장을 시키거나 팔다리를 붙들어 돌에 태질하는 자리개질, 생매장 등으로 비참하게 죽어간 서민 출신의 이름 모를 순교자들에 관한 눈물겨운 사연을 들은 교우들이 곳곳에서 정성을 보내오기 시작했다. 국내는 물론 미국에서도 200구좌를 받았고, 900명 남짓한 신자에 시골 살림이지만 해미본당 교우들도 100구좌를 신청했다.
"식구 수대로 봉헌을 한 이들도 있어요. 이런 정성 때문에 일년 반 만에 90퍼센트에 이르렀습니다. 기적이라고들 하지만 당연한 결과예요. 3천 명의 순교자가 전구해 주시는데 이루어지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얼마 안 남은 지금이 더욱 어렵지만 틀림없이 잘될 겁니다."
8월 중순에 대성당과 유해 참배실 설계 현상 공모를 마감하고, 내년 봄이면 첫 삽을 뜬다. 서해안 고속도로 인터체인지가 근처에 생기므로 더 많은 순례자들이 이곳을 찾을 것으로 보아 기념성전은 700석 규모로 짓고, 방 10개 정도의 자그마한 피정 시설도 생각하고 있다며 안 신부는 기도를 부탁한다.
후원금을 완납한 이들에게 안 신부는 감사의 표시로 1단 묵주를 손수 만들어 선물한다. 순교자들이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죽어간 생매장 성지에서 자라고 있는 특이한 나무 열매로 만든 묵주이다.
"무환자(無患子)나무는 집 주위에 심으면 말 그대로 자녀에게 우환이 없어진다고 하여 생긴 이름인데, 무명 순교자들을 거름으로 해서 자랐을지도 모를 이 나무 씨앗으로 정성을 다해 만들었습니다. 묵주 알 색깔이 마치 응고된 검붉은 핏빛 같아 의미를 새기려고 ‘순교보혈묵주’라고 이름지었지요."
뙤약볕 아래 땀흘리며 농사일을 하면서도 성지에 나와 풀을 뽑는 교우들, 후원자들을 생각하며 묵주 알에 하나 하나 구멍을 뚫는 사제의 열정이 어우러져 해미성당의 여름은 더욱 뜨겁다. 순교자들은 이미 하늘의 성전에서 지내실 터이니 정성으로 지을 땅의 성전은 이곳을 찾을 수많은 순례자들 몫임에 틀림없다.
후원하실 분 ☎ 041-688-3183(해미 성지 관리 사무실)
<경향잡지, 2000년 9월호, 취재 배봉한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