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 아늑한 어머니의 품에서

2000. 11. 9. 오후 3:5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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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늑한 어머니의 품에서

 

 

며칠 동안 쉬지 않고 굵은 빗줄기를 뿌리던 검은 구름이 잠시 물러나면서 따가운 여름 햇살이 하염없이 쏟아지던 날, 우리 나라에서 유일하게 '성모 성지'로 지정된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에 있는 '남양 성모 순례지'를 찾았다.

 

이곳은 다른 성지들과 달리 이름 모를 신앙선조들이 순교한 곳이다. 남양뿐 아니라 인근의 교우촌인 백학이나 활촌에서 잡힌 천주교인들도 이곳에서 처형되었으나 지금까지 이름이 밝혀진 순교자는 충청도 내포 사람인 김 필립보와 박 마리아 부부, 경기도 용인 덧옥골의 정 필립보, 수원 걸매리 출신인 김홍소 토마스뿐이다. 그러나 이들 외에도 더 많은 신자들이 이곳에서 순교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무명 순교자들의 치명터였기에 그리 관심을 끌지 못하던 이곳을 1983년 당시 남양성당 주임인 박지환 요한 신부(1985년 3월 29일 선종)가 성지로 개발하기 시작했다. 남양성당 교우들은 성지 개발기금을 마련하려고 막노동으로 품을 파는 등 성지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정성을 다 쏟았다.

 

1989년부터 남양성당 주임을 맡았던 이상각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는 당시 수원교구장이던 김남수 주교에게 이곳을 성모 성지로 개발하자고 건의했다. 수원교구는 교구 내 모든 성당에서 1991년 9월 한 달 동안 '묵주기도 운동'을 펼쳤고, 같은 해 '로사리오의 성모' 축일이며 교구 설정 기념일인 10월 7일에 우리 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이곳을 성모 순례지로 봉헌하였다.

 

1995년부터 이곳을 전담하게 된 이 신부는 순교지에 성모 순례지를 만든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성모님을 누구보다 사랑한 이는 순교자입니다. 박해시절 순교자들은 기적의 패나 묵주를 몸에 지니는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했고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것으로 여겨 소중하게 간직했습니다. 순교지를 성모님께 봉헌함으로써 마리아 신심과 순교자 현양 정신을 함께 함양하려는 것입니다." 성지로 들어가는 다리인 '로사리오교'를 지나 둔덕을 넘으면 옥잠화가 활짝 핀 '로사리오 성모님의 동산' 입구가 눈에 들어온다. 빽빽하게 들어선 나무와 잘 다듬어진 주변 경관이 이 아름다움 뒤에 숨겨진 봉사자들의 땀방울을 짐작게 한다. 성지는 구릉처럼 나지막한 동산들이 감싸고 있어 마치 어머니의 품에 안겨 편안하게 쉬는 아기의 모습 같다.

 

논이었던 이곳을 아름다운 순례지, 푸르른 쉼터로 만들려고 나무를 끊임없이 옮겨 심었고, 다져놓은 땅이 장마로 무너져내리면 다시 다지고 해서 지금에 이르렀다는 최영춘 마리 요셉 씨. 그는 1991년부터 이곳 조경공사를 도왔는데 "다른 성지를 많이 다녀보았지만 이곳만큼 아름답게 꾸며진 곳을 보지 못했습니다."라고 자랑한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조금 더 올라가자 스피커에서 묵주기도를 바치는 소리가 우렁차게 들린다. 한 무리의 순례자들이 어른 둘이 팔을 펼쳐야 겨우 안을 수 있는 커다란 돌들로 만든 묵주알이 박혀진 '묵주기도의 길'을 돌고 있다. 거동이 불편하거나 오전 10시에 시작하는 묵주기도에 늦은 사람은 십자가가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그들과 함께 기도드린다.

 

매달 첫째 토요일을 성모께 봉헌하는 관습에 따라 '첫토요일 신심'을 지키려는 사람들까지 와서 여느 날보다 많은 사람이 참석했다. 모처럼 엄마아빠를 따라나선 여섯 살바기 보나도 오늘은 얌전하게 앉아 엄마아빠와 묵주를 번갈아 쳐다본다.

 

날마다 경기도 안양 호계동에서 거리가 멀다 않고 찾아와 성체조배실 앞에서 초 파는 봉사를 하는 할머니는 "여기에 오면 마음이 너무 편해서 좋다."고 한다. 어떻게 편하냐고 물으니 웃음으로 답을 대신한다. 그 웃음에 잔잔한 여유가 배어있다.

 

성모 성지라 하면 루르드, 파티마나 메주고리 등 성모 발현지를 생각하기 쉬운데 남양 성지가 성모 순례지로 지정되면서 성모 순례지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갖게 했을 뿐 아니라 성모 순례지를 순례하며 기도하고픈 교우들의 소박한 바람을 채워주었고, 마리아 신심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고 수원 가톨릭 대학교 교수인 이정운 신부는 말한다.

 

남양 성모 순례지에서는 두 가지 신심운동을 계속해서 전개하고 있다. 첫째가 '24시간 묵주기도 고리 운동'으로 하루 1,440분 가운데 자신이 기도 바칠 수 있는 시간 15분을 선택하여 묵주기도를 바치는 것이다.

 

1단은 조국의 평화, 2단은 민족의 화해, 3단은 죄인들의 회개, 4단은 남양 성모 순례지를 위하여, 5단은 묵주기도 고리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교우들을 기억하며 바친다. 자신이 기도를 바치기로 한 시간에 묵주를 들고 '기도의 마라톤'을 하면 하루종일 끊어지지 않고 기도가 이어진다. 이 기도에 동참하면 묵주기도 은총 안에 머무를 수 있다고 참가자들은 말한다. 둘째는 '피크로스'라 부르는 '십자가 로사리오 순례 운동'이다. 정기적이지는 않지만 일년에 두 번 2박 3일 동안 조국의 평화를 위하여 성지와 성지를 걸어서 순례하면서 묵주기도를 바치는, 희생과 고통을 봉헌하는 신심운동이다.

 

"성모님은 순교자의 보루이자 어머니입니다. 그래서 어느 곳보다도 순교지에서 성모 신심과 기도를 많이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도 성모 순례지가 생겼다는 것은 '마리아 영성의 생활화'라는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우리 나라도 본당의 주보성인을 성모님의 호칭으로 많이 정하지만 그 호칭에 대한 신자들의 이해가 부족합니다."라고 이상각 신부가 지적한다.

 

남양 성모 순례지를 돌면서 묵주기도를 바치면 전대사를 얻을 수 있다. 반드시 전대사를 얻으려고 성모 순례지를 찾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삶에서 마리아에 대한 믿음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이 기회에 되새겨볼 만하다.

 

남양 성모 순례지 (0339)57-5828

 

<경향잡지, 1998년 8월호, 취재 장창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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