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는 사람마다 " 수고했다.고생했다.참 좋았다 " 라는 말로 위로를 해 주었습니다.
어제 저녁 제가 기획 섭외 무대 감독을 맡아 진행한 교구 설정 40주년 기념 음악회를 두고 하는 말들 입니다.
40주년 행사분과 위원의 자격으로 맡겨진 일이었지만 당연히 저의 몫으로 돌아 올 일이었습니다.
1시간 30분에서 2시간 정도의 공연시간을 예상하고, 가능하면 교구내의 다양한 계층의 재원들을 동원하는
방법으로, 그래서 말 그대로 모두가 함께 하는 축제의 장을 마련하자는 의도로 기획된 음악회였습니다.많은 분들이
도와 주시어 행사를 치뤄 내긴 했지만 저로서는 아쉬움도 많이 남습니다.하긴 아무리 해도 스스로 만족해 하지 못하는
성격에도 문제가 있겠지만 장소 선정이나 홍보나 다른 분야의 협조를 얻어 내는 문제 등 좀 더 잘 할 수 있었는데....하는
생각이 듭니다. 마침 오늘 아침 미사의 복음 말씀이 또 머리를 때리더군요. 당신의 제자들을 선택하시기 전에 그 분은
"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루카 6,12)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도
제자를 선택하는 일을 앞두고 밤을 새워서 까지 기도하셨는데 과연 나는 이번 일을 잘 치루어 내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기도했는가?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 얼마나 간곡히 아뢰었는가? 교구민 모두를 위한 그런 행사였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저의 만족을 위한 행사였는지도 모릅니다.제 역량을 과시하고픈 마음이 앞 섯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부족함을 느끼지만 최선을 다 했기에 주님께서 좋게 보아 주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내일 종합 운동장에서의 경축
대 미사도 주님의 도우심으로 잘 마무리 될 것이라 여겨집니다.이번 40주년 행사를 통해 저희 마산교구가 한층 더 주님
도구로서의 사명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게 되도록 기도를 청합니다.
어느 누구도 아무 부족함 없이 사는 사람은 없다. 온전히 채우고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말이다.
부족하기에 스스로 노력해야 하고 도움을 청해야 하고 서로 도와 주어야 한다.문제는 부족하면서도 부족한 것을 느끼지
못하거나 느낀다 하더라도 용기가 없어 도움을 청하지 못할 경우도 있고 청하더라도 옳지 못한 것을 청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니까 나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이며 그 부족한 것을 어떤 방법으로 청해야 하는지가 중요하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 주신다고 하신다.하지만 그 청함 자체가 잘못 된 것이라도 과연 주님께서
들어 주시겠는가? 아이를 사랑하는 어머니라도 그 아이에게 해가 될 수 있는 것을 청할 때 예를 들어 날카로운 칼이나
송곳 같은 것을 달라고 청했을 때 그것을 들어 주시겠는가? 일용할 양식을 주시라고 하셨지 차고 넘치게,일확천금을
주시라고 하시지는 않으셨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간절히 구하라 하셨다.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는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장애인이었다.보고싶은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겠나?
그러나 그에게 볼 수 있게 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어쩌면 포기의 상태에 있었는지 모른다. 그런 그에게 희망의 불씨가
지펴졌다.소문으로만 듣던 나자렛 사람 예수가 자기 앞으로 지나간다는 것이다.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그래서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다윗의 자손 예수님께 간청한다.혼신의 힘을 기울였을 것이다.아마도 이미 그 자체로 자비를
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다 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그래서 주님은 그의 간절함을 채워 주셨다.
오늘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군중들의 모습이다. 처음 시각 장애인이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청했을 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다.그의 아픔과 간절함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니면 네가 그럴 자격이나 있느냐는 모습이다.이웃의 부르짖음에 대한 우리의 모습과 다를바 없다.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시자 "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 (마르코 10,49) 하고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다.
우리 이웃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함께 한다면 그와 소리를 모아 주님의 자비를 청해야 할 것이다.
"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지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마태 18,19)
주님의 이름으로 함께 청하면 들어 주신다 하지 않았나. 이런 것이 바로 복음 선포요 보편 구원을 통한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방법이 아니겠는가? 우리 주위를 한 번 더 둘러 보자.
예리고의 시각장애인은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었고 무엇을,어떻게 청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었기에 그 소청을 주님께서
들어 주셨다.불굴의 정신으로 매달리는 간절함이 이루어진 것이다.주님께서도 기도자의 자세는 이러해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루카11,5 이하) 또한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자세에서 벗어나야 한다. 바르티매오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자기를 감싸고 있던 겉옷을 벗어 던졌던 것처럼.
또 하나. 자기의 간청이 이루어지고 난 다음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지 오늘 복음이 보여 준다. " 그가 곧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 (마르코 10,52) 베풀어 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시는 자기 만족에 도취되어 있을
것이 아니라 바로 주님을 따라 나서는 일이다. 왜? 무엇을 위해? 주님과 함께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이다.
아파하는 이웃을 찾아 만나기 위해서 이다.그를 만나 그와 함께 주님의 자비를 청하기 위해서 이다. 이런 관계가 되풀이
된다면 이 세상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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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도 마지막 입니다.마지막 밤 잘 보내시고
위령성월 맞아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합시다. 산에 단풍들은 다 어찌할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