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6월 5일 연중 제9주간 화요일 1 매일 복음 묵상

2007. 6. 6. 오후 4:26:31

글자
 시험      

-박영봉 신부-


 하느님을 시험하는 행위는 하느님의 선하심과 전능하심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시험하는 것은 주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존경과 신뢰를
해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험은 하느님의 사랑과 권능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는 유혹에 동의한 결과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께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고 청해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시련을 이겨내는 힘’을 다지기 위하여 인간의 내적 성장에
필요한 ‘시련’과 죄와 죽음으로 이끌어가는 ‘유혹’을 분별하도록 하십니다.
우리는 유혹을 ‘당한다’는 것과 유혹에 ‘동의한다’는 것도 분별해야 합니다.
분별력을 이용하면, 우리는 유혹의 거짓된 가면을 벗길 수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유혹의 대상은 ‘먹음직하고 보기에 탐스럽지만’(창세 3,6),
실제로 그 열매는 죽음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돌릴 것은?

-김희경 수녀(그리스도의 성혈 흠숭 수녀회)-


 물질이 풍족한 시대에 사는 요즘, 더군다나 한번 클릭하면 만사가 해결되는 세상에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기가 참으로 어려운 것 같다. 또한 절대자의 존재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산다는 것은 무의미한 것으로 여기기 쉽다. 돈의 흐름만 잘 잡으면 행복은 저절로 따라오리라는 신념에 사로잡혀 있다. 능력이 있어 좋은 직장을 찾고 많은 연봉을 받는 것이 최상의 목표가 된다. 투자를 잘해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면 더 바랄 게 없다. 이렇듯 돈줄을 잘 탔는데 ‘누구에게 감사해야 하는가?’ 하는 태도로 사는 이들을 주위에서 자주 보게 된다.
우리나라 부모들의 교육열은 식을 줄 모른다. 아이들이 좋은 환경에서 누구에게 뒤지지 않도록 부모들은 온갖 정성을 쏟아붓는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이왕이면 돈 잘 버는 직장을 잡아 아무 걱정 없이 살아가는 것이 성공이라는 부모들의 꿈과 기대가 숨어 있다. 이 시대를 반영하듯 매일 읽는 신문은 경제 흐름과 투자 경영을 잘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고, 관련 서적과 새로운 강좌를 소개해 준다.
하지만 공부방 친구들의 가정, 그들의 현실은 너무나 다르다. 대다수 부모들은 두 개의 직업을 갖고 평일뿐 아니라 주말에도 열심히 일하지만 가정 형편은 나아지지 않는다. 임금 경쟁에서 불리한 이들이 하루 종일 일해도 간신히 한 달 생활비만 나오는 정도다. 아이들은 학교 친구들과 비교할 때 하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도 많지만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의기소침하다. 게으르기 때문에 가난하다고 쉽게 말한다. 하지만 기본 조건이 다른 입장의 경쟁은 더 가지고 많이 알고 있는 이들이 이길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 아닌가?
이 세상의 모든 재화는 어디서부터 온 것인가? 한꺼번에 쥐고 살다가도 이 생을 마무리할 땐 모두 두고 가야 한다. 돈이 곧 행복이라는 공식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오늘 먹고 마시고 즐기는 데 쓰는 모든 것이 과연 누구의 것인지 질문해 보고 싶다. 세상의 것에만 온 마음을 쓰고 있는 이들에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하느님께 돌려드릴 수 있는 기회를 찾아보라고 말하고 싶다. 그렇게 돌려드릴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우리가 하느님께 돌려드릴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모든 것이 아닙니까?”라고.

 



 

 황제의 것과 하느님의 것

-문성호 신부-

새로움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누구나 나이가 젊었을 때는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과 모험심이 있기에 새로움을 받아들이는 것이 삶의 에너지를 자극하는 기폭제가 됩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우리 인간은 누구나 어느 정도 과거 지향적이고 보수적인 경향을 지니고 안주하려는 성향을 짙게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언제나 새로운 분이십니다. 그분은 현실에 안주하는 우리를 일깨우시고 삶의 본질적인 부분을 보게 하십니다. 그러기에 그분을 온전히 우리 삶 속에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있는 낡은 것을 버리고 새롭게 준비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등장은 당시 유다 사회 안에서 참으로 큰 혼란을 초래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가르침은 기존의 사회 질서와 가치관을 완전히 뒤엎는 너무나 새로운 것들로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 그분은 너무도 파격적인 분, 너무도 충격적인 새로움이었기에 자신들의 고착된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습니다.

무엇보다도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이 생명처럼 소중히 여기고 간직해왔던 율법을 계속 파기하는 모습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분신, 목숨과도 같았던 안식일 규정을 자주 깨트리셨습니다. 그뿐이었습니까? 예수님은 당시 유다인들이 벌레처럼 여기고 상종조차 하지 않았던 나병환자, 창녀, 세리, 이방인들과 서슴없이 만나시고 친구가 되셨습니다.

당시에 그들은 하느님께로부터 버림받았던 죄인들의 상징이었습니다. 더욱 유다인들이 못마땅했던 일은 예수님께서 틈만 나면 자신들의 아픈 곳을 끊임없이 찔러댄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유다인들의 지도자들이었던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에게 향한 예수님의 질타는 참으로 직선적이고 정곡을 찌르는 말씀들이었습니다.

"이 위선자들아! 겉은 그럴 듯 해 보이지만 너희는 마치 회칠한 무덤 같구나. 동족들에게 큰짐을 지워놓고 너희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구나!" 예수님의 정곡을 찌르는 말씀 한마디 한마디에 대단히 예민해진 유대교 지도자들인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은 그분이 선포하시는 말씀들에 촉각을 곤두세웠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교훈으로 삼기 위해서가 아니라 트집잡아 올가미를 씌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그들은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옳으냐 내지 않는 것이 옳으냐는 대단히 민감한 정치적인 문제로 예수님을 올가미로 씌울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황제(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이 친 올가미를 지혜롭게 헤쳐나가십니다.

예수님이란 새로움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 자신을 겸허하게 낮추고 비울 줄 아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늘 어제의 낡은 우리와 결별하고 늘 새로움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려는 노력, 매일 변화되고 쇄신되려는 노력, 그것만큼 우리 신앙인에게 필요한 노력은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영적으로 민감해질 때 그분의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독서> : 주님의 날을 향하여 힘차게 걸어가자.

- 경규봉 신부-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재림과 종말이 자신들이 살아있는 동안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들이 생각한 것처럼 예수님의 재림과 종말이 이루어지지 않자, 믿음이 약한 이들은 조급해 했다. 급기야 예수님의 재림과 종말을 부정하는 이들까지도 생겨났다. 이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자신들의 생각과 욕정에 따름으로써 자신들의 현실적 이익을 챙기려고 했다.

뿐만 아니라 많은 교우들을 혼란에 빠트려 교우들이 올바른 믿음에서 벗어나도록 했다. 그럼으로써 교회에 폐해가 심각해졌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교우들에게 거짓 교사들의 속임수에 빠지지 말고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거룩하고 경건하게 살면서 종말을 기다리도록 권고한다. 종말이 더디 오는 까닭은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구원받을 기회를 주시기 위함임을 생각하며 진리와 의로움의 길을 걷도록 격려한다.

“당신 앞에서는 천 년도 하루와 같아 지나간 어제 같고 깨어 있는 밤과 같사오니 당신께서 휩쓸어 가시면 인생은 한바탕 꿈이요, 아침에 돋아나는 풀잎이옵니다.”(시 90,4-5)고 성서는 가르친다.

그런데 사람은 인생이 길고 영원할 것처럼 착각하고 살아간다. 비록 자신이 늙고 병들어가도 자신이 죽으리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며 살아간다. 비록 선조들의 역사를 보면서 선조들이 그처럼 세상에서 영원히 살지 못하고 죽었다는 점을 잘 알지만, 나 자신이 선조들과 똑같이 죽어 없어지리라는 점을 생각하지는 못한다.

수많은 선구자들이 “죽음을 기억하라.” 하고 외치고, 무덤 앞엔 “오늘은 나, 내일은 너”라고 쓰면서 죽음을 준비하도록 외치지만, 죽음이 적어도 나와는 무관한 것처럼 생각하며 살아간다. 이는 사람이 보이는 것에 얽매여 살아가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기 어려워하고,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욕심으로 인하여 우선 당장 눈에 보이는 이익과 즐거움을 추구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욕심 자체가 세상적인 재미, 즐거움, 여러 가지 이익 등, 이 세상의 것으로 결코 채워질 수 없다는 점을 깨달으면 욕심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인간의 욕심은 궁극적으로 하느님을 향하여 있으며, 하느님을 통해서만 욕심을 채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욕심에서 벗어날 수 있다.

사도들은 주님에 대한 체험을 통해서 그 점을 깨달은 사람들이다. 타볼산에서 예수님의 빛나는 모습과 모세, 엘리야를 보고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괜찮으시다면 제가 여기에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에게, 하나는 엘리야에게 드리겠습니다.”(마태 17,4) 하고 말씀드릴 정도로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이 기쁨이며 행복임을 체험한 사람들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뵙고 성령을 받음으로써 자신의 모든 꿈과 희망, 욕망이 주님을 통해 이루어지리라는 점을 깊이 깨달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체험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스도인은 사도들이 전한 그 체험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사람이다. 사도들처럼 주님을 체험하고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사도들처럼 그리스도의 재림과 종말(우주의 완성)을 기다리며 사는 사람이다. 그 날은 이사야서(65,17; 66,22)에 예언된 대로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되는 날이며, 정의와 평화가 넘치는 날인 동시에 악을 심판하는 날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종말을 기다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살면서 하느님의 뜻을 따라 진리와 의로움의 길을 걸어야 한다. 종말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디 오는 까닭은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구원받을 기회를 주시기 위함임을 믿고,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오늘 주님에 대한 체험과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을 다시 한번 깊이 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면서 주님의 날을 향하여 힘차게 걸어가자..............◆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김웅태신부-


오늘 복음에는 바리사이파와 헤로데 당원 몇 사람이 예수께 던지는 빈틈없는 질문이 나옵니다. 당시 로마의 식민지 하에 있던 이스라엘의 역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볼 때, 예수께 던지는 교묘한 함정의 질문이었습니다.

역사적 배경이란 서기 6년 옥타비아누스 아우구스투스는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의 임금 아르체라오스(헤로대 대황의 아들)을 폐위시키고 코포니우스를 총독으로 임명하면서 주민세를 거두어 로마에 바치도록 하였습니다. 여기서 주민세란 인두세로서 어린이와 노인만 빼고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에 사는 주민은 누구나 내야 했습니다. (그리고 로마 지배하에 있는 점령지역이 두 가지로 구분이 되는데 하나는 로마의 속국이면서도 문제성이 없는 지방은 의회에 속한 총독이 지배하였고, 또 하나는 문제성이 있는 지방은 로마 군대가 주둔하여 황제의 직활지로 되어서 지방장관이 지배하고 있었는데, 남쪽 이스라엘은 후자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금을 직접 황제에게 지불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여기에 대해 온건파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러한 세금 문제가 불가피한 것으로 여겼으나, 갈릴래아 출신 가우로니떼의 유다 같은 사람들과 그의 추종자들은 "과세는 노예제도 보다 나을 것이 없다. 일어나라! 하느님은 우리를 지지하고 계시다. 하느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지배자이시며 주님이시다. 로마인에게 공물을 바치지 말라. 다른 이를 주라고 부를 바에야 차라리 즐거이 죽음을 선택하겠다." 하여 열혈당을 조직하여 로마에 반기를 들다가 로마제국에 의해 처형되었습니다. 하지만 야훼 하느님만을 섬겨온 백성들의 마음속에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마음 내키는 것은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안내면, 황제의 군대들에 의해 처벌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황제에게 세금을 바쳐라!" 하면 자기 민족을 저버리는 발언이요, 비겁자가 되는 것이며, "바치지 말라!" ... 하면 로마 황제를 거슬려 군대에 의해 처벌되는 시대적 배경이 있는 난처한 질문에 봉착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은 로마의 돈인 티베리우스 황제가 주조한 데나리온을 보시고, 그것을 보여달라고 하셨습니다. 로마인들은 자기들의 황제를 카이사르라고 불렀는데, 예수께서 받아들은 데나리온에는 앞면에는 "아우구스토의 아들 신성한 아우구스토 티베리오 카이사르" 뒷면에는 "대제관 최고 성직자의 화폐"라고 적혀 있으면서 황제의 어머니 리비아의 초상이 새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화페에 대해서 고대인들은 세 가지 의미가 있었습니다.

1) 화폐는 권력의 상징 : 누구나 한 나라를 정복하거나, 반란에 성공했을 때 맨 처음으로 하는 일은 자기 자신의 화폐를 발행하여, 자기 주권과 권력의 보증으로 삼았습니다. 2) 화폐가 통용되는 곳에 그의 권력이 잘 유지되었던 것입니다 : 어느 왕의 지배 범위를 알려면, 그의 화폐가 통화로서 효력이 어느 지역까지이냐를 알면 되었다. 3) 화폐에는 왕의 머리 초상화와 그의 문장이 쓰여 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그 왕의 소유물로 생각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대답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티베리오 황제의 화폐를 사용하는 것이 이스라엘 나라 안에서 그의 정치적 권력을 인정하는 것이 됩니다. 비록 그 화폐를 달리 생각한다 해도, 그 화폐에는 그의 초상과 그의 문장이 새겨져 있음으로 여하튼 그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황제에게 세금을 바친다는 것은 황제 자신의 것을 바치는 것이므로 그것을 황제에게 바쳐라!" 그러나 "인생"은 하느님께 속한 것이므로 하느님께 바쳐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즉, 돈은 카이사르의 초상이 있으니 정당한 국가 권력에 따르라. 창세기 1 ; 26-27에서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하느님께 속함으로 사람의 삶은 하느님께 바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 있는 그 자리에서 최선을

-이봉하수사-


 

 

과거와는 달리 우리는 많은 것을 누리고 있습니다. 돈과 시간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어디든 여행을 떠날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바쁜 일상을
뒤로 하고 때때로 한적한 곳이나 외진 곳에 가서 며칠 동안 여행 삼아 지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시일이 지나면 오히려 무기력과 답답함을 느끼게
될 때가 있습니다. 반대로 시골 사람들도 도시로 나들이를 오게 될 때
이와 비슷한 경험을 갖게 됩니다. 도시생활과 시골생활 중에서 어느 쪽이 더
여유가 있고 좋을까요? 두 곳의 생활을 비교한다는 것이 좀 그렇긴 하지만
제 생각으로는 경제와 문화의 차이를 떠나 도시생활은 도시생활대로, 시골생활은
시골생활 그 자체로 각자 다른 삶의 모습을 띤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답답하고
복잡한 도시를 떠나 시골에서 생활한다면 더 많은 시간을 하느님을 위해서
바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1년에 며칠을 시골에서
지내보면 아무리 계획을 세우고 힘을 다한다 하여도 생각처럼 쉽지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삶의 여유는 스스로 만드는 것입니다. 여유가 많다고
해서 많은 시간과 돈을 하느님께 돌려드리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바쁜 와중에서도
서 있는 그 자리에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럴 때 일상 안에서 바리사이들과 같은 엉뚱한 질문은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

-양승국신부-


<무릎을 ‘탁’ 치게 하는 말씀>


언젠가 복음서를 쭉 읽어가면서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들만 한번 추려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말씀들을 유형별로 구분해보았습니다. 참으로 다양한 말씀들을 하셨더군요. 수많은 비유들, 제자들의 특별 교육용 일화들, 정신 못 차리던 제자들 혼내시던 말씀들, 잘 알아듣지 못하던 군중들을 위한 재미난 이야기들, 하느님 아버지와 나누셨던 대화들, 율법학자들과의 논쟁들, 그 많은 위로의 말씀들, 희망의 말씀들...


예수님의 말씀을 유형별로 정리하다가 느낀 바입니다. 무엇보다도 깜짝 놀랐습니다. 예수님의 한 말씀 한 말씀은 단 한마디도 버릴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말씀이 상황 상황에 너무도 적절했고, 기지로 넘치는 말씀이어서 경이롭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특히 사악한 적대자들이 예수님을 떠보려고 할 때, 예수님을 올가미에 집어넣으려고 갖은 계책을 마련해서 다가왔을 때, 그래서 의기양양한 태도로 예수님께 시비를 걸때, 예수님의 말씀은 더욱 지혜로 흘러넘쳤습니다.


적대자들 앞에서 예수님의 언변은 더욱 빛을 발했고, 생명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단 한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으셨습니다. 용감하게도 홀로 맞서셨습니다.


적대자들은 논리 정연한 예수님의 말씀, 순금과도 같이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예수님의 말씀, 어쩔 수 없이 승복해야하는 진리 앞에서 언제나 슬금슬금 뒤꽁무니를 뺍니다. 그리고 치를 떨면서 다음 기회를 노리며 물러갑니다. 눈앞에 놓여있던 먹잇감을 놓친 늑대처럼 으르렁거리면서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날카롭게 대립각을 세워 강경하게 맞서시던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해 약자들이 상처받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당신 지혜의 말씀으로 궁지에 몰린 약자들을 셀 수도 없이 구해내셨습니다. 박해자, 위선자, 이교도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로우셨지만, 길 잃고 방황하던 양떼들에게 그분의 말씀은 한없이 감미로운 생명수와도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는 것처럼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은 오랜만에 좋은 건수 하나를 만들었습니다. 이제야 잡아넣을 수 있겠구나, 드디어 소원성취 하는구나, 하면서 희희낙락,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예수님께 올가미를 던집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


참으로 난감한 질문이었습니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그 자리에서 고발되어 구속될 상황이었습니다. 바쳐야 한다고 대답하면, 그 인간들 분명히 예수님을 유다 민족의 반역자로 몰고 갈 것이고, 바치지 말아야 한다고 대답하면 로마제국의 반역자로 몰고 갈 것입니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대답하기 힘든 그 상황에서 나온 예수님의 대답은 정말 기가 막힙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


예수님의 대답은 난감한 상황을 적당히 넘기기 위한 대답이 아니었습니다. 장황하게 이것  저것 설명하는 말씀도 아니었습니다. 적정선에서 타협하는 말씀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단 한마디 강력한 말씀, 살아 움직이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 한 마디 말씀으로 황제의 권위도 존중해주시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는 말씀을 통해 하느님의 우위성, 하느님의 우선권에 대한 강조도 놓치지 않습니다.


참으로 지혜로 가득 찬 생명의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저 같은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할 수 없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어찌 그리 힘이 있는지요? 어찌 그리 지혜로운지요? 어찌 그리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지요? 어찌 그리 감동적인지요? 그 배경이 무엇인지 생각해봅니다.


오랜 기간 나자렛에서의 깊이 있는 수행생활 탓도 컸을 것입니다. 인내하면서, 침묵하면서, 하느님 아버지의 때를 기다리면서 하나하나 진리를 깨쳐나가셨을 것입니다.


그 보다 더 중요한,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와의 온전한 일치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하느님 아버지와의 완벽한 일치상태에 계셨는데, 그 때문에 아버지께서 원치 않으시는 길은 단 한발자국도 나아가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말씀만을 하셨습니다. 난감하고 절박한 상황 앞에 설 때 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기도하며 아버지의 뜻을 먼저 찾으셨습니다.


단 하루만에도 엉뚱한 말, 허황된 말, 거짓말, 일생에 도움 안 되는 말, 돌아서면 후회할 말, 이웃들에게 상처 주는 말, 그래서 이웃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말들을 셀 수도 없이 내뱉는 우리들의 언어생활 앞에서 예수님의 언어는 참으로 놀랍기만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실수가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말씀을 통해 사람들에게 기쁨을 건네주셨고, 행복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셨고, 생명과 구원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비결은 그렇게 어렵지 않군요.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 전에 늘 여유를 찾으셨습니다. 침묵하셨습니다. 기도하셨습니다. 심사숙고하셨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아버지의 도움, 하느님의 견해를 구하셨습니다. 이 상황에서 아버지시라면 어떻게 대답하셨을까, 이런 경우 아버지께서 과연 어떤 말씀을 원하실까, 늘 고민하셨습니다. 그 결과 단 한마디도 버릴 말씀이 없었습니다.

 


 

 미워하는 사람이 있으십니까?

-이기양 신부=

제 1독서 : 2베드 3,12-15ㄱ.17-18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복 음 : 마르 12,13-17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미워하는 사람이 있으십니까? 누군가 미워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미움에 끌려 다니게 되지요. 미움이라는 놈이 나를 마구 흔드는 걸림돌이 됩니다. 그 사람이 하는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고 잘 되기를 바라기보다는 잘못되었을 때 더 기분 좋아하고 즐기게 되는 것이 평범한 인간의 마음인 것 같습니다. 이러한 마음은 직위가 높거나 나이가 먹었다고 고쳐지는 것도 아니요 신앙인이라고 해서 초월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미움을 털어 버리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지요.

오늘 복음에 보면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 원로들 역시 이러한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요. 이들은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무엇인가를 묻게 합니다. 묻는 목적은 새로운 것을 알고 싶어서가 아니라 ꡒ말로 올무를 씌우려는 것ꡓ(마르12,13)이었지요.

서기 6년 로마의 황제, 즉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는 칙령을 발표하여 제국의 식민지인 이스라엘 백성들도 주민세를 내도록 명하였습니다. 주민세는 어린이와 노인과 노예를 제외한 백성의 인두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에 갈릴래아 출신 유다라는 사람이 하느님 홀로 이스라엘의 통치자라는 구호 아래 로마에 대한 납세 거부 운동을 일으키고, 헤로데 당을 조직하여 민족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오늘의 논쟁은 유다교의 장상들인 원로들과 수석 사제 및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올가미를 씌울 작정으로 몇몇의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을 예수님께 보냄으로써 시작됩니다. 예수님 당시에 헤로데 당원들은 세금을 바친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주권과 함께 하느님의 주권을 부인하는 것을 뜻하므로 납세를 거부하였지만, 바리사이들은 속으로는 이스라엘의 해방을 고대하면서도 그들의 종교생활에 지장이 있을까 두려워 겉으로는 세금을 착실히 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ꡒ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ꡓ(마르12,14)라고 묻는 그들의 속셈은 뻔합니다. 예수님께서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하신다면, 바리사이들이 예수를 로마 총독 관헌에 고발할 혐의를 찾게 될 것이고, 세금을 바치라고 하신다면, 헤로데 당원들은 실망할 것이고, 심지어는 군중들을 종용하여 예수와 결별을 선언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참으로 간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ꡒ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ꡓ(마르12,16)라는 물음을 던지시고, 그들이 ꡒ황제의 것ꡓ(마르12,17)이라고 대답하자, ꡒ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ꡓ(마르12,17)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 원로들은 예수님을 미워하고 올가미를 씌우려고 했을까요? 예수님보다 사회적 지위도 경제적 능력도 백성들의 존경도 훨씬 높고 많이 받는 사람들이 왜 예수님을 없애 버리려고 했는지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그 이유는, 첫째로 예수님께서 그들이 요구대로 순응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과는 다른 종교적 관습이나 권력자들의 잘못을 들쳐내고 비판하셨지요. 우리가 하듯이 ‘인생이란 다 그런 거야. 알면서 넘어가고 모르면서도 지나는 거지. 너무 따지며 살지마. 너만 피곤해져.’하는 투의 무책임한 삶의 태도를 꾸짖으시며 하느님의 정의를 세우려 하셨기에 기득권자들에게 미움을 사게 되신 것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의 권위 있는 말씀에 백성들이 환호하고 그를 따르게 되자 더 이상 두었다가는 그들의 권위가 도전 받을 것 같고, 또한 시기심에 예수님의 언행이 용납되지 않자 트집을 잡아서 치려고 했던 것입니다.

셋째는 예수님께서 집권자들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비판하시자 백성들을 착취하여 부와 권력을 누리던 사람들이 불안을 느끼고 예수님을 없애버리려는 결정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감정들에 판단력이 흐려지게 되자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 원로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예수님을 미워하게 되고 잘한 것이든 그렇지 못한 것이든 무조건 비판하기에 이릅니다. 심지어는 하느님의 이름을 써가며 간교한 올가미를 놓게 됩니다.

ꡒ스승님, 저희는 스승님께서 진실하시고 아무도 꺼리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압니다. 과연 스승님은 사람을 그 신분에 따라 판단하지 않으시고, 하느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ꡓ(마르12,14)

그렇습니다. 누군가에 대한 미움이 지나치게 되면 판단력이 흐려지고 신앙인이지만 최소한 양심도 지키지 못하는 경우까지로 추락할 수 있습니다. 최악의 경우 마치 유다인들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예수를 못 박았던 것처럼 하느님까지도 하느님의 이름으로 단죄할 수가 있습니다. 지나친 미움이 있다면 빨리 털어버리십시오. 미움의 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의 온 몸을 조정하여 구렁텅이로 빠뜨리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 은총을 구하며 기도하십시오.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께서 새로운 삶과 노력할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귀중한 것은...

-박상대신부-


오늘의 복음말씀은 예수님께서 유대교 장상들과 벌이신 두 번째 논쟁인 세금납부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서기 6년 로마의 황제, 즉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는 칙령을 발표하여 제국의 식민지인 이스라엘 백성들도 주민세를 내도록 명하였습니다. 주민세는 어린이와 노인과 노예를 제외한 백성의 인두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에 갈릴래아 출신 유다라는 사람이 하느님 홀로 이스라엘의 통치자라는 구호아래 로마에 대한 납세거부 운동을 일으키고, 헤로데 당을 조직하여 민족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오늘의 논쟁은 유대교의 장상들인 원로들과 대사제 및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올가미를 씌울 작정으로 몇몇의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헤로데 당원들을 예수님께 보냄으로써 시작됩니다. 예수님 당시에 헤로데 당원들은 세금을 바친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주권과 함께 하느님의 주권을 부인하는 것을 뜻하므로 납세를 거부하였지만,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속으로는 이스라엘의 해방을 고대하면서도 그들의 종교생활에 지장이 있을까 두려워 겉으로는 세금을 착실히 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로마 황제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라고 묻는 그들의 속셈은 뻔합니다. 예수님께서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하신다면,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를 로마총독관헌에 고발할 혐의를 찾게 될 것이고, 세금을 바치라고 하신다면, 헤로데 당원들은 실망할 것이고, 심지어는 군중들을 종용하여 예수와 결별을 선언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참으로 간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동전의 초상과 글이 누구의 것이냐?'라는 물음을 던지시고, 그들이 '카이사르의 것'이라고 대답하자, '그러면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당대에 로마제국의 화폐를 사용한다는 것은 결국 로마제국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고, 그것이 황제의 화폐라면 황제에게 돌려야 하며,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세상 사물을 보고 우리 인간의 시각에 일침을 가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인간이 세운 질서와 하느님의 창조적인 질서를 혼돈할 때가 많습니다. 인간적인 권리는 상대적이지만 하느님의 권리는 절대적입니다. 그러므로 황제의 정권은 부차적인 것이지만 하느님의 나라는 우선적이고 영원한 것입니다. 교회가 국가의 권리를 인정하지만, 국가가 자신의 권력을 남용하여 하느님의 권리를 침해한다면, 교회가 순교할 각오로 이에 맞서는 것은 당연한 결론입니다.
  
카이사르의 것은 세상에 속한 것이요, 세상과 함께 사라질 것이지만, 하느님의 것은 영원히 살아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하늘나라에 계신 하느님께서 아직 한번도 세상에 가보지 않은 천사 셋을 불러, 세상에 내려가서 가장 귀중한 것을 하나씩 가져오라고 명하신 적이 있었답니다. 첫 번째 천사가 산과 들을 돌아다니다 들에 피어난 아주 아름다운 꽃을 가장 귀중한 것으로 생각하고 꺾어 갔습니다. 두 번째 천사는 군중 사이를 날아가다 정말 아름다운 아가씨를 발견하고, 그녀를 데리고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세 번째 천사는 어느 시골 마을 창가를 날아다니다 아기를 품에 안고 눈물을 흘리며 젖을 먹이는 엄마를 발견하고, 엄마의 마음을 가지고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이 셋 중에 어느 것이 가장 귀중한 것이었을까요?
  
하늘나라 가는 길이 얼마나 멀었던지 도중에 꽃은 시들어 버렸고, 아가씨는 늙어 할머니가 되었고... 그러나 엄마의 마음은 변하지 않고 처음 그대로였습니다. 하느님께서도 참으로 기뻐하셨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귀중한 것은 바로 어머님의 마음이요, 우리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것은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 사랑의 마음을 인간의 마음이 닮았기 때문입니다. 좋은 마음, 넓은 마음, 남을 위하는 여유 있는 마음으로 오늘 하루를 열어갑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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