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정체
-정필종 신부 -
오늘은 마르꼬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실상, 마르꼬 복음을 저술한 분이 누구인지 우리로서는 현재 잘 알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복음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약간의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습니다. 그가 히브리어와 아랍어 그리고 유다인들의 풍습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아 유다계 그리스도인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그리스어로 집필했을 뿐 아니라 이방인의 풍습까지 아는 것으로 미루어 해외 유다계 그리스도인이었다고 짐작해 봅니다.
그는 폭넓고 개방적인 사람이라 민족주의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온 인류의 구원을 이야기합니다. 온 세상 모든 민족이 복음을 믿어 다함께 기도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유다인들보다는 오히려 이방인들이 복음의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까지 합니다(마르 12,9). 그는 이방인들을 신앙인의 본보기로 제시하기도 했습니다(7,28; 15,39).
마르꼬 복음사가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예수님의 정체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예수님과 함께 지내며, 갖은 우여곡절을 겪은 제자들조차도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 말씀 바로 앞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부활한 모습을 본 사람들을 사도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마르 16,14).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아니 이 방송을 듣고 계신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올바로 이해하고 계십니까? 아니 이해하려고 노력하십니까? 막상 고백하려고 하면 어떻게 고백해야 할지 망설여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제대로 대답하기가 어려워집니다.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고. 이 순간이나마 다시금 그분이 누구신지, 특별히 나에게 어떤 분이신지 한 번쯤 생각해보시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마르꼬 복음사가께서도 우리를 그 길로 초대하기 위해 복음을 쓰셨음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마르꼬 복음사가가 자신의 복음을 저술할 당시인 A.D. 70년경은 초월적인 예수님에 대한 맹목적인 신앙이 극성을 부리던 때였습니다. 그러나 마르꼬는 그러기에 앞서 믿는 이들이 예수님의 공생활에 주목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어린 시절이나 부활하신 다음의 모습에는 별반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그분이 이 세상에서 무슨 말씀과 어떤 일을 하시다가 죽음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바라보기를 원했습니다.
마르꼬 복음은 우리가 평상시 묵상하기에 적합하다고 여겨집니다. 특히나 사건과 말씀을 간결한 문체로 우리에게 전달해주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상상력을 극대화해서 그분에게 나아가는데 매우 좋은 경우라 할 수 있겠습니다.
마르꼬 복음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평상시에 당신의 신분이 드러나는 것을 상당히 꺼리신 것 같습니다. 어쩌다 누군가 당신의 정체를 알아차린 때에는 곧 함구령을 내리십니다(1,24.34; 3,12; 5,43; 7,36; 8,26.30; 9,9). 이는 여러 가지로 이해할 수 있지만, 결국은 예수님 당신에 대한 몰이해에서 오는 경우를 경계하셨던 듯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주 제자들을 따로 불러 교육시키셨던 장면(4,10-25; 5,37-43; 6,45-52; 7-17-23 등)이 나오는 데, 그들조차도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복음사가는 전해줍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예수님에 대한 몰이해는 계속됩니다. 우리가 자주 범하는 잘못이 아닐 수 없습니다. 수많은 단견과 편견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너무도 자주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고는 마치 정리된 듯이, 잘 알고 있는 듯이 뒤로 내팽개쳐 버립니다. 그리곤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들은 예수님의 삶이 궁극적으로는 부활에 이르는 삶이지만, 우선적으로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가는 삶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기 쉽상입니다.
“어느 누가 내 뒤를 따르려면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그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합니다. 사실 제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요, [나와] 복음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을 구할 것입니다”(8,34-35). 이는 당시에 자행되고 있던 박해의 와중에서 끝까지 신앙을 간직하도록 격려하고자 하는 복음사가의 의도가 있었습니다.
나아가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현재의 신자들에게도 자기희생을 통한 나눔의 영성을 권고하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자기희생이 없는 신앙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말씀이겠습니다. 자신과 자신의 가족만을 위한 기복적인 신앙은 더 이상 신앙일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