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7주간 금요일2007.5.25.(사행 25,13-21/ 요한 21,15-19)
신(神)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하는 한 계몽주의자(啓蒙主義者)가 유명한 유대교 랍비를 찾아왔습니다. 찾아온 목적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 랍비와 논쟁하여 유신론자(有神論者)들의 주장이 허무맹랑(虛無孟浪)한 주장이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계몽주의자가 방에 들어서자 그 랍비는 그저 한 번 힐끗 그를 쳐다보고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속 방 안을 왔다 갔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고요한 시간은 자꾸 흘러 몇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러자 처음 그 방을 들어설 때 그렇게도 의기양양했던 계몽주의자는 초조할 대로 초조해졌습니다. 랍비의 그 침묵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아들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윽고 랍비는 그 계몽주의자에게 한 마디를 던집니다. “여보게, 자네와 함께 말씨름한 율법대가들의 말도 자네에게는 모두 허사였네. 자네는 헤어질 때마다 그들을 우습게 여기지 않았나. 자네에게는 그들도 하느님과 그의 나라를 여기 있소 하고 대령할 수 없었고 나도 그렇게 할 재간이 없네. 그렇더라도 좀 더 생각해보게. 여보게, 혹시 옳을지도 모르니까.” 계몽주의자는 “혹시”라는 말에 말문이 막히고, 결국 항복하고 말았습니다.(마르틴 부버의 ?유대전설?)
독실한 신앙인이라 하여 하느님이 여기 이렇게 존재한다고 명증할 수 없듯이,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다고 명증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혹시” “하느님이 계시다면 어떡하지?”하는 생각에 때때로 빠져들기도 하고, 실제 죽음 앞에서는 그들도 신에게 간절히 기도를 하기까지 합니다. 반대로 평소에 하느님을 열심히 믿었던 사람도 “혹시”라는 의혹에 사로잡혀 “하느님이 정말 존재할까?” 하는 의혹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더구나 불의의 사고를 당한다던지 하면 하느님이 없다며 신앙을 버리기까지 합니다.
오늘 독서는 한 쪽은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고, 한 쪽은 예수가 부활하였다고 주장함으로써 붙은 소송 이야기 입니다. 황제라 한들 그 문제를 명쾌하게 판결을 내릴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부활을 믿습니다. 부활을 믿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숱한 사람들이 목숨을 내어놓고 부활이 진리라고 증언하였기 때문입니다. “혹시 부활이 있을지도 몰라!”라는 “혹시” 때문에 목숨을 바치지는 않습니다. 확실한 부활체험만이 목숨을 내어놓을 수 있습니다. 순교자들의 신앙이 중요한 것은 그들의 순교가 참된 진리의 이정표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참됨을 위해 목숨을 바친 그들은 오늘도 진리를 향하라고 피로 새긴 이정표가 되어 우리를 부활의 세계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